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

교회와 사회 조회 수 4237 추천 수 29 2008.07.22 13:58:46
13장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

2차 세계대전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세계교회 운동으로서의 세계교회 협의회(WCC)를 창설하여 초창기 부터 교회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해 왔다. 특히 제 삼세계의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에 깊숙히 참여하므로서 동서 냉전의 매카시즘의 구도에 의하여 용공적 기구라고 매도당하기도 하였다. 지금 까지 일곱 번의 총회를 치루어 오면서 세계교회의 방향성, 그리고 세계와 인간과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해석과 대안을 제기하였다.
1차 총회 - 1948년, 암스텔담(Amsterdam)
2차 총회 - 1954년, 에반스톤(Evanston)
3차 총회 - 1961년, 뉴델리(New Delhi)
4차 총회 - 1968년, 웁살라(Uppsala)
5차 총회 - 1975년, 나이로비(Nairobi)
6차 총회 - 1983년, 벵쿠버(Vancouver)
JPIC 서울 대회 - 1990년 서울
7차 총회 - 1991년, 캔버라(Canberra)

1. 암스텔담(Amsterdam)

A. 1948년 이전의 세계교회의 상황

19세기의 유럽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인해 선교적 열정 보다는 교회의 도덕적, 윤리적, 그리고 종교적 역활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영미계통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과 선교활동은 교회의 내적 정체성을 강조하므로써 교회사의 특별한 선교사적 시대를 열었다. 우리 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거의 미국의 복음주의, 혹은 근본주의 교회에 속한다는 것도 이러한 교회사적 배경 가운데서 이해될 수 있다. 유럽의 학문적-자유주의 신학은 선교적 실천을 소홀히 한 반면에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은 그것을 강조하였다. 오늘의 교회들도 이러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진보적 교회와 보수적 교회의 선교적 열정이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다. 양적으로 성장하는 교회의 대부분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선교의 현장에서 발생되는 교회론에 대한 질문은 국제선교대회(IMC)를 통해 제기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제 삼세계의 이질문화(cross culture)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해한 질문이다.
1910년 - 제8차 세계선교대회(WMC)
1928년 - 예루살렘, 국제선교대회(IMC): 1910년의 세계선교대회 때와는 달리 그리스도교의 중심 메시지인 복음과 이 복음에 기초한 교회의 정체성 및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는 동시에 교회의 사회참여를 강조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인종문제, 농촌문제, 산업화문제 들을 연구보고케 하므로써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 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1938년 - 마르라서, 국제선교대회: 복음과 교회의 정체성을 말하는 동시에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포괄하는 “통전적 복음이해”를 강조하였다. 즉 복음은 개인적인 복음화 뿐만 아니라 “사회적 변혁을 바라보고 희망하며,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희망한다.”
1947년 - 휘트비, 국제선교대회: 이 대회에서는 교회의 사회참여가 더욱 적극적으로 개진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난하고 온갖 궁핍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섬겨야 하며, 매 순간 불의와 억압을 제거하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이 복움전도의 전부라고 보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과 비애의 기원은 영적인 것이요, 이 세상의 치료는 영적인 걱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삶의 모든 부분에 들어가실 때 일어난다.”

B. 암스텔담의 중요문건 안에 표명된 교회와 사회문제

제 1분과
Ⅲ-A
교회란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기원했고, 이 교회는 성령의 현존과 능력에 힘 입어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믿는다.8

Ⅲ-B
교회란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소명을 갖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성령의 여러 은사들로 하나님에 의하여 무장되어 있다. 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의 모범을 따라 신앙과 사랑으로 인류공동체를 위해서 살도록 거룩히 구별되었다. 교회는 사죄받은 죄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신앙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였고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권능으로 재림하실 때 실현될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9

제 3분과
제 3분과에서는 오늘 우리의 세계가 “역사상 유래 없었던 크기의 사회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세계대전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또한 그것을 통해 인간성과 존엄성이 얼마나 파괴되는가 하는 문제를 절실하게 체험했을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망각할 채 이 세상의 국가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할 수 있다고 3분과의 문건이 증언하고 있다.
이 시대를 위협하는 요인은 두 가지이다. 첫째,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경제적 힘의 집중과 편중,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의 경제적-정치적 힘의 집중. 둘째, 기술에 의한 세계지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문제를 취급한 S.Ⅲ.4에서 현대의 전체주의적 공산주의가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고 있는지 그리스도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언급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소외당하고 억눌린 사람들”과 연대의식을 가져야 하며, 이들을 도와주어야 하고, “인간평등과 우주적 형제주의의 시야”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공산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불의와 억압”을 초해했고, “불필요하고 황당부게한 선전”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 보고서는 왜 그리스도교가 공산주의와 적대관계에 있는가를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공산주의는 역사 내에서 인간의 완전한 구원을 약속한다.
둘째, 그들은 새질서의 부대자인 프로레타리아 계층이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셋째, 유물론적, 결정론적 세계이해는 그리스도교적 하니님과 인간이해와 충돌한다.
넷째, 공산주의는 적대자에 대한 폭력적인 방법으로 제거하려 한다.
다섯째, 공산주의 체제를 위해 독재적 정치형태를 취한다.

