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 제16강 - 3장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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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사도신경해설 16강에 해당되는 부분은 53쪽부터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도신경해설의 이 책으로만 보자면 3장에 해당되는 건데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그 부분입니다. 이러한 사도신경의 간단한 요약문들이 별것 아니라거나 또는 오늘 시대에 맞지 않는 고대인들의 독특한 세계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하거나 또는 무조건적으로 이 교리 요약문이 기독교의절대성을 증거해 주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오해입니다. 이 사도신경의 전체도 그렇고 부분도요 초기기독교의 아주 독특한 그리고 고유한 하나님이해이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 어떤 문서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고 동시에 여전히 해석되어야 될 그러한 말씀, 그러한 텍스트, 그러한 도그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전능성, 천지, 창조, 아버지 연관된 그러한 한 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는 마틴 루터의 어떤 구절을 같이 나누는 것으로 그 구절을 한번 확인했어요. 지난번 마지막 부분이 바로 그겁니다 마틴 루터가 한 이야기 그게 대교리문답 이었었죠. 마틴 루터의 대교리문답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이 의지하는 것, 당신의 마음을 걸어두고 신뢰하는 것, 이것이 실제로 당신의 계명(Gebot)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옳고 하나인 하나님을 만나며 그에게만 달려 있는” 올바른 신뢰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루터는 첫 항목의 설명에서 제시한다. 이 하나님만이 홀로 하늘과 땅을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참된 하나님이라고. 이게 지난번 우리가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다룬 단락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이 내용을 조금 더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보죠.

이 답변을 루터가 최초로 언급한 것은 아니다. 이 답변은 기독교의 이방인 선교와 기독교 신학 초기부터 항상 거듭해서 제기되었다. 창조 바로 그 하나님, 그 하나님에 의해서만 참된 세계가 가능한 어떤 사태들을 마틴 루터가 아니라 이전에 이미 초기부터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논점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겁니다. 이거는 기독교 신앙이 그냥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그러한 단순한, 그러한 주장에 머물지 않고 그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통치 그런 것들이 어떻게 이 세계 현실성과 연관되는가 하는 것이죠. 창조 세계 천지 그건 분명하게 우리앞에 놓여 있는 어떤 현실들이지 않습니까? 이런 것하고 관계가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하나님, 그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고 예수의 아버지라고 이야기한 하나님이라고 하는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게 왜 중요한지 판넨베르크의 설명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물론 이 문제는 내몰린 자의 신앙을 그들의 야훼가 만물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확고히 하려한 제2 이사야에게까지 소급된다(사 40:27이하). 그러한 진술에까지 이 사상이 소급된다고 하는 거죠. 구약과 신약이 이렇게 연결됩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안에서도 맥을 놓치지 않고요. 기독교 신앙이 왜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였는지 충분한 근거가 되죠. 기독교 신앙이 완전히 이스라엘 역사와 단절되어서 나온 게 아니라 흐름을 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흐름에서 요 항목도 포함 되는 거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바로 그 분이다라고 하는 거죠. 이방 기독교회와 그들의 신학은 그들이 그 하나님 안에서 만물의 창조자를 인식하게 된 경우에 우선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며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선포할 수 있었다. 이방인 기독교와 그들의 신학, 그게 바로 우리 기독교의 선배를 가리키죠. 그들이 하나님을 창조자로 인식할 때,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세계 전체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바로 그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신학적 사유를 할 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따라서 고대의 기독교 사신은 초기부터 세계의 근원으로서 신적인 것의 참된 형태에 대한 표준을 말하는 철학적 질문에 직면해 있었다. 이 철학적 질문과 대화했다고 하는 거죠. 직면했다고 하는 건데 이거는 때에 따라서는 같이 길을 가기도 하고 또 싸우기도 하고 논란, 같이 길을 간 거예요. 이 철학적 질문이라고 하는 거는 기독교 신학이 철학이다 그런 뜻이 아니라 철학적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까? ‘세계 근원으로서 신적인 것의 참된 형태에 대한 표준을 말하는 것’, 표현이 직역이라서 잘 전달이 되지 않을지 모는데 그렇게 복잡한 의미는 아닙니다. 철학이 하는 일이 세계의 근원으로서 신적인 것의 참된 형태에 대한 어떠한 기준들을 찾는 거죠. 탈레스가 만물의 본질은 물이다라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바로 그 작업이에요. 만물의 본질, 즉 세계 근원이죠. 신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 아주 보편적인 아주 근원적인 어떤 힘이니까 그런 세계 근원 그런 것의 참된 본질, 그런데 이제 물이라고 한다면 그게 하나의 기준이 되는 거죠. 표준이 되는 거죠. 기준, 표준 그러한 철학적 질문들과 기독교가 계속 논의를 해왔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한 질문 앞에서 기독교가 자기 자신을 해명하는 일에서 회피하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 철학적 질문에 맞섰다고 하는 거죠. 이건 아주 중요한 겁니다. 기독교 신앙이 어떠한 삶의 아주 작은 구석으로 도망가지 않고 세계 전체 현실성과 맞대했다고 하는 겁니다. 맞서 있었다고 하는 거죠. 오늘의 기독교 신앙이 그저 사람들의 작은 심리적 감성적 차원을 위로해 주는 것으로 자기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 회개해라 이러한 내용에 들어있는 건데요. 그렇게 한다면 그거는 기독교의 처음 출발과 아주 관계가 먼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이 철학적 근거에서 시도한 논증은 기독교 형태에서 진술된 성서의 하나님이 철학적 세계의 이해에서 만물의 참된 근원으로서 증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토대를 두고 있다. 그렇죠.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 이런 것들이 만물의 근원이잖아요. 철학자들이 말하는 핵심이잖습니까? 고대 헬라철학자들이 말이죠. 기독교가 선교할 때의 그 주변세계는 다 헬라철학을 통해서 가장 궁극적인 것의 실체를 이해하고 있었어요. 그들을 향해서 기독교가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설득 시키려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만물의 근원 이데아 혹은 형상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질료와 형상, 이러한 것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사유가 어떠한 철학적 전제에 근거해서 그렇게 나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추가적으로 그런 전제들과 연관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근거해서 자신의 진리성을 증거했다. 하나하나의 문장이 이해기가 어렵죠. 여기에는 판넨베르크의 고유한 사유체계가 녹아 있습니다. 녹아있기 때문에 그의 신학과 그의 사유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이러한 문장들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또는 이 문장들의 많은 부분들을 놓칠 수 있는거죠.

