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녹취록- 15강 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2)

안녕하세요?

지난 주간에는 사도행전 강해공부가 없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좀 바쁜 일들이 있어서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서울 샘터교회 창립예배도 있었고 서재를 이쪽으로 옮기는 일이 있었고 집들을 수리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15강을 공부하겠습니다. 15강은 이 책 제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이라고 하는 그 챕터의 두 번째 순서가 되겠군요. 두 번짼가요? 세 번짼가요? 지난 순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이라고 하는 챕터 비교적 앞부분에 해당하는 제목으로부터 시작입니다. 우리 전체 강의중에서 15강이 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이라고 하는 소제목만 보더라도 어떤 이야기를 판넨베르크가 하려고 하는지 그 이전에 사도신경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 어떤 윤곽으로나마 우리가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성, 그 분의 창조성, 여기에 보면 네 가지 단어가 나오는 군요. 그 단어는 다 각각 신학적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네 가지 신학적 개념을 담은 단어들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능, 하늘과 땅 천지, 창조 만드신, 아버지. 오늘 그 이야기가 나오게 될 겁니다. 아버지라고 하는 그 표현,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과연 그게 어떤 뜻이냐 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남성적으로, 부성적인 그러한 차원으로 보는 단어나 개념이 아니냐?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그게 아니란 것이 판넨베르크의 설명입니다.

전능, 하늘과 땅, 땅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까지. 그 당시 고대 이 사도신경이 기록되던 그 이전 구약성서로 거슬러 올라가기까지 그 시대, 그때의 하늘의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하고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졌죠. 그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초보적인 물리학적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니까 제가 여기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하늘, 땅만이 아니라 하늘까지 만드셨다. 그 하나님은 그러니까 전능하다 그런 말들입니다. 전능하시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라고 하는 거거든요. 이 전능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에게만 붙여질 수 있는 그러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전능은 바로 창조의 능력이거든요. 지금 인간들도 뭘 만들기 때문에 창조력이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어떤 부분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창조성이라기보다도 창조적인 부분이 있기는 있습니다만 하나님에게만 붙여질 수 있는 그러한 창조하고는 다른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창조라고 하는 것은 사도신경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이 하나님의 창조라고 하는 단어는 현재 있는 것을 어떻게 변형시키거나 아직 밝혀지지 않는 자연의 원리들을 발견해 내는 것, 이런 것하고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무에서 창조죠. 아무것도 없는 데로부터 어떤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러한 능력을 우리는 창조성이라고 하는데 우리 인간에게는 도저히 붙여 줄 수 없는 거죠. 그런 점에서 하나님에게만 전능이라고 하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거죠. 전능하사 하늘과 땅을 만드신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요 대목입니다. 오늘은 아버지를 이라고 하는 이 호칭과 연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책, 50쪽 두번째 패러그래프서부터 입니다.

모든 것을 자유하게 하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의지는 예수에 의해서 부성(父性)적 의지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다만 예수에 의해 神이해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잖습니까? 이 개념, 하나님 신(神)에 대한 아버지 호칭 여기에 연관된 이야기들은 아주 없던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 아주 특별한, 아주 중심적인 하나님이해의 개념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런지 설명을 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이해하는데 난점들이 있다. 하나님의 속성을 아버지라고 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반영하는 게 아닐까? 이런 질문이죠. 그렇게 보입니다. 하필이면 왜 아버지라고 그랬을까? 왜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을까 모계사회라고 했다면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겠는가 하는 질문이 가능한거죠. 성서가 기록되던 시대에는 가부장 제도가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어서 결국 이 예수님의 하나님을 향한 아버지호칭, 혹은 그런 개념은 그러한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그런 이해가 가능한거죠.