자본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충돌을 네 가지 관점에서 설명한다.
첫째, 자본주의는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할 겨어제의 주 임무를 상실하고, 모든 부를 소인들에게 예속시킨다.
둘째, 불평등을 초래한다.
셋째, 자본주의는 그리스도교적 서양세계 안에 물질주의를 낳았으며, 황금만능주의를 가져왔다.
넷째, 집단적인 실업을 초해하였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있다.

우선 교인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역사적 상황과 그들의 사회적 문제들을 조명시키는 설교와 교육이 수행되어야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나타난다. 교회는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투표행위, 공무행위, 여론형성, 경영주 혹은 노동자로서 그리고 그 어떤 직업전선에서 그 무엇을 결정할 때 철저한 교육을 시켜야 한다.10

2. 에반스톤(Evanston 1954) ?

A. 1954년 이전의 세계교회 경향성

WCC 총회가 있기 전인 1952년 빌링엔(Willingen)에서 IMC가 개최되었다. 여기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missio Dei”였다. 호켄다이크는 “교회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의 도구요, .. 이세상에서 샬롬을 실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손에 들어 있는 수단이다.”라고 역설하였다. 이 대회에서 또 하나의 신학적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철저한 삼위일체 중심”으로 전환하였다는 점이다.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선교운동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에게 발원하였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그의 심오한 사랑으로 부터 인간과 민물을 자신에게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이로써 우리와 모든 인간들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본성이신 완전한 사랑 가운데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11

1952년 IMC 보고서 중에 “교회와 세상의 연대의식”이라는 제목이 있다. 거기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볼 수 있다. “교회란 이 세계 속에 있으며 이 교회의 주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과 동일시 하였듯이 교회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세계에 대한 선교에 참여하지 않고는 아무도 그리스도에게 참여할 수 없다.” 이렇게 철저하게 교회의 사회적 연대성과 책임감을 역설하였다. 다음의 문맥도 그러한 여장선상 위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이 세계를 향하여 그리스도교적 증언의 과제에 직면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희는 가서’ 공산주의와 세속주의의 여러 문제에 직면한 사회적 , 경제적, 인종적, 불의에 대하여 예언자의 소리를 말하기 위하여 교회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도구로 사용하라고 하시는 우리 주님의 대선교의 위탁 명령을 새롭게 듣고 다시 한번 듣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12

B. 에반스톤 총회에서의 교회와 사회

에반스톤에서는 빌링엔의 영향을 받아 암스텔담에서 보다 “하나님 선교”에 적극적인 평가를 내린다.

복음의 전도란 무엇인가? 우리는 남자와 여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사화의 집단들과 사회의 패턴들을 개변시키기 위하여 복음을 선포해야한다. 이 복음선포의 목적은 인간의 제도들과 사회구조를 하나님의 의도에 더 가까이 순응하게 하는 데 있으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특권을 존중하는 데 있다.13

S.Ⅲ의 서론은 교회의 사회참여의 신학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책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역동적 행위들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역사를 자신의 영원한 목적 안에 포함시켰다. 그는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역사 속에서 운동하시고 행동하신다. 세계역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 십자가, 그리고 부활이다. .....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인간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곤경이 계시되었고 이 세상의 종말이 계시되었다.14

교회의 정치와 경제참여를 강도 높게 주장한 에반스톤 총회는 다음과 같이 정치참여에 대해서 규정하였다.
1) 각 개인은 인위적 강금이나 그 어떤 기본권의 침해를 받을 수 없다.
2) 각 개인은 자신의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확신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3) 폭력에 호소함 없는 정치행동으로 국민은 정부를 바꿀 수 있다.
4) 국가는 사회 안에서 자기 나름의 기초와 원리를 가지고 형성되는 모든 단체들을 존중해야지, 제어하거나 억압해서는 않된다.