이 철학적 질문에 초기기독교가 도망가지 않았다고 하는 이 사실, 또 주변의 그러한 많은 사상과 세계를 향해서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기 위해 그들이 말하는 만물의 참된 근원, 이런 표준, 그들이 말하는 표준에서 하나님을 말했다고 하는 이 사실을 오해하지 말아야 되는거죠. 무슨 뜻이냐 하면 기독교가 이러한 철학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적인 논증을 잘하다보면 그러면 이제 하나님을 만난다 그 뜻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 그러한 전제들과 연관되고 그러한 방식으로 기독교가 자기의 진리임을 증거했다고 하는겁니다. 무슨 말인지 전달이 되었죠. 철학에서 기독교가 나오지 않았지만, 왜냐하면 기독교는 인간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창안해내는 어떤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는 그 계시에 따라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거든요. 그러니까 철학은 귀납법 적이라고 한다면 신학은 연역적이라고 할 수 있죠.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한다고 하는 전제, 철학은 그걸 전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논리적 사유를 통해서 신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어떤 궁극적 실제들을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물론 오늘의 철학들은 그것마저도 포기한 경향이 있기는 있지만요. 지금 이제 초기기독교를 말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헬라철학의 전통이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구요. 그 전통은 오랫동안 계속 되었고요. 최근에 그러한 것을 철학이 포기한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철학들이 언어분석이나 이런 쪽으로 나갔지 궁극적인 터전, 토대들 이런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헤겔이후로 그러한 현상이 많이 나타났다고 하는데요. 아마 과정철학은 여전히 궁극적 토대들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Reality is process.

