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녹취록 - 2장 하나님을(4)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3258 추천 수 0 2009.04.05 00:33:10

판넨베르그 사도행전 해설 제13강 - 하나님을 (04)

안녕하세요. 오늘 사도신경 해설 13강입니다. 날짜가 어떻게 되었나요. 참 빠르죠. 제가 8월 마지막 주에 첫 녹화를 했고요. 여러분들에게 나간 때는 9월 첫 주일 인가 8월 마지막 주일인가요? 그 쯤 되었는데 9,10월 11월 중순에 접어들었으니까 두 달반 정도 되었고요. 근데 13강이 되었다고 한다는 거는 네 주씩 하더라도 세 달이 지난 건데요. 네 그렇군요. 앞부분에서는 한주에 두 번 강의 한 적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13강입니다. 지금 판넨베르크의 책 진도에 따르면 제2장입니다. 전체가 14장까지 있는데 그 중에 2장 오늘 마지막 시간입니다. 아직까지는 우리가 사도신경의 내용에 깊이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워밍업 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장에서는 나는 믿습니다. 그것이 과연 뭐냐 하는 문제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억에는 얼마 남지 않았을 겁니다. 큰 줄기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이 됩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성적이고 혹은 감정적인 요소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믿는 대상에 대한 참된 신뢰에 근거한 거다 그 이야기죠. 그때 아마 신앙과 신뢰 두 가지를 조금 구분한 것 같습니다. 신앙은 무조건적인 의존성을 이야기한다면 신뢰는 신뢰할만한 어떤 근거를 확보한 가운데서 의존하는 어떤 태도를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신앙은 이 두 가지를 같이 가지고 있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지금 2장에서 하나님을 이라고 하는 이 내용이 신론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깁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말한다고 할까요? 아니면 해명한다고 할까? 믿는다고 하는 거 말할 수 있고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과연 그게 무엇을 이야기 하냐 하는 그런 것들을 좀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소부지하고 전지전능하고 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에 아주 깊이 들어가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고 그분과 관계를 맺는다고 하는가에 그 사태라고 할까요? 그게 뭐냐 하는 거죠. 여기서 인제 아마 1장에 있는 믿음과 연관이 된다고 보는데 중요한 거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만을 단독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하는 사실, 그러한 근거에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거예요. 즉 구원받아 천당 간다고 하는 이 교리문답이라고 할까? 믿음의 간략한 도표라고 할 수 있는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 일원론적인 차원이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과의 관계가 늘 배경으로 두고 작용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아마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네 그건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이게 기독교 신앙과 신학이 말하는 그 명제들, 그러한 해명들이 어떻게 보면 뻔한 이야기 같은데 뻔한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구요. 받아들이기에 따라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설명을 잘해야 될까요. 그거는 자기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는 아포리즘하고도 좀 연관되는 거예요. 다르게 예를 들자면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이시다 라고 하는 이러한 명제도 말이죠. 그냥 단조롭게 생각하면 그냥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명제를 중심으로 한 어떠한 신앙적인, 네 그러니까 그러한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라는 그 명제에도 깊은 세계가 있는 거죠.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그 명제가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 철부지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졸라서 뭐 좀 타내듯이 그러한 표상으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고요. 훨씬 더 깊은 세계에서 자기에게 오는 고난마저도 하나님의 구원이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온다고 하는 차원까지 이를 수 있는 겁니다.

시편공부도 제가 지금 사도신경공부와 같이 녹화하고 있습니다. 같은 진행을 나가고 있는데 옛날에 제가 시편을 읽을 때하고 지금하고는 천차만별 이예요. 젊었을 때 신학생 시절, 초보목사 목회할 때는 제 딴에는 책을 읽고 생각하기는 한다고 했습니다만 시편 이야기들이 그냥 뻔한 이야기로 들어와서 그냥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덕담으로 전해주는 거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늘 들었던 신앙용어이기는 하지만 시편기자들의 영성, 그거가 참 놀랍다고 하는 사실을 읽을수록 더 절감하게 되거든요. 지금 여기 하나님을 사도신경 안에서 언급하는 것이 뭐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여러분들이 놓치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그것은 곧 바로 앞서 제가 이야기한대로 우리 신앙이 그리스도 일원론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행되는 거라고 하는 그러한 뜻이기도 합니다.

