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교회와 사회의 관계유형

교회와 사회 조회 수 4270 추천 수 15 2008.07.22 13:31:21
4장 교회와 사회의 관계유형
H. Richard Niebuhr의 <Christ and Culture>를 중심으로

1992년10월 어느 날에 휴거가 발생한다고 한국 사회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다미선교회>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그들을 비판한 정통 교회와 그들 사이에는 사실상 별로 큰 차이가 없었다. 기껏해야 종말을 시한부로 보는가 아니면 미정으로 보는가 하는 차이만 있었지 그 종말의 내용은 대동소이하였다. 이 땅의 모든 역사가 초자연적으로 정지되는 것을 종말로 보는 그들의 생각이나 요한계시록의 여러 묵시론적 표상을 사실적으로 말하는 교회의 가르침이나 내용상으로 다를 바가 없다. 대개 교회는 이 세계와 역사와 문화를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복음 찬송가 가사에도 있듯이 가능한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와 같은 자세로 이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
처음 기독교는 그런 묵시론적 신앙에 기초하고 있었다. 예수님 자신이 집을 나섰으며, 제자들도 가족과 직업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였으며,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그것을 허물라 삼일만에 다시 세우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승천 이후로 초대 교회는 어쩔 수 없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반문화적으로 복음에 충실하게 살아갔다. 비타협적인 자세로 인하여 로마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콘스탄틴 이후로 교회는 철저하게 세상의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하였다. 부패하고 죄 많고, 썩어 없어질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의 권력과 밀착하여 서로 힘을 비축하기 시작하였다. 교회 스스로 문화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다. 여러 제도와 도그마, 그리고 조직들이 문화적 교회의 성격을 갖는다는 말이다. 지금도 역시 겉으로는 세상의 문화를 거부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문화에 깊숙히 참여하고 있다.
문화와 그리시스도의 관계는 영속적인 주제에 속한다. 복음과 문화, 교회와 세계는 제거될 수 없는 현실이다. 세계가 아무리 번성하고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체로서 영원하다거나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처럼, 교회가 아무리 참된 진리라고 하더라도 세계를 제외한 채 존속될 수는 없다. 관점에 따라서 복음이 우위에 있기도 하고 혹은 세계가 우위에 놓일 수도 있다. 이 관계 유형을 리차드 니이버는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 톨스토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사회의 관습이 어떤 것이든, 또는 인간이 성취한 어떤 업적을 이것이 보존하고 있던지 상관 없이 그리스도가 이를 반대한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격한 것이나 로마가 초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이들의 <양자택일적> 자세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세기의 수도원 규정이나 소종파 운동은 세상을 포기하고 나오라고 가르쳤다. 구약을 통해서 보더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종족과 결혼도 하지 말고 가까이 하지도 말라고 가르쳤다.
몇 년 전에 연세대학교에서 장승절단 사건이 있었다. 기독교 써클 학생들이 교내에 있던 장승을 우상숭배라고 생각하여 절단해 버린 것이다. 초기 한국 기독교는 주일에 물건도 사지 않고 극장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지금도 째즈나 록이나 하비메탈 음악을 악마적이라고 하여 듣지도 부르지도 않는게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주로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이들이 이런 성향을 드러낸다.
문제점: 자연의 창조주, 역사의 지배자, 피조물에 내재한 영과 같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문제가 여기에 놓여 있다. 지나친 정신주의로 인하여 역사적 예수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2. 문화의 그리스도(Christ of Culture)- 리츨
그리스도가 문화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인간 문화사상 위대한 영웅으로 간주한다. 그리스도 자신도 문화의 아들로서 그 문화의 일부분이라는 말이다. 이들은 예수에게서 어떤 신적인 능력을 보는게 아니라 인간적인 면을 바라보고자 한다. 그의 도덕적인 가르침이야말로 새로운 정신문화를 심은 것이라고 말이다. 19세기의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를 이렇게 인간학적으로 보고자 하였는데, 그런 입장을 가리켜 <문화개신교주의>(Kulturprotestantism)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토착화>는 아마 그런 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예수님을 흑인으로 그리거나 아니면 한국 사람으로 그리는 일이 있다. 조금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이들이 사회참여 운동을 펴는 것도 역시 이런 계열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이 철저하게 이 세상과 그 문화를 변화시키고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복음이 문화에 철저하게 예속되는 경우이기 때문에 사회참여라고 해서 모두 이렇게 분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문제점: 그리스도를 아무리 세상에 적응시키려 해도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거침돌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문화에 대한 충성은 결국 십자가를 없애려고 할 것이다. 또한 이러나 자유주의적 복음 전도로서는 어떤 전도효과를 가져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19세기 독일에서 처럼 말이다.