이 낱말은 그때와는 다른 오늘의 사회적 조건 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강요될 수 없는 神경험이 아닐까? 네. 지금은 그렇게 가부장 제도적인 게 강하지 않죠.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구라파보다는 훨씬 가부장제가 강 하구요. 유럽 구라파, 여기에는 어떤지는 제가 확실하게 끊어서 말하기는 힘들지만 남녀가 완전히 평등한, 법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그렇게 되었는지 아닌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부분적으로는 남아있지 않을까. 법적으로는 완전히 해결되었지만 정서적으로는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되요. 어쨌든 우리의 풍토 보다는 훨씬 더 그쪽은 가부장제가 그 흔적들을 거의 없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벌어졌던 간통죄, 존치냐 없애냐하는 그러한 문제로 수년 동안 지금까지 왔는데 여전히 아직까지도 존치하기로 했지 않습니까? 이런 점도 여성보호라고 미명이긴 한데 가부장제도인 생각이 거기에 깔려있다고 볼 수 있죠. 직접 연관되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호주제는 이제 좀 해결된 것 같고요. 그리고 특별한 이혼한 가정이라든지 이런 저런 특별한 가정의 아이들의 성도 어머니를 따라갈 수 있게 하는 점진적으로 가부장적인 질서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사회 밑바닥에는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아요.

교회는 그런 점에서는 더 심각합니다. 여성 목회자들이 거의 갈 곳이 없거든요. 담임목회를 하는 그것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역사가 있는 그러한 교회의 담임목사를 하고 있는 여자목사는 손꼽아 보기도 힘들 겁니다. 그래도 이제는 전반적으로는 이러한 가부장제가 우리나라에도 많이 약화되어 있고 유럽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는 이러한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 이런 것들을 좀 이제 포기해야 되지 않는가 이런 말이 가능하다고 하는 거죠. 주로 여성신학자들에 의해서 나올 수 있을 법한 주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 이렇게 부르기를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저도 그런 거가 필요하다고 보기는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교회에 다닐 때 하나님을 늘 아버지로만 부르게 된다면 그 아이들에게 하나님은 남성이다라고 하는 것이 각인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교육적으로도 좋은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 것이 각인되어버린다면 남자 아이들은 아 하나님은 나와 같은 성이다. 여성들은 하나님은 성이 다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아버지라고 하는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적인 색깔을 덜 강화시키거나 드러낼 수 있는 그러한 신앙용어들을 바꾸어 나갈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조건 폐기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는 않기는 하구요. 천천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요.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다음과 같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입니다. 가부장적인 이러한 아버지 호칭이 용도폐기 될 때가 되었다는 그런 주장에 대해서 여기서 중요한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 신앙고백은, 하나님아버지라고 하는 신앙고백은 세례자에게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말하도록 한 게 아니라 다만 아버지라고, 말하자면 나사렛 예수의 아버지라고 말하게 했다. 좀 중요한 대목이네요.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대목이네요. 판넨베르크가 초기 기독교에 있었던 독특한 신앙형식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도신조의 내용의 기초는 로마교회의 세례문답에서 나왔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렇게 세례자에게 이걸 요구한 거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 그냥 아버지라거나 그냥 아버지라고 고백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예수의 아버지라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요 설명에서만 본다면 틀린 이야깁니다. 기독교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죠. 나의 아버지가 아니죠. 그런데 그렇게 부르라고 하는 그러한 성경구절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지금 정확하게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보통 교회 안에서는 보통 그렇게 많이 부르지 않습니까? 고건 구분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라고해서 틀린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여기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가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요 대목을 좀 따라 가겠어요.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로마교회의 세례문답에서 세례자에게 요구된 것은 하나님을 세례 받는 사람 자신이 나의 아버지라고 한 게 아니라 아버지로 그 아버지는 곧 예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을 요구했다고, 그렇게 부르라고 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부성적 표현에 맞추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부성적 상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언급할 수 있는지, 혹은 없는지에 대한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도 많이 있는 거예요.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독교 성서적, 종교, 기독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은 형상들을 많이 보인다라든지, 신인동성동형론적인 그러한 특성들을 보인다든지, 지금 여기에 나오는 주제로 본다면 가부장적인 그러한 특색을 보인다든지 뭐 그러한 비판들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 따지고 들면 기독교를 아버지라고 호칭에서 부성적이 아니냐 하는 것은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죠. 핵심이 뭘까요? 예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핵심이라고 하는 거죠.

이 신앙고백에서 진술되고 있는 하나님은 아버지 칭호를 통해서 예수의 하나님으로서 확증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참 여기 굉장히 우리가 별로 생각하지 못했던 그러나 정말 중요한 대목인 것 같습니다. 다시 반복되지만 중요한 거라서 다시 한 번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겠습니다. 아버지라고 하는 칭호가 하나님의 부성적인거냐 아니냐? 그러한 것을 논하는 문제는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까지 아버지라고 하는 호칭을 통해서 기독교를 부성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거라고 하는 것이죠.

