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교회론의 제지평

교회와 사회 조회 수 3562 추천 수 13 2008.07.22 13:28:43
2장 교회론의 제지평 3월13일
-몰트만을 중심으로-

오늘의 교회는 대단히 불안한 상태에 놓여있다. 교회의 미래, 특별히 한국교회의 미래가 그렇게 밝은 것만 아니라 보기에 따라 어두운 현실 가운데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지도자들도 의식하고 있던지, 아니면 무의식적로든지 이러한 불안의 징조(성장의 정체, 시대정신과의 부조화)를 느끼고 있다. 최근에 교회를 통해 발생한 여러가지 반사회적 현상은 이러한 분위기를 확대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교회의 권위가 그대로 인정되던 시대를 오늘 우리가 그리워 할 필요도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 Postmodernism이라는 시대적 정신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 스스로가 내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들이 이러한 요구를 증대시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자기 자신을 존재의 목적으로 삼고자 하는 신학적, 그리고 실천적 경향으로 말미암아 진리론적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제 교회와 사회라는 두 관점에서 그리스도교회의 정체성을 모색하려는 우리는 기본적으로 교회론이 터해야할 제지평에 대해 확실한 방향을 설정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만 하는가? 교회의 여러 조직과 관리체계를 개선하는 것도 그 한 방편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표면적이고 주변적인 문제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로 부터 접근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정직하게 서는 일이다. “교회란 무엇인가”(Was ist die Kirche?)라는 질문은 우리의 전체 과목의 주제에 비해 지나치게 포괄적이기 때문에 좀더 구체적이고 상응하는 문장으로 바꾼다면 “교회의 자리”이다. 교회가 영속적인 진리에 묶여 있음과 동시에 이 땅의 질서와 병행해서 존재하고 있다. 가변적이고 구체적인 이 세상의 질서 속에서 교회의 자리는 어디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자리에 대한 질문은 그것이 씨름해야할 주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마찬가지이다. 즉 교회가 확고하게 붙들고 대결해야할 테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로 하자는 말이다.
교회는 처음부터 불안을 가슴에 안고 출발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안정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자기의 전존재를 맡기는 모험이었다. 만약에 교회가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존재기초에 설정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불안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한다. 교회는 이 세상에 잘 적응하는 그 적응능력에 의해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령과 오고있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부터 발생하는 교회의 내적 갱신”(J. Moltmann)에 의해 판단되어져야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작은 제목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표현이기 때문에 진부하게 보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항상 잘못된 고정관점에 젖어 있기 때문에 정작 풍부한 사고를 할 수 없을 때 가 많다. 만약에 우리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명명한다면 올곧게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사귐이 있는 공동체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 세상의 문화나 혹은 교회공동체 내의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지배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 교회의 메카니즘이 단순히 비민주적이라거나 어떤 특별한 경우를 지적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일반의 비그리스도성을 일컫는 것이다.
그리스도은 교회의 기초이며, 힘과 희망이다. 종교개혁신앙은 종교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인간적인 규정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척도 안에 종속시켰다. 바르멘 신앙선언의 1항에서 보여주는대로 교회를 국가에 종속시키려는 국가교회의 모든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가 성서에서 우리에게 증언된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 하고, 삶과 죽음에 있어서 우리가 신뢰하고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교회가 교회의 선교의 근원으로서 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 밖에 그리고 이 말씀과 나란히 해서 다른 사건들, 권세들, 형태들, 진리들을 하나님의 계시로서 인식할 수 있고 또한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치는 그 거짓 교리를 우리는 배격한다.(Bearbeitung von Wilhelm Huffmeier und Martin Stohr, Barmer Theologische Erklärung 1934-1984, Geschichte-Wirkungen-Defizite, Luther Verlag, Bielefeld 1984, 245.)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배를 그 존립의 근원으로 한다는 사실은 두 가지 차원에서 교회의 자유성을 보장한다. 하나는 교회의 시대적 한계(교회의 전통)로 부터 교회의 영속적 본질이 자유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세계의 정치적 지배로부터 교회가 자유하다는 것이다. 교회는 자신이 소유한 전통이 아무리 풍부하고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의존해 있지 않고, 오히려 교회의 전통은 교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끊임없이 의존해 있다. 이러한 교회의 자유는 세계로 부터 더욱 엄격히 구별되어 있다. 교회 역사상 세계의 질서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확장하기 위하여 교회를 지배하려던 적이 여러번 있었으며, 또한 교회와 정치가 공생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그리스도성으로 부터 멀어진 적도 있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철저하게 지배하도록 개방되어 있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자유성은 특별히 비판적 기능으로 작용한다. 몰트만은 이르기를 “만일 신학이 비판의 자유를 잃는다면 그것은 현존하는 교회 형태의 이데올로기가 될 것이다. 만일 신학이 교회의 교제를 잃는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학이 아니고 일종의 종교학이 될 것이다. 기독교 신학으로서의 신학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주권을 기억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독교 교회로서의 교회는 신학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을 기억하게 하고, 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타당한 신학을 추구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고 피력하고 있다.