아래는 경제생활에 대한 규정이다.
1) 국가의 경제적 행동은 도시개발계획, 산업팽창활동, 토질 보존, 대규모의 산업연구와 농업연구, 산업분배의 지도 등 사유재산의 소유자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데, 교회는 이 국가의 경제활동이 탈중앙집권화 되고 제약을 받고 적응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2) 교회는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를 확보해 주어야 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책임수행과 인간의 존엄성에 걸맞는 사회적 신분을 확보해야 한다.
3) 각 나라의 농부들은 가장 중요한 경제적 역할 중에 한 역할을 한다. 몇몇 나라들의 경우는 비상한 생산성 향상에 의하여 사람들의 긴급한 필요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들의 경우는 영농방법의 과격한 변혁이 요구되며 이에 따르는 농민의 인권문제가 제기된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농민들의 일정수입에 대한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해야 한다.
4) 교회는 어린이, 병약자, 노인, 난민, 그리고 경제적으로 나약한 집단을 위하여 국가적 차원과 국제적 차원에서 도움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5) 고용주 연합과 노조,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과 농부들은 모두 사회전체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일깨워주되, 지도자들과 피지배자들 모두가 책임이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6) 착취에 항거하여 노동자를 위한 인간다운 환경조성을 위하여 투쟁하는 노조운동을 교회는 환영해야 한다.15

S.Ⅲ.2는 공산주의에 대해 암스텔담에서 조망된대로 맑스주의 이념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모순을 지적해 주고 있다. 근대 서구의 그리스도교 국가가 사회불의를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린 까닭이라고 설명한다. 이 보고서는 지나친 반공 히스테리도 경계하고, 서구의 정치-사회체제에 대한 지나친 신뢰나 공산주의의 거짓 약속 및 책임적 사회를 파괴시키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라 할 수 있다.

3. 뉴 델리(New Delhi 1961)

뉴 델리 WCC 총회에서 IMC가 통합되므로써 명실공히 “하나님 선교”가 함축하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한층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또 다른 특징은 동방정교회와 11개 아프리카 교회, 2개의 라틴 아메리카 오순절 교회가 정회원이 되므로써 세계교회적 성격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 수 있었다. 다음에 인용되는 문장은 총회문건에서 채택된 것이다.

백성이 보다 나은 삶을 열망할 때 사회적 변혁은 강열하게 일어나다. 기술의 발달은 기아와 질병과 비참으로 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 줄 것을 약속한다. 정부는 국가발전 계획을 추진한다. 혁명적 변화는 경제생활, 사회구조, 가정 및 공동체적 삶 전반에 영향을 준다.16

사회적 변혁의 성격, 범위 및 속도는 인간이 얼마나 자연을 정복하는가에 달렸다. 자연과학적 발견과 이것에 근거한 기술의 결과들은 너무도 훌륭하고 놀랍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보다 과학을 신앙하고 희망하는 자리에 이르렀다.17

정부는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기본 질서를 확립시켜 주는데 그 존재의미를 갖는다. 국가가 각 계층의 이익경쟁을 균형있게 제어할 때 사회의 삶이 가능하다. 이렇게 해서 이룩되는 질서는 정의를 지향해야 한다..... 기독교인의 국가에 대한 기본 태도는 적극적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나라의 한 구성원이 되도록 부름받았고, 국가의 한 회원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기독교인으로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부름 받았다.18

1954년의 에반스톤 총회는 전통적인 기성 헌정국가를 의식하면서 정치참여를 논했으나 1961년 뉴 델리는 신생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 등을 의식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총회문건은 기독교인의 정치참여에 대해 신학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들고 있다.
1)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2)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그의 이웃을 섬기도록 부름받은 바 구체적인 지역적, 역사적 상황에 걸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3)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님이심과 오늘도 세계의 모든 나라 안에서 역사하시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물론 각 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조들과 행동들이 불투명할 때도 있지만.19

4. 웁살라(Uppsala 1968)

1960년대는 교회의 현실참여가 적극적으로 요구되던 시대였다. 그 요인을 몇 가지로 구분해 보자.
첫째, 국제정치는 동서 냉전 구도 가운데서 민족주의의 부각이라는 특성을 나타낸다. 존 F.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월남전쟁, 제 삼세계의 세력화, 막스주의의 팽창 등의 국제질서가 새롭게 형성된다.
둘째, 경제. 사회적으로 세속주의의 물결이 범람하게 되었다. 세속성을 더 이상 거룩성과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전하던 우주파국으로서의 종말론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게 되었다. 세속이 가져다 주는 풍요와 소비를 즐기려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셋째, 신학적으로 말씀의 신학이 퇴조하게 되었고, 해방신학과 정치신학과 역사신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WCC는 뉴델리에서 IMC와 통합된 이후 사회참여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웁살라 총회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WCC는 1961년 뉴 델리에서 CWME(세계선교와 복음전도 위원회)로 하여금 “개교회의 선교적 구조”(The Structure of the Congregation)라는 제목의 프로젝트를 연구토록 하였다. 1963년 멕시코에서 개최된 이 위원회에서는 하나님의 선교에 근거한 교회의 사회참여를 강조했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행동과 그리스도교적 공동체와 관계 없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 사이에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의 행동과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행동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있을까? 인간적인 삶의 회복과 화해가 세속적인 대행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행동에 의해서 성취되고 있다면 신앙의 자리와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교회가 세상사에 전적으로 참여하고 있을진데 교회와 세상의 분리난 과연 무엇일까?

