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여성신학과 기독교 인간론

여성신학 조회 수 5027 추천 수 106 2005.04.19 13:39:35
8장
여성 신학과 기독교 인간론
-기독교 인간론은 여성 차별적인가?-

이 8장에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우선 그 한계를 정한다면 일단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는 우선적으로 ‘인간론’이 그 바탕에 놓인다. 그렇지만 이 인간론은 ‘신학적’이라는 전망 안에 들어 있으며, 동시에 ‘여성’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인간론을 다루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하물며 신학과 여성이라는 두 관점을 동시에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여성 신학적 인간론은 기본적으로 매우 복잡한 어떤 학문적 세계를 내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모든 관점을 세밀하고 포괄적으로 다룬다기보다는 우리의 강의에 필요한 관점에만 집중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여성신학이 제기하는 인간학의 초점을 검토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런 문제 제기에 대답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신학적 인간론이 담고 있는 인간이해를 해명하는 작업이다. 여성신학의 인간론과 정통신학의 인간론을 비교 검토하는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여성 신학적 인간론의 특성을 또렷하게 부각시키고, 그 한계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부장적 인간론

여성신학은 그 비판의 강도에 따라서 약간씩 구별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성서를 여성 차별적인 문서로 간주한다는 데에는 일치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비난을 방어하기 위해서 성서에 나타난 여성 차별적 성격을 감출 필요는 없다. 예컨대, 소위 E기자와 J기자의 서로 다른 보도가 얽혀있는 창세기 1-3장은 인류 창조와 타락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다. 기본적으로는 야훼가 이 세상을 창조하였는데, 인간이 야훼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죄를 범했다는 주제이다. 그런데 J기자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 방식을 구별한다. 남자는 흙을 빚어 만들었으며,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를 소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뱀의 유혹을 받은 이브가 남자까지 끌어들여 결국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에덴 동안에서 추방당하게 되었고, 생존하기 힘든 이 현실에서 살게 되었다. 이런 창세기의 설화에 의해서 기독교는 오랫동안 인간을 이런 죄의 구도 안에서 판단했으며, 더구나 이 죄의 근원이 이브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성서의 보도 때문에 여성을 낮추어볼 뿐만 아니라 어딘가 불완전한 존재로 간주하고, 궁극적으로는 죄와 불행의 장본인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도 역시, 특히 바울의 서신에는 여성을 비하하는 진술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기 때문에 머리에 베일을 써야 한다거나, 여자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한결같이 남자들이었다는 사실도 기독교가 여자들을 한 수 아래로 본다는 증거로 제시된다. 이런 성서의 진술과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전통은 어쩔 수 없이 가부장적이고 여성 차별적인 교회 구조나 간혹 교리를 만들어냈다. 이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찾아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일단 류터(Rosemary Radford Reuther)가 제시하는 것만 대충 검토함으로써 이 수고를 덜어볼까 한다. 류터는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바르트를 중심으로 교회역사에 나타난 가부장적 진술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주장은 가부장적 인간학의 고전적인 원형인데, 그는 여성의 속죄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미지에 여성의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지만 여자가 죄악에 빠지기 쉬운 열등한 자아를 육체적으로 대표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균형감각을 상실한 셈이다. 류터가 인용한 어거스틴의 언급을 여기에 재인용하겠다.

남자는 하느님의 형상을 갖고 있으므로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되지만 여자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머리를 가리도록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사도들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말했는가? 그것은 그야말로 내가 인간 정신의 본성을 다룰 때 이미 말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여자는 그녀 자신의 남편과 함께 있을 때 하느님의 형상인 것이며, 따라서 그 모두가 하나의 형상으로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여자가 그녀의 특성 속에서 단독적인 배우자로서 별도로 언급될 때에는 그녀는 하느님의 형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단독적으로 언급될 때도 여자와 하나가 되어 결합되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하느님의 형상인 것이다. (De Trinitate 7, 7, 10. 이 번역문에 있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하느님의 형상’으로 바꿔 인용했다. 필자주).

