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마틴 루터의 두왕국론

교회와 사회 조회 수 6867 추천 수 18 2008.07.22 13:32:56
5장 마틴 루터의 두왕국론

인간이 살고 있는 이현실은 분명히 악과 선의 공존상태이다.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그리고 인간이 꿈꿀 수 있는 최상의 복지가 완벽하게 준비된 사회라 하더라도 악한 요인들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현상적으로 드러나 있다. 우리는 현대의 역사를 통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투쟁을 보았다. 양 진영에 공히 비인간성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이 사라질 기미를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악의 문제를 교회가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이해해야 하는가? 이미 구약의 묵시문학적 사고로 부터 초기 교회의 영지주의나 어거스틴적 세계이해, 그리고 2천년의 교회사를 통해 이 문제는 항상 교의학자들과 사상가들의 마음에도 떠날 수 없았다. 가장 전형적인 구도를 우리는 일단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의 두왕국론(Die Zweireichlehre)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가 이 과목 <교회와 사회>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마틴 루터의 두왕국론이 적절하게 상응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가능한대로 그의 신학적 구조를 충분한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다. 최소한 아래의 두 자료를 참고해야한다.
1. Ulrich Duchrow, Christen und Weltverantwortung - Traditionsgeschichte und systematische Struktur der Zweireichlehre, Stuttgart 1983.
2. J. Moltmann, Glaube und Politik, in: Das Experiment Hoffnung und Politik, 희망과 실험의 정치, 복음주의신학총서 13, 152-202.

1) 묵시론적 종말론
마친 루터의 두왕국론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한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당시 루터가 처했던 정치적, 종교적 상황 가운데서 제기되었던 세계와 역사이해이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그의 원래적 의도를 오해하기 쉽다. 지난 4백년 동안 루터의 두왕국론은 우익이나 좌익 양측으로 부터 신학적 근거로 채용되었다. 그 교의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이 세상의 질서를 거의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것일 수 있으며, 반대로 세상의 질서에 대한 하나님 나라 질서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단 우리는 두왕국론의 신학적 사고의 출발점이 무엇이었는지 편견 없이 살펴보고자 한다.
몰트만은 두왕국론의 신학적 사고의 출발이 묵시문학적 종말론에 있다고 설명한다.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에 속한 신부였기 때문에 어거스틴적인 전통을 계승하여, 이 세계를 마지막 때 까지 지배하는 악마의 나라를 대항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투쟁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묵시문학적 사고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과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역사관이다. 현재의 세계(alte Aon)는 멸망할 것이며, 머지 않아 하나님의 왕권적 통치로 이 세상에 새로운 세계(neue Aon)가 임할 것이라고 이스라엘은 생각하였다. 이러한 묵시문학은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공동체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케제만은 묵시문학을 ‘그리스도교 사상의 어머니’라고 일컬은 바 있다.
루터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땅의 날, 그리스도의 지배와 악마의 지배, 그리스도의 몸과 악의 몸, 믿음과 죄, 영과 육 등의 대립 가운데서 역사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 두 나라는 결코 공존의 관계를 갖지 못하고 나뉘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루터가 신이해 까지 이원론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아니며, 다만 피조물인 인간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모순과 투쟁에 대해 예민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도출하게 된 이원론적 세계이해이다.
분명히 이 세계의 악한 질서를 볼 때 우리는 두왕국론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지 모른다. 더구나 이 세상의 악한 질서, 혹은 선한 질서가 교회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으로 느껴질 때 더욱 그러하다. 교회는 다만 영적인 세계를 위해서만 봉사할 뿐이고 이 세상은 그 세상의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고 여겨질 때가 없지 않은 실정이다. 루터가 농민전쟁이 발생했을 때 농민들 보다는 귀족들 편에 섰다는 사실은 그가 농민들의 고통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두 질서를 인정한다는 그의 신학적 사고 때문이었다. 결국 그가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윤리와 그 구원에만 힘을 기울였지, 이 세상의 질서를 갱신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두왕국의 질서를 영원한 질서로 인정하는 묵시론적 세계관에 동의할 수 없다. 이미 타협할 수 없는, 혹은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영속적인 두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책임감이 소홀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두왕국론적 세계이해보다는 기독론적인 역사이해가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요청된다. 최소한 두왕국론은 기독론적으로 재설정될 때만 그 신학적 근거를 회복할 수 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악한 질서와 선한 질서가 분명한 리얼리티라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존재론적인 근거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그러한 갈등과 투쟁이 시작되었으며, 그 투쟁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참여하게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말하자면 선악의 구별이 본래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성에 의해 그 반대되는 허위와 악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2) 이중의 두왕국론
루터의 두왕국론은 두 가지 전망을 갖는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악마의 나라 사이의 대결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의 나라와 영적인 나라 사이의 구별이다. 몰트만은 이 관계를 아래와 같이 도식화하였다.
하나님의 나라
세상의 나라 영적인 나라
국가, 경제, 가정 설교, 신앙, 교회
법률, 이성, 폭력 그리스도, 복음, 성령
세속인간 그리스도의 인격 악마의 나라