요 부분을 조금 더 설명을 해야 되는데요.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과 연관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을 굳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 예수만 믿으면 되지 않느냐 그러한 주장이 가능하고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한국교회에서는 크리스트센트리시즘이라고 할까요. 바르트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축소해서 이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형편이거든요. 이것이 보수적인, 약간 편향된 보수주의, 건전한 복음주의라기보다도 편향된 그러한 보수주의나 또 하나의 다른 극단인 진보주의, 자유주의 이런 쪽으로 비슷한 현상으로 나타나요. 무슨 말인지 여러분들이 아마 한국교회사나 아니면 현대신학사나 조금 알고 계신 분들은 눈치 채고 있을 겁니다. 즉 근본주의적이고 그리스도 일원론적인 그러한 신앙,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 늘 예수 예수 맨날 그러한 상태에 있는 거죠. 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와 종말과 그 창조의 유지와 그리고 지금 사도신경해설에서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세계 현실성 이런 문제들까지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건 까마득한 자기들의 관심이 없는 이야기고 거리가 먼 이야기고 신앙하고 상관없는 이야기 그리고 아무거나 붙들고 믿고 구하고 예수 믿어서 축복받아서 잘산다고 하는 그런 관심 아닙니까? 예수구원 불신지옥, 예수 축복 불신저주, 불행 이러한 구도에 고착되어 있는 거죠.

이러한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이런 신앙과 전혀 다른 편에 놓여 있는 진보적인 민중신학적인, 자유주의적인 이게 같은 색깔은 아니에요. 그것도 조금 더 세분화해야 되는데 일단 같은 흐름으로 보수주의, 근본주의와 이런 쪽하고는 조금 대별되기 때문에 묶음으로 제가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쪽도 사실은 비슷한 성향으로 보이는 거예요. 역사적 예수를 붙들자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들의 이야기는 사도바울에 의해서 교리화된 그리스도, 이러한 것들에 별로 큰 관심은 없는 거예요. 역사적 예수에게 머물러 있는 겁니다. 역사적 예수라고 하는 거는 민중들의 고난에 함께 했고 그들의 해방을 선포하였고 그러니까 인간예수, 나사렛 인간 예수, 그 외의 교리적인 부분들은 다 기독교 신앙이 헬라화된 거다. 그것을 껍질을 벗겨내자. 순수한 갈릴리 호수에서 민중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역사적 예수에게 집중하자고 하는 거죠. 이 두개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한 패러다임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하나님의 영역은 혹은 성령의 영역은 축소되거나 왜곡되고 예수 일원론적인 신앙으로 떨어진 겁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철저하게 개인 구원쪽으로 해석 받아들여지고 있고 또 이쪽 진보주의쪽에서는 사회구원쪽으로만 받아들이는 거죠. 양쪽의 공통점은 예수에게만 머물러 있는 거죠. 하나님은 별로 신앙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이야기하죠. 그러나 성령이라고 하는 것도 편향한, 복음주의 보수주의 주술화되고 심령적인 하나의 정신화된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진보쪽에서는 사회과학쪽의 힘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거죠.

이러한 양쪽극단의 신앙은 기독교 중심은 아닙니다. 하나님, 신론적인 토대를 놓치지 않는 거죠. 성령, 생명의 영, 이러한 삼위일체론적인 그러한 관점에서 기독교신앙의 중심을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텍스트의 흐름에 따라서 본다면 이러한 이야기죠. 기독교 일원론적인 신앙으로부터 삼위일체론적인 신앙으로 고양된다, 확장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현실성을 그것을 붙든다고 하는 겁니다. 말이 조금 진부한 표현인 것 같은데요. 직접 와 닿는 이야기를 해야 되겠는데 고게 확실하게 잡히지 않는군요. 이렇게 말하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보수주의 쪽에서는 이렇게 초월적으로 관념화된데 떨어져 버렸고 진보적인 쪽에서는 사회 개혁프로그램의 동력 정도로만 떨어지고 있는데 기독교 역사의 중심, 메인 스트림은 세계 현실성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현실성을 확보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한 것들이 뭐가 중요하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이 세상 안에 우리가 살고 있는 거군요. 서론적으로 그러한 말씀을 드렸는데 정리가 좀되지 않는 거 같습니다. 정리를 이야기를 좀 텍스트하고 딱 떨어지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 정리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전반적인 어떤 흐름이라고 할까 좀 전달되었다고 봐도 되겠지요. 텍스트를 좀 보겠습니다. 42쪽 위에서 여덟째 줄. 새롭게 시작하는 패러그래프입니다.