3.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아퀴나스
이들의 주장은 제2의 유형과 비슷한 것으로서 그리스도는 문화적 열망을 성취시키고 진정한 사회 기구를 회복한 분이며, 동시에 그에게는 문화에서 산출되지 않으며 문화에 직접 공헌하는 것도 아닌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문화에 대해 <연속선>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불연속선>도 갖고 있다. 문화 속에 있는 인간을 향한다는 점에서 <연속선>이, 그리고 신앙이라는 비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불연속선>이 있다.
문제점: 이들은 이성과 계시를 종합하려한 이들인데, 이러한 종합주의는 필연적 오류가 따르게 된다. 그리스도와 문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번과 은혜 들을 한 체계 안에 넣어 버리려는 노력은 거의 불가피하게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며 무한한 것을 유한하게 하며,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이들의 시도에는 항구적 복음이 잠정적 문화에 휩쓸려 들어간 느낌이 들어 있게 되므로써 결국 문화적 기독교의 일종이 된다.

4. 역설적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바울, 루터
이들은 주로 제1 유형을 따르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이중적, 불가피한 권위를 모두 인정한다. 그러나 서로 합치되지 않는 두 권위이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만 복종을 할 수도 없고, 문화에만 복종할 수도 없다. 이 두 권위의 역설적 관계가 바로 그리스도인이 처한 이 세상에서의 삶이다. 따라서 그들은 일종의 이원론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양극성과 긴장성 안에서 인생은 역사의 피안에 놓여 있는 칭의의 희망 안에서 불안정하고 죄악된 인생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그 영에 사로잡힌 삶을 살았으면서도 이 세상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또한 루터도 <두왕국성>에 근거하여 이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문제점: 이러한 이원론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설득력을 갖느다 하겠다. 이원론은 기독교인을 반율법주의에 빠지게 하며 동시에 문화적으로는 보수주의에 빠지게 만든다. 바울이 니골라당을 책망했지만 본질적으로 율법으로 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루터는 농민전쟁을 부정하여 정치적인 보수주의적 입장에 선다.

5.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Christ as the Transformer of Culture)- 어거스틴, 칼빈
이들은 1, 4유형에 동조하여 인간본성은 타락되고 비틀려 있는데, 그것이 문화면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문화로 인해 전승된다고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제도에 대립된다. 그러나 1유형 처럼 그리스도인을 세상으로 부터 나오라고 하거나 4유형 처럼 초역사적 구원만을 바라고 참으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각가의 문화와 사회 안에 있는 인간을 개변시키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따른다. 이들을 <개변주의자>(conversionist)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원론자들과 비슷하지만 그들에 비해 문화에 대한 적극성을 갖고 있다.
이상의 유형은 어느 정도 도식적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신앙형태를 이런 틀에 짜맞출 수는 없다. 다만 전체적인 흐름을 분류하기 위해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순서를 정한다면 다음과 같다.
2유형 --- 3유형 --- 5유형 --- 4유형 --- 1유형
2유형은 가장 세상적이며, 1유형은 가장 비타협적이다. 그 사이에 이 두 관계를 조정하려는 입장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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