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 14강-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1)

안녕하십니까?

제3장입니다. 강의숫자로 하면 제14강이 되겠군요. 3장의 제목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입니다. 우리말로 사도신경 해설의 시작은 바로 이대목이죠.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내가 믿사오며 뒤로 가 있는데요. 영어 독일어 프랑스 이런 것들은 다 내가 믿는다가 문장 구조가 앞에 있어서 판넨베르크가 그것으로부터 앞에서 시작했죠. 1장, 2장은 그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제목을 볼까요? 전체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요. 1장 나는 믿습니다. 2장 하나님을. 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전능하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이라고 하는 항목을 먼저 떼어서 설명했고 3장에서 아버지를 이렇게 떼어서 따로 설명합니다. 여기는 나름대로 신학적 의미가 있겠죠.

1장에서 ‘나는 믿습니다’는 제목으로 신앙론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믿는다고 하는 것이 그냥 우리가 믿는 행위 그 자체에 포커스를 둔 것이 아니라 믿는. 그러니까 이 이야기죠. 신뢰의, 믿을만한 근거가 있는 거를 포함한 믿음이라고 하는 거죠. 무조건적 믿음이라기보다도 그렇습니다.

1장에서 그것을 이야기했고 2장은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이 이야기의 핵심이 무엇인지 이해하시겠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을 전제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허물어지게 되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서 좀 벗어나는 겁니다. 그거 뭐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당연한 이야기다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2장에서 우리가 그거를 충분히 다루어서 제가 그 것을 여기서 반복하지 않겠는데요.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가 우리에게 아빠 아버지라 이야기하신 그 하나님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 예수에게만 집중하는 그런 믿음으로 떨어질 수 있거든요.Christocentricism 크리스토센트리시즘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기독 중심적인 그런 신앙이죠. 그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세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신앙이 바르게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그러한 설명이었습니다.

3장에서는 하나님이 더 구체화되는 것이죠. 여기서 부터 사도신경의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인간이 자신의 의지하고 있는 무한한 현실성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 현실성은 이것을 동시에 인간적 본질이라고 하는 특색을 지닌다. 말이 조금 꼬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드시나요? 아니면 너무 관념적인 생각이 드시나요? 그러실 수도 있을 겁니다. 여기 보십시오.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 실존에서 다소간 크거나 작거나 많거나 적거나 간에 의지하고 있는 무한한 현실성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것도 하나의 문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조건절이라고 한다면요.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구요.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이런 신학대가, 다른 책들도 그렇지만 신학에서도 그런데요. 그들이 이런 쓴 글들은 그냥 어느 한부분도 허술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용어, 그런 것들을 통해서 신앙의 중심을 우리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고 하나 하나 단어, 그 단어가 연결되는 과정, 연결됨으로서 문장전체를 통해서 또 패러그래프를 통해서 더 깊은 세계로 우리들을 끌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 실존에서 다소간 의지하고 있는 무한한 현실성, 현실성이라고 하는 단어가 앞에 나왔습니다. 무한한 현실성이죠. 무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 이 인식안에 가둬두거나 범주할 수 없는 무한한 현실성, 그 현실성을 우리의 실존에서 의지하고 있는 거죠. 이건 뭐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먹고 사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문명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사실 그렇게 연결되는 게 아니겠어요. 이게 꼭 신앙적인 관점으로부터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자체가, 우리 인간 삶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먹을거리라든지 인간관계라든지 조금 더 우주론적으로 생각한다면 태양과의 관계, 또 먹을거리 말씀드렸는데 탄소, 햇빛, 물 이런 것들이 결합해서 이렇게 먹을거리가 생산된다고 하는 이러한 모든 것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의 실존에서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한한 현실성이거든요. 그 현실성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오해하지 마세요. 어떤 그런 먹을거리 생산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고요. 하나님이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무한한 현실성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 현실성은 이로써 동시에 인간적 본질*이라는 특색을 지닌다. 이 현실성, 무한한 현실성,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인간적 본질이라는 특색을 지닌다.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만나는 방식을 그분이 선택하신다는 거예요. 인간적 실존에서 그분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나무가 되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잖아요. 인간 삶, 실존해 있는 겁니다. 죽음 허무 병 소위 말하는 생로병사 그런 것들을 비롯해서 등등, 우리가 피할 수없는 그러한 실존에서 하나님을 우리가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현실성, 무한한 현실성은 인간적 특색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실존, 아 지금 정확한 말이 떠오르지 아네요. 바로 직전에 다른 글을 쓰다가 강의 녹화를 하다보니까 집중력이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사람이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계라기보다도 그 사람의 한계겠죠. 어떤 일을 하다가 다른 일 들어오려면 한참 시간이 걸립니다. 빨리 빨리 잘 되는 사람이 있고 느린 사람이 있는데 저는 좀 느린 편이거든요. 그게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그게 이런 것 같습니다. 제가 평소 하던 이야기하고 연관됩니다. 어떤 세계로 자꾸만 들어가는 거죠. 이 시라고 하는 것도 시의 세계가 있고 베르디의 레퀴엠에도 그런 세계가 있듯이 이러한 신학 책, 혹은 하나님 영성 이러한 것도 고유한 나름의 세계들이 있거든요. 그게 다른 바깥하고 단절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개방되어 있지만 고유한 세계가 있어요.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한꺼번에 풍덩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천히 마치 수영하는 사람들이 다리부터 물을 묻히고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가듯이 사도신경해설이라는 세계도 그렇게 들어가는 거거든요. 제가 앞에서 다른 글을 쓰다가 다른 것을 읽다가 거기에서 빠져나와서 이렇게 들어가려고 하다 보니 제가 시간을 좀 촉박하게 둔 것 같습니다. 변명 비슷한 말이 되어서 미안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에 대해서 뭔가 설명을 좀 잘 해야 되겠다. 처음에는 좀 생각을 했는데 설명이 좀 막혀서 왜 이럴까 그러다보니 변명 비슷이 되었어요.

