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녹취록 - 2장 하나님을(3)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2920 추천 수 0 2009.04.05 00:31:00

판넨베르그의 사도신경 해설 12강 - 하나님을(03)

안녕하세요. 오늘 사도신경 강해 12강이 되겠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좀 우중충합니다. 낮에는 그런대로 가을 햇살이 빛났는데 지금 이 녹화를 하는 시간, 먼저 날짜를 말씀드리면요 11월 오늘 6일입니다. 저녁 5시 10분전입니다. 아직 해가 질 때는 안되었잖아요. 바깥을 내다보니 상당히 잔뜩 흐려 있습니다. 해가 기울 때가 가까이 오긴 했는데 조금 음산하다고 할까요. 가을의 정취를 충분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저녁 즈음인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뒷부분에서 본 이 책의 내용은 철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어떤 근원적인 문제들, 그거하고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해명들 그런 것들이 그렇게 관계없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철학의 역사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상당히 오래되었잖아요. 그냥 큰 대표적인 것만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이렇습니다. 탈레스는 만물의 본질이 물이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근원을 하나로 잡는 거란 말입니다. 다른 철학도 사실은 그렇게 나가는 거거든요. 플라톤도 이데아라고 이야기를 했고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을 이야기하는데 결국 형상이 핵심적인 거죠. 노자와 장자 이런 사람들은 도라고 이야기했겠고요. 어쨌든 근원적으로 하나로 돌아가 하나를 이야기 거거든요. 그러한 철학적 성찰들은 신화적인 세계상을 넘어서는 그러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라신화의 여러 신들의 작용들과 투쟁하는 과정이 헬라철학자들의 학문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한 철학자들의 노력이 결국 우리가 하나님, 한 분 하나님 창조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연결해서 그들이 우리들의 학문적인 신앙적인 동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그렇게 우리하고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현대 들어와서 철학적 흐름이 이상한 방향으로 나오게 된 거예요. 그 이전에는 기독교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간접적으로라도 기독교 하나님 설명에 도움이 되었다고 보는데요. 그러한 흐름이 서양철학에서는 계속되어 왔는데 현대철학에 와서 조금 반대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무신론적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일종의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위기이구요. 도전이기도 합니다. 그런 것은 어떻게 보면 기독교 신학의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세계에 대한 해명을 철학이라고 한다면 철학적 논의앞에서 신학이 과감하게 같이 노력을 지속했다고 한다면 철학이 신학을 나 몰라라 조금 전에 이야기한데로 무신론적인 관점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을텐데요. 기독교신학이 현대로 넘어오면서 그 뭐 현대를 언제로 잡는가에 대해서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배경의 흐름들은 많이 있는데 기독교 신학이 결국은 세계의 논의, 철학적 논의에서 물러서게 된 거예요. 그게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쉴라이에르마허의 감정이라든지, 기독교 신앙의 근거, 세계에 대한 해석과는 상관없이 인간의 존재적 절대의존적인 감정이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거라든지 이 책에도 이야기했듯이 변증법적 신학, 기독교 신앙은 철학이 비판하고 있는 종교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그렇게 슬쩍 질문을 피해가는 그러한 방식으로 대응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철학은 신학과 세계의 중요한 문제들을 중간에 놓고 대화하지 않는거죠.