한편 WCC 중앙위원회는 교회와 사회분과 위원회에게 “교회와 사회를 위한 세계대회: 현대의 기술적 혁명과 사회적 혁명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이란 대회를 개최토록 하였다. 1966년 제네바에서 열린 교회와 사회대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계와 역사참여의 행동에 교회가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당시 유럽교회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 대한 논의가 부상하고 있었으며,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도 주요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삼세계의 정치투쟁을 신학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제네바 대회에서는 변화된 사회구조에 대응하기 위한 선교적 교회의 구조가 변화되어야 함이 역설되었다. 심지어는 적절한 폭력사용을 허락한 것이나 다름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워커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본 대회는 혁명을 위해서 폭력의 적절한 사용에 대하여 의견이 갈라졌으나 대체로 교회가 불의를 없애기 위한 사회적 혁명에 가담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W. Worker)

1968년 웁살라 WCC 분과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S1- 성령과 교회의 보편성
S2- 선교의 갱신
S3- 세계경제와 사회발전
S4- 국제관계에 있어서 정의와 평화
S5- 예배
S6- 삶의 새로운 스타일

S2 “선교의 갱신”은 선교의 개념을 “인간화”, “새 인간성”을 추구하는 데 이르기 까지 확대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문건의 보고서를 인용해 보자.

교회는 산업의 독점으로 소외되고 비인간화 되는 위협을 받는다. 인간의 이성과 양심과 의지의 자유는 대중전달의 매체의 폭탄세례에 눌려 있다. 의사들과 생물학자들의 도덕적 결단의 고민 -유산, 안락사, 생명의 연장, 기관이식, 특히 뇌의 이식수술 등은 과연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일으킨다. 오늘의 도시들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면서도 단조로운 양태로 인해 개인들을 소외시키고 인구폭발은 한 없는 규격화에 의한 통제를 요구한다. .... 이미 괴로움을 주는 궁핍과 영양실조는 이 지구의 반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일으켰고 한편 가진 자들은....20

그러나 웁살라 총회의 문건은 성령, 신앙, 중생, 새 사람에 대한 전통적인 복음전도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지는 않다. 다음의 내용이 그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새 인간성이란 단순히 우리가 도달해야 할 하나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들 가운데 하나로서 신앙의 응답에 의해서 우리는 이것을 받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여러 다양한 결단의 순간들에 인간들에게 이 선물을 주신다. 하나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하므로 인간을 살피고 회심케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복음전도에 있어서 우리가 할 일은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응할 수 있는 기회들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21

이제 교회는 자기 성장과 자기 보존에만 힘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으로 파송받은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가난 한 자들, 보호받지 못하는 자들, 잊혀진 자들, 권태로운 자들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웁살라 대회는 이렇게 질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에 깊숙히 파고 들어가 그들의 문제들과 그들의 삶의 구조에 참여하고 있는가? 교회는 불신자들과 더불어 이 시대의 징표들을 분별하면서 그리고 새 인류의 도래를 기대하면서 역사와 동행하는가?” 이러한 표현들은 변증법 신학이 상실하였던 역사문제를 다시 교회와 신학의 중요한 근거로 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60년대는 교회가 새로운 사회의 미래를 위해 투쟁하는 사회와 연대하려고 노력한 시기였다. 이러한 모습이 WCC에서도 웁살라 총회를 중심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교회는 항상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사회참여에 치우치게 된면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게 되고, 교회의 정체성에 주력하다 보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실현되어야 할 사회의 참여가 소홀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참여와 자기집중이란 것은 두 개의 현실이 아니다. 교회는 참여를 통해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며, 자기 정체성에 대한 숙고로 부터 참여의 동기를 획득하게 된다. 몰트만은 이 문제를 십자가 신학에서 해결하고자 한다.

관계성의 위기와 동일성의 위기는 상호보완관계에 있다고 우리는 말하였다. 동일성이 발견될 때 관계성이 의심스러워지며, 관계성이 발견될 때 동일성이 의심스러워진다. 이 이중의 위기를 이제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자 한다. 곧 이 위기들 중의 한 위기는 다른 위기의 반대면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양자는 한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 신학이 기독교적 신학으로서 그리스도와 동일화 되어야 한다면, 기독교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비판적이며 해방하는 이론이다. 기독교적 실존은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뒤를 따르면서 인간 자신과 사회적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실천이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의 신학은 실천적 이론이다.22


5. 나이로비(Nairobi 1975)

1970대는 해방신학이 확장되던 때였다. 1968년 웁살라에서 절정에 달한 교회의 사화참여는 사실상 나이로비 총회 시 까지 지속한다. 그 어간에 여러 위원회와 대회를 통해 WCC는 총회의 성격을 형성해 나갔다.