기독교 신학은 근본적으로 철학하고 그 출발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러나 자기의 진리성을 변증해야 한다고 하는 점에서 이 철학적 사유를 어느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하는 거죠. 그런 것을 통해서 했다고 하는 거죠. 즉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철학적 전제들과의 논의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것을 극복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네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사유가 지금 제가 몇 번 반복해서 말씀드린 바로 그 내용입니다. 철학적 논의들을 거부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극복해 나간다고 하는 겁니다. 신학과 철학의 관계는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신학이라는 말도 철학에서 나오긴 한 거예요. 제가 요걸 준비를 하다가 판넨베르크의 책을 먼저 잠간 인용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요 책이거든요.

신학과 철학, 판넨베르크의 책입니다. 이분이.. 네. 이 판넨베르크가 현대의 살아있는 개신교 조직신학자로 최고 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신학을 보통 보편사 신학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그냥 한마디로 끊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그 말로 그의 신학사유를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한두 가지 단어로 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상가나 예술가도 마찬가지인데 규정하기는 힘들거든요. 그러나 그 특징을 드러낸다고 하는 점에서 과연 틀리지는 않습니다. 보편사요. 운버서게쉬히테. 그러한 것을 근거로 해서 본다고 하더라도 판넨베르크가 왜 철학을 신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있는 겁니다. 보편적인 현실들은 철학적 사유를 관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이거든요.

이 책 서론, 서론 첫번 패러그래프만 잠간 읽어보겠습니다. 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 한 역사적인 형태를 갖춘 기독교 교리를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재적으로도 기독교 교리의 진리 요청에 대해 고유하고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으로부터 조직신학으로 넘어가려면 자명한 판단형성의 전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철학적 의식이 아주 객관적으로 작동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신학을 이런 저런 철학에 짜 맞추는 일이 아니라 신학적이며 철학적이면 개념 형성을 다루면서 확대되는 문제 의식에 참여하는 일이다.

예를 들자면 존재에 대한 철학적 해석, 관점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가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성서자체가 그러한 것을 배경으로 두고 기록되었으니까요. 철학에서 신학이 나왔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한다고 하는 전제아래 그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성서기자들과 그 성서역사에 포함된 사람들은 철학적 사유를 한 거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에게 그런 말씀을 듣잖아요. 나는 자존자다. ‘스스로 있는 자’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도대체 자존자라고 하는 게 뭘까요? 다 존재문제이거든요. 그러한 것들이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철학자들을 거쳐서... 네 신학의 흐름들의 이런 저런 영향들을 주거나 받은 서양의 철학의 과정속에서 우리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그 뒤로 이어지는 동양의 그러한 철학들도 우리들에게 마찬가지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들이구요.

지금 왜 이런 철학과 신학의 관계. 신학이 왜 철학적 질문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았느냐는 것을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이유를 아시겠죠?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이라고 하는 사도신경의 한 대목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유대교의 그러한 유대교의 그러한 사유, 신앙적 사유의 흐름 안에서 하나님을 천지와 연관된 분으로 창조한 분으로 이 고백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거죠. 헬라신화에도 데미우르고스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철학자들, 신화는 그러한 철학에서 나온 거니까요. 그러한 흐름들 속에서 기독교가 왜 그러한 방식으로 말하는 그러한 세계 안으로 우리가 뛰어 들어가야 하면 또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진리를 변증해야 되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철학이 기독교의 토대는 아니지만 기독교가 자기를 해명하는 데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고 일종의 도반(道伴)이기도 하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 사유에서 발생한 철학과의 논쟁이 이처럼 기독교 진리의 보증을 획득하거나 유지했다는 사실이 복음의 변질로 폄훼(貶毁)당할 수는 없다. 간혹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철학이 뭐 중요하냐? 믿음이 중요하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왜곡 된 거다 뭐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거든요. 잘못되었다고 하는 거죠.

