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신의 현실성

교회와 사회 조회 수 3767 추천 수 47 2008.07.22 13:42:39
10장 신의 현실성

1. 신현실성을 찾으려는 몇 가지 시도들

우리는 1960년대의 사회상과 그 신학적 대응을 중심으로 생각해 왔다. 이 시대의 모든 학문적, 실천적 노력은 현실성(reality)의 확보문제였다.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해는 그러한 세속적 사유 속에 있는 이들에게 아무런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아무도 이 땅을 벗어난 저 하늘에서 참된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현실성이 배제된 기독교라는 인상이 그 당시 지식인들에게 각인된 기독교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칼 바르트나 불트만, 그리고 본훼퍼의 말씀신학만으로 그들이 만족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오늘날 인간의 인식능력, 인간의 과학적 능력은 옛날에 하나님이 할 수 있던 일들을 자신 있게 처리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고전적 하나님상이 그들에게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오직 유일하신 불변의 하나님상이 대단히 복합적 사회구조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현실로서 다가온다는 것은 70kg의 몸으로 커버린 아들에게 국민학교 때의 교복을 입히려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매쿼리는현대인들이 하나님의 현실성을 찾으려는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1) 물리학적 과정철학 - 여기에 포함될 수 있는 학자들은 화이트헤드, 사무엘 알렉산더, 하트숀, 그리고 약간 차이가 나지만 베르그송, 또한 경험철학자인 윌리암 제임스와 존 듀이 등이다. 특히 화이트헤드를 깃점으로 한 과정철학은 과정신학과의 연대 속에서 문명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어떤 본체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즉 “Reality is a Process.”이다. 이 세계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현실성을 취하려고 한다. 아직 이 세계는 완료된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중에 있으며, 그 과정만이 현실성이다. 만약 우리가 우주론적 차원에서 이 세계를 전망한다면 이들의 논리가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질 것이다. 이전의 기독교의 전통은 하나님을 이미 완전한, 그리고 불변하는 실체적 존재자로 가르쳤기 때문에 이들 과정철학이나 신학자들에게 큰 도전을 받는 것이다.
2) 실존주의 -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적 책임을 강조하는 실존주의가 아니라 거대한 존재론을 심층적으로 탐구한 학자이다. 그에게는 존재자(Seiende)가 중요하지 않고 존재(Sein)가 중요하다. 신학이 말하는 신은 존재자이기 때문에 신학은 근본적으로 철학과 같은 사유의 학문이 아니고 오히려 수학이나 생물학과 같은 학문에 속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그는 사유의 세계에서 신언급을 인정하지 않았다. 실존주의 신학은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역사적인 실존 속에서 인간을 분석하는 실존주의에 관심을 가는 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실존을 넘어서 존재론에 기초한 실존주의에 흥미를 갖는 이들이다. 첫번째는 불트만이 속하고, 두번 째는 틸리히가 속한다. 매쿼리도 역시 틸리히 처럼 존재론에 기초한 실존주의에 속할 것이다.
3) 전통적인 경험주의 -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주로 취급되는 경향인데, 이들은 실존주의가 내적인 면을 바라보는데 반하여 외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경향을 갖는다. 이들은 철저하게 실증적 가치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가시적인 물리의 세계 이외의 것에 대해 의심스럽게 생각한다. 이들이 과정철학과 다른 점은 형이상학적 세계를 간과한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과정철학과 신학은 물리적 세계의 그 과정이라는 원리를 통해서 그 물리의 세계를 넘어서는(Meta-Physik) 현실성을 모색한다고 보아야 한다.

