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종교사회주의

교회와 사회 조회 수 3936 추천 수 27 2008.07.22 13:46:34
12장 종교사회주의(Religiöser Sozialismus) 94.4.28.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질문은 그리스도교사에서 계속되어 왔으며, 이번 학기에 우리가 논의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20세기 초에 스위스를 중심으로 종교의 사회적 역활을 중요하게 생각한 그리스도교 운동이 있었다. 종교의 현실성을 간과하지 않으려 노력한 종교사회주의였다.1 종교사회주의자들은 19세기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쉴라이에르마허의 영향 가운데서 종교경험에, 그리고 칸트의 영향 가운데서 윤리성에 정초하고 있음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사회개혁과 사회복지를 향한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미 사회는 산업혁명 이후로 노동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고, 공산주의가 프로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연대하고 있었다. 교회는 사회의 문제를 교회 관심 밖으로 내팽개쳐 버릴 수만은 없었다. 종교사회주의*는 교회가 사회주의와 나누려 했던 대화였다. 종교사회주의 운동은 신정통주의에 의해 교회의 중심무대로 부터 밀려나게 되지만 그 전통은 매우 뿌리가 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논의하던 주제는 오늘도 여전히 계속된다고 할 수 있다. 정치신학이나 해방신학, 혹은 민중신학도 역시 본질적인 면에서 교회의 사회적 기능에 터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종교사회주의’라는 명칭이 그 운동으로 분류되는 이들을 참되게 드러낼 수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통일된 신학이나 조직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독특하게 자신들의 일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운동이 오랫 동안 지속하지 못했던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들에게 공통되는 점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었다. 특히 블룸하르트의 설교와 실천을 준거로 삼는다는 점도 일치된다. 이 운동에는 Eugster-Züst, Kutter, Ragaz, Barth 같은 스위스인들이 참여했다. Eduard Buess, Markus Mattmüller, 손규태역, 예언자적 사회주의11ff.참조.

이러한 운동이 미국에서는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를* 중심으로 한 ‘사회복음’(the Social Gospel)이었다. 그는 1907년에 출간된 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로 당시 신학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또한 그가 운명하기 직전에 A Theology of the Social Gospel(1917)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 하였다.

*라우쉔부쉬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0년 동안 미국 프로테스탄티즘을 사회적 기독교라는 관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당시 ‘땅위의 하나님 나라’라는 진부한, 그러나 그 당시에는 선구자적이었던 개념에 ‘악의 나라’라는 반대개념을 추가시켰다. 그의 ‘Kingdom of Evil’이란 개념은 그의 사상에 자유주의 신학의 사회적 비평에서 결여된 현실주의를 첨가한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미국 사상에 그 예상이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예컨데 Bushnell은 그의 책 Nature and the Supernatural에서 라우쉔부쉬 보다 더 깊은 신학적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복음주의적 반노예운동은 개인의 죄성과 덕성에 대항하는 남북의 ‘유기적 죄’라는 개념을 묘사하였다. Beecher는 이 문제에 특히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Fritz Buri, 변선환역, 현대미국신학, 전망사, 556참조.

종교사회주의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서 진보적인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된 것으로서 종교가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보수우익적인 입장에서 합리화 시켜주는 운동이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독일의 종교사회주의는 국가사회주의로서 히틀러의 신성로마제국건설을 종교적으로 강화시켜 주었으며, 스위스에서의 종교사회주의는 이러한 국가사회주의를 반대하였다. 이런 면에서 ‘정치신학’도 구분되어야 한다. 정치를 정당화 시켜주는 정치신학과 정치를 비판하는 정치신학이 그것이다. 콘스탄틴 이후 중세기 교회는 전자의 정치신학을, 현대의 정치신학은 후자의 정치신학을 견지한다.
스위스의 종교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세 명의 신학자를 살펴보도록 하자. 블룸하르트와 라가쯔와 바르트가 바로 그들이다.