뒤이어 류터가 기독교의 가부장적 인간학의 예증으로 삼은 이는 아퀴나스인데, 아퀴나스의 여성관은 기본적으로 ‘사생아적 남성’(misbegotten male)이라고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개념에 의해서 여성은 단지 질료일 뿐이고 남성만이 형상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여성과 남성의 성적인 결합에 의해서 기본적으로는 남성의 형상이 자식에게 물려짐으로써 남자아이가 출산되어야 하지만, 우연한 경우에 여성의 질료에 의해 이 남자의 형상이 파괴됨으로써 열등하거나 불완전한 종이라 할 수 있는 여성*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류터가 예증으로 제시하고 있는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여성 차별적 언급들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좀 난감하다. 그녀가 없는 말을 인용하지는 않았겠지만 신학과 영성의 대가들이 여성에 대한 성서의 진술에 비해서도 훨씬 시대 역행적인 발언을, 이렇게 몰상식한(?)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좀더 신중하게 다루려면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가 이런 발언을 하게 된 그 맥락을 좀더 면밀하게 검토해야만 할 것이다. 성서도 그렇지만 이런 신학자들의 발언들도 그들이 살아가던 ‘삶의 자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은 채 오늘 우리의 잣대로 재단한다는 것은 자칫 그의 신학적 의도를 왜곡할 염려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가부장적 인간학을 바꿔보려고 했지만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류터에 따르면 루터는 현재의 여성과 타락하기 전의 이브를 구별하면서 타락하기 전의 이브는 아담과 모든 점에 동등했으나 타락 이후에 그 모든 동등한 특성을 상실했다고 보았다. 아무리 원래의 이브가 아담과 동등했다고 하더라도 지금도 그것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거역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류터는 루터의 진술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처벌 역시 원죄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여자는 그녀의 육체에 지워진 불편과 고통들을 참아내듯이 마지못해 처벌을 참아내고 있다. 규칙은 남편의 수중에 있으며 아내는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 남편에게 복종해야만 한다. 그는 가정과 국가를 통치하고 전쟁을 수행하며 그의 소유물을 방어하고 땅을 일구고 집을 짓고 식량을 재배하는 등등의 일을 한다. 반면에 여자는 벽에 박혀 있는 하나의 못과 같다. 그녀는 집에서 앉아 지낸다. ...    아내는 바깥일이나 혹은 국가의 일에 관련된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한 사람으로서 집에서 가정 일을 돌본다. ...  이런 식으로 이브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M. Luther, Lectures on Genesis, Gen. 2:18, 1958, p.115)

루터에 비해 칼빈은 인간의 타락과 상관없이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동등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좀더 전진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되는 것은 본성의 차이가 아니라 현재와 같은 사회 질서를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류터는 칼빈의 여성관을 이렇게 설명한다. “남성은 그가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지배하는 것이며, 여성도 또한 그녀가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녀에게 부과한 역할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다.”(성차별과 신학, 111). 칼빈의 주장도 역시 결과적으로는 여성 차별적이라 볼 수밖에 없다.
바르트의 경우에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은 창조 때부터 확립된 질서에 속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이 여기에 담겨 있으니까 남성이나 여성 모두 이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질서에 의해서 남자가 올라간다거나 여자가 아래로 격하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이런 질서를 따름으로서 각각의 적합한 자리에 놓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K. Barth, Church Dogmatics 3, 158-172) 바르트의 입장은 칼빈과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의 본질적인 차이를 부정하기는 하지만 예정과 사회질서라는 점에서 여전히 결정적인 차이가 개입되어 있다고 본다.

필자는 여기서 류터가 비판하고 있는 기독교 신학의 가부장적 인간학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증을 들어 본격적으로 논쟁을 전개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그녀가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옳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문제가 기독교 신학에서 별로 핵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이 내가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에 대해서 취하고 있는 기본적인 입장이다. 예컨대 루터의 경우만 하더라도 이미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과학적으로 증명한 지동설을 부정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루터에게는 로마 가톨릭의 업적 신앙 내지 교권 중심의 지도력과 투쟁하는 것에 몰두하는 게 중요했지 우주과학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루터가 지동설을 부정하고 여전히 천동설을 믿었기 그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런 주장은 작은 차이에 집착함으로써 큰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것이다.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칼빈, 바르트가 비록 오늘의 기준으로 볼 때 매우 부당한 여성관을 피력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그들의 신학 일반에 대해서 부정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물론 류터도 역시 그들 신학적 대가들의 신학 전반을 부정한다는 뜻으로 이런 가부장적 인간학의 문제점을 제기한다기보다는 정통 신학이 여성의 문제를 등한히 하거나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긴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 전통을 비판하는 것은 별로 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런 문제 제기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게 아닐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은 늘 열린 자세로 모든 타당한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들을 신학적 담론으로 유지해야만 할 것이다.