조금더 센세이셔날한 예를 들자면 지동설과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동설은 오래전 이야기니까 접어둔다고 하구요. 진화론 생물한적연구에 대해서 기독교가 바르게 대응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알레르기반응을 보여서 결국은 생물학적 학자들에게 신학이라고 하는 상당히 무지몽매한 교권적인 것같이 세계의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곤란한 그런 집단으로 좀.. 치부된 거죠. 하여튼 그러한 흐름 속에서 결국은 신학이, 무신론적 그러한 비판을 끊임없이 현대철학에 들어와서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뭐 이러한 도전 앞에서 한국 교회는 아예 그 사태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어요. 아예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그래서 우리는 12강 시작하는데 있어서 무신론적 논의가 대두된 철학사적 흐름들을 이제 이야기하게 되겠습니다. 요 부분은 난삽하기도 해요. 판넨베르크의 글은 난삽한 건 없는데 요점은 정확하게 짚고 있는 우리가 따라가기가 만만치 않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 동영상 시청하시는 분들이 판넨베르크의 책 내용을 어렵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댓글을 좀 읽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일단 판넨베르크의 접근 방식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신앙의 틀들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하는 겁니다. 해석학적 이야기인거죠. 해석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교리적이지 않다 독단적이지 않다. 기독교의 모든 진술내용들을 보편적 진리의 토대에 과감하게 내어놓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앞에서 제가 잠시 지적한대로 현대신학에서 철학과 세계학문의 도전앞에서 떳떳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것을 넘어서려고 하는 거죠. 세계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당당하게 대면하지 못했던 그러한 과오를 인정하고 그러한 차원으로 뛰어 들어가겠다고 하는겁니다. 철학적인 논의를 회피하지 하지 않는 거죠. 논리학, 과학, 철학 이런 것들하고 기독교 신앙을 정면도전, 도전이라기보다도 같이 논의의 장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거죠.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지 않느냐 철학이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데 왜 신앙을 어려운 방식으로 이 세상 학문과 대면시키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지난 2천년동안 2천년이 아니죠. 현대신학에 들어와서 그런 경향을 많이 보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19세기 초부터 교리적으로 보면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만 핵심적으로 보면 쉴라이에르마허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이전에는 사실 변증신학이었거든요. 기독교 교부신학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세계의 모든 현실들에 근거해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과정, 역사의 하나가 삼위일체 논쟁 다 거기에 포함되는 거예요. 판넨베르크의 시도가 생뚱맞은 것은 아닌 거예요. 원래 신학의 근본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예요. 나사렛 예수에게서 시작한 하나님 나라가 헬라세계로 확장되면서 결국 이 복음이 변증 요구를 받게 되는 거거든요. 여기서 변증은 dialectics가 아니라 apologetic 입니다. 그러한 역사가 사실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르네상스와 그 뒤의 계몽주의, 모더니즘, 관용주의철학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신학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움츠려 들어서 결국 세계 문제에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대응하지 못한 건데요. 판넨베르크는 그 전통을 회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부신학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다보니 그가 말하는 논의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게 되는데요. 앞에서도 짚은 바와 같이 현실성에 대한 문제라든지 예 그러한 문제들, 철학적 논의들 그러한 것들을 근거에 깔고 기독교 교리를 설명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의 신학이 관념적인 색깔을 보이는 거거든요. 그러기에 우리가 따라가기 힘든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번역이기 때문에 좀 낯설죠. 문자와 언어라고 하는 것은 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어서 우리 한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모국어가 아니니까 확 와 닿지 않습니다. 필이 꽂히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제 설명이 그걸 조금 더 우리들의 입맛에 맞도록 하면 좋은데 그것도 약간의 착오가 있는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판넨베르크의 철학자체가 관념적이고 특별히 독일의 관념적인 흐름들,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린다면 헤겔철학을 너무 따른다. 뭐 그런 역사문제를 이야기하니까요. 그런 비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좀 어렵다고 이야기 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이건 교부신학으로 돌아가는 정도의 무게를 갖고 있는 겁니다. 어렵다고 하는 생각들이 있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오늘의 것이 조금 더 그래요. 무신론적인 비판이 나오게 된 그러한 과정들을 이야기하게 되니까 본격적으로 철학적인 이야기들이 나오게 되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철학자들에 대해서 충분하게 설명하기는 좀 힘듭니다. 판넨베르크가 쓴 디올리기온데프리처라는 책요. 잠간요. 이 책이요. 요거를 제가 번역을 한 사람이긴 한데. 헬라고대철학, 플라토,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철학 그 뒤를 이은 스콜라, 죽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막스와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과정들과 신학이 어떻게 논쟁해왔는가 그리고 그 흐름들이 어떤가? 오늘날 인간학적 철학 앞에서 신학이 어떤 논쟁을 해야 하는가 자세하게 설명을 했어요. 참 많은 철학자, 신학자, 생물학자, 이러한 사회학자들이 나열되었는데 그 책을 번역하기는 했는데 그것 참 어렵더라고요. 어렵다고 하는 말이 그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전체적인 흐름을 다 파악을 해야만 충분한 건데 그게 참 힘들다고 하는 거예요. 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실존적인 철학과 그 관계에서 이야기하는 것만 내가 따라가는데 흄 철학 이런 것들을 다 제가 따라가기 힘드니까 좀 한계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게 되는, 내용에 나오는 철학자들도 그냥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정도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거지요. 강의안이 어렵다고 해서 그래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네 37쪽 맨 아래 패러그래프 밑에서 두 번째 줄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 철학적 논의가 하나님을 이야기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된다.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된다. 그걸 앞에서 이야기한 거예요. 지금 우리는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인간과 세계를 견인해 나가는 현실성에 대한 확신이 무신론적 비판 때문에 흔들리는 것일까? 요 구(句) 라고 할까요? 주부죠. 문장은 술부와 주부로 되어 있거든요. 주부. 중요합니다.