하나님의 현실성*을 결정하는 문제는 대체적으로 현실성에 대한 경험이 계속적으로 이루어내는 관계성에 해당된다. 관계에 의해서 나올 수 있다. 관계가 중요하다. 관계 안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요 첫 번째 문장도 상당히 중요하죠. 판넨베르크가 하나님의 현실성을 결정하는 문제라고 이렇게 시작하고 있어요. reality of God, 독일어로 하자면 위르키그가이트 고테스(Wirklichkeit Gott). 하나님의 현실성요.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현실성이라고 했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요. 우리는 신앙적인 표현으로는 그냥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현실성이라고 하는 이 추상명사죠. 이런 것들을 덧붙임으로서 신학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세밀한 부분들이 있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하고 하나님의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차이가 있는 거죠. 하나님의 현실성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하나님이 진리라고 하는 사실이 해명될 수 있는 어떤 형상, 어떤 근거, 어떤 토대 그런 것들 통칭해서 현실성이라고 하는 거죠. 이 말은 곧 이렇게 까지 우리가 확장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할 때 막연한 거죠.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거죠. 하나님의 현실성으로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거죠. 여기서 현실성이라고 하는 단어가 여러분들이 그 개념을 먼저 파악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관념적인 표현이기도 한데 그거는 영어에서 말하는 Reality 하고 흡사하기는 하지만 꼭 그 단어는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세밀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면 그냥 리얼리티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말 참된 것, 변증법적으로 진리를 드러내는 것, 그런 것을 Wirklichkeit 현실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현실성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겁니다. 종말 참된 것, 이 현실성은 하나님에게만 붙이는 것은 아니에요. 세상의 현실성도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최종적이고 그렇지 않겠어요? 하나님의 현실성을 결정하는 문제는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이 증명될 수 있는 길은 이런 뜻이에요. 대체적으로 전반적으로 현실성에 대한 경험이 계속적으로 이루어내는 관계성에 해당된다. 제 번역이 조금 매끄럽지는 않군요.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현실성, 진실성, 하나님이 참되다고 하는 것, 그분이 영원하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그 알짬, 하나님의 참된 그것, 그런 것은 현실성에 대한 경험이 만들어내는 어떤 관계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 뜻이죠. 현실성에 대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성에 대한 경험. 그 우주물리학의 차원에서 본다면 갈릴리, 코페르니쿠스 이전에서는 천동설이 현실성이 되었어요. 그 이후로는 지동설이 현실성입니다. 이 현실성을 사람들이 경험하는 거예요. 뉴턴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기계적 역학이라고 하는 것이 물리학에서 가장 확실한 현실성이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른 것을 해석할 수 있는 근거들이죠. 그렇게 물리의 세계를 그 당시의 사람들은 경험했습니다. 헬라시대를 올라가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본질이 불이라고 했으니까 현실이에요. 불이요. 탈레스가 말하면 물이라고 했어요. 데모크리투스는 원소라고 했나요? 그런 것들이 다 그 당시의 현실성입니다. 그게 인제 뉴턴까지는 거의 크게 변하지 않고 왔는데 그 뒤로 양자역학에 와서는 전혀 다른 상대, 물리의 세계가 확고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 밝혀지잖아요. 그게 은폐되었던 것이 들어나는 거지요. 그전에는 있기는 있었는데 알지 못해서 그건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지동설은 현실이 아니었어요. 그거는 사실은 사실이었는데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게 참 신기하죠. 그 다음에는 현실이 되는 거예요. 양자역학도 그렇고요. 그러니까 이 현실성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딱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그것은 변화하는 것입니다.