철학의 주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진리로 증명되기 위해서 당연하게 필요한 그 총체적 현실성에 대한 경험이다. 참 중요한 대목이군요. 저도 밑줄을 쳐야 되겠습니다. 철학의 주제가 뭐냐는 거죠.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진리로 증명되기 위해서 당연하게 필요한 총체적 현실성, 기억해 두십시오. 앞으로도 몇 번 반복해서 비슷한 개념이 나오게 될 겁니다. 총체적 현실성, 모든 것, 모든 현실성, 전체 현실성이죠. 제가 가끔 메타포로 사용하고 있는 퍼즐로 비유하자면 전체 그림이죠. 아직은 거가까지 가 닿지는 않았습니다. 조각 몇 개만 우리가 들고 있는데 맞추고 있는데 이게 다는 아니죠. 결국은 언젠가 그림 전체가 드러나 날이 올 텐데 그 전체가 사실은 지금 부분 이런 것들을 끌어가는 힘입니다. 그 전체 그림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이 퍼즐을 맞춰갈 수 있거든요. 그게 총체적 현실성이예요. 아직은 우리들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종말에 가서 그 총체적 현실성이 드러나게 될 겁니다. 그 그런 경험이 바로 철학의 주제이거든요. 당연히 세상의 창조와 종말을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 신앙이 그 철학적 주제들과 대화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만약 하나님의 신성이 그가 모든 현실적인 것의 단초이며, 또한 그가 없이는 모든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런 하나님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연(深淵)에 놓여있는 현실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아무리 올바르게 살펴본다고 해도 피상적으로만 묘사될 수 있을 뿐이다. 철학과의 논쟁에서 지적되어야 하는 바는 기독교인에 의해 주장된 하나님이 진정으로 하나님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늘 자신의 믿고 있는 바를, 믿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세상을 향해 그들이 알아들을수 있는 개념으로 해명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미 베드로서에도 이런 가르침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요한복음을 비롯해서 헬라 철학적 개념을 받아들인 초기 기독교가 그 길을 갔거든요. 그뿐만 아니라 2천년 기독교는 꾸준히 그러한 길을 걸어왔거든요. 그 다음입니다.

우리의 현존경험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증명은 또 다른 한편으로 볼 때 확실히 우리의 전체 인격적 경험에서, 즉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충격, 존속과 큰 기쁨에서, 특별히 도덕적 경험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실존적 영역이라고 하는 거죠. 바로 앞에서는 총체적 현실성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조금 각도를 바꾸어서 이러한 개개인들의 도덕적 경험, 그러한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신성이 경험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 두 가지가 좀 대립이 되는 건데 이 두개가 한쪽으로 고착된다면 곤란하다고 말하려고 하는 거죠. 그러나 보편타당하게 유지될 수 있는 근거가 인간 삶의 좁은 영역에서는 절대 가능하지 않다. 요 부분을 한국 기독교인들이 좀 귀담아 들어야겠습니다. 바로 이 성서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게 틀림없다면 그렇다. 바로 이 하나님이 누구요?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사 그 앞에 있는 수식이 중요합니다. 전능하다는 것, 이 전능하다고 하는 말은 여러분들이 조금 더 깊은 의미를 포착하셔야 하는데요. 물론 그 말입니다. 그 말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계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전능성을 가리키는 계명입니다. 전능하사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바로 그 하나님, 그 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다. 그러한 아버지 하나님이 개인이 실존적 도덕적 신앙을 이야기하게 될 경우에 그러면 설득력을 잃는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인간 삶의 경험을 독점적으로 판단하게 되면, 배타적으로 판단하게 되면 자기의 주관적 확신 속에서만 머물러버리게 된다면, 신앙이냐 불신앙이냐 하는 결단은 항상 궁극적으로 자의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를 지니게 된다. 주관적이죠. 자기 생각에 머물러 버리게 되는 거죠. 전체 인간 삶의 경험 중에서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작은 부분이 아니라 각기 현실성에 대한 모든 경험의 넓은 부분이 성서적 하나님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성이 논증되어야만 할 장이다. 문장 다시 읽겠습니다. 번역을 잘못했는지 확 와 닿지 않습니다. 전체 인간 삶의 경험 중에서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작은 부분이 아니라 각기 현실성에 대한 모든 경험의 넓은 부분이 바로 그것이 성서적 하나님의 신성이 논증되어야만 할 장이다. 보편적 세계 전체라고 하는 거죠. 물론 개개인에게 속한 인간 삶의 경험은 특히 죄와 용서에 대한 도덕적 경험은 간과되면 안 된다. 실존적 죄 용서에 대한 경험들, 기쁨 해방의 경험들, 칭의의 경험들이죠. 중요한 요소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신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을 현실성에 대한 경험의 확장된 연관 가운데서 보아야만 한다. 이게 번역이 좀 그렇군요. 현실성에 대한 경험에 확장된 연관, 너무 직역이군요. 현실성, 드리트리카이. 이런 경험들이 넓어지면서 연관되잖아요. 어디까지 넓어지는지 조금씩 여러분들이 느낄 겁니다.

