11강 녹취록 - 2장 하나님을(2)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2830 추천 수 0 2009.04.05 00:29:28

안녕하세요.

판 넨베르그의 사도신경해설에 대한 해설 공부 오늘 11강이 되겠습니다. 지난번 10강요. 그때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게 재미있어서요. 재미있다는 표현보다는 신기하게도 짧은 거지만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모든 체계가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는게 뭐냐 하는 신앙론부터 시작해서, 그거는 신앙의 내용을 말하는 도입구라고 할 수 있죠. 그러한 거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서 성령, 삼위일체, 성령론, 거기에 교회와 재림 심판 이런것들까지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신경은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기독교신앙을 모두 담고 있다고 보면 옳은 거죠. 여러분들이 기독교 신앙의 어떤 전체적인 체계를 잘 알고 싶다면 이 사도신경만 충실하게 공부해도 부족한 게 없습니다. 그걸로 충분하다 할 수 있어요. 그러한 거를 대충 알고 있긴 하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아마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에게 감이 오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 교리가 그렇게 있냐? 교리라고 한 게 여러분들이 주로 접한 게 세례 받을 때 한 세례문답, 혹는 CCC같은 선교단체에서 만든 사영리 뭐 그러한 정도로 생각할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체계라고 하는 것은 인간구원을 비롯하여 세계전체에 대한 체계적인 해명이예요. 그러한 점에서 제가 본문으로 다시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사도신경이 기독교 신앙에서 얼마나 중요하나 한마디 하려고 하다가 옆으로 나갔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지난주부터 우리가 보고 있는데요.

지난주에 본내용이 무엇인지 아시겠죠? 인간예수에만 떨어지게 된다면, 특히 예수가 선포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만 기독교 신앙의 중심만 모은다면 그건 공허하다.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그리스도의 사건 그리고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이런 것들 모두가 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직접적인 연관이 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내용이 그 바탕에 놓여 있지 않게 된다면 예수의 복음선포, 예수의 사신이라고 하죠. 오늘도 반복해서 나오는 개념입니다. 보트샤프트, 예수의 복음선포 이런 것들도 근거를 잃는다고 하는거죠. 말이 안된다고 여러분들 생각하시겠죠?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느냐 그의 사랑 그의 죽으심과 부활 이런 것들 다 기독교의 케리그마는 바로 여기에 모여 있는데 왜 그것만으로 완성적이지 않는 것처럼 말하냐? 그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 우리가 지금 계속 판넨베르크의 설명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오늘 11강 하나님을 항목에 대한 두 번째 순서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책으로 33쪽.

예수가 선포한 사랑의 사신에서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떨어져나간 세상을 심판할 자로 오실 하나님의 사랑이 핵심이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예수의 사명에서 드러난다. 특히 중요한 대목은 요한복음이 예수가 어떤 사명을 갖고 있는지 그 의미를 새삼 발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외아들을 주셨으니.. 그 구절이죠.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 있었던 이야기에 나온 것이다라는 것이죠. 오히려 이것은 이미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눅 15장에 나온 것처럼) 보여준 것처럼 예수의 자기이해였다. 예수가 선포한 이웃사랑은 모든 인간의 행동에 이미 주어져있는, 그러나 인간 자신의 태도에서 추구되어야 할 하나님의 고유한 성향과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계속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는 부분은 ‘하나님의 고유한 성향과 활동’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히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어떤 것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 것이거든요. 하나님 없이 사랑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모든 행위들은 바로 그분, 하나님, 예수가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던 바로 그분이 주신 사명이거든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로 이 예수님의 모든 사건들이 진리론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옳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고유한 성향과 활동에 참예한 것이다.