시인들에게는 이 세상이 그 방식으로 현실로 다가오게 될 거예요. 우리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은 그들은 경험하는 거죠. 음악가들은 음악가대로 그런 방식으로 사는 거죠. 그런 현실성에 대한 경험, 이런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런 이야기죠. 천동설일 때는 그 방식으로 하나님의 현실성이 확인되는 것이고 지동설 시대에는 이 방식으로 하나님의 현실성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이 세상이 하늘 땅 지하 이렇게 삼층천으로 우주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현실성 이예요. 그 방식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현실성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땅에 있고 지하에는 스올이라는 곳에 악령들이 있고 인간이 죽으면 그곳에 가야하고 거기는 저주받은 그와 같은 그런 세계로 고대인들이 이 세계를 생각했는데 그거는 그들이 현실성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약성서시대에도 주술적인 것이 만연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볼 때는 주술이라고 그래갖고 조금 현실에 대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현실이었어요. 그 당시의 눈으로 봐야 됩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많이 행하고 바람도 멈추게 하고, 파도 멈추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 같이 복음서와, 서신들은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데요. 그래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신약성서가 그렇게 예수님을 말하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세계 현실성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그것을 최선의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이었어요. 지금은 다르잖아요. 지금은 주술적으로 생각하지 않지 않습니까? 여전히 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습니다만. 귀신론 같은 데는 영안이 밝으면 상대방의 귀신이 턱에 붙었다 등에 붙었다 그런 것들도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잖아요.

어저께 CTS 뉴스인가 장경동 목사님이 또 나왔습니다. 부흥회 비슷한 것 하시더라고요. 어떤 개인에 대해 평가하는 게 조심스럽기는 한데 아 마냥 그냥 좋은 게 좋다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옳고 그름을 때에 따라서는 말을 해야 되니까 이야기하겠습니다. 요즘 들어서 훨씬 더 그분의 설교행위, 성경공부강해, 부흥회 그런 것들이 모양이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그걸 더 이상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고요. 어제 이야기한 것 중에 자기네 교회 권사님이 있는데 그분이 시집와서 부터 진통제를 먹기 시작해서 이제는 25알까지 먹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분이 기도를 받기 원했다. 앞에 이야기 좀 생략하구요. 안수하고 기도하니까 귀신이 쫓겨났더라.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몇 년도 귀신인데 말하면서 나갔다. 그것을 아주 사실적인 것처럼 묘사하는 하시더라고요. 매일 25알 진통제를 먹어야만 겨우 두통을 견딜 수 있었던 분이 귀신이 나가고서 부터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이런 주술적인 신앙을 당연한 것처럼 공식적으로 하시더라고요. 오늘의 현실경험, 세계, 새로운 물리학, 그러한 세계 속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말하면 현실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여러분, 성서에 있는 것들은 오늘의 우리 현실과 다르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하나님이 달라진다고 하는 뜻이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하는 거죠. 고대인들은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들과 같은 거죠. 이 세상을 잘 몰랐으니까. 깜깜했지요. 직관했을 뿐입니다. 여기 공기가 있다고 하는 사실도 몰랐고요. 그런 등등, 미숙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보다 신앙이 약하다든지 하나님에 대한 직관력이 떨어진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조금 미숙한, 아니 많이 미숙한 세계 현실성에 대한 경험, 그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러한 방식으로 그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기독교인들은 청년쯤 되었다고 할 수 있나요. 더 이상 우리는 산타클로스가 와서 선물을 주고 가신다고 하는 그러한 정도로 조금 나왔습니다. 그런다고 해봐야 우리의 인식이나 이런 것들이 부족하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리던 유치원아이들과는 다른 그런 어른이 된 거거든요. 이런 때는 그러한 방식으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관계속에 있다고 하는 거죠. 현실성에 대한 경험, 그런 점에서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현실성과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인간학적 논증의 한계를 벗어나야만 한다. 무슨 뜻인지 알죠. 인간학적 논증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감성, 이것이 중요하기는 한데 감성, 거기에 인제 축소되는 게 문제예요. 심리적인 작용들, 조금 믿어라 하는 것이든지. 무주건 충성하라고 하든지. 인간적 논증이잖아요. 예수 믿었더니 마음이 평안해지더라. 이러한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현실성, 그쪽으로 우리의 신앙이 확장되어야 되는거죠.