1. Christoph Blumhardt

블룸하르트는 1980년 부친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가 사망한 이후 부친이 세운 Bad Boll의 그리스도교 목회센터의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그리스도를 프로레타리아에게 전하려 진력한 인물이다. 그는 현대의 맘몬주의를 직시하면서 오직 하나님만이 이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사회민주주의’에 참여하여 하나님 나라를 프로레타리아 세계에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자기가 자라난 전통을 파기해 버림으로써만 이러한 길을 갈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당시 사회민주당의 프로그램은 “무신론”, 교회와 국가의 분리, 그리고 전체 지배적인 사회질서의 변혁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가 정당정치활동을 회고하면서 피력한 다음의 진술을 보자.
내가 아직 지방의회원으로 있던 시절에 이러한 사람들의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커다란 이점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신작로를 닦는 작업에 있어서 이 영적 삶이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인식, 특히 인간을 오늘도 여전히 억압하고 그 삶을 부패시키는 물질적 관계에 대한 인식에서 부터 생겨나야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 처럼 보였다.(예언자적 사회주의, 49.)

그에게 있어서 종교적 경건성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했다. 인간사랑이 중요했다. 그가 1898년 Bad Mergentheim에 요양차 갔을 때 부터 사회주의적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하였다. 톨스토이, 베벨, 고르키 등의 책을 읽고 사회주의적 연대성을 발견했으며, 결국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사회주의 안에서 더 큰 하나님 나라 운동을 찾아보려 했던 블룸하르트는 정당활동에서 역시 소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에서 정치도 교회와 똑같이 독불장군 처럼 보였다.” 민중은 모이기는커녕 갈라졌다. 그는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을 존경하지 않았던 것 처럼, 교조적인 사회민주주의 체제와 그 대변자들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지방의회에서 6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재선될 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1906년의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문대에서 많은 장애요소를 만났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는 “노력”(Machen)과 “기다림”(Warten)을 대안적인 관계로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과의 깊은 연대감 때문에 정당정치적 투쟁장으로 뛰어들었으나 그 동일한 연대감 때문에 다시금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죽은 다음에 사민당이 출판한 초도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말년에 한 침묵의 인간으로 처신했으나 그의 심장은 여전히 억압받는 이들의 일로 뜨겁게 맥박쳤다. 그의 종교의 일부이기도 했던 사회주의에 그는 언제나 신실했다.”
골비쩌는 블룸하르트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3 그의 기독론의 특징은 우리와 동등케 되는 예수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의 종말론은 철저종말론이다. 이것은 역동적 기론론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와의 신앙적인 관계가 개인적인 연결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 사고”(Reich-Gottes-Gedanken)을 통해 내용적으로 채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사역은 보편성(Universalität)에 그 특징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사랑하신다. 그는 말하기를 “나의 일은 세계의 일에 속한다.”고 하였다.
2) 이 보편성은 급진적(혁명), 포용적(화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귀착된다. “예수는 저주가 아니라 구원의 심판주로 오신다.”
3) 사랑은 항상 다른 이를 향한 것이다. 하나님은 무신적인 것 까지 사랑하신다. 신앙이란 예수 안에서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사랑의 사역은 이 땅을 근거로 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피안적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영성주의(Spiritualismus)를 배격한다.

이러한 블룸하르트의 신앙을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a. 세계사에 대한 관심: 그는 역사적 낙관론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위로 부터가 아니라 점진적인 역사발전에서 다가온다.
b. 하나님의 사랑: 세계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피조물을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충만케 된다는 것과 상관관계를 갖는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발전과 하나님 나라를 통합시키는 범주이다.
c. 낙관론적 창조론: 하나님 나라는 초자연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적인 것(땅)으로 다가온다. 모든 창조는 자연적인 것이며 선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블룸하르트는 생태학의 문제를 예언자 처럼 언급하고 있다. 우리 삶의 뿌리인 이 땅에 대한 책임감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말이다.

블룸하르트는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독단적인 인물(Einzlgänger)였다. 복음선포에 있어서나 정치적 행동에 있어서 독단적으로 처리하였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이해, 즉 현세적, 사회적, 정치적 결과로 이루어 진다는 사고도 역시 단편적인 것으로 남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중요성도 역사적으로 제한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고는 우리에게 더 없이 중요하다.(H. Golwitzer)

2. Leonhard Ragaz(1868-1945)

라가쯔는 20세기의 중요한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 하층계급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유일한 사람이다. 바젤, 예나, 베를린에서 대학공부를 하고 25세가 되었을 때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했다. 그러나 1895-1902 동안 Chur에서 市목사직을 맡았으며, 1902년에는 바젤의 큰 교회 목사가 되었다. 1903년 4월18일에 행한 설교에서 별돌공과 건축공들의 파업에 대해 언급하므로써 자유주의 신학으로 부터 혁명적 사상으로의 변화를 예고해 주었다. 마22:24-40을 본문으로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설교를 했다.