하나님. 이처럼 예수의 선포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구원하는, 그리고 용서하는 사랑에 대한 사신, 복음 선포, 보트샤프트 이것은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확신에 근거해 있다.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미래, 그게 뭘까요? 생명이 완성이죠. 창조의 완성이기도 하구요. 또 다른 말로한다면 하나님이 온전히 자기를 드러내는 그때를 말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자기를 실질적으로 드러내는, 완전히 자기를 도출하는 완전한 자기 계시를 이루는 그때를 말하는 것이죠. 정말 중요한 대목입니다. 중요한 관점, 지적이죠.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확신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용서하는, 구원하는 사랑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것도 바꾸어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그러한 용서와 구원의 사랑의 선포가 가능하지 않는겁니다. 왜 가능하지 않냐? 지금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자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네. 여기 조금 어려운 맥락인데요. 당연히 그거는 옳습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이야기해야지 없는 거라고 고집피울 수 없잖아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보다도 더 박애주의 정신을 실행하고 삽니다. 그럴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미래에 근거한 사랑의 선포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거죠. 아니면 똑 같은 거다. 아니다. 어떨까요? 제가 지금 그거를 분명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는데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 뒤에 나올거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미래, 이거를 일단 우리가 좀 충분하게 이해를 해야 하는데 어쨌든 그걸 전제하면서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지 않으면, 그것이 없으면, 우리가 행해야 될 모든 사랑의 요청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요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왜 그런지 이해하시겠죠? 어떻게 더 설명을 해야 될까요? 뭐 구체적인 예를 들까요? TV나 신문 이런데서 병에 걸리거나 등등 이런 저런 걸로 도움을 원하는 일이 많이 있잖습니까? 그걸 보면 도와주겠다는 생각이 들긴 들어요. 그게 한두 번이 아니라 반복되잖아요. 그러한 프로그램이 건강한 것 같지는 않는데 그러한 문제들을 복지, 구제봉사차원의 문제인데 그런 것들이 그런 방식으로 일반 서민들의 의식을 그런 쪽으로 끌어간다는 의미에서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게 반복되면요. 아주 무거운 짐으로 오든지 아니면 그게 매너리즘으로 빠질 그런 염려가 있어요. 어쨌든 그런 프로그램에 무방비책으로 노출된다고 합시다. 그러면 지금 사는 것이 불안한 거죠. 이게 견딜수가 없는거예요.

제가 지금 편안하게 강의 녹화를 하고 있습니다 차도 마시면서 쾌적한 환경인데요. 이것도 불안한거죠. 끝까지 밀고 나가게 되면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노숙자들, 그리고 단칸방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따로 이렇게 연구소를 얻어서 강의할 수 있나 그렇게 스스로 자책할 수 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확신에서 이러한 어려움, 이러한 갈등 이런 것들까지 우리가 안고 나갈 수밖에 없는, 또 그러한 능력이 주어지는 어떤 기초가 하나님의 미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설명을 완벽하게 설명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관에 대한 문제인데요. 제가 확실하게 정리를 하지 못하겠는데 그래도 어떤 뜻인지는 이해하시겠죠. 하나님 나라의 미래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 기독교들의 윤리적 행위의 기초가 된다. 그것 때문에 가능하다. 그럴 때마다 인간을 살리는 요구가 되는 거죠. 그런 게 없으면 강박관념에 빠지게 되는 거죠.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런 일이 많이 있잖아요. 여기 바로 나와 있습니다.

예수의 사신에서 이 하나님을 제거해버린다면 인간은 이 사신으로 인해서, 이 복음 선포로 인해서 오히려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중요한 문제는 예수 출현이 담지하고 있는 예언자적 능력도 아니고 해명되어야 할 갈등들도 아니다. 예수가 이해한 하나님이 제거된 기독교적 사랑의 사신은 그 사신의 능력과 믿음이 토대를 두고 있는 그 중심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하나님, 하나님의 미래,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이런 것들이 제거된다면 그러면 중심이 흔들리는 거다 하는 거죠.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없는 예수의 사신은 견고하게 유지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신론을 통한 신(神)표상의 논란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언급이 어떻게 고수될 수 있겠는가? 다시 한 번 고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없는 예수의 사신은 견고하게 유지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신론을 통한 모든 神표상의 논란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언급이 어떻게 고수될 수 있겠는가? 무신론 비판을 많이 당했잖아요. 그런 비판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 아빠 아버지, 아버지를 보았다든지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는가 그런 질문입니다.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 질문 그런 것들이 예수의 복음사신의 중심이 되고 있는데 만약에 그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오늘 현대 무신론적 비판에서 부정된다면 예수의 모든 하나님에 대한 진술들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의 문제제기인거죠. 이거는 앞에서 우리가 짚은 그러한 내용과도 연관됩니다. 현대신학의 어떤 쪽에서는 하나님이 없이도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면 충분하지 않는가? 그런 말을 하기도 하거든요. 민중신학, 앙가주망(engagement)을 강조하고 있는 신학쪽에서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하나님 언급이라고 하는 근거는 어떻게 되는 거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근대 무신론의 뼈대는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에게서 시작되었다.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그의 작품(1841)은 종교에 대한 그의 심리학적 설명을 결정적으로 관철시켰다. 종교의 본질에 대한 그의 강의(1846)는 앞서의 기본적 사유를 다만 확장시켰을 뿐이다. 그 뒤에 나온 일련의 모든 중요한 무신론적 경향은 포이에르바흐에게 의존되어 있다. 무신론적 경향, 여러분들이 죽일 놈들 생각하지 않을 수 있죠? 그들의 타당한 주장들입니다. 바로 그런 것 때문에 기독교 신앙안에 있는 유신론적 허상들이 많이 제거될 수 있었어요. 기독교 신앙은 무신론·유신론 논쟁이 아니거든요. 무신론논쟁을 굳이 유신론적 관점에서 그것을 맞받아 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비판을 통해서 우리 기독교 신앙의 건강성이 더 확보될 수 있었다.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신론적 비판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니고요. 다만 우리의 비본질적인 신앙, 때문은 것들을 청소하는, 때밀이 하는 그러한 계기는 되었고 그러나 그거 무신론적 비판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놓쳐서는 안 되겠죠.