그 문장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 실존에서 다소간 의지하고 있는 무한한 현실성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 현실성은 이로서 동시에 인간적 본질이라고 하는 특색을 지닌다.

그 다음 문장은 번역이 좀 시원치 않습니다. 일단 있는 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적인 것의 동인이 명시적으로 알려져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神들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요게 복잡한 독일 문장을 정확하게 번역을 좀 못한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인간적인 것의 동인이 명시적으로 알려져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神들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요걸 다음과 같이 좀 바꾸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알든 모르든 그 현실성이 인간적 요소를, 다시 한 번요. 그것을 확실하게 알든 모르든 그 현실성의, 현실은 무한한 현실성이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 현실성에 인간적 혹은 인격적 요소를 결합하지 않는 채 신들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래도 조금 더 났죠? 결국 여기서, 두 문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언급이라고 할 때 인간적 요소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어떤 방식, 어떤 통로를 그런 것이 아닌, 완전히 배제한 채는 가능하지 않다 그 이야기죠. 앞의 첫 문장에서 이야기한 것과는 조금 연관된 거죠.

우리가 우리의 실존, 인간의 실존이잖아요. 거기서 우리가 어떤 사람은 크게, 어떤 사람은 좀 적게 의존하고 있는 무한한 현실성, 하나님이기 때문에 혹은 신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현실성의 인격적인 요소 인간적인 요소를 연결시키지 않는 채 추상적으로만, 말이 될까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인간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고기서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만 이해가 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실존주의 신학자들에게는 그런 요소들이 훨씬 더 강하죠. 자유주의적인, 자유주의, 자유주의라고 뭉뚱그려서 말하면 좀 곤란한데요. 어쨌든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유주의적인 실존적인관점에서는 Anthropology가 곧 Theology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차원은 아닌 겁니다. 더 나가보겠습니다.