2. 선교하는 교회

몰트만은 세속화의 시대에 다음과 같이 네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1)선교의 교회 2)분열된 교회의 에큐메니칼적 교제의 의지 3)하나님 나라의 우주성의 발전 4)신도의 사도직.
여러 가지 면에서 기독교공동체(Corpus Christianum)가 쇠약해져 가는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교교회는 새로운 전환을 모색해야만 한다. 기독교공동체의 와해현상은 이 세계의 성숙성과 비례하여 상승되고 있다. 물리적 세계의 눈부신 발전이 인간에게 더 이상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게 하였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그러한 관심을 대폭 축소시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교회가 이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방향은 교회를 선교적 존재론에서 다시 설정할 수 있는 것에 달려 있다. 교회가 선교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교가 그 자체의 교회를 창조한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교회로 부터 선교가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로 부터 교회가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성직자나 일부 열심 있는 신자들의 종교적인 업무만을 대상으로 해서 자기의 과업을 찾을 수 없다. 교회구조 전체가 선교의 성격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간혹 우리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나 이웃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일만을 선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가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에 교회가 동참할 뿐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세계의 지평 속에 있는 선교의 교회를 신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교회의 포괄적인 선교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명과 모든 육체에 부어진 성령의 카리스마적 사명에 일치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교회의 활동을 뛰어넘는 인간세계의 전지평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선교란 교회자체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그 목표로 한다.
한국교회는 매우 역동적으로 선교를 지향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선교 행위가 삼위일체론적인 역사이해에 상응하지 못하고 단순히 교회기구의 확장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숙지해야만한다.

3. 에큐메니칼 교회

만약에 교회가 선교를 자기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행위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에큐메니칼 정신을 내포하게 될 것이다. 결국 문제는 교회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Herr)로 고백하고 그러한 정신에 근거하여 실천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위기의 시기에, 그리고 자체불안을 갖고 있는 교회로서 오늘 우리는 하나의 교회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해야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하나의 교회가 되지 못한다면 그러한 교회는 어떠한 능력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교회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몰트만은 교회일치를 위하여 두가지 전제가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기독론적인 기초이며, 둘째는 종말론적인 정향이다. 그리스도적인 교회는 그 안에 이미 일치성이 내재해 있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종말론은 교회로 하여금 무엇에 매진해야하는지를 분명하게 지시해 준다. 하나님의 완전한 지배, 그 분의 온전한 통치를 기다리고, 그 때를 위하여 전력하는 교회는 하나의 목표를 가진 하나의 교회임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교파와 지교회의 독립성을 파괴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가능하지도 않다. 현실교회는 어느 때나 나누이는 역사를 그 안에 갖고 있었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최소한의 형제애를 상실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형제애는 배타성의 극복이며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전체교회를 개교회 안에 담고 실제적으로 만나는 문제들을 함께 풀어가려는 진지한 노력이 요청된다. 하이젠베르그가 그의 과학적 철학 에세이의 제목으로 삼았던, 그리고 철학사 개념 하나인 부분과 전체의 틀 안에 볼 때 개교회는 전체를 통해서 완전에 참여할 수 있다.

4. 정치적 교회

교회의 선교,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의 선교는 이미 예수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구원에 터하여 있다. 구약의 구원행위, 그리고 예수의 구원행위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선교인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으며, 동시에 구원공동체인 교회가 무엇을 전해야하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구원은 인간세상을 대상으로 한 하나님의 행위이지 이 세상을 떠난 천사들의 사건은 결코 아니다. 아직도 이 세상의 모든 비밀이 완전히 드러난 것이 아니며, 무엇이 존재인지, 무엇이 미래인지,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지 완전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전하는 구원은 이 세상을 떠난 다른 세상의 것일 수 없다. 이 세상성이라고 해서 그저 단순히 우리의 물리적, 생물학적 삶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영적인, 정신적인 부분을 포함해서 인간의 전체 삶을 뜻한다. 인간 구원을 지향하는 기독교 선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이런 면에서 구원을 외치는 교회는 정치적인 성격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 중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부분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인간의 하루 생활중에 정치가 미치지 않는 부분이 얼마나 되는가? 아침 식탁에서 부터 직장, 그 일자리, 임금, 출퇴근, 생활주변의 문제들, 자녀들의 교육에 이르기 까지 정치적인 결단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스스로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는 공동체라면 정치적 결단을 유보할 수 없다. 정치적 교회라는 말은 <교회의 정치화>를 뜻하는게 아니라 반대로 쯔빙글리가 말한대로 <그리스도의 표준과 규범>에 의해 교회가 정치를 기독교화 하는 것을 의미한다.(몰트만)
교회는 이 사회적 세계 속에 있는 제도로서 그리고 이 세계를 위하여 <비판적이며 해방을 주는 과제>를 갖고 있다고 메츠가 말한바 있다.(J.B. Metz, Zur Theologie der Welt, München/Mainz 1988, 107) 이러한 비판적 과제는 바로 정치적 과제라 할 수 있다. 구원을 선포하는 교회가 인간의 해방을 위하여 용감하게 외치지 않는다면 막스적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구원을 개인의 영적 지평에서만 강조하여 교회의 정치적 책임을 간과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세계는 사탄의 지배 밑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숙명주의적 무책임성이 교회 안에 만연해 있었다. 메시야적 희망을 교회가 담지하고 있다면 인간의 세상을 악한 세력에게 넘겨주지 말아야하며,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투쟁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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