신적 현실성을 언급한다는 것은 세상과 인간을 능가하는 능력을 주장한다고 하는 뜻이다. 네. 그렇죠. 신적현실성, 하나님의 현실성을 우리가 말한다고 하는 것은 세상과 인간을 능가하는 능력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분을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다. 요 부분이 상당히 중요한데요.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을 잘 읽어봐라. 그러면 하나님을 만난다. 이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적현실성, 그거는 인간과 그리고 세계, 우리 앞에 있는 세계, 이것을 넘어서는 능력이라고 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는 초월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미 구약성서가 우리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창조자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피조물 안에 거하면서 동시에 초월해계시는 분이시거든요. 이 세계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니까 이 세계에 내재하시면서 이 세계와 역사에 내재하시면서 동시에 그 분은 그 것을 뛰어 넘어 계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거죠.

이미 우리가 지적했던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유 자체가 근대 사유와의 관계에 터한 세계인식에서 더 이상 도출될 수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사유가 정말, 사유로서의 다른 근원을 갖고 있다면 그 진리성은 해명하는 능력, 그리고 의미를 열어주는 능력에 달려있는 셈이다. 의미를 열어준다고 하는 것은 그 의미는 단순히 무엇을 가르친다는 차원이 아니라 심층적인 사건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독일어로 의미를 뜻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어요. Bedeutung(베또이퉁) 이거는 단순히 의미한다고 하는 거구요. 또 하나는 진, Sinn 실체적 의미, 중심성, 이건 정말 옳은 거야 참된 거야. 징이라고 하는 거죠.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유가 진리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그것이 세계를 해명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심층적 세계를 의미를 풀어낼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고 하는 거죠. 그냥 마음 편해지고 그런 정도로 머문다면 그건 우스운 이야기죠. 장경동 목사가 그런 예를 들면서 하려는 이야기가 바로 그거더라고요. 예수 믿으면 우울증이 뭐있냐 그건 다 사치스러워 그런 거다. 예수 믿으면 우울증이고 뭐고 다 해결된다. 뭐 그럴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 안에 들어가면 자폐적인 그러한 증상으로 일어나는 우울증은 극복되는 것은 분명한데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심리치료, 처세술로 낮춘다고 한다면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퇴보시키는 그러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죠.

해명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 능력은 다른 근원으로부터 현실성에 대한 인간의 경험 전체로 진행되는 그것을 말한다. 그것 성령이죠. 성령이 우리 내면으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다른 근원으로 와서 현실성에 대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경험, 인간경험, 이것을 휘감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여기서 일종의 하나님에 대한 사유가 현실성 경험에 직면해서 증명되는지 아닌지 결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네. 그렇죠. 유전공학이라고 하는 오늘의 생물학적 화두있죠.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여러분이 백안시 할 필요도 없지만 거기에 너무 치우칠 필요도 없죠. 그것도 하나의 현실성인거예요. 그것으로 우리가 생명을 이해하고 있는데요. 아마 세월이 지나가면 또 새로운 현실성이 우리들에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실성들, 생물학도 있고 사회학도 그렇고 고고학, 모든 인간관계를 포함한 이러한 것들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 이거를 완전히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거는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경험이 변화하기 때문이죠. 책이 이야기하는 그대로예요.

종교적 인식의 변화들, 종교사의 변형들은 이러한 변화와 연관된다. 이러한 연관은 물론 종교적 인식의 변형들이 단순히 세계경험의 변화에 나타나는 거울像이기나 한 것처럼 일방적으로 의존적인 형태를 갖지는 않는다. 오히려 각각의 종교역사에는 역사적으로 경험되고 있는 현실성이 종교의 전승에 알려져 있는 신적 능력을 통해서 명확하게 이해된다는 점이 핵심이다. 현실성이,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그러한 현실성이 종교의 전승에 알려있는 신적능력을 통해서 명확하게 이해된다고 하는 그 점, 그게 인제 핵심이구요. 그래야만 종교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나가보지요.

결국 한 종교에 전승된 하나님 이해가 현실성을 독특하고 새롭게 경험함으로써 그 경험이 신성에 의해 작동된 세계이해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면 이런 과업을 훨씬 효과적으로 만드는 새로운 神경험의 자리가 틀림없이 마련된다. 이게 좀 어려운 표현이기는 한데 그 내용은 분명한 겁니다. 한 종교에 전승된 신이해, 구약 신약쯤 내려오면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들이 있잖습니까? 그런 것들이 현실성에 대한, 뉴턴이 이야기하는 만유인력이라든지, 이런 새로운 현실성들을 새롭게 경험한 게 되잖아요? 혹은 코페르니쿠스의 아까 예로든 지동설의 새로운 현실성인데 이런 것들을 새롭게 경험해가지고요. 이런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섭리되고 있는 세계라는 그 구도 안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런 이제 종교가 이 세계 현실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고 하는 사실이 증명된다고 하는 거죠. 옳은 이야기입니다.