저는 이런 점에서 현대의 여러 가지 시류에 따른 현대적 감각에 따른 이런 것들을 무조건적으로 비판적으로만 말씀드리는 것은 아닌데요. 해방 정치 여성신학쪽에서 기독교를 정통기독교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비판을 받아야 될 부분은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받아야 될 대목도 많이 있습니다. 현실 기독교는 그런 쪽으로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판하더라도 잘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경솔해 질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삼위일체 이러한 개념들은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와는 상관없이, 고거는 조금 다른 문제군요. 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거는 원래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 사상이 아니라 플라톤의 사상이 그대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개념이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이렇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러한 것들은 삼위일체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솔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리려다가 거두어 드린 그 대목을 말씀드린다면 그리스도로 신앙고백된 바로 그 교리화된 예수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복원해야 된다. 기독교 교리에 박제된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그 갈릴리 나사렛, 나사렛 갈릴리에서 활동했던 바로 그 참 예수가 아니다. 교리화 되었다, 헬레니즘화 되었다. 이렇게 비판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경솔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사건이라고 하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는 복원해 낼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사도성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경험되고 고백된 그 예수를 말하는 것이거든요. 그 것을 빼버리면 마치 네 기둥으로 지어진 집에서 밑에 주춧돌 네 개를 딱 뽑아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거죠. 사도적인 사도에 의한 사도들을 통한 예수님 경험과 그 고백이 사도신조고 복음서고 그리고 3-4세기에 동안에 걸쳐서 형성된 신앙고백된 예수, 그리스도시거든요. 거기에 주변의 여러가지 정치 사회적 영향력들이 크게 작게 개입되었다고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들을 모두 빼어버리고 원초적 역사의 예수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그 생각,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바른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이제 중요한 것은,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이 아버지 칭호라고 하는 것은 부성이다. 남성중심이다 아니다 그게 아니라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겁니다. 꼭 기억해주십시오. 오늘 다른 것 다 놓쳐도 이것 하나만 기억해도 됩니다. 여기서 질문해야 할 사실은 예수에게서 아버지 칭호가 어느 정도로 자신이 이해한 하나님의 특성을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부성적이냐 아니냐 그런 질문은 부가적인 거니까 내버려 두고 이 아버지 호칭이 정말 예수의 하나님 이해에 얼마나 정확하게 들어맞느냐 하는거죠.