A. 만일 영적 나라로 부터 세상 나라를 본다면 매우 선명한 구별을 얻게된다. 이쪽에는 영, 저쪽에는 폭력, 이쪽에는 신앙, 저쪽에는 행위, 여기에는 복음, 저기에는 율법이 있다.
B. 만일 하나님의 나라로 부터 악마의 나라를 본다면 영적 나라와 세상 나라는 긴밀히 접근한다. 두 나라를 통하여 하나님은 악마의 세력을 대항해 싸운다. 이쪽에 말씀과 신앙이 있고, 저쪽에 질서, 평화, 법이 있다.
C. 만일 두 나라의 차이를 본다면 그리스도인은 두 다른 나라의 시민으로 산다는 모순 가운데 살아간다. 이쪽에서는 산상설교의 복음에, 저쪽에서는 법률과 국가권력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이원론적으로 보지 말고 오히려 전체적인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함께 악마의 나라를 대항해 싸우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이럴 때 세상의 나라와 영적인 나라 사이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통전성이 회복될 수 있다.
두 나라는 루터에게 있어서 서로 경계를 짓고 서로에 의해 보충된다. 세상 권력은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 나라를 침해할 수 없고, 만약 그러한 일이 발생할 때 교회는 이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 동시에 세상 나라영역이 영적이 나라로 부터 제약받지 않는다. 루터에 의하면 복음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루터가 이렇게 세상왕국과 영적인 왕국을 구별한 반면에 칼빈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주권에 근거하여 세상왕국이 영적인 나라로 부터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차이가 루터의“만인제사장론”과 칼빈의“만인 왕권론”에서 드러나고 있다.
루터의 이러한 이원론적 구별은 하나님 나라의 권위를 약화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급선무가 교황청의 종교적 횡포로 부터 자유를 확보하자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명제에 걸맞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여진다. 아직도 시민의식이 뿌리를 박기 전이었기 때문에 세속의 폭력으로 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길은 이 양자의 구별을 분명히 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햇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의 의도대로 교회가 항상 세상으로 부터 확실한 자유의 영역을 제공받았다고 할 수도 없다. 끊임없이 교회와 세계는 서로 상대방의 영역을 침해하려고 투쟁하였다.
결국 루터의 두왕국론은 두가지 목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복음의 힘이 세속의 질서를 변화 내지 구원시킬 수 없다는 현실적 인식이며, 둘째는 세상과 영적인 지평을 나눔으로써 교회의 질서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3) 그리스도인 인격과 세속 인격
루터의 두왕국론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두 인격을 갖게 된다. 하나는 복음으로 인한 그리스도 인격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의 법과 질서에 의한 세속인격이다. 즉 복음은 세상 안에서 새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질서를 하나님의 질서로 보존하며 그 안에서 사랑을 실행하기를 요구한다. 이 세상에서는 결코 복음의 질서로 유지될 수 없으며 세상의 권위와 법률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루터가 농민전쟁 때 농민들 보다는 봉건주들의 입장에 섰던 것은 이 세상의 질서가 바로 봉건주들의 법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루터교회의 전통은 계속해서 교회를 세상의 부정한 권력과 타협하게 만들었다. 루터교회는 이 세상을 다스릴 그리스도교적인 준거가 없고 다만 세상의 질서만을 옹호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는 대단히 보수적인 역사이해에 머물러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갈 것은 루터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것이 단순히 보수적이라는 점 때문은 아니며 궁극적으로 교회를 보호하자는 생각이었다는 점이다.