이것은 니체나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장 폴 사르트르 이런 사람들도 다 포이에르바하의 영향을 받았다. 이 핵심은 뭐라고 할까요? 종교를 환각이라고 보는 포이에르바하의 설명, 뭐라고 할까요. 자기투사 그런 것에 의해서 종교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그러한 관점이죠.이런 설명은 인간이라고 하는 종(種)을 개체와 구별하는 그의 입장과 연관되어 있다. 개개인의 인간과 종으로의 인간을 구별한다는 것이군요. 개체가 편협하고 배타적이고, 따라서 유한한 반면에 종은 무한하다. 개체 인간의 이성, 판타지, 사랑, 그리고 의지의 한계는 인간종의 역사적 발전에서 지양된다. 지양된다. 아우테릉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라 극복되어서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변증법적인 용어이죠. 그러나 개체는 자신의 편협성에 빠지며, 자폐적인 자기애에 빠진다. 개체나 그 개체의 고유한 본질적 완성이 아니라 인간종족의 무한성이 인간과 완전히 다른 본질로 간주된다고 하더라도, 개체는 인간의 무한성을 자기에게 주어진 무한성으로서 인식하지 않는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흐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유는 심리학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즉 인간의 환각은 인간이 그 고유한 본질을, 즉 종으로서 인간이 도달하게 될 무한한 본질적 완성을 낯선 본질로 간주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이다. 개체가 인간이라고 하는 종의 어떤 무한한 완성을 낯설게 이렇게 간주한다고 하는 거군요. 제가 잘 모르는 것인데 따라가 보겠습니다. 역으로 현실성에 담겨있는 이러한 낯선 신적 본질은 가상의 하늘에 대해서 인간 스스로의 고유한 본질이 갖는 일종의 투사(投射)일 뿐이다. 낯선 본질. 절대적인 종이 발전해서 절대적인 능력을 갖게 되는 발전 말입니다. 결국 그런 것들은 투사다. 포이에르바흐는 이러한 견해를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하나님은 대개 인간과의 유비에 근거해서 생각되었으며, 그리고 인간이 자신을 확실한 것으로 믿으려하는 그 모든 것, 그러나 개체로서의 삶에서는 배타적이며 편협한 방식으로만 현실화되는 그 모든 것의 완성으로서 생각된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결국 그것을 신으로 믿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거죠. 인간에게 투사가 발전해서 결국 자기는 한정되니까 신이 될 수 없고 그러나 인간종이 발전해서 그게 무한하게 나가려고 하는, 나가고 있는 그 인간 종으로서의 어떤 대상을 낯설게 느끼고, 자기로 느끼지 못하고 낯설게 느끼는데 그 낯선 대상이 신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거죠. 그렇게 심리학적으로 느꼈다고 하는 거죠. 결국은 신은 자기투사인거죠. 개채로서가 아니고. 개체는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개체가 아니라 종, 인간종, 인류전체죠. 역사 수백만 동안 내려오는 인간으로 말하면 호모사피엔스로 예를 들자면 표현될 수 있는 그러한 종이 가고 있는 그 절대적인 자기를 성취하려고 하는 그러한 본질, 그것을 낯설게 경험하면서 그것을 신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인간적 본질을 낯선 본질로 간주함으로써 그는 스스로에게서 소외된다. 신으로부터 소외된다는 뜻이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인간적 본질에 담긴 능력을 부인하게 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책임져야만 한다면, 그가 낯선 신적 본질 탓으로 돌린 그것을 다시 한 번 인간성의 본질적 완성으로서 인식해야만 한다. 소외된 인간이 극복하려면 신적본질을 자기로서 이해해야 된다. 알아야 한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사상적 맥락에서 니체, 니콜라이 하르트만, 그리고 사르트르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우리가 모든 神사유에 대한 선입관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당히 인간학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학적이라고 한 것은 나쁜 뜻으로 무조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요. 인간에 대한 분석에서 나왔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의 무의식과 심층심리, 문화적인것, 이런 것들에 대한 총체적 분석을 통해서 그들이 인간이 신을 자기 소외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는가? 이런 것들을 일련의 무신론적 신학으로 정리한 연구가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걸 판넨베르그가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극복하려면 이들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소외시킨다. 그런 점들이 없잖아 있죠. 인간을 자기 비하, 끊임없는 자책감 그런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이 살고 있을 때 유럽 기독교 현상들이 그렇게 나타났다고 보여지죠. 노이로제 현상이 나타나 듯이요. 지금도 한국교회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현실 검증력이 없어 보이잖아요. 옳고 그름의 판단이 없어 보이잖아요. 레드컴플렉스에 꽁꽁 묶여 있잖습니까? 마녀사냥하듯이 어떤 집단을 향하여 집단적 공격성향같은 것들도 보이구요. 반대로 어떤 세력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하는 무의식적인 피해망상, 이런 것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보면 신앙이 자칫하면 오히려 자유와 평화, 사랑, 기쁨 이런 쪽으로 우리 삶을 통제화시키기보다 소외시키는 점이 많다. 이것은 인정해야 됩니다.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일치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다른 방향에서 포이에르바흐의 기본적 사유를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에 의해 묘사된 인간의 종교적인 자기소외를 인간의 사회적, 경제적 자기소외로 되돌림으로써, 그리고 다르게 표현함으로써, 개개인의 이기심에서 발생한 종교적 투사에 대한 포이에르바흐의 설명을 심화시켰다. 프로이트는 인간 종을 원부* 형태로 대체하고 있다.