사회운동은 오늘날 우리들 중에서 일어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운동은 종교개혁 만큼이나 그리고 불란서 혁명 보다 더 중요한 기존의 제반 관계들의 일대 변혁이다. 공적 그리스도교가 복음의 핵심으로 부터 우러나온 새로운 세계의 생성과정을 냉정하게 이해함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을 원한다면 세상의 소금은 그 맛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4

라가쯔는 막스와 Zombart를 따라 자본주의를 정확하게 정의한 최초의 사람이고, 또한 노동운동이 갖는 세 가지 고전적 방향, 즉 노동조합적, 정치적, 협동조합적 방향들을 확정했고, 그 각각을 서로 구별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사회주의적 실천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현재의 경제질서를 변호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이 질서의 계속적 존속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존의 경제질서는 “모든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복음이 제시하는 삶의 질서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급기야 라가쯔는 1906년 바젤 목사대회에서 스위스 개혁교인들의 한 이정표가 될만한 강연을 했다. 그것은 곧 사회윤리의 요청이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당성하려면 예언자적 설교, 즉 사랑에 바탕을 둔 정의의 설교가 우리 가운데서 샘 처럼 솟아나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낡은 교회의 울타리들이 이 강한 도전을 감당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 울타리는 무너질 수도 있으며, 그럴 경우 우리는 곧 하나님이 허락한 교회 밖에 서게 된다. 교회는 우리가 근래에 듣고 있는 바와 같이 옛 것이나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 매우 새롭고 시급하며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를 멀리하는 사태가 와야 한다는 것이다.5

1906년의 목사대회에서 설정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적 방향과 실천목표는 그 당시 모든 그리스도 교회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 쿠터와 라가쯔의 적극적 참여 때문에 가능한 그리스도교 운동이었다.

라가쯔는 레닌의 폭력적 사회주의 건설에 대해 비판하였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과 1919년 10월의 볼쉐비키 혁명에 대해 라가쯔는 “동지들이 그것을 타락시키지만 않는다면” 영향력이 지대한 즐거운 사건이라고 일기에서 쓰고 있다. 결국 러시아 혁명은 민중들의 의식전환 없이 무장화로 손쉽게 성취된 사건이기 때문에 라가쯔의 우려대로 혁명이 폭력으로 변했으며, 그것이 먼 후일 실패를 갖오게 될 맹아였다. 라가쯔는 노동자 교육과 매일매일의 정치적, 노동조합적 협정이라는 어려운 노력이 없는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에서 실제적 노동운동은 거의 혁할을 가지 못했다는 것을 라가쯔는 알고 있었다. 볼쉐비키 혁명은 낡은 사회의 권력수단들과 더불어 그것들의 폭력원리마자도 넘겨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새로운 사회, 진정한 인간적인 사회주의(menschlicher Sozialismus)의 건설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라가쯔의 다음의 진술은 그의 역사적 안목과 사회분석력이 얼마나 투명한지를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보면 사회주의도 아닌 이 맹목적 사회주의가 자기의 가장 악한 원수가 되어야 했을 세력과 야합하여 그것에 승리를 안겨주고 또 그것에 의해서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게 된다. 이 사회주의가 지난 몇 달 동안 러시아에서 행한 것은 사회주의의 파괴를 의미하며 이 상처는 쉽게 고쳐질 수 없는 것이다. 무기를 버리지 않고 그것을 소유하고 그것을 내전이나 계급투쟁에 사용하려고 하는 사회주의란 모든 고귀하고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는 자기자신의 대의를 져버림으로 몰락했다.6

라가쯔는 이 혁명과 전대의 시기, 위기의 시기에 여덟 권의 저서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본래적 메시지를 회복시키려 했다. 그 시기는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초판(1919)과 맞물려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하심에 직면하여 피동적인 자세로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동역자로 함께 참여하므로써 그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에게 의지하므로써만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의존은 인간을 능동적으로 만든다. 라가쯔는 초기의 사회민주주의를 옹호하다가 러시아의 폭력적 혁명 때문에 멀리 했다가 그들이 폭력을 포기하자(스위스, 독일) 여전히 그들의 편에 섰다. “전에는 우리의 길은 사회민주주의에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었고 또 사회민주주의의 잘못된 점들을 아픔 심정을 가지면서도 참고 용납하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가 갈 길은 더 이상 프로레타리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 나라, 오직 그것만은 대변하는 것이다.”