신들과 하나님에 대한 각각의 진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러한 인간적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논의 가능성도 근본적으로 의심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럴 경우에 포이에르바흐에게서 시작된 무신론 논증과는 달리 인간이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유한한 것을 뛰어넘는 무한한 현실성을 생각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이런 현실성에 담겨있는 인간적 특질이 바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거기에 들어있는 위험성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정한 피히테의 논증은 포이에르바흐의 종교론을 위한 단초가 되기도 했다. 포이에르바흐의 종교론은 투사명제로 잘 알려진 것처럼 그의 보편화 개념이다. 아이구 참 복잡하니까 그냥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여기 역주를 하나 달았는데요. 인간적 본질이라는 특색을 지닌다는 말을 설명했습니다. 현실성, 무한한 현실성은 인간적 본질이라는 특색을 지닌다. 여기서 인간적 본질이라고 하는독일어를 좀 설명했습니다. 그것을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역자는 여기서 persönliches Wesen을 ‘인간적 본질’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이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독일어Person이나 Mensch는 -그것의 형용사는 각각 persönlich와 menschlich인데- 거의 비슷하게 인간이라는 뜻이다. 앞의 페르존이 인간의 내부적 품격에 중점을 둔다면, 뒤의 멘쉬는 인간의 외부적 성격에 중점을 둔다 하겠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하는 것은 그의 인간성을 전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본문의 경우에 사실은 이 두 단어가 모두 사용될 수 있지만, 삼위일체론적인 면에서 그 ‘위격’이 바로 Person을 가리키기 때문에 판넨베르크는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한국말로 이 두 단어의 차이를 도저히 구별해 낼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우에 따라서 인간, 인간성, 인격, 인격체, 품격 등으로 번역했다.

당분간 조금 더 어려운 19세기에 있었던 종교논쟁, 무신론 논쟁, 학자들의 논쟁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건너뛸까도 생각을 해봤는데 어렵다고 해서 그냥 지나갈 수도 없잖아요. 시간이 정해져 있다면 중요하지 않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 동영상 강의야 시간이 널널하기 때문에 조금 어렵더라도 쓴 약을 먹는다고 생각하고 한번 짚고 가겠습니다.

피히테는 1789년 무신론 논쟁에서 주장하기를. 여러분들은 이런 무신론 논쟁 나오면 딱 거부감을 느끼잖아요. 이런 나쁜 놈. 도대체 무신론이라니 말이 되냐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학자들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충분히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 무신론 논쟁, 그런 것을 주장했다고 해서 정말 하나님을 부정한다. 꼭 그런 뜻은 아닐 겁니다. 이거는 그 이전에 있었던 유신론의 한계성을 짚으려고 하는 거죠. 무신론 논쟁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특히 개신교 신학이 유신론 무신론이라고 하는 대립적 구도를 뛰어넘어서 훨씬 더 근원적인 하나님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삼위일체론이거든요. 이런 것들이 어떤 치열한 신학적 논쟁을 통해서 심화되어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는 거죠. 그러한 기독교를 향한 반론들이 없었으면 기독교신학도 발전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피히테는 1789년 무신론 논쟁에서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이론의 여지없이 인격체로 간주될 수 없다고 했다. 보통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무조건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앞에 있는 문장들, 제가 조금 횡설수설한 부분들. 뭔가 설명해야 될 느낌이 있기는 있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다보니까 또렷하게 말하지 못했던 그 이야기하고 연관이 되는군요. 인간적 본질이 있다. 특색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인격체로 이해했다고 하는 그 부분입니다. 요 사이의 갈등과 긴장을 잘 파악을 해야 하는 거죠. 무한한 현실성 보세요. 무한한 현실성, 폴틸리히의 관념을 빌리면 Ultimate concern 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그분, 그 분인데. 그 분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이 들어가죠. 그 존재라고 해야 될까요? 그러한 존재를 인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거잖아요. 사실은요.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인격적으로 이해를 한다는 거죠. 이 부분이, 이게 지금 문제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우리가 인격적인 분으로 이해를 하고 경험을 하고 말을 하지만 그런 것이 잘못하면 인간적 자기 투사에 머물 수 있는 그러한 문제가 있습니다. 고 갈래를 지금 설명하고 있는 중이예요

피히테는 하나님을 인격체로 간주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격체를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곧 유한성을 전제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격체’로서 진술되는 하나의 본질은 항상 일종의 다른 존재와 상대적으로, 사물적인 세상과 상대적으로, 혹은 다른 인격체들과 상대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인격체는 늘 그렇게 관계, 상대적 그런 존재인데 어떻게 무한한 현실성을 그렇게 말할 수 있겠냐 하는 거죠.