이런 종교투쟁들과 결정들은 민중종교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와 성서의 하나님에게도 해당된다. 유대민중들에 의해서 획득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후기 고대세계에서 예수사신, 예수의 복음선포와 역사를 통해서 변형됨으로서 모든 경쟁적인 신들보다 탁월한 이해로 증명되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으로 경험하고 그렇게 믿었던 초기 기독교에 의해서 바로 이 하나님이 다른 신들에 비해 훨씬 탁월한, 훨씬 능력이 있는 그러한 분으로 받아들여지게, 증명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살아나는 거죠. 그런 것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지거나 지난 인류역사에서 많이 등장했다가 다 사라졌던 그러한 여러 종교운동의 하나에 불과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아주 고유하고 독특하게 유대교로부터 내려온 그 하나님 전승을 새로운 현실 안에서 해석해낸 거거든요. 그런 것이 없었다면 흐지부지되고 말았겠죠. 그런 해석역사, 새로운 현실성을 받아들이는, 유대교의 하나님 전승에서 그러한 일에서 물론 그 뿌리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 뒤를 이어서 바울의 역할도 컸고요. 어거스틴 이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교부들, 헬라 철학들과의 연관, 이런 것들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헬레니즘화된 이 잘못이 바울과 어거스틴에게 있다.’ 이렇게 비판하고 있는데 한 면만 보는 겁니다. 그 방식이 아니면 기독교는 살아 남을 수 없는 거예요. 그 당시 헬라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했었던 거의 절대적인 현실이었거든요. 그런 거하고 관계 대화 속에서 유대교의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없는 거죠. 살아남기 위해서라기보다도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요? 그렇게 인간적인 머리를 굴려서 잘 머리를 써서 기독교가 살아남았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진리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현실성 경험에서 기독교 신앙이 아주 탁월한 길을 걸어 왔다는 예기죠. 2000년 동안 그렇게 지금도 왔구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현실성을 상실해 버리고 인간의 심리나 감정 안으로 빠져들어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도 21세기의 전혀 새로운 현실성이 우리들에게도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기독교의 하나님 전승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꺼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또는 돈키호테처럼 소모적인 투쟁만 일삼는 다면 그러면 기독교의 미래는 없는 거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켜도 된다, 변질시켜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늘 그 당시 현실성 경험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시거든요. 그게 이미 성서에 다 들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당시 현실성 경험을 총체적으로 밝히고 심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랬다고 하는 거예요. 현실성에 대한 경험은 수세기 동안 요동이 심했으며…. 그렇죠. 지난 3-4세기 이후로 르레상스 이후로 자연과학이 독자적인 길을 가기 시작한 이후 인간의 심층 무의식의 세계가 연구되기 시작한 이후, 현실성 경험이 요동쳤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상이 우리들의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여기서 종교사적으로 핵심적인 문제는 기독교적으로 각인된 인류의 가장 큰 부분에서 그 결과로 나타난 이 변화들이, 그러니까 서유럽이지요. 유럽에서 일어난 이 변화들이 기독교적으로 전승된 하나님 이해로 부터 현실성에 대한 전체적인 의미를 일치시키는 데로 통합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참 중요한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과학의 발달은 성서를 근거로 한 유럽기독교, 유대교가 기독교의 덕을 본 게 많습니다. 성서는 이 자연을 주술하거나 아니면 우상숭배나 그 자체를 경배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피조물로 보는 거잖아요? 그것을 조금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고 일단 “정복하라! 번성하라!” 그러한 창세기에 하나님의 명령도 있고 해서 이 자연을 하나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 거에요. 뭐 거기서 생태계 파괴라든지 많은 문제들이 요즘 벌어지고 있기는 하는데 어쨌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자연과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물꼬를 튼 게 성서종교죠. 그것이 이제는 지금 성서에 근거해서 나왔는데 이제는 성서의 권위에 완전히 도전하게 되는 그것을 거부하게 되는 그런 사태에 내몰리게 된 겁니다. 그래서 지금 문제는 성서종교의 토대에서 시작한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벌어진 새로운 현실성 경험들이 바로 그 하나님 신앙, 성서적 하나님 신앙으로 그 전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그 현실성 전체가 수렴될 수 있는가? 통합될 수 있는가? 일치될 수 있는가? 없는가? 이게 지금 관건이라고 하는 거죠.