* 원부(原父, Urvater)는 원래의 아버지. 무소불위한 절대자 아버지 상을 뜻한다. 프로이트의 기독교 비판에 따르면 기독교의 하나님 상은 바로 이런 원부 상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인간이라는 종의 자기투사와 다르지 않다. 이 개념은 친부살해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결되어 있다. 네. 다시 본문으로 갑니다.

이 원부는 아들들에 의해 제거된 이후에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도달될 수 없는 능력 충만과 무제한적인 통치의 이상이 되었다. 포이에르바흐에 따르면 인간 종은 인간에게 낯선 본질이라는 점에서 환각적이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에게 낯선 본질이라고 하는 점에서 환각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을 다시 기억하십시요. 인간이라고 하는 종이 인간에게는 낯선 종으로 다가 오고 있는 거죠. 환각이라고 하는거죠. 여기서 프로이트는 포이에르바흐처럼 인간의 비종교적인 근원상황을 전제했다. 인간의 기대로부터 발생한 신성의 도래에 대한 이해에서도 역시 그는 포이에르바흐의 생각을 따랐다. 특히 이런 기대의 발생에 대한 서술과 종교적 환각의 실현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는 포이에르바흐의 고유한 길을 따랐다. 네 일련의 무신론적 비판가들이 포이에르바흐의 견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여전히 통용되는 신(神)죽음에 대한 언급은 포이에르바흐의 종교비판과 연관되어 있다. 왜 신죽음 문제를 말하는지 당연하죠. 인간 소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니체는 이 점에서 그와 연관된다. 그런데 신 죽음에 대한 표상은 매우 특이하게 자가당착적이다. 현재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하나의 하나님은 실제로 하나님이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죽였다는 그 뜻이죠.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죽은 신은 아예 신일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가설 자체가 자가당착이다 라는 거죠. 따라서 신 죽음에 대한 언급은 종교적 환각이 끝장났다는 신화적 그림일 뿐이다. 그 자체가 신화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신(神)사유가 인간의 꿈이며, 인간 자신과 그 기대의 거울이었다는 발견에 대한 신화적 그림일 뿐이다.