‘나’에 대한 생각에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불가분리 ‘너’와 ‘그것’이 포함된다. 따라서 모든 것일 수 있는 ‘나’라는 것은 없으며.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가 어떻게 해야 할 때 상대방을 전제하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라는 말이죠. 모든 것을 결정하는 현실성이란 말입니다. 이게 모순된다는 거죠. 항상 상대적으로 마주하고 있고, 따라서 각기의 인격체는 다른 이를 통해서 결국 인격체로 한정되며, 그런 점에서 유한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하고 대립적으로 나 너 부르고 대답하고 기도하는 이러한 관계라고 한다면 무한한 현실성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거죠.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죠. 이러한 논증으로 헤겔은 자신의 종교철학에서 첨예한 논란을 전개함으로써 종교철학의 기초가 되어있는 인격체 개념의 실질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다.

헤겔에 따르면 인격체는 이게 뭐 헤겔, 피히테 이런 사람들의 논리인데 이게 사실은 뭐 우리 일반적인 신앙에서도 많이 거론될만한 그런 이야기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 이런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자아의 투사가 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고요. 인격적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인격과 대립되는 그러한 분으로 한정시키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인격이라고 하는 것보다 위격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정체성과 같은 방식으로 그분을 제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동시에 그 분을 상대해서, 상대이기도 하고 그분을 향해서 기도할 수 있다고 한다는 것, 이게 이제 보기에 따라 모순일 수도 있고 기독교의 독특한 하나님 인식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후자가 옳다고 보는 것입니다.

헤겔 자신의 대상을 그 고유한 존재의 한계라 할 자기 외부에 있는 각기의 관점에 두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대상에 연관되어있는, 게다가 그 대상에 직면해서 자기를 포기하며, 또한 타자에게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인격의 본질이다. 이것은 내가 관여하는, 다루어지고 인식되는 일들 가운데서, 그리고 내가 우정이나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너(Du) 안에서 그렇다. 이럴 때 하나의 인격체는 이러한 타자에게 자기를 맡겨버리거나 포기한 것처럼 타자의 기준에서 다시 등장하게 된다. 복잡한 이야기가 됩니다. 여기서 헤겔의 변증법 철학이 좀 나타나고 있죠. 자기포기, 지양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인격을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인격적인 삶에서 타자에 대한 대립과 한계는 지양되고 극복된다.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인격체로서의 인격체가 그 본질상 결코 유한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인격체의 유한성이, 피히테는 그걸 유한하다고 보았는데 헤겔에게서는 그것이 변증법적으로 이렇게 정반합 관계속에서 너와 나 관계속에서 대립되지만 그러나 그게 지양되고 극복된다고 하는 거죠. 그 인격존재*의 제한이라고 이해될 때 유한한 인격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논박의 여지가 없다. 사실상 인간적인 인격존재의 유한성은 우리가 타자와의 -그것과의, 그리고 너와의- 대립을 오직 부분적으로만 극복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부분적으로만 타자와 일치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런 한에서 그 유한한 인격체는 우리와 같은 거죠. 완전한 의미에서의 인격체는 아니다. 인격체로서의 인격체는 말이 좀 이상하죠. 이게 뭐 인격체면 인격체죠. 하도 조금 말이 자구 비비꼬이고 그래서 독일어 원서를 찾아봤더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디 페르존 알스 페르존.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우리가 헤겔의 생각을 따른다고 할 때 무한할지 모른다. 인간이라고 하는 인격체. 이게 참 어렵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 인격체라고 하는 것 우리에게 뉘앙스가 다르잖아요. 그걸 어떻게 번역을 해야 할지 좀 까다롭인격성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무한성을 부정하는 규정이 결코 아니다. 습니다. 실력도 그것 밖에 안 되고요.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피히테와 헤겔과의 논쟁이라고 할까? 논쟁이라고 하기보다 피히테가 조금 더 앞서 있었던 사람인가요? 시대가 비슷하죠. 관념주의 철학자들이니까요. 피히테, 셀링, 헤겔 비슷합니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사람이죠. 피히테는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늘 무한할 수 없다. 늘 너나 대립이라고 하는 관계로 규정하니까 유한하다. 하나님에게 맞는 개념이 아니다라고 말한 반면에 헤겔은 그것이 대립, 한계 이런 것들이, 인격적인 것들이 대립되어 있으니까요. 부부사이에도 인격들이 대립되어 있잖아요. 인격이요. 하나가 아니잖아요. 이런 겁니다. 피히테에게는 이것이 결국 유한하다고 전제한다면 그러나 헤겔에게는 이런 것들이 지양되고 극복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무한성을 인격이라고 말할 때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무한자를 계속적으로 인격적인 존재로 인식해 나간다. 네 이게 인제 기독교 신앙의 다른 종교와 다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격,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죠.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한한 초월적인 그러한 성격을 확보하면서 인격적인 존재로 인식해간다고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두 부분을 잘 붙들고 나가보십시오. 자칫하면 하나님을 인간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유치하다. 어린아이들이 아버지, 할아버지, 무조건 절대자로 인식했던 것처럼 서유럽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한 것 아니냐. 그건 철부지와 같은 어린아이들에게 필요했던 거지 이렇게 성인이 된 고상한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인격, 그런 하나님으로서는 좀 맞지 않는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아버지 하나님, 인격체 하나님, 자연원리, 기(氣),도(道) 이런 정도로 말을 해도 되지 않느냐 이렇게 조금 비판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네 그러한 부분들이 기독교역사에서 많이 나타났기 비판받아 맞긴 합니다. 유아적인 신앙 말이죠. 노이로제 현상과 비슷한 그러한 일들이 기독교안에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그렇게 비판하는 것을 무조건 우리가 근거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거죠. 그러나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유아적이다 성숙하다는 차원을 떠나서 본질적인 그러한 문제입니다. 무한한 현실성을 인격체로 인식해 나간다고 하는 종교현상 종교경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 무한자에 대한 인격적 해석은 종교에 드러나 있는 것과 같이 신적 인격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의해서 여전히 상당하게 소외되어있다. 이런 논의는 독일 관념주의에 의해 견인되어 온 것이다. 철학에서 소외되어 왔다. 더구나 인격성에 대한 명시적 개념이 종교세계의 어떤 곳에서나 기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앞서 제가 불교에서 그러한 것이 논의되지 않는다고 그랬죠. 그렇지만 거의 모든 종교들은, 그들이 하나의 신이나 많은 신들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현존의 실제적 기초가 인격성으로서 경험된다는 사실과 상호적 관계를 맺는다. 현대의 많은 종교에서 그러한 인격적 관계가 있다고 하네요. 불교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모든 현실성의 기초에 있는 이러한 인격체성은 사건에 작용하는 능력이 완벽한 비밀로서, 그러나 완전하게 통찰될 수 없는 것으로서 경험되었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네. 이게 중요한 이야기군요. 아 이게 참, 따라가기도 허겁지겁 댑니다.