우리가 자라나는 과정과도 비슷합니다. 어릴 때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자아가 형성된다면 조금 크면 친구들, 학교, 교회 이렇게 넓어지죠. 그 다음에 세계, 그리고 더 이러한 자기 영적인 훈련을 하는 사람들은, 우주 그 어떤 심층의 세계까지 넓어지거든요. 지금 책이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우리 현실성에 대한 경험이 확증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다보니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때 내가 예수 믿고 예수 영접하고 죄 용서받고 의로움을 받고 세례 받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독론 적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적으로 확장된다고 하는 거죠. 하나님, 천지창조, 전능한 그 하나님, 그 하나님 행위 속에는 세계 전체 현실들이 담겨져 있는 거거든요. 그러한 연관속으로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의 실존적 경험이 확장되어야 된다. 그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 연관되어야 된다. 당연하죠.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인간으로서 이 현실성에 참여한다. 개인의 인간적 삶에 대한 경험, 그리고 그의 신앙적 확증에 대한 그 의미는 여기서 과소평가되거나 축소되면 안 된다. 판넨베르크가 지금 그걸 계속 반복해서 강조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꾸만 판넨베르크신학이 보편성, 진리, 뭐 현실성 이런 쪽으로 나가기 때문에 하여튼 개인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확신, 도덕적 변화 이런 것들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게 아니냐 이러한 오해 받을 수 있거든요. 저도 그런 오해를 받기는 합니다만요. 그게 아니라고 하는 거죠. 그런 것이 중요하다. 그런 것이 축소되면 안 된다고 하는 거죠. 그런 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경험은 시간적인 전체 생명으로부터 해체되어 종교적 경건의 특수 영역 안으로 빠져들면 안 된다. 시간적인 전체 생명, 2천 년 전, 지금 2천 년 후 시간이 흘러가잖아요. 역사, 생명 전체적인 생명, 총체적 현실성하고도 연관되는 문제예요. 이러한 것들과 완전히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갖고 혼자 독실한 경건성안으로 빠져들면 곤란하다고 하는 겁니다. 이 특수영역이란 것은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세상으로 난 창문을 밀폐해두는 영역이다. 일종의 밀의 종교와 같은 현상 말이죠. 기독교 안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오지 않습니까? 세상은 망할 놈의 세상이니까 십자가만 보자. ‘세상에서는 관심을 끊고 교회일에만 열심을 내자’라든지 ‘세계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든지 우리가 예수님을 무조건 잘 믿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폐적인 공간 안으로 종교적 경건성이라고 하는 밀폐된 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단일성에는 현실성의 전체성만이 상응할 뿐이다. 이것만이 옳은 말이다. 이것만이 해당된다고 하는 말이죠. 더구나 완료되지 않은 전체성의 과정 중에는 더욱 그렇다. 완료되지 않는 전체성, 세계 전체, 우주 전체 그게 바로 하나님의 것인데 이게 아직 완료되지 않았잖아요. 이것이 인제 과정 중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한 분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하나로 끌어간다고 하는 사실이 바로 이게 전체적인 현실성과만 연관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 완료되지 않은 과정이란 일종의 의미 전체성을 가리킨다. 의미 전체성, 오늘 유난히 이러한 개념적인 용어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총체적 현실성, 총체와 현실성, 그런 것도 있고요. 그로부터 시작해서 현실성의 전체성 이런 것, 의미 전체성 이런 것들이 지금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개념적 용어들을 익숙하게 대하지 않았던 자주 반복해서 대하지 않았던 분들은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천천히 가보죠. 판넨베르크의 이 말이 어려운 건 아닙니다. 용어 자체가 일상적이지 않아서 그럴 뿐이죠.