지금까지 쭉 무신론적 비판에 대한 지난 19, 20세기에 있었던 논란들을 아주 간략하게 판넨베르그가 설명했습니다. 결국 이 모든 흐름의 출발은 포이에르바흐인데 여기에서 핵심은 인간종이 인간 개체에게는 낯선 본질로 다가왔고 그것은 결국 자기 투사에 불과했으며 그런 결과로 인간소외가 발생하게 되었다고 하는 거죠. 그러한 신이라면 없어야죠. 인간 해방을 위해서라도.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없어야죠. 그래서 니체는 그래서 우리가 그를 죽였다. 신을 죽였다. 어떤 미친 사람의 외친 소리로 어디 ‘짜라수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 나오던 가요.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철학자, 사상가의 말이 헛소리가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겠습니다.

신학은 무신론적 도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을까? 우선 변증법 신학파,* 특별히 칼 바르트와 그 뒤를 이은 헬무트 골비쳐 같은 이들은 무신론을 채용해서 계시신학을 극단적으로 설계해보려고 했다. 변증법신학 제가 역주를 달았습니다. 현대신학을 공부할 때 중요하게 나오는 학파입니다.

변증법 신학(die dialektische Theologie)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기독교 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려한 신학을 말한다. 자유주의신학이 인간중심적이고 윤리 중심적이었다고 한다면 변증법신학은 하나님 중심적이고 계시 중심적이었다. 일명 신정통주의, 위기의 신학, 말씀 신학이라고 하는데, 이 신학파의 대표자는 칼 바르트다. 1920년대에 몇 판에 걸쳐 개정된 그의 <로마서 강해>는 이 신학운동의 단초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이러한 변증법 신학의 무신론 비판에 대한 항거가 별로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했다라는 그런겁니다. 그런데 바르트나 골비쳐가 이들이 제기한 것은 무신론 비판에 대한 극복방향은 무엇이냐하면 기독교 신앙을 아예 종교와 다른 것으로 자리를 옮겨 버린 것이예요.

포이에르바흐는 인간이 치졸하게 만든 종교들과 유신론적 철학의 가면을 벗겨내는 데는 성공했으며, 그것은 또한 정당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정을 하는거예요. 이들 무신론적 비판자들을. 종교나 철학자들의 神사유에서 이런 유신론적 해석이 시도되었는데, 이것은 역시 인간적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지만 기독교적 복음선포, 사신에서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독교적 사신만이 홀로 참된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포이에르바흐가 말하는 의미의 ‘종교’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변증법적 신학, 20세기 계시신학을 대표한다고 하는 신학의 논리는 바로 그거죠. 이 포이에르바흐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비판자들이 한 것은 종교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죠. 인정하는 거예요. 일단은요. 유신론적 비판이었다고 하는거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유신론의 구도와는 같지 않다는 것이죠. 그것을 신학적 용어로 하자면 종교 지양성, 지향이 아니라 지양. 종교가 아니라 종교너머에 있는 계시신학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들은 무신론적 종교비판과 정식으로 싸우지 않고 아예 논의의 자리를 따로 둔겁니다. 너희들은 그렇게 이야기해라 당신들이 말한 것은 상당히 옳다. 종교비판이다. 그건 우리가 새겨들어야 한다. 다만 기독교 신앙은 종교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뭐냐? 계시라는 겁니다. 종교를 초월한 혹은 종교를 지양하는, 종교가 지양된, 그러한 하나님의 계시에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논쟁하지 말자. 그렇게 해결했습니다. 그러한 길을 찾았습니다.

변증 법 신학의 이러한 논증은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결코 확증될 수 없다. 왜그러냐하면,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무신론적 비판자들, 지금도 나오고 있죠. 그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한번 싸워보자 이렇게 샅바를 잡고 덤볐는데, 씨름판을 벌렸는데 이 변증법적 신학자들은 종교를 중심으로 해서는 우리는 씨름하지 않겠다. 자리를 피한거죠. 그러나 이것은 판넨베르크가 볼 때는 바람직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되지 못한다는 거죠. 각각의 종교가 이와 같은, 왜 그러냐는 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자기 정당성으로 그들의 신에 대한 예외 조항을 요청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각각 종교가 다 그렇게 하면 불교 마호멧교 다 그렇게 하면 다 우리들거만은 다르다고 말하는 차원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면 논의가 어떻게 가능하겠느냐 하는거죠.