여성 해방론적 인간학

류터는 기독교 전통 신학자들에게 담지된 가부장적 인간학을 비판하면서 인간학의 여성 해방론적 방향을 제시한다. 우선 류터는 기독교 소종파에서 일어났던 종말론적 평등주의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비록 교회 안에서 남녀의 평등을 주장하지만 결국은 종말론적 지평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성 해방론적 인간학의 토대로 삼지 않고, 오히려 교회 밖에 있었던 자유주의와 낭만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극복해보려고 한다.
류터는 자유주의적 인간학의 한계를 이렇게 이해한다. 여자들이 남자들과 동일한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인간학은 다른 여성의 심리적, 경제적 소외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여자가 능력을 발휘해서 남자의 영역에 들어가 성공하는 것으로 이런 여성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주장하지만, 여자가 이런 남성 중심의 사회 조직에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지배하고 소유하고 투쟁하는 방식이 남아있는 한 그것은 바람직한 여성 해방이라고 할 수 없다. 그가 볼 때 결국 자유주의는 남성과 여성을 동일화함으로써 이 문제를 경쟁과 대결의 차원으로 떨어뜨린 셈이다.
이에 반해서 낭만주의는 기존의 남성다움에 속했던 가치들을 거부하고 여성만의 고유한 가치를 되살려내려고 한다. 가정과 인간 상호관계의 사적인 영역, 세상에 물들지 않은 자연 등등, 이런 요소를 통합된 인류의 안식처로 이상화한다. 류터가 볼 때 남성 중심적 가치의 한계를 지적하고 여성다움의 가치를 되살려내려는 낭만주의의 한계는 이런 사고방식이 자칫 여성 차별적 구조가 확립된 곳에서 기형적이며 왜곡된 방식으로 머물러 있게 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남자들이 이 세계를 지배하고 무한의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으로 몰고 가는 일이 계속되면서 여성들은 아이를 잘 기르고 자연을 보호하고 인간 사이의 평화를 위해서 봉사하는 일만 하게 된다. 이 낭만주의는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여전히 이분법적으로 구분함으로써 통합적인 인간으로 고양되는 길을 막아버리게 된다.
류터는 자유주의자의 논리처럼 여성의 능력을 개발시켜서 남자들과 대등하게 경쟁하는 방식에 머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자들의 논리처럼 남성적 가치를 무조건 배척함으로써 여성적 가치를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나가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만약 여성이 현 상태 그대로의 남성의 정치적 권력과 일에 편입됨으로써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면 남성도 역시 자식을 기르고 가정을 돌보는 것을 배운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게 아닐 것이다.”(성차별, 123). 류터의 분석은 옳다고 본다. 현재의 상황을 단지 ‘자리바꿈’의 방식으로 인간의 구원이 가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성의 가치와 남성의 가치라는 게 그렇게 완전히 구별되는 게 아닐 뿐만 아니라 우열의 관계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류터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가? 우선 류터는 최근의 여성 해방론자들이 제시하는 ‘양성동체성’(Androgyny)이 갖고 있는 문제를 해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양성동체성은 “전통적으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으로 분리되었던 인간의 정신적 능력의 반쪽을 남녀 모두가 한꺼번에 다 소유하고 있음”을 말한다. 구미정 박사도 인간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칫 이 개념은 곧 인간에게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 모두 내재해 있기 때문에 한 인격체 안에 이 두 속성이 결합되어 있다는 뜻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류터는 그런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구분 자체를 잘못된 인식으로 여긴다. 예컨대 이성은 남성적이며, 직관은 여성적이라는 그런 전통적 구분 말이다. 한 인격체 안에 이성적인 부분과 직관적인 부분이 있다고 해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혼재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류터는 오히려 양성동체성이라는 혼란스러운 개념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남성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as male and female) 완전하고 동등한 인간성과 인격을 갖고 있음”을 주장한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다른 생식 기관을 갖고 있으며, 이런 다름으로 인해서 서로 보완하면서 심리적이고 사회적으로 역할을 분담하게 되었는데, 이런 역할 분담에는 어떤 필연적인 생물학적 역학관계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문화와 사회화의 산물이지 ‘본성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자들은 이 사회가 여성다운 것이라고 강요했던 가치에 귀속되거나,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남성다움이라고 규정했던 것을 획득하는 것으로 자신의 인간다움을 확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주어진 대답은 분명하다. 여성들이 “총체적인 정신 능력을 회복하여 사회적 역할에서 보다 평등하게 접근할 때” 구원받은 인간성이 회복될 것이다. “문화적으로 판에 박혀버린 성차별로 인해 억압되었던 우리의 완전한 정신적 잠재력의 모든 측면들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곧 인간이 상실했던 하나님의 형상과 다시 결합됨으로써 얻게 되는 ‘구원받은 인간성’의 의미이다. 왜냐하면 이런 상태에 도달한 개인과 사회는 자신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육체로부터, 우주로부터, 신적 존재로부터 더 이상 소외되지 않기 때문이다(성차별, 127).