라가쯔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네 가지 요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우리는 막시스트가 아니다. 라가쯔는 막스의 사회분석과 사회투쟁을 인정한다. 그것이 메시야주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스주의는 개개의 인간을 하나의 일반적인 권력에 제물로 바치는 체제들 중의 하나이다. 목적을 위하여 거침 없이 폭력을 사용하는 권위주의적 체제들이다. “우리는 인간의 영혼에 이기주의과는 또 다른 보다 깊고 보다 강한 힘들이 작용하고 있으며 또 최고의 세계법칙은 ‘존재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 정신이 세계의 주인이지 질료가 그 주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나님이지7 세계가 아니다.”
2) <계급투쟁>은 그것이 “역사라는 거창한 사실의 묘사, 즉 현재를 총체적으로 서술하는 한에서만 승인된다.” 노동운동이 프로레타리아를 질곡으로 부터 구해내기 위한 투쟁, 곧 새로운 세계로의 돌진으로 이해될 수는 있지만 계급투쟁을 전술적인 원천으로 삼았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사회주의는 계급투쟁에 호소해서는 안된다.
3) 도그마와 전술적 원칙으로서의 계급투쟁만이 아니라 <사회주의는 전적으로 계급의 문제라는 명제>도 부정한다. “사회주의는 만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도 될 수 없다.”
4) 종교사회주의자들이 막스주의자들 및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결별하지 않으면서도 구별되는 최종적 기준은 사회주의란 모름지기 ‘전통적인 정당들이 해석해 온 것을 능가한다’는 신념이다. 라가쯔는 사회민주주의를 통한 하나님 나라에서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대변하는 방향을 선회하였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은 경제, 사회, 정치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공동체와 신학, 곧 신앙이해의 여러 측면을 포함한다.

<다음은 라가쯔의 Christliche Revolution, in: Eicher, 1924, H.1, 38-50을 요약 번역한 것이다.>

혁명은 이미 시대적으로 지나간 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그 중심부에 서 있다. 우리가 지금 까지 경험했던 것 보다 더 강한 혁명이 기다리고 있다. 거리에서 데모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큰 재앙 혹은 사회의 전복이라 할만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만하나? 우리는 혁명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그렇다”고 대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강제적인 전복(die gewaltigste Umwälzung)이라고 말할 수 있기 대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이다. 기존질서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삶을 향한다. 기존질서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미워하고 이의 붕괴를 기다린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가장 위대하고 철저한, 그리고 위험한 혁명가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강압적인 선봉자들(der gewaltigsten Vertreter des ReichesGottes)이다. 이런 면에서 젊은 블룸하르트는 우리의 귀감이 된다. 거룩한 영만 활동할 수 있다면 우리는 유혈혁명(eine blutige Revolution) 까지도 동의한다. 잘못된 정부가 타도되는 것은 당연하다. 새 질서 건설에 우리는 기꺼이 참여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폭력에 대한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무엇이 폭력인가? 그것은 때로 선하게, 때로는 악하게도 쓰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부해야 할 폭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유혈이냐, 무혈이냐에 따라야 하는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살인도 가능한가?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루터도 사랑의 폭력을 인정했으나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생각과 뜻이 있었다. 우리는 사회투쟁에서 사랑의 폭력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예수는 ‘Nein!’이라고 말한다. 사랑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세상의 방법으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그리스도교적인 폭력은 적그리스도적이다. 이상주의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록 그 폭력이라는 악령은 더욱 위험하다.
소위 말하는 계급투쟁(Klassenkampf)은 고상하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오직 하나의 계급만을 위해 싸운다. 증오와 폭력이 그 무기이다. 이 일에 우리는 동참할 수 없다. 정치적 공산주의는 영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우선 폭력으로 구조적 경제질서를 바꾸고, 그 후에야 그리스도가 지배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신다. 즉 하나님의 혁명(die Revolution Gottes)이 바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길이다. 교회가 이런 하나님의 혁명에 앞장 서지 않는다면 결국 폭력을 수반하는 혁명이 발생한다. 이것은 악마의 혁명(die Revolution des Teufels)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교적 혁명은 그리스도교의 혁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이 바로 혁명의 원인이 된다.
어디에 그리스도교의 혁명이 있는가? 두말 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혁명이다. 그는 이 세상을 뒤집는 분이며 끊임 없이 혁명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이것은 신비한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 즉 정의와 사랑의 질서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실성이다.
오늘의 비극은 그리스도와 혁명이 나뉘어져 버렸다는 데 있다. 어떤 이는 하나님만 믿지 땅 위에 임하는 그의 나라는 믿지 않고, 어떤 이는 그 반대이기도 하다. 이 두 입장은 함께 통합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혁명의 길을 발견할 수 있는가? 만일 하나님이 살아있는 분으로서 진정한 혁명을 의미한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실성이 다시 새롭게 경험되어져야 한다는 기준에서 세계의 혁명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폭력신앙이 아니라 구체적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혁명이 완성된다는 신앙이 요청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혁명이 완성되는 곳을 타개점(Durchbruchstellen)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런 곳은 어디인가? 소유에 대한 질문이 이에 대한 대답이다. 아무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두 공유하는 그런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공산주의, 초대교회의 공산주의이다. 이 공산주의를 실현해야만 평화가 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점에서 바로 타개의 길(Durchbruchwege)이다. 어떤 원칙이나 법이 필요한게 아니다. 이렇게 볼 때 계급투쟁이란 것도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하나님의 속죄(Versöhnung Gottes)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
또 하나의 발전된 타개책은 다음과 같다. 종교와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히 구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혁명이 완성되려면 그리스도 사건은 대리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그 무엇(eine neue Art der Vertretung der Sache Christi)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그리스도를 대리할 수 있을까? 교회는 나에게 이 무신적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싸움에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일은 전문적인 종교인들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중심부, 그 일터에서 발생한다. 그리스도의 혁명은 그의 대리성을 삶의 구체성 안에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종교개혁을 통해 현실적 세계를 뒤집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온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의 교회로 부터 벗어나 하나의 그리스도-세계(Christus-Welt)가 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적 혁명 아닌가!