인격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제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도 연관됩니다. 제가 큰 방향에서는 바르게 이야기를 해가고 있어요. 부분 부분에서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아주 미세한 그러한 어떤 작용들, 그러한 해명들을 제가 바르게,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그런 것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체적인 흐름에서는 과히 그렇게 잘못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 문장에서도 확인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현실성의 기초에 있는 이러한 인격체성은. 제가 이런 문장을 읽으면서 빨리 빨리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이러한 문장이 딱 들어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노파심인데 앞으로 나가는 것이 낫겠지요. 또 적당하게 설명할 때는 하고 그러겠습니다.

모든 현실성의 기초에 있는 이러한 인격체성은 사건에 작용하는 능력이 완벽한 비밀로서, 그러나 완전하게 통찰될 수 없는 것으로서 경험되었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하나님의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을 들어준다. 꼭 그런 차원이라기보다도 우리 인간과 비슷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는다고 하는 것에 대한 신학적 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비밀이 아니잖아요. 우리의 인격하고 하나님의 인격하고는 이거는 전혀 다른 문제인 겁니다. 우리가 그러한 모든 현실성에 기초하고 있는 만물에 근거하고 있는 모든 역사와 생명현상과 인간 삶, 모든 것에 기본 바탕이 되고 있는 하나님을 인격체로 경험하는 이런 것들은 그런 모든 사건들, 이거는 생물학적인 생명현상으로부터 바로 앞에 말씀드린 대로 인간 역사와 우주에 이르는 것 까지 그 모든 것, 거기에 인제 작용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통찰될 수 없는 것으로 경험된다고 하는 거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격체라고 하는 이 말의 핵심입니다. 전혀 다른 뜻이죠.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하는 것과 다르죠.