2. 무신론적 도전과 철학적 시도에 대한 대답

유신론적, 혹은 무신론적 기독교 비판은 기독교 신이해의 현실성 문제에 직결된다. 현실성 없는 이상적 신이해가 현대인들에게 납득되기 어렵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서 있다. 이러한 비판의 공통점은 첫째, 이 세계의 시간과 역사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며, 둘째, 자연과학적 현실을 존중해야하며, 셋째, 일상의 경험을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이러한 세계현실성을 배격한 채로 하나님을 아무리 논리적으로 변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극단적 관념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인간과 세상과 역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길을 우리 기독교가 제시해야만한다. 결국 신학은 인간론과 사회학과 역사철학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주변학문과의 솔직한 대화를 통해서만 우리는 신학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이러한 작업을 신학의 보편성이라고 일컫고 있다.
교회와 신학은 더 이상 성역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는 안된다. 이 세상의 인간들에 대해, 그리고 그 인간들의 경험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외치는 하나님이란 하늘의 세계 안에서나 통용되는 존재자로 남게되고, 결국 무신론적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기독교 비판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대응해야할 것이다. 하나는 그것의 긍정적인 면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즉 적극적으로 그 비판을 받아들이는 것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의 전통적 신이해가 전달상의 문제이던지 아니면 교회의 실천에서 문제가 발생했던지 현대정신의 비판은 상당한 부분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우선 앞서 말한대로 기독교 신이해에 있어서 그 현실성의 부족은 우리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 안에서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거의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소극적인 자세를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개인의 성격이라기 보다는 교회 안에서 인식되고 있는 신이해가 그러한 태도를 야기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흔히 부르는 복음노래의 가사처럼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라는 신앙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세상이 어떠허게 되던지 자신만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된다는 사고가 교회 안에서 지배적이다. 비근한 예를 다시 들자면 1992년도에 한국사회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다시선교회의 시한부종말론은 교회의 비세상성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들은 10월 어느날 휴거된다고 믿었으며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점심밥 싸들고 다니면서 전파했다. 그러한 구원론, 그러한 세계이해, 그러한 우주론이 한국교회 안에, 그리고 전통적으로 일반 교회 안에 자리잡고 있는 신앙의 내용이다. 다미선교회의 문제는 휴거의 날자를 못박았다는 것 뿐이자 기본적으로 세계이해는 별로 큰 차이가 없다. 인간의 과학, 시간과 공간, 그리고 모든 경험을 무시하는 휴거론은 일종의 사이비 신앙이며, 따라서 기독교 비판의 주요 이유가 된다. 이런 면에서 현실성이라는 각도에서 제기된 기독교 비판은 오히려 기독교를 건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비판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더큰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시대정신이 안고 있는 그 한계를 직시하고 그들의 제안을 선별적으로 채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세속정신이 초월의 세계를 무가치하게 여긴다고 해서 교회가 그러한 생각대로 따른다면 우리는 작은 것을 얻기 위하여 더 큰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 교회가 중요하게 전승해온 하나님 이해, 그것의 초월성, 그것의 영원성, 그것의 종말론적 성격, 은혜와 심판의 하나님 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교회가 말하는 성서의 하나님은 세속정신에 의해 결코 침해당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능가할 것이다. 휴매니즘은 인간에서 시작하는게 하니라 하나님의 구원론, 그의 계시론에 철저할 때 발생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3. 삼위일체론적 신으로서의 신현실성

하나님의 현실성은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론> 안에서 확보된다. 삼위일체론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투쟁을 근본적으로 무효화 시키고,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육신 하신 하나님, 생명의 영을 통해 인간을 만나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성서적, 그리스도교 전통적 신이해이다. 레슬리 드와트는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의 궁극적인 기초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통일성(unicity)으로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發現(self-communicating procession)으로서 생각되어야만 할 것이다.”(The Future of Belief, 143.)
그리스도교는 신이해에 있어서 유대교와 차별성을 분명히 갖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유일하고 불변한 실체로서의 존재자라기 보다는 예수를 통하여 역사에 참여하고 종말론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능력이다. 그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존재이유를 갖는 이가 아니라 인간구원, 나아가서 우주론적 구원을 지향하므로써 자기를 드러내는 분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내재성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며, 그 내재성은 경륜성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는 변증법적으로, 참된 하나님 그리고 역사와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가장 독특하게 기독교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신학적 개념이다.
하나님의 절대성이란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이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운명과 우주의 신비를 주관하신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우리는 악의 존재 때문에 다시 한번 자기모순 가운데 빠질 수 있음을 상기해야한다. 만약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을 말할 수 밖에 없다면 어떻게 악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가? 몇 가지 변증학이 시도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오늘의 기독교 비판을 모두 입다물게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절대성과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강조하려면 악의 근원으로 인해 이원론에 휘말려 들어달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해서 구원론과의 관계성 속에서 새롭게 인식해야한다. 하나님의 절대성은 모든 것을 혼자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절대성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필요없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성을 이 역사에 의존하시는 분이다. 인간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교회의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인 것 처럼 하나님은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 역사 안에 자신을 의존시키는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절대성을 유지한다.
마지막으로 판넨베르그가 말하는 ‘미래적 존재론’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현실성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실체론적 형이상학은 하나님을 그저 저 높은 곳에 앉으사 인간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분으로 설명하였다. 그분은 이미 자기 존재성을 완전하게 갖추신 분으로서 아무런 도움 없이, 그리고 홀로 완전하게 존재하는 분이라는 말이다. 판넨베르그는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에 완전한 존재가 아니며 미리에 그 존재가 드러나는 종말론적 존재라고 말한다. 아직은 모든 사물이나 인간, 그리고 그 세계와 역사는 잠정적이며, 하나님도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때이다. 하나님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안다는 것은 미래, 즉 종말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판넨베르그의 역사신학과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의 차이는 종말로 부터 ‘오시는 하나님’과 과거에서 미래로 ‘되어가는 하나님’에서 알 수 있다. 판넨베르그의 미래적 존재론은 하나님이 부족하다거나 완전하기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의 드러남이 미래에 가능하므로 그 때 까지 하나님 이해는 개방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인 반면에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의 섭리와 절대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순히 모든 존재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발전되어 가는 그 신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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