주부가 이렇게 되어있어요. 인간과 세계를 견인해 나가는 현실성에 대한 확신이. 다시 한번요. 인간과 세계를 견인해 나가는 현실성에 대한 확신이. 현실성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리르키르카이. 영어로 리얼리티라고 하는데요. 그 현실성, 리르키르카이트. 판넨베르크가 다른 문장에서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다. 디알레스벨쉴른데이 기르기르카이트가 하나님인거죠. 그 말이 좀 이상하죠. 하나님이 어떻게 현실성이냐? 현실성이라는 말이 우리들에게 확 와 닿지 않습니다. 그 말은 우리말로 하면 좀 빈약하죠. 그게 한자이기는 한데요. 기르키르타이트. 작용하다는 동사에서 온 추상명사입니다 이거는 어쩔 수 없이 현실성이라고 번역하기는 하는데 그거는 고렇게만 말하면 상당히 축소된 의미예요. 현실성은 그냥 리얼리티 참되게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혹은 역동적으로 활동함으로서 어떤 진리를 들어내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진리자체라고 할 수 있겠죠. 진리가 그런 변증법적인 힘이니까요. 모든 것들을 규정하는 현실성이 하나님이다. 이건 뭐 판넨베르크가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고 누가 말한 것을 인용한 거겠죠. 인간과 세계를 견인해 나가는 현실성에 대한 확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곧 그 세계 인간을 끌어가는 현실성인데요. 그 분에 대한 확신이 무신론적 비판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인데요. 그렇게 어려운 문장은 아닌데 제가 다시 요 문장에서 머뭇거리며 시간을 끄느냐하면 문장 자체, 낱말 뜻은 어려운 것은 아닌데 그것이 내포하고 하고 있는 어떤 근원적인 의미들을 여러분들이 조금 더 생각하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신론적 비판 때문에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인간과 세상을 견인해나가는 현실성에 대한 확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고렇게 표현한 것은 여기에 다른 훨씬 더 많은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하늘에 우주선을 타고 올라가 봐도 하나님이 없더라. 이런 것들도 무신론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있고요. 또 포이에르바하 이런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자기투사다. 프로이트 이러한 사람들에 의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발현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 것 앞에서 우리다 아니다 하나님은 권능이 있다. 전능하다 이런 식으로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조금 궁핍하죠. 우리가 논리적으로 조금 밀린다고 하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이러한 무신론적 비판 앞에서 인간과 세상전체를 견인해나가는 현실성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상황이 말이죠. 그러한 질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현실성의 참된 형태는 성서 전승이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거죠. 현실성의 참된 형태, 성서가 이미 말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이런 문장에서 여러분들이 어떤 느낌이 오지 않나요? 아. 하나님이, 성서가 선포하는 하나님이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 이렇게 세계 인간 모든 것을 규정하고 끌어가는 근원적인 현실성이라고 한다면 훨씬 더 역동적인 거죠. 그렇죠? 이게... 이런 생각으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지 않으면 이러한 무신론적 비판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이쪽으로 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쓰고 있는 단어, 현실성 이런 쪽으로, 혹은 화이트헤드의 표현이라면 reality process 이야기하잖아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깊이, 차원 이런 것들을 심화하거나 확장시키지 않는 이유는 일단 그러한 것들을 잘 모르기도 하구요. 또 기존의 하나님상이 너무 확고해서 그렇습니다. 고정관념이죠. 하나님을 이미 결정되어 있는, 완성된 어떤 절대자, 이런 것으로 표상해 놓는 거죠. 이렇게 생각을 해두는 거죠. 거기서 조금 다른 하나님을 이야기하게 되면 불안하게 생각이 되는 겁니다. 예컨대 이런 거죠. 십일조 헌금을 하면 차고가 넘치게 복을 주고 안하면 저주받는다. 이런 식의 하나님 표상이 고정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헌금 때문에 하나님의 복과 저주 이런 것이 전혀 상관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적절한 예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현실성,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은 성서 전승이 이미 말하고 있는 바로 그 분, 혹은 그것이다. 그거죠.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왔는지를 명확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이런 철학적 질문은 고대의 고전적인 체제에 맞서, 그리고 교부신학을 통한 그런 체제의 계속과 기독교 중세기의 그런 체제에 맞서 현대에 들어와서 발생했다. 있었던 과거의 그러한 모든 체제, 시스템, 교권이라고 할까요? 이런 것들이 현대에 들어와서 발생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의 이러한 변화된 상황이 바로 근대 무신론의 출발점이다. 현대 철학이 제기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의 변화는 하나님이해의 인간론화 라고 할 수 있다.