적당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자연의 능력을 최소한 원리적으로 항상 통찰할 수 있거나 계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을 결코 그 어떤 인격적 능력으로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기계처럼 보는 거죠. 원리로서 보는 거죠. 기계적인 능력만을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런 기계적인 것과의 유기적 능력들만을 생각한다. 인간만이 그 본질의 궁극적인 중심으로 계산될 수 없는, 마음대로 처리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오직 그런 이유 때문에 인간은 여전히 인격체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우리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객도식이라고 할 수 있고요. 이게 인제 근대주의의 기본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 싼 세상에서 사건의 외견만이 계산될 수 있고 마음대로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점을 질문해야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고 아! 이 자연 이 세계 계산할 수 있어! 이런 생각들 말이지요.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느냐? 이런 예기죠. 인간들이 여러 점에서 심리적으로 통찰될 수 있고 다루어 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고 까지만 우리는 보고 이 세계가 읽혀질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인간을 심리학의 원리 안에서 읽어 보려고 하는 것 하고 비슷합니다. 그런 현상들이 있지요. 당연하게요.

그러나 인간생명은 그것으로 다 해명이 되지 않는 거거든요. 그래서 제가 가끔 심리학이 인간의 심리를 과학적으로 읽는 방법으로서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난센스다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죠. 가능한 대로 상담학 이런 것들은 아주 전문가들에게 맡겨서 우리의 심리를 치료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긴 있지만 거기에 목회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이야기 인거죠. 인간을 무슨형, 무슨형 무슨형 이렇게 나눠놓고 정답찍기해서 번호매기고 이 사람은 무슨 형 즉 그 방식으로 그 사람을 처리하는 것. 이것처럼 인간과 인간 삶을 표면적으로만 다루는 것도 없는 겁니다.

이러한 외관적인 통찰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인간존재의 심연(深淵) 속에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이다. 심연 속에서요. 그 심연, 생명의 가장 심층의 자리에서 작동하는 힘과의 공감 또는 공명, 이런 것들을 영성이라고도 예기하잖아요? 그런 거죠. 그러니까 영성은 심리학의 문제는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심리학적으로 파악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한 인간인 그와 가까워지는 한 그에게 있는 너(독일어로 다스 두)를, 그 인격체를 고려하게 된다. 인격체가 뭔지가 조금 들어오지요? 심리적인 기제로 다 계량하거나 재단하거나 할 수 없는 그러한 어떤 그 사람의 실질, 그걸 가리켜서 우리는 인격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에게 주어진 아주 고유한 어떤 것들이지요.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토대는 마음대로 처리될 수 없으며 우리를 초월해서 규정되고 또한 인격적이라고 생각될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 다시 이런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 같다. 이게 바로 인격적이라는 말의 의미인겁니다. 이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 하나님의 섭리라고 보통 이야기 하지요. 그 섭리라고 말할 때 얼마나 포괄적인 의미가 있는지가 좀 전달이 되지요? 우리가 처리할 수 없는 그러한 어떤 힘의 작용, 힘 자체, 그런 것을 인격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죠.

인간은 그 세계와의 사귐에서 어떤 능력과 상대해 있음으로써 자신에게 다가오는 능력을 인간에게 필요한 일종의 의지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 능력은 항상 거듭해서 놀라게 되는 일이지만 의미심장한 연관 없이는 완전하게 작동하지 않으며 또한 인간현존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죠. 하나님이죠. 그런데 그게 완전하게 통찰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에 대한 당혹감이 인간과 그 생명세계를 향한 인간의지의 한 경향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고 하는 점에서 신적 인격성의 경험은 이러한 점에서 종교적 기초적 경험에 토대를 둘 수 있다.