4) 결론: 몰트만이 제기한 두 가지 문제점
A.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나님의 나라와 악마의 나라 사이에서 일어나는 투쟁에 관한 묵시적 종말론으로 서술하는 두왕국론이 옳은가? 루터는 하나님이 악마의 세계와 투쟁한다는 것만을 보았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죽음과 악마를 이기었다는 사실을 그 핵심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세계가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 못하고 단순히 악의 세력이 준동하는 것을 억압한다고 생각했다.
B. 두왕국론에 의하면 이 세상의 질서인 율법과 자연법의 타당성을 측정할 수 있는 준거를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루터의 두왕국론은 세상 윤리를 비판하지 못하고 다만 그것을 인정할 뿐이다. 루터의 두왕국론은 근본적으로 역사신학이지 윤리신학의 기초는 아니다. 즉 세상 전체의 역사를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라는구조 속에서 이해하려는 것이지, 이 세상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윤리적 기초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루터의 두왕국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신학적 대안을 몰트만은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개념과 바르트의 그리스도중심적 신학에서 찾고자 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에 겸하여 살고 있지만, 칼빈의 개혁주의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여 이 세상의 상황에 사는 것이다. 루터에게는 두 질서가 있으며, 칼빈에게는 하나의 질서만 있는 셈이다. 이러한 칼빈의 그리스도 주권론은 바르트를 중심으로 고백교회 운동의 신학적 뿌리가 되었다. 히틀러의 국가교회에 대항하여 고백교회는 1934년에 “바르멘 신학선언”을 제창하고 그리스도의 주권론을 가장 중요한 신학적 테제로 삼았다. 여섯 항목 중에 처음의 두 가지만 인용해 보고자 한다.

테제1. 성서 안에서 우리에게 증거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할 또한 생명과 죽음에서 신뢰하고 순종하여야 할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교회가 선포의 원천으로서 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그리고 그것과 병행하여 그 어떤 사건이나 능력이나 형태나 진리를 하나님의 계시로서 인정할 수 있고 또한 인정해야만 한다는 거짓 교리를 거절한다.
테제2.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의 약속(Zuspruch)인 것 처럼, 그러므로서 또한 이런 정도로 그는 우리의 전체 삶을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요청(Anspruch)이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의 속박으로 부터 나오는 기쁜 해방이 우리를 이 피조의 세계를 향해 자유롭고 감사한 봉사를 감당케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악한 세력에게 위임해 버릴 수는 없다. 한국교회가 이 세사의 질서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내버려 둔것은 직무유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질서와 세상의 질서가 있는게 아니라 오직 하나의 질서, 세상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질서만 있을 뿐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101 신학과 철학 5장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 신학 2009-03-27 4825
100 신학과 철학 4장 플라토니즘과 기독교 2009-03-20 6253
99 신학과 철학 3장 철학과 신학의 관계 유형 2009-03-13 4059
98 신학과 철학 2장 하이데거의 사유, 언어, 세계 [7] [1] 2009-03-13 4315
97 신학과 철학 1장 철학적 사유와 신학적 사유의 기초문제 [6] 2009-03-03 5359
96 신학과 철학 강의 안내 [2] 2009-03-03 4214
95 교회와 사회 13장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 [1] 2008-07-22 4236
94 교회와 사회 12장 종교사회주의 2008-07-22 3932
93 교회와 사회 11장 신의 현존 2008-07-22 3688
92 교회와 사회 10장 신의 현실성 2008-07-22 3768
91 교회와 사회 9장 세계 안에서 신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2008-07-22 3816
90 교회와 사회 8장 Wolfgang Huber의 “교회의 미래” 2008-07-22 3578
89 교회와 사회 7장 세계 속의 그리스도인 2008-07-22 3454
88 교회와 사회 6장 義認과 法 -칼 바르트 2008-07-22 3961
» 교회와 사회 5장 마틴 루터의 두왕국론 2008-07-22 6867
86 교회와 사회 4장 교회와 사회의 관계유형 2008-07-22 4269
85 교회와 사회 3장 세상을 위한 교회 2008-07-22 3913
84 교회와 사회 2장 교회론의 제지평 2008-07-22 3559
83 교회와 사회 1장 한국교회의 자리매김 2008-07-22 3984
82 교회와 사회 &lt;교회와 사회&gt; 강의 계획서 2008-07-22 4732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