그리고 각각의 종교는 포이에르바흐처럼 다른 종교를 인간적인 치졸한 행태라고 재단함으로써 아주 간단히 그들의 경쟁자들을 해치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중적 잣대로 재단해 버리는 것을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독교 신학은 어떤 근거로 하나님에 대한 진술, 혹은 성서기자들의 진술, 또는 예수 자신을 다른 종교적 신(神)표상과의 연관성으로부터 구별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들 사이의 유비가, 다시 말해 신(神)사유, 신에 대한 생각들에 대한 구약성서 및 초기 기독교적 형태와 다른 세계 종교들 사이의 발생연관이 너무나 또렷한데 말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현상적인 차원에서 볼 때 다르지 않다. 발생하는 것들이 종교의 시작 이런 것들이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어떻게 기독교만 그들과 다르게 우리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거죠. 일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인제 신학적인 흐름에 차이가 있는거죠. 이 변증법 신학자들은 종교의 문제에 본격적으로 접어 들어가서 논란을 벌이고 싶지 않다고 하는거예요. 이에 반해서 판넨베르크는 본격적으로 논쟁하자 그이야기 입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종교적 현상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무신론적 종교비판가들의 이런 도전에 우리가 변증법적 신학자들처럼 살짝 자리를 비해서 우리들끼리만 계시를 논하는 방식으로 가버린다고 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기는 있습니다만 기독교가 진리라고 하는, 특별히 보편적 진리라고 하는 차원을 다 포기해야만 되겠죠. 또 보겠습니다.

신구약 성서기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관되게 주변 세계와 공유했다. 즉 인간은 어쨌거나 신적 능력의 작용을 감안해야 한다는 확신을 말이다. 요게 바로 종교적 현상들이죠.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변증법 신학자들이 회피하려고 했었던 바로 그 종교의 문제들을 신약성서기자들이 붙들고 있었다는 것이죠.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그의 미래에 대한 확신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확신했던 것처럼 말이죠. 이런 점에서는 고대교회의 신학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의 아버지라는 점을 전제했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주장에서 우리는 성서의 하나님에 관한 특별한 요소들을 만나게 된다. 네 이거는 종교적 문제인거죠.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는,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주장, 누누이 구약성서 기자들이 말하고 있는 부분이죠. 이게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요소인거죠.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 像으로 이해한 예수의 사신은 구약성서의 이 하나님과 연관된다. 아버지 상으로 드러난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을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라고 믿음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를 벗어난 이방의 역사에서 전제되는 바는 신적 현실성에 대한 질문이 중차대하다고 하는 것이다. 조금 까다롭죠. 본문을 보지 않고 귀로만 저의 이야기를 듣는 분들은 지금 무슨 이야기인가 따라가기가 쉽지 않는 것 같아요. 저도 읽으면서 머리속으로 여러가지 생각들이 복잡하게 움직이거든요.

그 문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버지 상으로 드러난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을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라고 믿음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를 벗어난 이방의 역사에서 전제되는 바는 신적 현실성에 대한 질문이 중차대하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은 종교적 문제잖아요. 그렇게 논증이 되어야 되잖아요. 설명되고 논증되고 어떤 면에서는 증명되어야 되는 문제죠. 다른 데서도 얼마든지 신앙의 대상으로 있는 그 어떤 절대자들을 또 감안을 해야 되니까요. 이 말이 되나요? 그게 바로 신적현실성에 대한 질문이 늘어났다는 것이거든요. 신적현실성, 거룩한 현실성,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들이 현실로 드러나야 되는 거잖아요. 우리의 삶이, 우리의 삶에서 아무런 상관이 없다거나 역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러한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현실성이 없는 거거든요.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기도하면 모든 것을 다 들어준다거나 하는 그런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우리가 해명해 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골치 아프다. 종교적인 문제다. 계시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씩으로 내팽개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또 그렇게 할 수도 없구요. 그리고 이미 성서기자들은 그러한 신적현실성과 연관된 유일한 하나님을 이야기 이미 했고요.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약성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실패한 그 역사를 말한다. 즉 이스라엘 나라는 망했으니까요. 즉 기독교 사신이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헬레니즘의 비유대적 세계로 전파되었을 때 ‘참된’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질문, 그리고 신적 현실성의 참된 형태에 대한 질문과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죠. ‘신적 현실성’ 헬라철학에서도 그런 것을 얼마나 이야기를 했습니까?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철학의 대가들이 헛소리로 만물의 본질은 물이다. 만물의 본질은 4원소로 되어있다고 했겠습니까? 그들도 신적 현실성을 인식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거 거든요. 이런 헬라철학은 유대지역을 넘어선 그런 다른 세계에서 인식되고 있었던 신적현실성과 기독교가 말하는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냐 하는 것을 규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죠. 안할 수가 없는 상황에 초기기독교가 봉착한겁니다.