이해가 되죠? 느끼시죠? 그런 경험되시죠? 완전하게 통찰될 수 없지만 그 능력을 경험은 되는 거예요.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붙는 가시떨기 현상을 보고 거룩한 어떤 거룩한 체험을 했던 것처럼 성서에는 그런 일들이 수없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네 그런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거죠. 우리와 상대하는 거죠. 그분이요. 그를 우리의 어떤 통찰 안에 끌어 내릴 수는 없어요. 그 어떤 방식으로도 그것을 재단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 분은 우리들에게 인격적으로 경험되는 겁니다. 때로는 아버지로 경험되고 어머니로 경험될 수도 있고요. 그러나 곧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닙니다. 그 분은 그 분 방식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 분의 페르조나 그 분의 위격으로 우리 인간을 향해서 인간적인 방식으로 대화를 하시는 거죠. 그렇게 만나시는 거죠.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계시라고도 예기할 수 있고 자기 알리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은 우리가 결코 완벽하게 계산해낼 수 없는 통찰해 낼 수 없는 그러한 분이라고 하는 거죠. 이렇게 의지할 만한 능력의 수치가 많다고 생각한 여타 민족들과 달리(다신교 같은 거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대로 올라 갈수록 더 분명하게 모든 사건을 통해서 유일한 하나님, 하나의 하나님 그리고 시내산에서 경험한 야훼의 능력적인 의지를 신뢰했다. 요부분에서 키다리 아저씨라고 하는 동화책이 생각이 나네요. 고아 아이가 계속 도움을 받는데 편지는 오고 직접 만나지는 못했어요. 힘을 느끼지요. 정확한 비유가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을 다 경험하거든요. 다른 민족에게서도요. 유대인들만 아니라 옛날 고조선 그 당시에 살던 사람들도 그런 경험들이 없을 리가 없지요. 인간은 다 공통적으로 이 3장의 첫 문장에 나와 있듯이 자기의 실존에서 의존하고 있는 무한한 현실성이 있으니까요. 그들이 무당들을 찾아가는 샤머니즘도 사실은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종교현상이 나온 게 아니겠어요?

유대인들은 유일한 하나님으로 신뢰를 한 거예요. 타 종교에서는 주로 인제 여러 신들을 주로 그렇게 했죠. 무한의 현실성의 여러 신으로 따랐죠. 이 유대인들은 그 어떤 타자도 곁에 남겨두지 않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탁월한 유일한 하나님을 그 하나님만을 신뢰했다. 이러한 신뢰는 그들이 하나님과 관계한 이래로 그와 함께 이룬 경험들로부터 생겼다. 아브라함, 이삭, 족장들로부터 시작해서 계속 쭉 모세와 광야와 가나안을 거치는 그러한 과정에서 그런 유일한 하나님과 현실성은 한 하나님, 한 분, 야훼, 엘로힘 그 분으로 그러한 경우에서 나와서 그렇게 인식하게 된 거죠.

항상 거듭해서 예지될 수 없는, 미리 알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발생한다는 경험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들의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인식했다. 재미있는 표현이지요. 신학자들의 통찰이 놀랍죠? 전능성,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안다 다 안다 이런 식으로만 예기하지만 신학자들은 벌써 그 근본을 뚫고 있잖아요? 이 알 수 없는 어떤 일들이 우리들에게서 발생한다고 하는 경험, 하나님은 전능하다고 하는 신앙, 그 하나님 개념, 하나님 본성에 대한 인식으로 나가게 되는 겁니다. 이로써 이 하나님은 사물의 현존적 질서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지금 이렇게 있는 질서에 근원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우리의 사유능력을 뛰어 넘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현존질서의 변화가 그에게 의존되어 있다고 하는 점이 주목되었다. 놀랍죠? 이미 다 이 성서에 있는 이야기들이예요. 유대인들의 신적 경험과 통찰과 그 인식과 그 표명들 그것들은 참 놀라운 거죠. 다른 종교들하고 뚜렷이 대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고, 그들은 분명히 현존질서의 변화가 그에게 의존되어 있다. 하나님 앞에서 쓸데없이 아는 척 하지마라 그러한 이야기죠. 욥과 그 친구들과 대화 속에서도 결국은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에게 내리는 재앙 이런 것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 대한,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말하려고 했었던 그 친구들 혹은 ‘나는 아무 죄가 없다.’ 라고 생각했던 욥. 이러한 논의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그러한 이야기잖아요?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되어 있다고 하는 점이 유대인들에게서 주목되었습니다. 예레미아서 32:17, 27에 구체적으로 그렇게 나오고 있네요. 못하실 일이 없다. 이러한 표현들이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시겠죠?

성서의 진술들은 세계를 꿰뚫어보고 수많은 그러한 논의의 과정을 통해서 엑기스처럼 집약된 하나님의 말씀인겁니다. “못하실 일이 없다.” 이런 것을 설교한다고 해서 무조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말한다고 해서 설득은 안 되잖아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알아야하니까 요 공부는 중요합니다. 우리의 사유능력을 뛰어 넘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생존질서의 변화 이러한 쪽으로 우리의 신앙적 차원들이 열려야 되는 거죠.