1. 방콕 CWME(Committee of the World Mission and Evageliztion<?>) 대회

1973년 방콕에서 열린 CWME 대회는 그 주제를 “Salvation Today”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웁살라 총회 때 드러냈던 두 모습의 얼굴-사회참여와 정체성-이 여전히 효력을 갖게 된다. 복음주의적 신학자인 피터 바이엘하우스(Peter Beyerhaus)는 1952년의 빌링엔의 IMC에서 논의되고, 1968년 웁살라에서 긴장을 자아냈으며, 방콕대회에서 조차 해결을 볼 수 없었던 ‘하나님 선교’개념에 대한 두 가지 엇갈리는 이해 때문에 방콕대회에서 조차 두 얼국이 보인다고 진술하고 있다.
전통적 복음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문건의 일 부분을 발췌해 보자.

어떤 교회들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묘사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에 대하여 언급해야 한다. 다른 교회들 안에서 갱신과 성장이 성경의 재발견에 기원하며 성령의 메시지에 대한 새로운 청종에 기원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령이 연구되는 곳에서 마다 성령은 행동하며,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에서 마다 성경은 사용된다.
구원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개인들을 죄와 죄의 모든 결과들로 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을 이 세상의 모든 억압으로 부터 자유케 하시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것이 일어나기 위하여는 교회가 먼저 갱신되어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

이러한 복음주의적 입장과 더불어 방콕대회는 교회의 사회정의 실현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자신들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는 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을 거절하는 것”이다. SⅡ 분과위원회에서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구원의 4차원에 대해 언급하였다.

구원이란 사람들에 의한 사람들의 착취에 항거하여 경제적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인권에 대한 정치적 억압에 항거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인간소외에 항거하여 소외된 무리와 연대감을 갖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개인의 삶 속에 도사리고 있는 절망에 항거하여 희망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Bangkok Assembly, 1973, 89.)

몰트만은 1972년에 발행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Der gekreuzigte Gott)에서 이러한 구원의 제 차원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죽음의 악순환이 다섯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1) 경제적 삶의 차원에 있는 <가난의 악순환>
2) 정치적 삶의 차원에 있는 <폭력의 악순환>
3) 문화적 삶의 차원에 있는 <인종적 문화적 소외의 악순환>
4) 자연에 대한 <산업적 자연파괴의 악순환>
5) 삶의 깊이에 있는 <무의미와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음의 악순환>
이러한 악순환의 차원들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모로 연결되어 있거나 원인과 결과로서 관련을 맺고 있다. 몰트만은 악순환의 고리로 부터 해방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규정하면서 소위 ‘해방신학’을 제창하고 있다. 다섯 가지의 악순환으로 부터 해방이란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가난의 악순환에 있어서 해방은 사회정의를 의미하고, 권력의 악순환에 있어서는 민주주의적 인권을 의미하고, 소외의 악순환에 있어서 해방은 인정 가운데서의 동일성을 의미하며, 생태학적 악순환에 있어서는 자연과의 평화를 의미하고, 무의미의 악순환에 있어서는 존재에의 용기와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이다.(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342)

그러나 WCC는 사회참여와 정치투쟁 만을 편향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았다. 방콕 대회는 두 가지 흐름 가운데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복음주의 그룹(바이엘하우스)이며, 다른 하나는 에큐메니칼 신학자 그룹(몰트만과 WCC당국)이다. 복음주의는 나름대로의 선교대회(로잔 세계복음화 대회, 1974)를 통해 교회의 사회참여를 비록 소극적일지라도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까지 사회참여를 소홀하게 생각해 온 것을 반성한다. 우리는 때때로 복음전도와 사회적 관심이 상호배타적이라고 생각해온 것을 뉘우친다. .....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면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의를 불의한 세상 한 복판에서 알려야 하고 확장시켜야 하고 실현시켜야 한다. 우리가 선포하는 구원이란 우리를 개발시켜서 개인적인 책임과 사회적인 책임 모두를 감당케 하는 것이다.

또한 WCC의 교회와 사회분과는 “시카고 선언”(1973)에서 개인구원과 복음의 가치를 재인식하였다.