이 가운데서 모든 경험이, 즉 궁핍, 고통, 죄, 그리고 불합리 같은 부정적인 경험이 발견되고 있는 그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런 의미 전체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초월해나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존적인 것과 이미 지나간 것을 포괄하고 있다. 의미 전체성, 총체적 현실성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의미 전체성, 총체적 현실성, 이러한 것들은 과거와 현재 이런 것들을 포괄하고 있으면서 이런 것들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유하게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이 세계 창조자와 다르지 않다고 하는 사실이 기독교에 대해서 언급할 때 항상 결정적인 문제다. 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읽을 필요 없고 다시 한 번 간단히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중요한 문제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 바로 세계를 창조한 그 분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사실, 이것이 바로 바로 기독교와 연관된 문제를 이야기할 때 핵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기는 거죠. 세계창조자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그 하나님을 이슬람교도 이야기하고 유대교도 말한단 말 이예요. 또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또 다른 종교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타종교랑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하는 그런 질문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아직까지 어떻다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 시간이 더 흘러야 되고요.

어쨌든 이거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참된 생명으로 불러내신 하나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신 그 하나님이 바로 그 세계를 창조한 바로 그 분이다는 사실이에요. 뻔히 아는 거다. 뻔한 이야기를 왜 자꾸하냐? 뻔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도신경의 진술에는 많은 해석이 필요한 겁니다. 그냥 어떤 신앙의 대가가, 혹은 신학의 대가가 며칠 사이에 자기가 생각한 것을 끼적거리다가 만들어놓은 도큐먼트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몇 세기에 속해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특히 로마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주변의 철학적 시도, 사유들과 격렬한 투쟁과의 대화,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물론 여기에는 유대교도 포함되어있죠. 그러한 투쟁을 통해서 도달한 기독교 신앙의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문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해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 거죠.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는 구원과 해방에 대한 모든 경험은 우리가 그런 것을 세계 창조자와 함께 생각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렇다고 마치 내가 인간의 전체적인 경험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덕으로 돌리고 모든 것이 그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고 싶어서, 확신하고 싶어서, 즉 세계창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런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주먹구구식으로 하나님이 만드셔서 그렇게 아전인수적으로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그러한 의미를 담고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세계 창조자로서 이해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그의 덕으로 돌리는 인간적인 경험은 일종의 경건한 자기기만일 수 있다. 이 경건 역시 이러한 질료적인 세계가 자기 현존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네. 자기기만일 수 있는 거죠.

그 다음 56쪽 넷째 줄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경험이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다양하다는 사실 앞에서, 그리고 모든 개체 인간의 경험이 한정적이라는 사실 앞에서 성서의 하나님이 모든 현실성의 근원자로 이해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질문이 결국 결정적이라는 말인가? 여기서 말하는 이 현실성은 현실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것을 뜻한다. “그 어떤 다른 하늘과 땅도 창조될 수 없습니다.”라는 루터의 주장은 무엇인가? 성서적 희망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에서나 완성될 인간의 역사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면 분명히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전히 논쟁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셈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는 하나님의 현실성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그 어떤 최종적인, 그리고 반론의 여지가 없는 답변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불안한 거죠.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한 게 아니라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반론의 여지가 없는 답변을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울로 보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 보고 있을 뿐이고 말씀의 약속을 우리가 붙들고 있을 뿐입니다. 여전히 우리가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해명해야 될 책임이 있다고하는 점에서 불안한거죠. 이 불안은 우리를 파괴하는 불안이 아니라 우리를 진리의 칼에 진리의 칼을 양쪽으로 날카롭게 갈게 하는 그런 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없다면 이미 답을 다 갖고, 최종적인 답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무조건 질문할 필요도 없고 고민할 필요도 없고 그냥 그것을 암기하기만 하면 되겠죠.