신적능력이라고 하는 이 사상은 이러한 형태에서 특별히 이스라엘적이다. 이러한 사상은 무엇보다도 헬라적 신이해와 구별되며 오히려 잘 알려진 그러나 한 번도 유일신이지 않았던 수메르와 바벨론의 신성쪽에 가까웠다. 창조설화 이런 것들은 바벨론 신화의 이런 것들과 가까우니까요. 사도신경의 헬라적 전(前) 형식 사도신경에 폼이 쭉 발전해 오게 되는데 좀 더 초기적인 헬라적인 형식에서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신앙고백은 헬라신의 칭호인 ‘판토크라토르’ 즉 모든 것을 주라고 하는 칭호를 통해서 표현되었다. 그쪽의 영향을 받은 거죠. 이 주는 경우에 따라서 헤르메쓰처럼 헬라신들에게 덧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유대교적 기독교적 전승에 구약성서의 헬라어 번역을 통해서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주 ‘판토크라토르’와 연관 가운데서 구약성서 하나님의 이름인 만군의 주 야훼라는 명칭으로 다시 주어졌다. 그 당시 얽히고설킨 종교와의,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서로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이 번역이 가리키고 있는 바는 ‘판토크라토르’와 연관 속에서 만군의 주 야훼라고 하는 명칭이 들어오게 된 건데요. 이러한 번역, 구약성서 헬라어 번역, 그게 보통 70인역 이라고 하는데 본문에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제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성서의 헬라어 번역을 70인역 그러니까 그 히브리어를 모르는 여러 군데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들을 위한 구약성서의 헬라어 번역이거든요. 그건지 아닌지 제가 혼동 되가지고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강의가 초반서부터 조금 정신이 없네요. 아! 그렇군요. 오늘 오후에 집수리를 하고 있거든요. 제가 여기 연구소 여기를 문 닫고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장소를 대구 샘터교회의 예배처소와 대구 성서아카데미 연구소로 사용했는데 교회는 이미 옮겼고요 연구소로만 사용을 당분간 하려고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여러 가지 이러저러한 사정, 개인적인 사정도 있고 등등해서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집에 수리를 하는 중이에요. 서재도 그렇고 집도 낡았기 때문에 오늘 페인트칠을 좀 했습니다. 페인트 직접 하는 사람이 와서 했고 와서 다 하더라고요. 네 시 인가에 가서 정리도 좀 해보려고 했더니 그 사람이 시간이 많이 모자란다면서 바닥에 묻은 페인트를 지워달라고 하더라고요. 두세 시간 한 세 시간쯤 한 것 같습니다. 아 그거 뭐죠 기술자 옆에서 도와주는 일하는 거요. 대모도라고 하나요? 네 열심히 하다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페인트 배겨내는 일 하다가 갑자기 신학적인 문제로 들어올라고. 해서 그런가요? 와서 또 다른 것을 쓰다가 들어왔고...

이러한 번역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얼마나 자주 야훼의 무제한적 능력이 유대적 신앙의 중심에 섞여있는가 하는 점이다. 유대인들이 계속 그러한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 그리고 현 질서의 변화가 가능한 힘의 원천들 그런 것들을 신앙의 중심으로 생각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변에 있었던 ‘판토크라토르’ 이런 신 이름까지도 영향을 받을 정도로 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아주 고유하고 집중적인 생각들이 거기에 담겨있습니다. 사도신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전능은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점을 갖고 있다. 그러한 유대인들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 신앙에 그대로 들어 온 거죠. 그에게 못하실 일이 없다고 하는 이 언급은 죽은 자로부터 이루어진 예수의 부활로 통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새롭게 증명되었다. 로마서4장 24절.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에는 그가 창조자라는 사실이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 세계창조가 명시된 암시적인 진술을 통해서 만군의 주이며 전능자인 하나님의 신앙고백을 언급하는 것은 전능이라고 하는 사상이 이미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의미한다. 전능자라고 한다면 가시적인 세계인 땅만 아니라 불가시적인 세계인 하늘도 역시 그의 창조행위이다. 천지이죠. 그러니까.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하늘까지도 하나님의 창조행위로 이들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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