문화적 해방

류터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여성 해방론적 인간론은 “여성이 문화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총체적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단지 이 사회 구조 안에서 여성의 입지를 확보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억압된 인간성의 본질을 모든 삶의 부분에서 회복한다는 점에서 다른 과격한 여성 신학자들에 비해서 원만한 방식으로 접근한다고 볼 수 있다. 류터가 모든 여성 신학자들을 대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성 신학적 인간론의 중요한 문제들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논의를 이끌어 가는데 별로 부족할 것 같지 않다. 특히 여성신학이 ‘해방’을 기본 개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문화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서 총체적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류터의 주장은 여성 신학 일반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문화적 해방’이 과연 타당한가, 아닌가 하는 점을 여러 관점에서 검토하고 비판해보자. 그것을 토대에 놓고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이 제시하고 있는 기본 교리를 사회와 문화의 지평에서 해명함으로써 여성신학과의 차별성을, 또는 연대성을 모색해보자.
직접적으로 이렇게 질문하자. 인간이 억압된 문화구조로부터 해방됨으로써 더 이상 소외되지 않고 구원받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문화적 해방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하나의 현실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기독교가 인간과 이 세상의 구원 문제를 하나의 대안으로 대답하는 종교라고 한다면 이런 방식으로 접근해도 괜찮겠지만 절대적인 구원의 세계를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아직 충분한 대답이 아니다. 이런 문화적 해방은 기독교가 말하기 전에 이미 수많은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와 정신 분석에서 제기된 것이다.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는 이 세상과 하늘을 이원론적으로 접근한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인간의 문화적 해방을 부르짖었다. 기독교의 도덕적 강요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니체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가 말하는 초인개념을 통해서 오늘의 인간이 구원받았다고, 또는 그 구원에 가까이 접근했다고 볼 수는 없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고 했지만 인간은 여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어쩌면 그 사실을 인식하기 전의 사람들이나 오늘의 사람들이나 별로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문화적 해방이라는 우리의 논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좀 더 자세하게 다루기도 하자. 날카로운 경제학자의 눈에 비친 그 당시 유럽의 노동상황이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주지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표적으로 산업혁명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발생지가 된 영국에서는 십대 초반의 아동들이 하루에 열 시간 이상씩 노동에 혹사당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잉여생산으로 인한 소득은 기업가에게만 돌아감으로써 그들이야말로 불로소득의 수혜자들이었다. 요즘 말로 빈익빈부익부의 악순환을 인간의 양심에 호소해서 해결할 수 없으니까 결국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크스에 의해서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으며, 이런 소외와 왜곡이 역사과정을 통해서 결국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예측되었다. 그런데 그가 예측한 자본주의의 붕괴는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현실 사회주의가 파산되었다.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들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사회주의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100년이 안되어 실패하고 마르크스가 자체 모순으로 인해서 망할 것으로 내다보았던 자본주의는 여전히 그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공산주의 이념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많고 대신 자본주의 이념이 건강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양측의 인간 이해가 달랐다는 데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능력만큼 노동하고 필요한 것만큼 소유할 수 있는 이상적 사회를 주창하는 마르크시즘은 인간을 지나치게 이상적인 존재로 보았다. 한 가정에서도 완전히 공평한 체제가 운영되기 힘든 마당에 홉스가 표현한대로 ‘만인의 만인을 향한 투쟁’처럼 돌아가는 사회 안에서 인간이 이렇게 이상적으로 행동할 것으로 기대했다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능력만큼 소유할 수 있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했다. 사유재산을 철저하게 인정함으로써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이에 근거해서 생산을 높일 수 있었다. 이런 생산성의 제고는, 소위 ‘파이를 크게 키움으로써’ 인간 삶에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해보려던 자본주의 사회는 마르크시즘이 관심을 기울였던 무산자 계급의 문제까지 점진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예증을 우리는 서유럽과 동유럽에서 볼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서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은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서 국가경제 체제로 움직였으며, 서유럽은 개인의 소유권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주는 시장경제 체제로 움직였다. 4,50년이 흐른 결과는 서유럽의 일방적인 승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유럽은 나름대로 문제가 많긴 했지만 나름으로 풍요로운 사회를 달성했고, 동유럽은 평등한 사회를 이룬 것 같아도 실제로는 총체적으로 가난해지고 말았다. 1990년 어간에 몰락한 동유럽은 이제는 거의 서유럽에 흡수된 상태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가 지고의 선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근본적으로 해체되었다고 단정하고 싶지도 않다. 서유럽이 시장경제 체제였다고 하더라도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일색이었다기보다는 여전히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시장경제 체제의 문제를 보완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의료와 교육 문제에서는 서유럽이 철저하게 사회주의적 정신을 따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의료와 교육을 국가 차원에서 해결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동유럽의 해체가 곧 사회주의의 몰락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역사 발전의 깊이를 간과하는 일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바는 마르크시즘의 실패는 그 이념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에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그런 이상적인 기준에 부합해서 행동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바람직하겠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그런 해방과 자유의 세계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 즉 이 현실세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곳이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다음에 가능한 세계라는 말이다.