3. K. Barth(1886,5.10-1968.12.10)

1) 바르트의 종교사회주의 운동-초기의 바르트
1911년 25세로 자펜필의 목사로 청빙받은 바르트는 진보적인 종교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자펜빌에서 아직 조직화 되지 못한 방직공업 노동자들의 참상을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이러한 일에 참여하므로 치루어야 할 어떤 댓가도 각오하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목격하고 있는 계급갈등에서 나는 처음으로 현실적 삶이 당면한 문제성에 접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공장법제정, 보험제도, 노동조합강좌 등을 다루게 되었고, 또한 정서적으로도 노동자들 편에 서서 열렬히 투쟁하는 입장을 취했다.”그의 노력으로 자펜빌의 노동자 760명 중에 587명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되었다.
노동운동은 정치활동을 배재하고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라가쯔가 그랬던 것 처럼 1915년에 사민당에 입당하였다. 당연히 그 지역의 자본가들은 바르트를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공장주들과 계속된 갈등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적대자들은 “빨갱이 목사”를 교회로 부터 몰아내려고 하였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더욱 바르트를 추종하게 되었다.
바르트의 사회주의적 활동의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노동자교육이었다. 자펜빌에 있는 동안 43편의 논문과 강연을 출판했다. 그의 기본적 노선은 그리스도교회의 사회주의적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참된 사회주의란 그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예수가 만든 것이다. 1914년 “복음과 사회주의”라는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회주의적 요구들은 복음서의 한 중요한 부분의 응용이라고 생각하며 또 그것들은 복음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고 믿는다.”
1921년에 괴팅엔 대학교 종교개혁신학부의 명예교수로 떠난 이후 그는 변증법신학과 교회교의학을 중심으로 활동하므로써 종교사회주의로 부터 일정한 거리를 갖게 된다고 볼 수 있다.