우리는 구조적인 것 보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것을 강조하는 경향에 서 있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빈번히 비판해 오는 경향을 드러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촉구한다. 이 제자의 길은 결코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을 선포하며, 이 복음의 개인적-인격적 함축과 사회적 함축을 선포하는 일에 부끄러워 하거나 자신 없게 생각하지 않는다.

2. 나이로비 총회

나이로비 총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케 하시며 일치시키신다”였다. 각 분과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SⅠ- 오늘 그리스도를 고백하자.
SⅡ- 일치가 요구하는 것
SⅢ- 공동체를 찾아서: 다양한 신앙, 다양한 문화, 다양한 이념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
SⅣ- 해방과 공동체를 위한 교육
SⅤ- 불의의 구조와 해방을 위한 투쟁
SⅥ- 인간발달: 권력의 애매성, 기술, 그리고 삶의 질

SⅠ에서는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건으로 표명되고 있다.

복음이란 하나님, 곧 창조자와 구속자로 부터 온 좋은 소식이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땅 끝 까지 이르도록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결정적 계시의 새로운 국면들과 차원들을 항상 다시 노출시키고 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요, 은혜 배푸심과 죄들의 용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의 사귐,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과 행동의 증언, 정의와 인간 존엄성을 위한 투쟁에의 참여, 인간의 통전성을 저해하는 모든 것을 배격해야 할 의무, 목숨 까지도 버리는 참여를 포함한다.(Breaking Barriers, Nairobi, 1975, 52)
복음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필요에 대응하여 말하며, 우리의 삶을 개변시킨다. 복음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므로 우리의 창조자에게 화해시키고,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아는 참 기쁨을 일으키며, 영생을 약속한다.(37)

SⅤ는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이란 죄와 다른 세력 밑에 눌려서 고통당하는 인류와 자신을 동일화 하신 하나님에 관한 메시지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와 연대성을 가지셨음은 종이신 그리스도의현실에 의하여 표현되었다. 이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사 인간의 형체를 입으셨고 가난 속에 탄생하셨으며 버림받음의 길을 수용하셨고 끝내는 십자가의 죽음을 대면하셨다. 이 그리스도의 대리적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현현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연약성의 모든 짐을 홀로 걸머지셨다.(101)

인권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가 고문과 같은 인권침해의 철폐를 이하여 투쟁해야 할 경우, 경제적 착취, 정치적 조작, 군대의 힘, 계층적 지배, 심리적 조작 등에 의한 사회적 구조악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조악에 의하여 인권침해의 여건이조성되기 때문이다.(103)

위와 같은 구조악을 염두에 두과 아래와 같이 여섯 가지의 인권침해의 실례를 들고 있다.
1) 생존권- 일할 권리, 적당한 식량에 대한 권리, 건강의 보살핌을 받을 권리.... 등이 인식되어야 한다.
2) 자결권, 문화적 정체성, 소수의 권리- 어느 나라의 국민이든지 자기들의 정치적 지위를 자유롭게 결정하
며 자신들의 경제적, 문화적 및 사회적 발달을 자유롭게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
3) 공동체 안에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권리
4) 저항할 권리
5) 개인인격의 존업성에 대한 권리
6) 종교의 자유권


6. 뱅쿠버(Vancouver, 1983)

1980년대는 월남전쟁이 끝난 이후 비교적 안정된 세계질서가 틀을 잡아가고 있던 시기이다. 1968년 웁살라 총회를 정점으로 한 해방신학과 교회의 사회참여는 1975년 나이로비 총회를 계기로, 복음주의적 선교대회에서 발표된 로잔언약으로 부터 도전을 받은 것이기도 한데, 교회의 정체성과 균형을 이루게 된다. 뱅쿠버 대회도 역시 교회의 자기 정체성 문제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기본기조로 삼고 있다. 먼저 뱅쿠버 대회에 영향을 끼친,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위원회가 완성한 BEM TEXT(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BEM TEXT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1927년 로잔대회 까지 소급된다. 그 이후 1974년 Accra에서, 1978년 Bangalore에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1982년 페루의 Lima에서 소위 <리마문서>가 결정된다. 이 문서는 복음의 본질과 교회의 일치, 나아가 직제의 일치에 관한 에큐메니칼 신학을 제시하므로 “교회가 정의, 평화, 화해를 증진시키므로 인류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 세례
“그리스도교적 세례는 나사렛 예수의 사역, 그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고 있다. 이 세례는 집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하나되는 것이다. 이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참여한다. 이 세례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베풀어진다.”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표시하는 것이며 각인시키는 것이다. 이 세례로 말리암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인류의 해방자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증거해야 할 공통의 책임을 진다.”(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Faith and Order Paper No. Ⅲ, WCC, Geneva, 1982, 2)
세례는 모든 교파가 하나될 수 있는 기초이며, “하나님 선교”의 초석이기도 하다.