해방 이후와 영성

문화적 해방이 기독교적인 대안으로서 확실한 토대를 확보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마르크시즘을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 우리는 그것이 지나치게 낙관론적 인간 이해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성을 상실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이 제시하고 있는 문화적 해방의 상태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인간 구원에 적합한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
우리 인간의 역사는 그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계속적으로 발전해왔다. 마르크스가 원하던 만큼의 해방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가 붕괴되리라고 예측한 자본주의 방식에 의해서 노동자들의 삶이 풍요로워졌으며, 여성주의자들이 기대한 것만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성들의 삶의 형식들은 지난날에 비해서 놀랍도록 발전했다. 단적인 예로 이제 우리는 빨래를 직접 하느라고 애 쓸 필요가 없게 되었고, 자신이 성실하게 노력하기만 하면 생존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문화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교육과 의료의 평등도 역시 상당히 실현되었으며, 그런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해방의 역사는 누가 원하든 원치 않던 우리에게 상당한 삶의 풍요를 허락했지만 그것에 상응할만한 행복한 삶이 보장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 인류의 딜레마이다. 이혼율이 증가했다거나 자살 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거나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실제로 행복하다는 체감 지수가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는 게 핵심이다. 결국 인간의 행복과 구원은 우리가 지표와 지수로 객관화하는 데 익숙한 이런 문화, 경제적 해방만이 아니라, 혹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서 그 이후(postliberation)와 연결되어야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나는 그것을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여기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영성’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두 사람의 예를 들려고 한다. 한 사람은 <월든>을 쓴 소로우이다. 그는 스무 여덟 살이 되던 1845년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손수 짓고 2년 간 자급자족하면서 살았던 경험을 책으로 냈다. 일반 사람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으면서 호숫가의 숲에서 약간의 농사를 짓고 살면서 무한한 행복을 경험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사람의 삶을 일반화하는 것은 오늘 같은 산업화 이후, 정보화 이후, 고도의 인간적 역학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적합하지 않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삶의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그렇게 낯선 삶도 아니다. 즉 문화와 담을 쌓고 살았지만 이 사람에게는 문화가 인간에게 주는 만족감과 전혀 다른 삶의 행복이 주어진 것이다.
티베트의 한 마을 라다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소개한 <오래된 미래>는 우리에게 바람직한 공동체의 삶이 무엇인가를 새로운 방향에서 제시해준다. 이 책을 쓴 노르웨이 언어학자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티베트 언어를 공부하기 위해 라다크에 들어갔다가 그들의 삶에 매료되어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헬레나의 주장에 따르면 라다크 사람들은 혹독한 환경 가운데서도 평화롭고 건강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개인 소유 개념이 희박하고 의견이 다를 수는 있지만 싸우는 일은 전혀 없고, 거의 자연과 일치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삶이 오늘 우리 문명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 그런 유목생활을 거쳐 온 문명인들에게 그런 삶으로 돌아가라고 강요할 수도 없지만, 상대적으로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보다 훨씬 궁핍하게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오히려 행복한 삶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양질의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주로 문화에 의존해서 살아가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간다는 게 그 대답이다. 이 말은 곧 삶의 외면적인 차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내면적 태도를 가리킨다. 즉 문화에 의존한다는 것은 자기를 성취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이며, 자연과 일치한다는 것은 자기를 최소화하고 자연에게 자신을 맡기는 삶의 방식이다. 유럽의 근대주의 이후로 인간이 세상을 객관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진 탓인지 오늘 근대주의 아들과 딸들인 우리 모두는 그렇게 자연과 대결하면서 살아간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이 부분적으로 해방되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해방되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기가 성취한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삶의 무게는 우리를 힘들게 만들뿐이다.

*필자는 여기서 기독교의 행복론을 관념화해도 좋다는 뜻으로 이런 발언을 하는 게 아니다. 흡사 열광주의 집단들처럼 자신들의 주관적 경험에 폐쇄된 채 인류 보편적 행복의 가치를 외면하는 이들의 삶을 옹호하려는 것도 역시 아니다. 건강, 경제, 자유, 의미 등등, 우리가 행복한 삶의 기준으로 제시할 수 있는 요소들이 우리 모두에게 확산되도록 구체적으로 투쟁해야 하지만 그런 요소들을 계량화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할 뿐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림절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우리의 행복이 훨씬 내면적인 영성에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하며, 그런 기준에서 이 세상의 행복론과 경쟁해야만 한다.

물론 여성신학은 이러한 제반 문제들이 가부장적이고 여성 차별적인 가치관과 세계관 때문에 벌어진 결과라고 비판하고, 그것의 영성을 살리는 길이 곧 여성신학이 모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여성신학이나 기존의 정통신학은 기본적으로 같은 길을 간다. 그러나 양측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하나는 부분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부분적이 차이는 이런 영성으로 나가는 길을 굳이 여성신학이라는 또 하나의 방법에서 찾을 필요가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정통 신학은 이미 신학의 정통 안에 그런 영성의 길이 담겨 있다고 보는 반면에 여성신학은 그것의 한계를 지적한다. 근본적인 차이는 여성신학은 해방신학과 같은 맥락에서 역사 변혁을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는 반면에 정통신학은 그런 역사 너머의 현실을 중심 주제로 삼는다는 데에 있다. 전자를 역사 내재라고 한다면 후자는 역사 초월이다. 물론 이 ‘내재와 초월’이 이원론적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학의 성향에 따라서 강조점이 다르다는 점에서 구분될 수 있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다루어질 예정이니까 여기서는 일단 접어두고, 인간 해방의 역사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적인 입장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서 기독교가 인간과 그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리고 인간의 정치, 경제적인 구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일련의 마르크시즘적인 시도와 어떻게 다른지 차별성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그 단초는 죄론이다.