2)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K. Barth, Das Vaterunser, 62-71 발췌요약)
우리는 이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갖게되는 모든 현실성(Wirklichkeit)의 종말론적인 본질관계를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한 개혁자들 보다 더 나아갈 수는 없지만, 그들의 가르침을 보다 낫게 구성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 나라는 신약성서 안에서 볼 때 이 세상의 삶이며 목적이다. 그 삶과 목적이 바로 창조자의 의도와 부합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 나라는 죄로 인해 발생하는 위협에 대항하는 방어물이며, 이 세상에 잠복해 있는 죽음의 위험과 파괴성에 대항하는 방어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위협들은 피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죄를 극복하는 최종적 승리이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세상의 사면이다.(고후5”19). 이 사면의 결과들이 여기에 있다. 즉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Neue Äon),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평화 안에 돌입한 것이며, 하나님으로 부터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이며, 창조자의 정의이며, 의롭다 인정하시고 승리하시는 주님의 정의(Gerechtigkeit)이다. 이 세상의 마지막과 그 목적은 와의 나라(Königreich)가 오시는 것이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Dein Reich komme! 분명한 것은 우리가 충만한 새로움에 역행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들은 우리의 가능성을 끊임 없이 뛰어넘어가고 있다. 우리 자신인 모든 것, 그리고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가장 좋은 조건들 밑에서, 그리고 그 자체의 우험 밑에서 위협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해방, 모든 승리, 모든 속죄, 그리고 중생이 필요하다. 왕의 나라가 오심은 우리의 능력과 무관하게 완성된다. 우리의 존재와 가능성의 공간인 창조에서와 같이 그의 오심을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있어서 우리는 무능력하다는 말이다. 나라가 임함은 다만 우리 기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완성할 수 있다. 모든 충만케 하는 행위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산 결정적인 칭의 안에서. 세상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세상의 정의와 평화가 문제이다. 이것은 그분의 활동으로 인한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이 사건의 시간이 시작되도록 종을 우리소서!
그런데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것은 이렇게 기도한 사람이 이 나라를, 이 생명을, 이 정의를, 이 새로움을, 이 속죄를 알고 있다는 것과 또한 이러한 것들에 낯설지 않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도하는 그것에 왕의 나라가 벌써 임박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됨 안에서, 그리고 친구됨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이 아주 특별한 상태에 우리는 직면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이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당신의 나라는 벌써(schon) 임했다. 당신은 우리 사이에 그것을 세우셨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눅17:21)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채우셨다. 당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과 더불어 이 세상을 속죄했다. 이처럼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사도바울은 이 속죄에 대해 하나의 미래에 일어날 사건인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용서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이미 발생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합법적으로 죄와 그 모든 결과들을 없이 하셨다. 그 안에서 당신은 모든 낯설은 그리고 원수와 같은 폭력을 없이 했다. “나는 벼락처럼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눅10:18)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위협의 죽음에 이르는 위험을 당신은 극복했다. 당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죽지 않는 새로운 인간이 되셨다. 이 일은 발생했다. 그 안에서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현재적으로 현재적으로 되었다. 완전한 깊이에서, 그의 주권의 전체성 안에서, 어느 것에도 축소됨이 없이, 비밀됨이 없이 그렇게 되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종말과 목적에 도달했다. 즉 종말과 심판과 죽은 자의 부활, 이 모든 것이 벌써 그 분 안에서 발생했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에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그런 사건이 아니다. 이미 우리 앞에 일어났다. 그것은 역시 하나의 과거의 사건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방인에게 선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교회가 이미 오신 주님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교회는 성탄절, 성금요일, 부활절과 오순절을 기억한다. 이것들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그것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므로써 우리가 하나의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정확한 것이며, 이미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성육신을 전하며, 오신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 슬프고 삭막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궁극적인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된 그 곳에, 그분이 오신 그곳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이 궁극적 말씀은 선포되었다. 우리는 이 사건 위에서 살아간다. 그 외의 다른 더 이상의 것은 없다. 