신성을 ‘아버지’로서 드러내는 특징은 많은 종교에, 아니 거의 모든 종교에서 발견된다. 일단 이스라엘과 가까운 종교사적 주변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바벨론의 월신(月神)인 신(Sin)은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가리트인들은 그들의 창조신인 엘(El)을, 엘이라고 하는 단어가 구약에도 엘로힘할때 그 엘이거든요. 이스라엘 한테도 엘. 많이 그렇게 통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헬라인들은 제우스를 그렇게 보았다. 모든 종교에 나타나는 아버지 특징이라고 하는거죠. 스토아 철학자인 클레안트에 의한 제우스 찬양은 만물의 아버지인 그 한 하나님을 향한 종교성의 고전적 증거라 할 수 있다. 구약 성서에서, 특히 후기에 속하는 포로기 이후의 문서에서 바벨론 포로 이후를 이야기합니다 . 기원전 587년 이후죠. 문서에서 야웨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거명된다(렘 3:19, 31:9). 이보다 훨씬 앞서 그 하나님의 특징은 왕의 ‘아버지’이다(삼상 7:14). 원래 야웨의 부성은 백성들에게 오직 간접적으로만, 즉 그들의 왕을 통해서만 정당하게 작용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가부장적 사상에서 분명히 비슷한 특징으로 드러나고 있는 아버지 관계가 전체 백성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왕조의 몰락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 포로 후기에 왕조가 멸망하니까 이제는 왕이 아버지로가 아니라 모든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 개념에 사용되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개체 인간 하나 하나를 돌보아주신다는 하나님의 부성,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생각은 그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이에 대한 동기를 발견할 수 있을까? 예수의 사신과 전체적으로 연관되어있는, 예수님의 복음선포와 전체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칭호는 전반적으로 연관되어 있군요.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칭호는 임박한 심판에 직면해서 다시 한 번 예수를 통해 구원을 허락하는 하나님에 대한, 말하자면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까운 미래로 다가왔다는 그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에게 어떤 조건도 없이 구원을 허락하는 하나님에 대한 구원론적 접근을 특별한 방법으로 표현한다는 게 틀림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한 사건, 혹은 그러한 하나님이해에서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가 가깝게 왔다고 하는 것을 그러한 예수님은 그것을 선포하실 수 있잖아요. 예수님이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를, 여기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자신은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통치 다스림으로 존재하시니까요. 하나님은 어떤 우주 공간에 옥황상체처럼 정좌하고 있는 분이 아니라 생명을 일으키고 가능하게 하고 완성하는 그러한 통치입니다. 인제 그러한 것을 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어느 예외도 없이 그 사람의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적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러한 사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저도 오늘 여기 많이 배웠네요. 아버지 칭호라는 것이 이런 의미가 있군요. 이렇게 시작했군요. 우리가 이렇게 처음을 알아야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주욱 발전해낸 내용을 알게 되는건데요. 그러한 처음을 모르게 되면 우리가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우리가 지금 계속 아버지 칭호에 대한 오해를 교정해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아버지했다고 해서 기독교는 가부장적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 칭호가 필요가 없다 이런 말을 하게 된다면 기독교의 시작을 모르는 거죠. 정말 전문적인 부분이라서 까닥하면 다 놓치기 쉽습니다. 이게 교회 밖에서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교회 안에서도 정말 말도 안 되게요. 하나님 아버지니까 예수님도 남자니까 당연히 교회 안에서 남자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된다 이런 이야기까지 한다고 한다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겠죠. 그러니까 그 하나님 아버지 부성이라고 하는 게 결국 뭘까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뢰, 그것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기 위한 종교적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아주 가장 강하게 표현하는 방식이죠.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 이게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칭호의 핵심입니다.

이처럼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더 이상 가부장적으로 굳어진 그 고대사회의 신적 상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부분들이 있기는 있겠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 확실히 종교사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최고신에 대한 아버지 이름의 근원이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연결되었을 수는 있다. 그런 부분들을 배척할 수는, 부정할 수는 없는 거죠. 그러나 이미 구약 성서에서, 더구나 예수의 경우에 이 상징이 의미심장한 변형,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성서와 예수님에게서는 일반적으로 보이는 종교적 가부장성 이런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근본적으로 다른, 변형된, 그러한 신앙의 차원으로 가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또한 이 상징은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방식에 담긴 특별한 의미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며, 이로써 역시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신앙고백양식의 의미를 인식하게 해준다.

그렇군요.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들이 설명된 겁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니 이렇게 신앙고백을 하는데요. 이 말속에는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의 하나님이다. 예수의 아버지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죠.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론적인 시각이 정말 중요한 거죠.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때는 그냥 세상을 창조한 그러한 하나님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하나님, 예수의 아버지, 예수와의 관계에서 우리들에게 아주 실질적인 창조자가 되신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예수가 없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불가능한 거예요. 불가능하다고 하는 말은 정확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고 계셨으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창조전에 계신 분이라서 역사적으로 오셨던 시간 이전까지도 그리스도론 적으로서 예수님의 사건안에서 해석된다고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을 말할 수 없는거죠. 삼위일체론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설명들은 너무 이론적이다. 신학적으로 정당할지 모르지만 실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하냐? 그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혹은 그 말을 듣고 그런가부다 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와닿지 않는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 두 질문이 비슷하기도 하고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그 말은 이런 뜻인 것 같습니다. 삼위일체론을 중심으로 한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예민한 차이점과 일치점, 이런 것들을 일반신자들이 다 풀어서 설명, 이해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머무르지 말고 진도를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요 대목에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 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고백을 하는 게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을 전제하는 거다. 그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거다라는 거죠.