죄로부터의 해방

기독교는 인간 실존을 기본적으로 죄라고 인식한다. 이미 창세기에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인류 조상의 삶은 죄로 각인되어 있으며, 그 이후 구약성서의 역사에는 이스라엘의 배반과 하나님의 심판 및 은총이 반복되고 있다. 신약성서도 역시 이런 시각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하셨으며, 사도들도 그런 회개의 복음을 전했으며, 바울의 편지는 부패한 인간의 모습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성서의 이러한 견해가 기독교 역사를 거치면서 훨씬 강화됨으로써 결국 교회 밖의 사람들마저 기독교는 죄를 강조하는 종교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역사 과정에서 죄 문제가 지나치게 확대된 이유는 성서 자체가 그런 부분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교권의 행사 과정에서 오용된 측면도 없지 않다. 이 말은 곧 교회 지도자들이 신자들을 원만하게 다루기 위해서 그들의 죄책감을 자극했다는 말이다. 어떤 인간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완벽하게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자신의 죄를 공격하면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마땅히 대꾸할만한 심리 상태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입장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죄를 지적 받고 용서의 선언을 듣게 되면 어느 정도 심리적으로 정화(카타르시스)되는 기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죄책감의 문제가 악순환에 빠진다.
계몽주의 이후 인간의 가치와 가능성이 학문과 사회 모든 분야에서 규범적 기준으로 등장하면서 죄의식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인간론은 세상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세상의 역사의식에 자극받은 해방신학이나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여성신학도 역시 기독교의 죄론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다. 전통 기독교가 여성을 죄인으로 다루고 있으며 여성의 운명 자체를 그렇게 비극적인 것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영은 거룩하고 몸은 악하다는 영육이원론에 근거해서 여성의 육체를 가장 추한 것으로 표현한 교부들과 신학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의 인간이해는 철저하게 여성 차별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비판에 대해 일일이 맞대응 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들의 비판이 전반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 인간학은 그들의 비판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드러난 기독교 현상은 그들의 비판을 들어 마땅하지만, 원래의 기독교 인간학은 그렇게 자학적이거나 비관적인 게 아니라는 말이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 조금 더 나가보자.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다시 아담과 이브 설화로부터 이 문제를 풀어가자. 이브가 아담을 유혹해서 죄를 범하게 했다는 이 에덴동산* 설화를 중심으로 인간의 죄를 숙명적으로 단정하거나 더 나아가서 여성의 책임을 무겁게 말하는 것은 성서의 세계를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는 태도이다. 우리가 좀 더 엄격하게 말한다면, 원래 성서는 죄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아담과 이브 설화가 말하려는 것은 죄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죽음을 야기한 원인이 바로 죄라는 사실에 관한 일종의 신학적 술어이다.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사건,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파괴한다는 명백한 현실 앞에서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이런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선악과라는 설화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이런 성서의 시각이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성서의 입장이 인간의 삶을 숙명주의로 몰아가거나 더 나아가서 그 삶의 에너지를 강탈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현실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그 인간의 구원과 해방에 대한 바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까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에덴동산 설화는 오해될 여지가 많은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일종의 신화로 받아들인다. 오늘날 성서의 보도를 일점일획도 틀린 게 없다고 주장하는 축자영감설에 완전히 종속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이야기를 실제적인 역사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성서론과는 약간 달리 조금 더 신학적인 오해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에덴동산으로의 복귀로 여기는 것이다. 에덴동산은 이미 실낙원이 되었기 때문에 이 세계(에온)를 시간적으로 접근하는 그리스도교는 이 에덴동산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린다. 예수의 재림으로 일어날 새 하늘과 새 땅은 그 어떤 인간학적 복지 프로그램으로 성취될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한 생명의 나라이다. 그 생명의 나라는 아직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다.  
  
교회 지도자들이 공연히 신자들의 죄의식을 공격하고, 따라서 신자들이 실존적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오류를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죄의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리해야 한다. 이런 왜곡된 죄 인식은 교회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 밖을 향한 선교의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이다. 즉 죄의 왜곡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인간론이 반(反)생명적이라는 의심을 받게 된다. 우선 기독교의 죄론에 관한 판넨베르크의 진술을 들어보자.

죄의 용서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고백을 옳게 해석했다면 이것은 곧 참된 자유에 대한 보증이며, 또한 이로써 확보된 인간의 휴머니티에 대한 신뢰이다. 이것은 신앙에 기초한 자유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 자신을 향하게 함으로써 가능하다. ···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의 죄의식은 자기를 부인하거나 생명에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왜곡 앞에서 생명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사도신경 해설 211쪽).