예. 무신론적 비판의 출발은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나왔다고 볼 수, 인간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포이에르바하의 자기투사, 인간에 대한 이해거든요. 그러니까 기독교 비판, 무신론적 비판하는 사람들이 거의가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해방, 인간이해죠. 니체, 포이에르바하, 모든 무신론적 비판의 근거들은 모두가 다 Anthropology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보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환상이다. 환각이다. 망상이다. 그런 대답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질문들, 혹은 이러한 도전 앞에서 기독교가 도대체 어떠한 반응을 해야 되고 대답을 해야 되냐 하는 문제들은 그냥 우리가 쉽게 그건 믿음이 없어서 그래 라고 지나가기에는 너무 심각하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유럽사회에서는 깊이 들어와 있을 거구요. 만연되어 있을 거구요. 한국교회에서는 상황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앞에서 이야기 한, 한국교회도 사람이 성숙하게 되면요. 좋은 뜻이든 부정적인 뜻이든 지식과 인문학적 깊이들, 철학 그런 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성숙해지지 않습니까? 세상을 좀 아는 거죠. 우주가 어떻다, 인간의 심층심리에 대한 그건 것들, 노동의 문제, 그러한 것들을 거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고전적 대답들, 하나님은 하늘에 있다는 식이라든지, 아니면 권선징악 같은 하나님이라든지,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분노를 보이는 그러한 하나님이해 그런 것들은 설 자리가 없는 거죠.

판넨베르크가 이런 도전 앞에서 어떤 길을 택하겠습니까? 여태까지는 판넨베르크 이전의 신학들은 아. 일반적 철학하고 생물학이 다루는 주제하고 신학이 말하는 것은 다른 거다. 서로 대화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하지요. 대화하는 거지요. 대화할 뿐만 아니라 그가 대화하는 것은 무신론적 비판이 안고 있는 한계들을 짚음으로서 인간이해에 대한 더 근원적인 토대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제시하는 겁니다. 그게 결론이에요. 사실은요. 그 결론까지 도달하는 것을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분명한 그러한 상황이 놓여있는 거예요. 무신론적 비판, 이거는 이미 빼도 박도 못하는 거예요. 이미 턱밑에 들어와 있어요. 그걸 한국교회는 믿음이 없다 그렇게 치부해버리고 마는데 그렇게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그런 시절은 많이 지났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이 들어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네 그러한 것들 앞에서, 아니 바꿔서요. 그러한 방식으로 인간과 세계역사 이런 것들이 해명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 그 문제점들을 판넨베르크가 뚫고 들어가면서 바로 그 부분의 종교적 차원, 이 모든 것을 규정하고 견인해가는 그리그리가이트 이런 것이 전제되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들이 말하고 있는 모든 무신론적 종교적 이해 이런 것들이 설득력이 없다. 이걸 그냥 독단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방식으로 보편적 진리차원에서 하는 겁니다. 그걸 우리가 배우는 겁니다.