이 현실성은 곧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에 대한 근거는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현실성과 세계 현실성이 일치할 수 있는가? 똑같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현실성의 근거들이 하나님의 현실성에 의해서 확보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거죠. 그냥 이렇게 자꾸만 학문적인 표현만 해서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겉도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신앙적인 우리가 익숙한 말로 하면 이렇게 되는 거죠. 오늘 생물학 물리학 이런 것들이 새로운 현실성의 핵심들인데요.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는 이러한 성서적 진술에 근거해서 설득력과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거죠. 그거를 하나님이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는,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그것을 완성하다고 하는 그래서 모든 실체가 종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하는 이러한 성서와 기독교 신앙에 그 근거로 부터 오늘 새롭게 우리에게 열리고 있는 모든 그러한 현실성들에 일치점, 어떤 방향성, 이런 것들이 주어질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이게 문제인 거죠.

“아이고 복잡해라 뭐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냥 예수 잘 믿고 구원받고 천당 가고 그렇게 복되게 살면 되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네 그렇게 사실 분들을 그렇게 사셔도 되고요. 그러나 기독교의 미래를 생각해야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세계,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우리 신앙의 근거로 또 놓아야 한다고 하는 가장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서 놓고 볼 때도 이 문제를 그냥 놓칠 수는 없는 거예요. 만일 그것을 방관하게 된다면 기독교의 미래라고 하는 것은 그저 개인 개인의 사적인 삶에만 조금 종교적 의미를 줄 수 있는 그런 축소된 자리로 떨어지고 말겁니다. 이건 틀림없어요. 무당들 사머니즘이 바로 그러한 길을 걸어 왔잖아요. 고대인들에게 샤머니즘에 대한 연구들도 많이 되어 있고요. 재미있기도 한데 고대 동양 이쪽에서는 그 샤머니즘이 세계 현실성을 해석하는 종교적 가장 핵심이었잖아요? 모든 것들이 그 샤머니즘에 근거해서 그 당시의 사회가 중심적으로 작동되지 않습니까? 그게 지금은 어떻게 됐어요? 그저 개인의 운명을 어떻게 좋게 하고자 하는 그런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종교적 대응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추락하고 만 거 아니겠어요. 기독교도 이런 새로운 현실성 경험을 하나님 이해 안에서 해명할 수 있는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결과적으로 우선 기독교 전승이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 현실성을 결정한다. 그렇죠. 기독교가 작동하고 있는 영역에서 영적으로 생생하게 각성되어 있는 개인들은 오늘날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자기의 고유한 입장을 분명하게 견지해야만 한다. 의사, 약사, 변호사, 고고학자, 음악가 이런 모두 각각 새로 현실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러한 사람들은 그러한 자기가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기독교적인 신앙으로 그것을 감내하고 있는지 아닌지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근데 많은 경우에 그게 잘 안될걸요. 신앙은 신앙, 직업은 직업, 따로 따로 놀고 있지 않습니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라는 것은 오늘 우리들의 삶의 중심하고는 별로 상관없이 그저 내가 종교적으로 위안을 받고 우리자식들 잘되고 이런 정도로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축소되어 있는 거죠. 자기 전체 실존 거기에 담기지 않은 겁니다. 이건 잘못이다. 분명하게 진지하게 입장을 표명해 내야 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근대적 학문과 그 결과를 통해서 변화된 현재의 세계 경험에 직면해서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으로 증명되는 분이다.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 하나님이 바로 그분이시거든요. 앞에서 한 번 나온 용어죠. “디 알레스 베쉬민데.. ”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 그 하나님.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이시고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부활시키신 다시 살리신 바로 그 분이시고 세계를 종말론적으로 종말에서 지금 우리를 향해 오고 계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현장에서 하고 있는 그 일들을 이러한 하나님의 구도 안에서 해명할 수 있어야 되죠. 그러한 차원에서 접근해야 되는 거죠.