예수가 언급한 아버지 이름은 그의 전권적 도래가 임박한 미래에 기대되고 있던 이스라엘의 전능한 하나님이 고유한 방식으로 예수를 보냄으로써 어떻게 계시되었는가 하는 것을 특별하게 가리키고 있다. 그 예수는 인간이 당면해야할 심판 앞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자다. 따라서 아버지 이름은 특별한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한 성품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유지하고 규정하는 신적 현실성이, 다시요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고 앞에도 나왔던 건데요. 모든 것을 유지하고 규정하는 신적현실성이 예수를 통해 어떻게 해명되는가, 혹은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그 현실성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규정하는 신적 현실성이 예수를 통해서 어떻게 해명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 자신의 고유한 파송에서 실제로 행위하는 분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조금 복잡하지요. 어렵지요.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닌, 어렵기는 한데요 자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려운 거죠. 논리는 분명합니다. 따라가기만 하면 기독교 신앙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영적깊이들을 담아냈는가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적으로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 이런 정도로 생각하고 말하고 말잖아요. 하나님이 보내신 성육신 되신 구원, 그렇게 말하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기독교 비판자들이 말하듯이 심지어 교회안에서도 신인동형동성론으로 그렇게 보지 않습니까? 그런 차원이 아니라 이건 훨씬 실질적이고 현실적이고 그리고 기독교신앙이 독특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대목들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똑떨어진 것은 아니잖아요. 분명히 어떤 여자의 몸을 통해서 나왔단 말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외아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삼위일체론적으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이냐? 그게 어떻게 말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말이 된다는 것을 지금 것을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걸 제가 이 시간에 더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세밀하게 판넨베르크가 설명하고 있어서 그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아요. 더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거는 이러한 설명들은 그 전이해가 필요합니다. 사실은요. 하나님에 대한 실체론적 형이상학에 머물러 있으면 이런 논제들이 이해되지 않는 겁니다. 흔하게 소유지향적인 사람들에게는 존재지향적인 삶이 이해 안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내가 뭐를 획득하고 얻어내고 만들어내고 돈을 벌고 자식들 잘 되게 하고 업적을 쌓고 하는 것으로 자기의 삶을 확인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게 아니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삶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정말 와 닿지 않게 되죠. 허황한 이야기처럼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존재지향적인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업적을 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는 천착하게 된다면 우리의 생명은 정말 풍요로와 진다고 하면 전달되지 않잖아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느냐 말장난 하지 마라 그렇게 하잖아요.

이 하나님과 예수님 관계, 이 두 관계만 하더라도 다 연관되는 문제인데 이런 것도 전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을 경우에는 말들이 자꾸만 쳇바퀴 도는 것처럼 머물러 버릴 수밖에 없어요. 많은 분들이 판넨베르크 책이 어렵다고 하소연 하십니다. 제가 옆에서 설명을 하는데도 어렵다 하십니다. 제가 어떻게 이것을 더 설명을 해야 하나.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는 거는 그 이유가 본인들에게도 있겠지만 어쩌면 설명하고 있는 저에게도 또 있거든요. 제가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설명하고 있지는 않는가 조금 저의 책임도 생각해 봅니다.

그 예수님이 분명히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칭호, 호칭을 했고 그렇게 선포했다고 하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되었고, 예 더 궁극적으로는 부활이겠습니다만 연관되는 문제라서 고 말을 빼고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는 범위 안에서 설명하는 중이예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그래서 아들로 하나님으로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자로 고백되었고 재림할 자로 고백되었다고 하는 이 전체 흐름 속에서 뭔가가 있는 거죠. 뭔가가. 그 사이를 뚫고 우리가 지나가면서 기독교 신앙의 틀들을 이해해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칭호의 핵심은 임박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다 구원받는다고 하는 그 사실의 강조에 있다는 거죠. 그 하나님은 자비하신 아버지이시거든요. 아들 때문에 그 어떤 사람이라도 흉악한 범죄인이라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다스림을 인정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예수님은 그걸 전하는 거예요. 그 분의 사신, 그분의 복음 선포입니다.