고대와 중세의 구(舊) ‘자연신학’은 세계 질서의 근원과 모든 운동의 최고 이성을 역추적하기 위해서 본질적으로 세계인식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중세기 후반기 이래로 취약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증명 몇 가지 그런 것 있잖습니까? 부동의 동자, 그러한 증명 방법들이 있습니다. 세계인식에서 출발하는 거거든요. 운동이 있다고 한다면 충격이 있다. 원인이 있다. 계속 추적해 올라가면 처음에 운동을 일으킨 그 존재 부동의 동자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을 증명해 보려는 것입니다. 세계이해로부터 나오는 것이죠. 그게 중세기 이후로 넘어오면서 취약하게 된 거죠. 세계의 현 상태를 규정하고 있는 원인 사슬이 무한한 과거로 소급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해서 제일 원인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세대들이 세대계승으로 인해 이미 죽음으로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현세대가 살아있는 동안에 세상이 과거와 현재를 모두 통괄하는 전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 요런 부분에서 좀 설명이 필요한데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요 부분은 무신론이 등장하게 되는 과정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거라서 까다롭기도 하구요. 그냥 대충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가도 사도신경을 공부하는데 크게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시작만이 아니라 모든 현 상태의 유지도 역시 일종의 원인으로서 필요하다는 점에서 제일 원인자의 수용이 필연적일 수도 있다. 이 제일 원인자는 그에게 의존적인 작용으로부터 시작해서 현재 유지되고 있는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활동성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인데, 세상이 존립하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관성의 법칙이 도입된 이래로 한번 등장한 상태에서 한 몸의 지속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당연시되었다. 이로써 궁극적 근거는 일종의 제일 원인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데카르트와 뉴턴이 여전히 지구 운동에 제일 충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유를 자연像에 기초하려 한 것은 이미 그 당시에 원칙적으로 극복된 표상을 지켜내려고 쓸데없이 안간힘을 쓴 반향에 불과했다. 지구 출현에 관한 기계론적 이론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신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배제되었다는 것은 무언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흐름이었다. 자연과학적으로 충격운동, 관성운동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역사적 불가피한 흐름이었다고 하는 거죠. 하나님을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다 증명해 낼 수 있겠어요. 관성의 법칙이 도입된 이래로 자연사건의 제일 원인이라는 가정이 결정적인 대세를 잡게 되자 자연 인식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사유에 이르는 길이 폐쇄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이르는 모든 길이 막힌 건 아니었다. 근대 사유에서 하나님은 세상 대신에 인간으로부터 사유되기 시작했다. 자연인식으로서는 조금 어렵게 되었고요. 시도가 있었는데 그것으로는 힘들게 되었고 그래서 방향을 틀어 인간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로부터 데카르트를 거쳐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거듭해서 인간이 신적인 현실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주체성에서 자신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새로운 설계를 제시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철학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바탕에는 다 신학들을 깔고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생각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을 신학과 반대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신학과 반대되는 철학자들은 훨씬 후대에 나오는 겁니다. 헤겔까지도 다 철학적인 신학을 한 거거든요. 헤겔이후로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 니체, 이런 사람들이요. 따라서 데카르트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 외부에 있는 실제 세계의 현존은 하나님이 원인자로 존재할 경우에만 확실했다. 데카르트, 코기도에르고숨.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게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처럼 혹시 생각되면 아닙니다. 다 오히려 그런 데카르트 같은 그 당시의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전제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봐야죠. ‘나’라는 존재는 이 원인자가 세계의 근원이 아닐 수 있다 하더라도 내 의식 가운데서 그 원인자 개념을 우선 인식하게 된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윤리적 규정이 자연의 본질로서 자신의 현존과 일치한다는 것은 일종의 최고 힘이 인간의 도덕적 봉사와 사실적인 일 사이의 조화를, 그리고 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는 모순성의 피안적 균형을 이루어낸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만 고려될 수 있다. 즉 이것은 도덕적 신성을 통해 구별되고, 또한 동시에 절대적(전권적)인 힘으로 자연의 진행을 규정할 수 있는 하나의 본질이어야만 한다.

데카르트와 칸트를 이야기했잖아요. 결국은 제1원인자, 하나님을 전제할 때 데카르트는‘사유하는 나’가 가능한 것이고 칸트의 경우에는‘윤리적 당위’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제1원인자인 하나님과의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결속이 아주 탄탄한 거예요. 그들은 하나님을 인간학적 바탕에서 확실한 근거들을 찾아보려고 했던 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리고 앞에서는 세계에 대한 인식, 자연신학적인 관점으로 하나님을 부동의 동자 이런 비슷한 논리로 증명해 보려고 애썼지만 조금 중세기에 흐르면서 그러한 문제들이 한계에 봉착하게 된 거에요. 인간에 근거해서 인간론적인 하나님의 이해의 증거를 찾아보려고 한 겁니다. 데카르트에는 ‘사유하는 나’, 칸트에게는 ‘윤리적인 당위성’ 이런 것들이 다 제1원인자인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고 하는 그러한 논리를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독일의 관념주의 사상가들은, 제 번역으로는 이상주의라고 했는데 Idealists, 이상주의가 아니고 관념주의라고 해야 됩니다. Idealism, 독일어로 이디얼리즈무스가 Idea가 ‘이상’이라는 뜻도 있지만 철학사에서는 관념주의이거든요. 제가 요 거를 번역할 때 그 차이를 정확하게 모르고 이상주의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걸 고쳐 주십시오.

독일의 관념주의 사상가들은 이런 생각에서 출발해서, 인식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주체성이 우리 외부에서 현실성과 일치하고 있다는 경이로움은 서로 구별되지만 양측을 포괄하는 주관과 객관의 공동 근원을 전제할 때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로 생각을 발전시켜나갔다.