2) 성만찬
“예수님께서 지상교역을 통하여 여러 차례 음식을 나누셨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의 근접을 선포하며 현실화 시킨 것이다. 무리들을 먹이신 사건 역시 하나님 나라의 표시였다. 에수님의 마지막 만찬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귐이란 예수님의 고난과 관련된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떡을 떼시면서 자신의 현존을 제자들에게 알리셨다. 그런즉 우리의 성만찬은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와 부활 이후 잡수셨던 음식을 하나님 나라의 표시로서 우리도 계속 나누는 것을 뜻한다.”(10.)
성만찬을 통하여 5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a.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감사
b. 그리스도의 기억으로서의 성만찬
c. 성령을 부르는 행위로서의 성만찬
d. 믿는 자들의 사귐으로서의 성만찬
e.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의 종말론적 성격.

3) 교직
신앙과 직제위원회는 안수받지 않은 교역(ministry)과 안수받은 교역을 구분하므로서 평신도주의를 지향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사 파송하신 것 처럼 오늘도 계속해서 성령을 통하여 그의 일꾼들을 택하시고 부르사 안수받은 교역자들로 만드신다.”(21) 이 안수받은 교직자의 주된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성례전을 집행하므로, 공동체의 예배, 선교, 돌봄 및 지도하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모으며 세우는 것”이다.

2. 뱅쿠버 총회

뱅쿠버 총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생명”이었다. 이 대회에서 채택된 문건을 보면 예배가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예배란 교회의 삶과 선교, 교회의 증거와 봉사를 위한 중심적 행위이다. 예배를 통하여 여성과 남성,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와 장애자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함께 나눈다. 예배란 이 세상의 삶을 위해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행동의 의식적(liturgical), 성례전적, 공적 실현이다. 예배의 복음적이고 구속하는 능력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까지 주님의 죽음을 계속전하는데(고전11:26) 있다.’(Gathered for Life, Vancouver 1983, 34.)

또 다른 문건에서 “교회의 일치”에 대해 논의되고 있다.
세상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 하나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통일하셨다. 떡과 즙을 통하여 주어지는 그의 몸과 피는 의식과 섬김을 통합하고 선포와 치유행위를 통합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회상은 설교말씀의 핵심이요 성만찬의 내용이다. 이 양자는 서로 보강한다. 성찬예식은 말씀의 선포를 내포하는 것이 정상이다. 우리의 성만찬적 비젼은 기독교적 예배, 삶 및 증거의 모든 현실을 포괄하며 충만한 다양성을 지닌 기독교적 일치에 새 빛을 전해준다.(44-45)

이 교회의 일치를 다음과 같이 a. 사도적 신앙 b. 세례, 성만찬, 직제 c. 책임적 삶에서 찾는다.

첫째로 교회들은 사도적 신앙을 공고히 해야하고, 이 사도적 메시지를 동시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백하므로 동시대인들을 화해와 해방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교회들은 이 사도적 신앙을 함께 살아나가면서 이 세상으로 하여금 창종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도록 도와야 한다.

둘째로 교회들은 이 사도적 신앙을 고백하면서 세례, 성찬, 직제에 대한 충분한 상호 인식을 하고자 하며 자신들의 가시적 사귐을 통하여 분열된 세상 속에서 세례, 성찬, 직제의 치유력과 일치력을 더 분명하게 하기를 원한다.

세째로 교회들은 의사결정에 대한 공통의 방법에 동의하고 싶어하며 권위 있는 가르침에 관한 공통의 방법에 대하여서도 동의하기 원한다. 그리고 교회들은 갈등의 세계에 치유의 빛을 비출 수 있는 사귐, 참여, 집단적 책임을 들어 내고자 한다.(45)

제 6 이슈그룹이 채택한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은 1975년 나이로비 총회 이후 에큐메니칼 운동이 정의를 위한 투쟁에 큰 진전이 있었음을 전제하면서, 여전히 그러한 악한 구조와 질서들이 도처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지배적인 경제질서의 체제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굶어죽게 하며, 매년 수많은 실직자를 증가시킨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 남용은 많은 사람들을 억압하며 미친듯한 무기경쟁으로 이 지구를 파괴하려 든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체포당하고 구속당하며 실종되고 고문당하며 종교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강제로 실각되거나 추방당한다.(84)

뿐만 아니라 교회의 영적인 투쟁은,

가난한 자, 눌린 자, 소외된 자 및 추방당한 자의 투쟁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은 투쟁하는 사람들 안에 있다. 성령은 사랑을 불붙이며 우리에게 용기를 주신다. 성령은 창조적 비젼을 베풀어 주신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만찬을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으로 축하하며, 이 성찬을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있는 영적 능력의 근원으로 축하한다.(85)