제가 여기 달아놓은 역주. 하나님의 현실성에 대한 설명인데요. 간단하게 읽어볼까요.

바로 앞에서 설명한 현실성 개념을 참고해서 하나님의 현실성 문제를 생각하기 바란다. 이 현실성 문제는 현대철학과 물리학의 토대에 속한다. 예컨대 과정철학이 현실성 리얼리티를 과정, 프로세스라고 말하듯이 기계론적 세계 이해로는 더 이상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 현실성 개념이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 현실성을 추구하려는 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성서를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해서 해석함으로써 이 세계에 현실과 현상을 말하고 있는 과학자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게 된 거죠. 판넨베르크는 이제 기독교는 하나님을 말할 때 그 현실성을 확보해야 한다. 현실성을 확보해야만 그 현실성 문제를 진리에 기초해서 생각하는 학문적인 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패라그라프입니다. 인간 존재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그것 자체로는 부분적인 접목을 보여줄 뿐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연관해서 생각하면 됩니다. 세계 현실성 경험이 중요한데 그게 아니라 인간 존재 나, 나의심리 그런데만 떨어지게 되면 부분적인 거다. 이런 부분적인 전망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진술에 대한 신뢰성이 적극적으로 용납될수 없다. 처세술, 도덕성 강조 그런 정도로 머물러 있게 된다면 이 세계에서 기독교가 신뢰성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거죠. 만약 신뢰성이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면 인간존재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으며 사전에 차단 당할 수 밖에 없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프로히르바크가 그 뒤를 이은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가 비슷하게 다 비판한바 이지만 종교가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말하잖아요. 신뢰를 근본적으로 그 당시에는 상실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종교라는 것은 기독교라는 것이니까요. 어떻게 인간을 소외시키냐? 많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들이 보고 있는 중 이고요. 예를 들자면, 그냥 가장 예민한 문제를 들자면 지금 교회에서 십일조 헌금을 하나의 절대적인 법으로 가르치잖아요. 그래서 십일조헌금을 드리면 창고가 넘치도록 복을 주고 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도적질한다고 말하고 더 나아가서 십일조 헌금을 떼어먹으면 하나님이 물질적인 피해를 준다.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그걸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조금 에둘러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약간의 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러한 전체적인 면에서 보면 십일조에 대한 강박이 기독교 신앙의 굉장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죠. 그거 십일조헌금을 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만족감을 얻을지 모르지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기서 얼마나 큰 소외감을 느끼겠습니까. 소외라고 하는 것은 왕따를 당한다는 그런 차원만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이 분열된다는 거예요. 교회가 요구하는 것을 하지 못할 때 얼마나 거기 자기 크리스천 아이덴티티가 분열되겠습니까? 이건 두말할 것 없죠. 동성애자들이 소외감을 느낄 때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되는 거죠 한두 가지겠습니까? 마르크스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는 것을 참고해서 본다면 역사의 현실들을 기독교가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 그것도 또한 소외죠. 현실감각이 없는 거죠. 오늘 우리들에게서 그런 것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여기까지 됐습니다. 2장이 다 끝났습니다. “하나님을…..” 이라고 하는 그러한 제목의 첫 회였습니다. 어땠습니까? 조금 관념적인 표현들이 많이 있었고요. 저도 그런 방식으로 해명을 한 거 같죠? 여러분들이 이해하기에 조금 어려운 부분들이 있기는 있었겠지만 전체적으로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잘 알 수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 현실성과 세계 현실성 이 두 단어만 기억하십시요. 하나님은 세계 현실성을 통해서 그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을 건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세계 현실성, 그건 심하게 바뀌었잖아요? 앞으로 더 급격하게 바뀌게 될 겁니다. 그러한 문제들을 성서가 말한 또 그 안에 전승된 하나님 안에서 해석해 내고 그것의 타당성들, 그 근거들을 확보해 내는 작업, 이런 것들이 오늘 21세기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과업이고 더 나아가서 신학자들에게만 아니라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있는 일반 신자들에게서도 자기의 운명, 현재성과 죽음 이후까지 이르는 모든 그 운명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아내고 그 안에서 참된 생명을 찾아 가려고 한다면 당연히 세계 현실성 문제를 우리가 놓치면 안되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좋은 늦가을을 행복하게 보내십시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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