관념주의 철학의 대표자, 혹은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헤겔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유한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세계를 뛰어넘어 모든 유한한 것을 자신 안으로 지양하는 무한한 현실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하는지를 지적했다. 무한한 현실성, 유한과 무한, 이런 것 전부 이렇게 우리가 판넨베르크가 전달해준 Secondary Source를 통해서 아! 헤겔이 그렇게 이야기 했구나! 좀 알아들을 수 있긴 했지만 그런 것으로 헤겔철학을 아는 것은 아니거든요. 이런 것을 더 공부하려면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라든지 그러한 책들을, 원본들을 쭉쭉 읽어내어야 되는데, 우리가 지금 뭐 석사과정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내가 그것을 많이 알아서 설명드릴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그런 정도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한한 현실성, 유한한 것을 자기 안으로 지양하는, 사실 지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없앤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우리가 일반적으로 쓸 때에 그 지양은 그러한 부정적인 의미가 있지만 이러한 학문적인 글에서는 변증법적인 의미가 있는 거거든요. 정-반-합이잖아요? 아푸헤봉이라고 하는데요. 그거를 하나의 테제가 있으면 그것을 안티테제에 반론을 하고 그것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아푸헤봉하는 지양해요. 그래서 진테제로 나가는 되거든요. 그 무한이, 하나님이죠. 그 무한이 유한을 자기 안에 지양, 버리는 것이 아니라 끌어올려서, 변증법적으로 끌어 올려서 이렇게 지양하는 무한한 현실성에 대해서, 이거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라는,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그 개념하고 똑같은 거죠. 이 무한한 현실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하는지를 지적했다. 헤겔이 그렇게 했다는 거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다. 유한한 소여성들에 대한 경험은, 소여(所與)성!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소여되있다 이미 주어져 있다. 산이 있다. 소여돼 있는 겁니다. 그런 것들은 다 유한하잖아요? 유한한 소여성들에 대한 경험, ‘내가 80살 밖에 못산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잖아요? 유한한 소여성에 대한 경험은 이미 자신 안에 무한한 것을 향한 일종의 고양을 포함하고 있다. 유한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무한을 향한 그 쪽으로 고양된다. 아부헤붕이라는 독일어가 쓰여 있을 텐데요. 올라가는 그러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한계의 피안을 생각하지 않고는 어떤 한계도, 그리고 어떤 한정된 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미 무한성을 알고 있을 때만 어떤 유한한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과 유한의 관계들을 지금 헤겔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헤겔은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전승된 神증명은 인간을 유한의 세계로부터 무한을 생각하도록 고양시키는 표현이라고 말이다. 다시 읽어 볼까요. 모든 전승된 神증명은 인간을 유한의 세계로부터 무한을 생각하도록 고양시키는 표현이라고 말이다. 헤겔에 의하면 그러면 ‘하나님은 곧 모든 유한한 것을 자기 안으로 지양하는 무한한 현실성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 그거 말장난 같다.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냐? 하나님을 절대, 전지(全知) 뭐 그런 하나님을 믿게 하면 되지! 뭐 무한과 유한, 지양, 또 무한한 현실성, 이런 개념들이 뭐 필요하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건 오해입니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우리는 무신론적 도전 앞에서, 철학적 무신론 도전 앞에서 할 말이 없는 거예요. 현대의 아주 세밀하고 아주 깊은 첨단화된 생물학적인 연구 앞에서 하나님을 해명해야 될 우리 신학의 입장이 이러한 철학적 신학, 신학적 철학의 도움이 없으면 궁색해 지는 거예요. 말할 거리가 없는 거죠. 결국 앞에서 언젠가 앞부분에서 나왔다고 보는데 판넨베르크의 인간학이라고 하는 책에서 나온 것이거든요. 결국은 교회가, 신학이 기독교 신앙을 아주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시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러한 철학적 신학, 신학적 철학의 풍부한 사유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믿는 것은 내가 그저 복 받고 마음 평안하고 위로받고 치유하고 그렇게 사는 거다. 완전히 독일어로 프레바트사키라고 하거든요. 프라이버시로 떨어지고 마는 거예요. 미국식으로 이야기 하면, 시민종교로 떨어지고, 부르주아 종교로 떨어지고 마는 거죠. 시민으로서의 도덕심, 질서 잘 지키고, 그렇게 하는데 일조하는 거다. 그렇게 떨어지는 거죠. 세계종말, 우주 이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되는 거죠. 만일 이러한 방식으로 기독교가 계속 나가게 된다면 그 미래가 어떻게 될까요? 아마 무당종교 비슷하게 떨어지고 말겠지요. 점쟁이 종교로 떨어지거나 일련정종처럼 그러한 거로 떨어질 수도 있겠지요. 아주 사적인 영역으로, 개인의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부분만 터치하는 그런데 머물게 되겠지요. 이미 한국교회가 그렇게 되어있죠?