“억압하는 권세와 해방의 힘”이라는 항목에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모든 권세의 근원이라고 규정하면서 권력의 남용을 경고하고 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있어서 힘은 광범위하게 남용되고 있다. 자원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불균형은 확대일로에 있다. 인종차별이 국제적으로 정죄되고 있으나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정책은 성경적 근거 위에서 계속 정당화되고 있으며, 심지어 이웃 나라들의 국토 까지 위협하고 있다. 인간차별, 처형, 정치적 퇴보, 대향학살 및 사회- 경제적 권리의 침해 등은 선량한 백성에 대한 힘의 남용이다. 소수권력 집단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도구들과 제도들을 지배하고 조정하기 위하여 부를 집중시킨다.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협력을 계속 추구하기 위하여 제도들 사이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국가 안보라고 하는 일그러진 주장에 의해 이를 정당화 한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백성의 안보를 보장하지 못한다. 권력층이 기술을 제어하므로 이 백성의 안보를 약속받으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사회관계는 극도로 비인간화 되었고 삶의 방향은 너무도 빗나가고 말았다.

제5 이슈 그룹은 “평화와 정의를 위협하는 것들에 대응하여”라는 제목으로 평화와 정의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는 정치. 경제적인 불의를 하나님의 평화로 극복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 평화는 더 나아가 과학과 기술의 비인간화 요인도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생명윤리와 에너지 문제에 이르기 까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요청한다. “과학과 기술은 둘 다 힘의 형태이다. 그래서 이 힘은 권력투쟁을 위해서 이용될 수 있다. 권력은 사호제도나 기구를 통하여 과학과 기술을 직접 통제한다. 예컨데 학문적 연구기관들, 산업체들 및 정부의 공공기관들....”(80)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구조악에 의해서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 다음 사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 과학교육은 사회적 책임을 존중해야 한다. 훈련 중에 있는 과학자들은 자기 백성의 문화적 유산으로 부터 소외되고 자기가 하는 일의 사회적-윤리적 의미를 모르는 고립된 엘리트가 되어서는 안된다.
2) 과학의 학문적 연구의 자유와 자유로운 과학정보의 교환은 과학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과학자들은 고립화와 비밀화 작업에 저항해야 한다.
3) 양심적인 자각을 심화시키는 단체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좋은 예이며, 이 단체들은 과학단체들과 종교단체들 사이의 공도의 작업을 위한 장을 마련하고 있다.(80)

뱅쿠버 정신은 오늘도 역시 유효하다. 복음, 성경, 설교, 세례, 성만찬, 안수받은 교역자의 정체성, 영성 등을 강조하는 동시에 정의, 평화, 해방 등 교회의 사회참여가 강조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7. 캔버라(Canberra, 1991)
<참조, 기상 91,4.>
주제: Come, Holy Spirit, Renew the Whole Creation.
분과별 토의
1. 제1분과- 생명을 주시는 이여, 당신의 피조물을 보전하소서.
창조신학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필요로 한다. 창조를 논함에 있어서 경제질서와 생명의 질서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2. 제2분과- 진리의 성령이여, 우리를 자유케 하소서.
여기서는 자유와 진리의 복음 증언 문제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자본주의의 문제가 노출된 이 시점에서 인류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비젼 제시가 필요하다. 인권, 빈곤, 민족차별, 성차별, 마약중독, 원주민 문제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3. 제3분과- 일체의 성령이여, 우리를 화목케 하소서.
전통적인 교회론과 선교론을 중심으로 교회일치 문제를 취급하고 있으나 괄목할 만한 대안이 제시되지는 못했다.
4. 제4분과- 성령이여,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성별해 주소서.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의 영성문제가 집중적으로 토의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평화지향적인 삶의 자세로 표현될 수 있음이 지적되었다.

주제강연1.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정현경, 여성 및 제3세계대표, 이대교수)
1)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에서 생명중심주의(Lifecentrism)로의 전환
2) 이분법적 습관(the habit of Dualism)으로 부터 상호연계(Interconnection)의 습관으로의 전환
3) 죽음의 문화(the culture of death)로 부터 생명의 문화(the culture of life)로의 전환

주제강연2. 성령 (Parthenios,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평화와 정의와 우리 피조세계의 보전은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세계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신 것 같이 아주 좋게 보전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그 위에 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과 인류를 더럽히거나 오염시키거나 실추시키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노예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행방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정의로워야 합니다. 어누 누구도 불공평하게 처우되어서는 안됩니다. 문맹자들, 교육을 받지 못한 자들, 소외된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전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중략> 이 모든 일에 성령은 친구가 되시며 공급자가 되십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고서는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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