역사의 미완료성과 개체에 대한 경험의 비확정성은, 네 재미있는 표현이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 어떤 다른 정보도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그러한 한계 안에 머물러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잠정적인 답변에 대한 기준이라도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이렇게 판넨베르크가 질문을 합니다. 이에 대한 하나의 길은 다음과 같은 통찰에 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이해는 종교사적인면에서 볼 때 아주 분명한 세계이해와 결합되어 있다. 분명한 세계이해. 세계에 대한 모든 임의적 이해가 어떤 神에 대한 이해와 연결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사유하는 기능은 하나님으로부터 세계이해가 규정된다는 데에 놓여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전능한 아버지라고 일컫는 성서적 사유에도 역시 어떤 분명한 세계이해가 결합하고 있다. 이 세계이해는 개별적인 이해에서는 변형되기 쉽지만 성서적 神사유의 기본적 성격에서는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다. 현실성에 대한 성서적 이해는 하나님을 전능한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사상에 의해 규정되어 있으며 또한 분명한 시간적 조건들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네 독특한 그리고 고유한 하나님이해. 성서에 해당되어 있고 그것은 또한 고유한 독특한 세계이해와 맞물려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냥 툭 튀어나와서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세상을 창조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는 성서만의 고유한 세계이해가 담겨 있는 거죠. 여기서 분명한 시간적 조건들로부터 해방되어 있다고 하는 말은 어떤 기계적인 역사발전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하는 겁니다.

네 그렇군요. 넘어가죠. 이 시간적 조건들은 곧 본질적이며 영속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사유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기계적으로 하나하나 이렇게 발전되어가는, 원인이 있으니까 그렇게 되어서 이렇게 당연한 결과가 나왔다 그런 식은 아니라고 하는 거죠. 성서의 세계 이해가. 우리는 이러한 성서적 이해가 그 기본 성격상 현실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여전히 유효한지 아닌지를 물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서이해가 지금도 옳으냐 아니냐 하는 거죠. 그게 틀렸다면 우리는 성서를 다시 보아야 하겠지요. 이런 문제들이 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하는 이러한 신앙고백에 담겨 있는 많은 생각들, 신학적 사유들입니다.

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 다음 패러그래프가 길어서요. 그리고 좀 중요하기도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 같아서 고런 정도로 정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부분이 특별히 좀 까다롭네요. 판넨베르크의 고유한 신학적 착상들이 많이 들어있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중요한 관점은 무엇일까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이 짧은 구를 통해서 판넨베르크가 정말 많은 것을 말하고 있죠. 그는 없는 부분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을 요약적으로 하고 있을 겁니다. 기독교 신앙, 교리, 신조, 사도신경 이런 것들은 그러니까 상당히 많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을 담고 있는 거죠. 그게 숨어 있어요. 말하자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것을 놓치기 때문에 고대인들의 언어 습관에만 묶여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이미 시대적 설득력을 잃어 버렸다 이렇게 오해하는 거죠.

오늘 저는 여기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적 mentality와 연관해서 말씀드려야 되겠어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다만 개인의 신앙경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계 총체적 현실성의 경험과 부단하게 신학적 소통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뛰어넘은 의미 전체성, 총체적 현실성에 속해 있는 거거든요. 연관되어 있는 거거든요. 어쩌면 그것이 더 우리 기독교 신앙에 더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전체 역사로 자기를 계시하시구요 우리 개개인의 실전적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하고 부분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생명계시라고 하는 구원역사속에 들어갈 때 참된 의미, 참된 신앙적 의미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벌써 2008년이 다 가고 있습니다. 다음 주가 대림절 네째주일이구요. 성탄절이 곧 옵니다. 여러분들 성탄절과 연말에 하나님의 평화가운데서 행복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강의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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