이와 동일한 문제가 그 신학적 의미에서 항상 함축적으로만 다루어질 뿐이지 명시적으로는 거론되지 않지만 오늘의 인간론에서는 다루어지고 있다. 슐쯔(W. Schulz)는 하이덱거의 입장에 근거해서 말하기를 인간현존의 실존적인 구조는 이 현존을 능가하고 포괄하는 존재에 근거되어 있다고 했다. 존재, 존재 문제, 하이덱거에 근거해서 인간실존을 능가하고 포괄하는 존재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이 곧 ‘존재가 하나님이다.’ 라는 뜻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최소한도 철학적 토대는 되는 거죠. 하이덱거도 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우군(友軍)이예요. 친구예요.

현대 인간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인간의 자기 초월과 세계개방성에 대한 언급에서 이와 유사한 점들이 고찰되었다. 인간이 세계 개방적 본질이라는 특색을 갖는다면, 이게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인간이 세계 개방적 본질이라는 특색을 갖는다는 거요. 이런 책들을 읽기가 만만치 않은 게 이런 짧은 구절이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고런 것들이 희미하면 자꾸만 복잡해지거든요. 그러한 것들이 모여서 문장을 이루고 문장이 연결되어 절을, 패러그래프를 이루곤 하는데 이게 요런 작은 부분들에서 막히게 되면 큰 틀에서도 어려움이 있죠. 그래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이거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그래도 한마디만 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인간이 인간자체로서 완성되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의 세계 개방성이라고 하는 것은요. 혼자로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서 열려있음으로서 인간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 건데요. 인간의 세계 개방적 본질이 뭔가? 이러한 제목으로 학부학생들이라면 학기말 시험에도 충분할 겁니다. 이걸 중심으로 해야 할 말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인간은 그 세계가 보여주고 있는 분명한 형태를 뛰어넘어 그의 변화를 향해 열려 있다. 그러나 그가 현존적 세계에서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일종의 완전함에 의지한다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열려져 있고 아직 성취되지 못한 충만함에 의지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그렇게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다고 하는 거죠. 그 때에 완성되는 쪽이지요. 그걸 단절해 버리고 지금 내가 완성된 것처럼 생각해서 자기를 고착화 시켜나가는 것이 이게 죄 인거죠. 기독교적인면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자신의 세계 개방성에서 인간은 그를 견인해가고 있는 무한한 현실성에, 헤겔의 용어에 나온 거군요. 무한한 현실성에 즉 모든 현존적인 것의 편협성을 뛰어넘어 고양되며,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현존적인 것, 여기 있는 것, ‘다 자인’ 현 존재 여기에 있는 것에 의해 구별되는 현실성, 그게 뭘까요? 요 글들을 잘 따라갈 수 있으면 세계를 보는 안목이 달라질 겁니다. 그게 달라지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는 거고요. 또한 자신에게 속한 자유의 근원이며 자신이 처한 상황의 한계를 뛰어넘는 현실성에, 또 현실성이 나오잖아요. 또한 인간을 가능한대로 승화시킬 근원이라 할 이 현실성에 의존한다고 하는 점이 확실하다. 즉 요러한 문장을 보면 바로 그 현실성은 성령에 대한 성서적 이해하고 맞아 떨어진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느낌이 오는데요. 다시 읽어볼까요?

자신의 세계 개방성에서, 세계 개방성 단절이 아니라 소통, 열림을 통해서만 인간의 정체성이 해명될 수 있는 그 인간의 특질을 가리켜서 세계 개방성이라고 하는 것이거든요. 자신의 세계 개방성에서 인간은 그를 견인해가고 있는 무한한 현실성에, 즉 모든 현존적인 것의 편협성을 뛰어넘어 고양되며,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현존적인 것에 의해 구별되는 현실성 이예요. 또한 자신에게 속한 자유의 근원이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의 한계를 뛰어넘는 현실성에, 또한 인간을 가능한대로 승화시킬 근원이라 할 현실성에 의존한다고 하는 점이 확실하다. 조금 더 느낌이 오시죠. 현실성에 성령을 대입해도 틀린 게 하나도 없습니다. 생명의 힘인 성령, 창조의 능력이면서 종말의 능력이고 또 예수 부활의 능력인 성령에 우리가 의존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다 신학적 진술이에요. 지금 판넨베르크 이 책을 요렇게 쓰면 철학적인 설명이고요. 예수 부활, 창조, 종말,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 이렇게 하면 이건 신학적 진술이고요. 그 내용은 맞아 떨어지죠. 지금 여태까지 요기까지 말하는 내용의 핵심은 무신론적 철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이해만으로는 인간을 충분하게 해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의존하고 있는 현실성에 근거해야만 가능하다. 그런 거를 딱 집어서 이야기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것을 앞으로 이야기 할 거고요. 제가 지금 이것을 읽어 보고 말하기 때문에 읽어보아야 될 부분을 당겨서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다 담겨져 있는 거예요. 네! 넘어가겠습니다.