어거스틴은 인간의 죄를 ‘휘브리스’(교만)*라고 규정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모르 수이’(자기 사랑)이라고 규정했는데, 옳은 말이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그런 설화에 매달려서 누가 누구를 유혹했다느니, 또는 인간의 육체를 천하게 여기는 일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축소시키는 원인이, 그래서 결국 죽음에 이르는 원인이 인간의 교만이며, 자기 사랑이라는 게 여기서 관건이다. 물론 여기서 자기 사랑이라는 개념이 오해받을 염려가 있다. 기독교가 사람들을 이타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요함으로써 이기적인 삶을 죄로 인식하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 사랑, 또는 이기심이 그렇게 단순한 인간의 심리현상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가 어떤 학자들의 주장처럼 문명의 원초적 에너지인지, 아니면 파괴적인 에너지인지 간단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이런 문제는 또 다른 주제이니까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교만과 자기 사랑 개념을 약간 다른 식으로 설명해보자.

* 휘브리스는 교만이라는 그리스어이지만 폴 틸리히의 설명에 의하면 훨씬 심층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교만은 아주 구체적인 부도덕한 태도에 불과하지만 휘브리스는 교만한가, 아니면 겸손한가와 상관없이 어떤 영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즉 교만하지 않아도 휘브리에 사로잡힐 수 있으며, 겸손하면서도 휘브리스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 말을 가장 정확하게 번역하려면 ‘신적인 것의 영역으로 자기를 드높이는 것’이다. 이것이 곧 그리스 비극에서 사용된 휘브리스라는 단어의 개념이다. 위대한 영웅은 휘브리스에 빠졌다가 신의 징벌에 의해 거꾸러진 사람들이다.(폴 틸리히, 송기득 역,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156 쪽.)