실제로 신적인 것에 대한 철학적 연구는 다신교적 민간신앙에 맞선 투쟁에서 신학의 동맹자가 되었다. 철학사를 아셔야 이해가 되는 건데 제가 번역한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철학 상당한 부분이 요것에 대한 해명으로 채워졌습니다. 신적인 것에 대한 철학적인 연구, 이것이 우리 신학의 우군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러한 연구는 다신교의 민간신학과의 투쟁에서 나온 거거든요. 그러니까 뭐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이 만물의 본질은 이데아다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이것이 신적인 현실성인거예요. 이것저것 여러 가지 신화적인 우상들이 많이 있는 세상 속에서 그 모든 것의 근원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의 단일한 신적현실성이 이데아라라는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것은 형상이죠. Form이라고 하는 형상. 이러한 철학자들의 연구가 신학의 동맹자다. 결국 이런 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위 그 철학이 여러 상이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중에서도 오직 한분 하나님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복음 선포, 사신은 철학자들이 참으로 신적인 것의 준거로 명확히 했던 그런 것들을 확증함으로써, 이런 준거들만이 우주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인데요. 확증함으로서 하나님이 헬레니즘적 인간 의식에서도 참되다는 점을 증거 하게 되었다. 그게 교부시대에 있었던 많은 교리적 논쟁, 역사입니다. 삼위일체론 이것도 사실은 그러한 신적현실성에 대한 헬라 철학자들의 논의와 아주 깊숙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이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그런 사상들, 신학성서에 나와 있는 그러한 사상들도 헬라철학과 아주 깊숙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성서가 증거하는 창조자 하나님,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던 바로 그분인데 그 분은 바로 헬라철학을 비롯한 하나님을 말하는 유대의 그 정신세계를 넘어서는 바깥세계에서도 여전히 참된 하나님으로 증거되어된다고 하는거죠. 증명되어져야된다는 거죠. 그 같으면 이러한 논의는 당연히 종교적인 문제죠. 그래서 무신론적 논쟁에서 우리가 슬쩍 한발을 빼고 우리는 종교가 아니고 계시다 이렇게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게 바로 판넨베르크의 입장이구요. 네. 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제 이 변증법적 신학이 출현했던 19세기 초중반의 상황과 지금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변증법적 신학이 그 당시는 그런 방식으로 밖에는 신학을 변증할 방법이 없었다고 우리가 넘어가고 21세기는 조금 더 보편적 진리가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되는 시대가 되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신론적 종교비판앞에서 기독교 신앙의 진리일성을, 종교논쟁, 싸운다기 보다도 진리논쟁이죠. 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네. 여기까지 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선포, 이것은 그것만 독립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거기에 토대하고 있다. 그것위에 올라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이해하는 그러한 하나님이 전제되지 않으면 예수의 사랑은 공허하기도 하고 괴롭힘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것을 이야기를 한거예요. 그걸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구요. 그러니까 사도신경에서 예수만 이야기하지 않고 제1항목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그냥 들어간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거죠. 그 창조자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거죠.

그런데 오늘 문제는 하나님이 이미 깊은 무신론적 논쟁과 위기 가운데 우리가 들어가버렸다고 하는거예요. 만약에 무신론비판이 그대로 옳다고 한다면 우리는 딜렘마에 빠지게 되는거죠. 그 딜렘마에 빠지지 않으려고 변증법적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아예 종교차원이 아니라 계시차원으로 옮겨 버렸고 그게 나을지 안 나을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정치적이고 해방신학적인 그런 쪽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없이 예수의 사랑실천만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다고 하는 겁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잘못이고 결국 기독교 성경기자들과 초기 기독교와 2천년동안 기독교 신학이 그러한 신적인현실성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들과 부단하게 토의하고 논의하고 그런 것을 극복해가면서 기독교의 복음을 보편적 진리차원에서 세웠다. 그 역사를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된다. 오늘 조금 어려운 부분이었죠. 그러나 구도는 분명합니다. 수고하셨구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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