성탄과 부활로 시작되는 그 시간을 더 이상 역행시킬 수 없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더 많은 이유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거기엔 다른 반대가 끼어들 수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성탄절과 부활절과 성령강림절로 시작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활동이 다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과거로서만, 이미 되어진 것으로서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과거를 돌아봄으로써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 앞을 내다보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미래는 과거의 기억할 만한 것을 가져온다는 것,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미래가 된다는 것, 오신 우리의 주님은 다시 오신다는 것,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현재 모든 것을 덮고 있는 이 덮개를 치우도록 간구한다. 탁자를 덮은 덮개와 같은 그것을 치우도록 말이다. 탁자는 그 밑에 있다. 우리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도록 이 덮개를 치울 수는 있다. 우리는 왕권의 현실성을 아직 가리고 있는 이 덮개가 치워지도록 간구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변화된 모든 것에 이 현실성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다. 하나님의 완전한 깊이는 거기에 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우리의 가족, 교회의 삶과 정치적 사건들 - 이 모든 것은 덮개이다. 현실성은 그 뒤에 있다. 우리는 아직 얼굴과 얼굴로 맞대어 보지 못하고 거울에서 처럼 불분명하게 영상만 본다. 신문을 보아도 확실하게 알지는 못한다. 우리가 이 현실성을 볼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적으로 되어야 한다. 흡사 그가 부활절에 가시적으로 된 것 처럼, 그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존재하게 된다. 그는 벌써 이 새로운 인간의 머리가 된다. 새로운 세계의 머라거 된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아지 보지 못한다. 우리는 보기를 기다린다. 즉 우리는 신앙의 방랑 가운데 놓여 있다. 아직 보는 것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즉 그의 삶, 죽음,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명성은 우리 전체 위에, 우리의 삶과 모든 것 위에 펼쳐져 있음이여! 이 세상적 삶의 비밀은 벗겨졌음이며! 이 비밀은 벌써 들어났다. 그러나 우리가 다만 보지 못할 뿐이다. 거기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소동, 이 격정, 과욕, 의혹으로 인해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개혁자들의 해석을 채택하고자 한다. 최소한 이 새 시대의 첫 발자취, 이 승리의 첫 발자취를 보도록 우리에게 은총이 내려지기를 기도한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아침 햇살이 우리를 허락하여, 우리 스스로 또한 다른 이들과 함께 역사의 사건들을, 바로 그 관점에서 무엇이 우리로 부터 떨어져 나가는지를 볼 수 있도록 기도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일반적 계시와 묵시(벧전1:3-12)가 주어졌다. 오신 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생동적이 되기를! 이 희망을 갖고 살도록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 시대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위한 희망 없이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없다. 우리가 최소한 과거의 모든 우리의 활동이 전체적으로 불충분했다는 것을 약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서로 투쟁하는 많은 싸움 속에서 아주 작은 존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의로워 지지 않은 우리의 개인적, 심리적 갈등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이것을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 오시는 왕권을 보아야 한다. 이 일에 심리학자들이 우리를 도울 수는 없다. 어느 날 태양이 뜨고, 인식의 선물이 임하게 된다. 우리는 오직 부활절이 이 세상에서 일반적 사건이 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때에 우리는 심리학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우리가 모두 건강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모든 슬픈 일이 사라지게 될 날을 볼 수 있도록 간구한다. 슬픔은 이방인에게나 어울리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시 좋은 모습과 재미있는 유모어, 그리고 사랑 안에서 살기를 원한다. 아무도 그것을 억압하지 않고, 이 세상을 자기에게로 이끌어 간다.
누가복음서에 나오는 주기도를 개혁자들은 다음과 같이 확장시켜 해석한다.(Codex D) 당신의 거룩한 영이 우리 위에 넘쳐나고, 그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소서! 마태와 누가의 고전적 본문이 원래적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변형이다. 개혁자들은 본문에 상응하도록 콤멘트를 계속한다. 하나님 나라의 오심을 간구할 때 이것은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개혁자들의 이러한 확장된 해석은 옳은 처사이다. 그러나 이 말 “당신의 나라”이 완성되어가는 교회와는 절대 다른 그 어떤 것으로 이해되어졌을 때만, 그리고 현재 있는 그 무엇의 종말로서, 또한 사물의 새로운 시작으로서 이해되어질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다행이 하나님의 왕권 안에서는 교회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시작한 것을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더 간구해야 한다. 그 분이 그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제의는 끊임 없이 우리로 하여금 그가 우리와 함께 갖고 있는 인내심을 생각케 한다. 그의 나라가 오심으로 부터 우리를 갈라 놓으려하는 이 세상의 불안한 시대에 하나님의 인내가 얼마나 필요한지! -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한다는 것, 그가 그 종소리를 울리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렇다. 성취를 위해 하나님 나라는 도래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지킨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으로서의 그것을 움켜 잡으려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당신의 나라가 온다는 것, 그리고 이미 도래한 이 나라가 온다는 것을 기도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렇게 소박한, 그리고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간구로 그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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