마지막 문장을 다시 한 번 더 읽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 자신의 고유한 파송에서 실제로 행위하는 분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유한 파송, 자신이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 회심하라. 회개하라 그러면서 전한 많은 말씀과 행위들 전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다고 하는 확신으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고 하는 사실을 전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다스림속에 자기가 들어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렇게 믿고 확신하고 말하고 행동했어요. 하나님과 일치죠. 하나님 나라와 일치죠. Identify예요. 이게 바로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더 나아가서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된 핵심입니다. 과연 그게 옳으냐. 틀리냐는 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거구요. 그건 다른 종교학적인 논의 그런 것은 가능하겠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안에서 들어와 있다면 일단 기독교 신앙이 여기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줄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읽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 자신의 고유한 파송에서 실제로 행위하는 분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의 부성적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이 모든 종교에도 중요한 문제인, 그러나 동시에 종교사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논쟁적인 문제로 남아있는 신적 현실성의 참되고 궁극적인 진술에 어느 정도로 접근하고 있는 것일까? 신적 현실성의 참되고 궁극적인 진술, 이런 것에 얼마나 접근하고 있느냐? 그냥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해했다고 하는 사실이 종교적 진리가 되겠느냐 하는 거죠. 또는 그것이 과연 신적현실성을 드러내는 길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신적현실성, 하나님이 하나님일수 밖에 없는 그 실질들,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어떤 사건들, 어떤 그러한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그러한 진리적 요소들, 이런 것들을 다 신적 현실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신적 현실성에 대한 진술에 이게 좀 맞는 이야기가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전승이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는 예수의 하나님이 현재 우리 삶의 문제들을 조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삶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 자신이라 할 현실성이 그 분으로부터 분명하게 증명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느냐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는 대교리문답의 첫 신앙 항목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했다. “이런 분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첫째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아버지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아니고서 나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하늘과 땅을 창조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루터도 대단하죠. 참 재미있게 씁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인 아버지가 모든 것을 창조했고 또한 혼자서 창조할 수 있었다는 것, 이것은 루터에 따르면 그분 홀로 참된 하나님이라는 것에 대한 근거다. 첫 항목에 대한 루터의 설명에는 어떤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인가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남아있다. 인용한 부분입니다. “……마음의 신앙과 신뢰는 두 가지, 즉 하나님과 우상을 만듭니다. 신앙과 신뢰가 옳다면 당신의 하나님도 옳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신뢰가 거짓이거나 불의한 곳, 그곳에는 올바른 하나님이 없습니다.” 각자 인간이 어느 곳에서나 자신의 최종적 신뢰를 걸어둔다는 것, 최종적인 신뢰 마지막으로 믿어 둘만 한 곳, 그리고 그곳에 자신의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옳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또 루터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이 의지하는 것, 당신의 마음을 걸어두고 신뢰하는 것, 이것이 실제로 당신의 계명(Gebot)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옳고 하나인 하나님을 만나며 그에게만 달려 있는” 올바른 신뢰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루터는 첫 항목의 설명에서 제시한다. 이 하나님만이 홀로 하늘과 땅을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참된 하나님이라고.

루터의 대교리문답 신앙항목을 인용하면서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에 대한 부성적 언급이 과연 신적현실성에 대한 진술에 적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합니다. 어떤 방향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 같죠. 뒤로 루터의 설명을 따라가면 더 정확하게 나오겠습니다. 그냥 이런 정도의 설명만 따른다고 하더라도 대충 방향은 잡혀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언급했다고 하는 사실은 곧 그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바로 그분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한다고 하는 거죠.

요것으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아닌 거 같은데 제가 머리속에 뭔가 남겨 두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정리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아 그렇군요. 이거군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호 했다는 것은 그분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었거든요. 아들이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셨거든요. 자기의 파송 보냄 받은 것을 바로 그 보냄 받은 사건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거든요. 바로 그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가 신뢰할 수 없는 거죠. 루터의 이 교리문답을 인용한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의 궁극적인 신뢰를 걸어두는 그 분이 바로 그 하나님 이예요. 그러니까 그 분은 바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것을 증명해보라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세계를 창조했는가 증명해봐라 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모든 이야기 신학적 진술의 흐름은 어떤 그 방향이 있는 거예요. 그것 없이 느닷없이 다른 가져다가 증명해봐라 서로 이렇게 하다보면 이건 이야기가 진행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핵심이 뭐냐 하는 것인데요. 바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창조자로 믿는다고 하는 사실인거예요. 이 두 가지가 한 묶음인거예요. 앞에서도 아버지 칭호가 부성적이냐 뭐냐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거거든요.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을 믿고 삽니다. 하늘과 땅을 무로부터 창조하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예수께서 나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바로 그 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대림절 둘째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대림절 평화를 더 누리십시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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