포이에르바흐 이래로 발전되어온 하나님에 대한 무신론적 비판을 극복할 수 있는 우선적이며 근본적인 결론이 이러한 사상적 맥락에서 도출된다. 내가 미리 이야기한 것이 바로 여기 나오는 군요. 포이에르바흐가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무신론적인 비판이, 거기서부터 시작한 일련의 흐름들이, 그것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인간의 세계 개방적 특질이라고 한 것, 제 머리 속에는 고 관계가 잘 정리되어 있는데 설명을 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더라도 여러분들이 잘 새겨서 들은 줄 믿고 넘어가겠습니다.

물론 인간과 모든 유한한 것들을 능가하고, 또한 유한하지만 이 전체 세계를 기초하고 견인해가는 신적 현실성을, 아까는 무한한 현실성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신적 현실성을 이야기하죠. 비슷한 이야기를 다르게 표현한 겁니다. 신적현실성을 전제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과 그 주관성의 구조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현실성에 대한 어떤 증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직은 아니다. 저는 그렇다고 이야기했는데 판넨베르크는 그 자체가 바로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하네요. 왜 그렇게 이야기 하는지 조금 더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분명히 여기에는 인간이 자신의 본질에 따라서 불가피한 환각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여전할지 모른다. 아! 고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군요. 세계 개방성이라고 하는 특질에 근거해서 신적현실성에 의존하는 인간이해가 바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잘못됐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자칫하면 왜곡될 수 있다고 하는 거죠. 환각으로 빠질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아주 작은 차이인데 엄청난 차이예요. 신앙이 망상, 미망, 미몽, 환각으로 떨어지는 거하고 정말 참되게 하나님의 생명신비로 들어가서 그를 신뢰하는 것 하고 겉으로 어떻게 보면 비슷하게 나타날 수 있어서요 구분이 안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거예요. 술에 취한 것 하고 성령에 취한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자아를 초월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거지요. 술에 취하면 이성과 자아가 완전히 이거는 말살되지만 성령, 생명의 힘에 사로잡히면 그것이 살아있으면서 초월하는 거거든요. 초월하는 것과 말살되는 것은 다르죠. 그걸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계를 능가하는 神적 현실성에 대한 사상이 인간의 인간실존에 기초하여 형성된다면 이런 사상의 형성은 여기서 환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라 하더라도 불가피한 일인지 모른다. 이에 반하여 무신론적 논증은 神에 대한 사유에서 인간발전의 경과적 국면이 보여주는 특별성에 기인한, 근본적으로 타파될 수 있는 환각이 핵심이라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신론적 논증의 주장을, 그들의 주장이 무어냐 하는 거죠. 종교는 환각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확증할 수 있다고 말한다는 것을 판넨베르그가 빌려서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증이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존재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위해서는 종교적 주제는 없어도 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다. 가장 무신론적인 바탕의 근거는 종교적 주제가 없어도 인간 존재를 해명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거죠. 만약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종교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그런데 판넨베르크는 아니다 그걸 이야기 하는 거죠. 이 증명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계속적인 진술들은 공허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증명이 성공하지 못하거나 인간역사의 초기부터 잘 알려진 대로 종교적 본질이 인간의 인간존재에 속한다는 반명제가 여전하다면 하나님의 현실성과 고유성을 간과한 채 인간존재에 대해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럴 경우에 오히려 신적 현실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그것이 논의될만한 가치가 있게 될 것이다. 네. 여기서 관건은 신적현실성, 그 고유성, 종교적 본질 이런 것 없이 인간 존재 해명이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는 거죠. 이렇게 철학과 인간학은 심각한 상태에 까지 도달해서 논쟁하고 있는데요. 기독교 신학이 그런 것을 외면한 채,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는 방식으로 나가게 된다면 특히 우리 한국교회에 척박한 비신학적 혹은 신학 무용론적 근거에 의한다면 정말 우리는 딴 나라 사람들 같아요.

예.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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