성서와 기독교가 보는 인간의 죄는 자기 집중이다. 불교의 용어로 말한다면 자기 집착인지도 모른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 이유는 그것이 자신들을 신처럼 만들어 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서의 보도에 따르면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유는 자신의 제사 행위가 인정받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조금 더 근본적으로 인간은 이 지상에서 자기를 성취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는데, 기독교는 이것을 죄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는 인간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상에서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문명을 일구고 무언가를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이 세계 자체에 대한 냉철한 직관과 해석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이방인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는 것이 곧 죄이다. 창조자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놓은 것을 염려하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이렇듯 구원받지 못하는 길로 가는 것이 곧 죄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메타노이아’(회심)이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이해하고 있는 대로 자기의 구체적인 몇 가지 잘못, 또는 죄의식을 벗어나기 위한 막연한 반성이 아니라 자기를 성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 즉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이다.
인간의 자기 성취가 인간을 구원하는지, 인간을 해방시키는지 우리가 우리의 일상을 조금만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그 대답이 쉽게 나온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성취하는 일은 집을 산다거나 자식들을 출세시킨다거나 또는 건강을 유지하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자기들 뜻대로 성취되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라는 주장은 매우 추상적인 것이다. 그 사태를 정확하게 직관하기만 하면 그런 성취가 우리의 생명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흡사 어린아이들이 구슬치기에서 구슬을 많이 따고 행복해 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정도에서 즐거워하거나 실망한다. 이런 자기 성취는 그것이 성취되기 이전까지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뿐이지 성취된 다음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그것은 너무나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다. 이런 점에서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이 추구하는 사회 문화적 해방 사건이 우리에게 성취되었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그런 일들이 너무나 흔한 일상으로 변모함으로써 생명력으로 작용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런 자기 성취감, 자기 집중이라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타당하다.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 또는 하나님 나라, 또는 생명의 나라에 삶의 중심을 두는 것이 곧 회개라고 한다면 이것만큼 확실한 해방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일이 예수님에게 발생했는데, 그분은 우리와 하나 됨으로써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자기 성취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할 수 있게 하셨다. 이게 곧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다. 이 땅에서 저 하늘로 우리의 삶의 지평을 바꾸는 것이다. 이 세상의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 나라의 의에 대해서 사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자칫 피안과 차안을 전적으로 구별하는 이원론에 빠질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기독교가 저 하늘과 이 땅을 구분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이 땅은 무조건 악하고 저 하늘은 무조건 선하다는 이원론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해야겠다. 이것은 인간 중심으로부터 자연과 세계 중심, 또는 노장이 말하는 도(道) 중심으로 우리의 인식 축을 전환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기독교가 인간의 자기 성취를 상대화하니까 이원론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자기 성취가 얼마나 작은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성취하는 것에 관심을 줄여나가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전체 세계와 연결되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곧 기독교가 말하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해방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기독교가 인간의 죄를 언급한다는 것은 인간을 죄의 노예로 간주하고 그 약점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요인을 정확하게 짚어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런 기독교의 인간론을 가장 정확하게 해명해주고 있는 신학개념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창세기 1장26,27절 말씀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공동 번역에서 사용된 ‘모습’은 곧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하는 ‘형상’과 같은 용어인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풀어내기는 쉽지 않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이 하나님의 형상(形象)이라는 것이 겉모습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우리가 소박하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김새와 하나님의 생김새가 같다고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이 형상(imago)은 겉모습이라기보다는 내면적인 어떤 능력이나 느낌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모습’이라는 단어보다는 ‘이미지’라는 단어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좀더 적절한 단어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을 해명할 수 있는 ‘존재유비’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form, matter) 개념에서 말하는 그 ‘형상’이 여기에 더 타당한 것일까? 이 철학적 용어는 성서의 형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형상(形相)은 어떤 사물이 원래의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근원적인 힘을 가리킨다. 질료는 단지 그것을 구성하는 물질적인 인자인 반면에 형상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 실체이다. 플라톤의 경우에 이 형상은 ‘이데아’다. ‘하나님의 형상’의 형상은 단어 자체부터 철학적 ‘형상’과 다르기는 하지만 그 의미를 따져본다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어쨌든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만들어졌다는 성서의 진술은 자연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특성이 그 이외의 것들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는 사실과 그 특성이 근본적으로 신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속한다. 비록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여성 차별적 요소가 담겨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남녀의 차별 없이 모든 인간에게 담지된 무한한 신적 가능성을 내다보는 입장이 곧 기독교의 인간론이라는 말이다. 보기에 따라서 그런 가능성들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며 아무리 인간에게 탁월한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자연적 속성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하다. 만약 인간을 기계적인 진화론의 산물로만 간주한다면 이런 말이 옳지만 ‘우연성’ 개념을 우선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바라본다면 자연 앞에서 인간의 초월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탁월한 구성 요소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성서와 기독교의 주장이 확보하고 있는 역동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이로써 우리는 기독교의 인간학이 인간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그래서 결국 여성 차별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의 문제제기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설화를 구성하고 있는 J기자와 E기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J기자는 야훼 하나님이 흙으로 만든 인간에게 ‘루아흐’(숨)를 불어넣었다고 했으며, E기자는 위에서 설명한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했다. 양측 모두 인간에게 신성이 부여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보다 더 혁명적인 인간론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인간이 신 자체는 아니지만 신성을 부여받았으므로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물론 성서는 곳곳에서 ‘너는 신이 아니라 그의 피조물이다’라는 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적으로 진술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두 측면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현실은 죄로 인한 죽을 운명에 처해졌지만 원래의 상태는 신성을 부여받는 존재라는 말이다.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신처럼 높이다가 인간이 파멸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극복되면 인간은 신처럼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 이 두 가지가 함께 타당하다. 이 세상은 현실이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새로워진다고 하더라도 신이 될 수는 없으며, 신과 비슷해질 수도 없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지는 데 그 영광은 곧 우리가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교회는 비록 인간이 이 현실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인간을 신처럼 대우하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 신처럼 존재하도록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갖게 되는 질문은 신 같은 존재라는 게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또는 ‘하나님의 형상’의 실체는 무엇인가? 많은 신학자들이 사랑, 이성, 자유, 기쁨 같은 개념으로 설명해보려고 했지만 아직 완전한 대답은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았다. 이 중에서 ‘사랑’이 가장 근사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가 아직 모르기 때문에 그것도 완전한 대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바울의 진술처럼 현실에서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인식할 뿐이지 결정적인 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 비록 완전한 대답이 종말에서나 주어지기는 하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신성이 드러날 수 있도록, 특히 인간에게 주어졌다가 상실해버린, 그러나 다시 주어지게 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드러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 여성해방일 수도 있고, 외국 노동자들의 생존 보장일 수도 있고, 이렇게 저렇게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보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그에게서 발생한 구원 사건을 마음에 새기고 이 세상을 바르게 통찰하며 우리에게 매일 새롭게 열리는 생명의 역사에 마음을 열고 있다면 생명의 영인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할 것이며, 그것을 우리 삶의 토대로 삼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기독교의 인간론이 여성을 차별하거나 인간을 소외시키는 가르침이 아니며 오히려 근본적으로 해방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문제는 그 해방의 능력을 축소, 손상시킨 기독교 역사에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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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조직신학 16장: 성령에 대해 2005-10-12 7306
76 조직신학 15장: 기독교 영성 [3] 2005-10-03 6220
75 조직신학 14장: 신앙론 [2] 2005-09-28 6349
74 조직신학 13장: 칭의와 성화 [7] 2005-09-22 8954
73 조직신학 12장: 은총론 2005-09-14 5857
72 조직신학 11장: 죄에 대해 [1] 2005-09-04 8101
71 조직신학 조직신학(2) 강의안내 2005-08-31 6708
70 조직신학 10장: 인간에 대한 물음 2005-05-25 6157
69 여성신학 12장: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에 관한 신학적 고찰 2005-05-23 5863
68 여성신학 11장 바울의 동성애 비난에 대해서 [4] 2005-05-23 7976
67 조직신학 9장: 하나님과 창조 [2] 2005-05-18 6679
66 여성신학 10장. 여성은 베일을 써야하는가? 2005-05-17 4505
65 조직신학 8장: 삼위일체에 관해서 [3] 2005-04-27 6890
64 여성신학 9장: 인간은 왜 남성과 여성인가? 2005-04-25 4273
63 조직신학 7장: 유신론과 무신론 2005-04-20 5568
» 여성신학 8장: 여성신학과 기독교 인간론 2005-04-19 5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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