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삼위일체에 관해서

조직신학 조회 수 6893 추천 수 65 2005.04.27 18:19:01
8장
삼위일체에 관해서

삼위일체론은 혁명적 하나님 이해라 불릴 만하다. 원래 절대적이고 유일하고 모든 것의 근원인 하나님은 그 어떤 것의 도움도 필요 없는 자족의 존재이어야 하는데, 기독교는 이런 전통적 유신론의 틀로부터 벗어나서 전혀 새로운 하나님 이해인 삼위일체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 삼위일체론은 핵심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집중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어떻게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었는가? 예수가 초대교회에 의해 ‘주’로 올림을 받았다는 사실은 영원하고 자존적이고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안에 자기를 낮추고 육화했다는 뜻인데, 이는 곧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가 영원의 세계와 동일시 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삼위일체론의 바른 이해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주장하는 유일신론적 이해를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기독교의 하나님 인식론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서 일컬어지는 삼위일체론의 하나님은 역사와의 연관성이라 할 경륜적 차원이 무시되고 단시 초월적인 부분이라 할 내재적 차원에서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삼위일체론의 역동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 신학의 근거이면서도 가장 무시되기 쉬운, 즉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면서도 접근하기 간단하지 않은 삼위일체론의 실체를 조명함으로써 하나님 인식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심화해보자.

왜 삼위일체인가?
위에서 말한 대로 기독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신론인 ‘삼위일체’ 개념이 교회 안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이유는 우선적으로 이 용어가 성서에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을지 모른다. 간혹 근본주의적 성서관을 따르는 분들 중에는 창조 설화에 묘사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삼위일체의 근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 1:26). 마태복음에도 이런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진술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 28:19,20). 창세기의 진술이나 마태복음의 진술은 아직 삼위일체론이 기독교 신학에서 충분하게 인식되기 이전의 것들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집적 가리키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신구약성서에 삼위일체론을 암시하는 진술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삼위일체’라는 용어나 그 개념을 직접 거론하는 텍스트는 한 군데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삼위일체론은 어떤 구체적인 신앙생활의 실천이나 성서 텍스트보다는 순전히 신학적 사유에 근거한 개념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삼위일체만 유독 신학적 개념과 연관된다고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다른 도그마에 비해서 그런 성격이 도드라진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사도신경도 창조자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을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단지 각각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뿐이지 삼위일체론에서 중요한 세 위격의 관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사도신경마저 삼위일체론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거나 해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결국 삼위일체론이 사변적 신학의 요청으로 인한 결과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 현장에서 삼위일체를 소홀하게 다루는 이유는 어쩌면 당연하다. 충분한 신학적 훈련이 없으면 이 개념을 따라잡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사물을 경험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한다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르겠다. 간혹 한 인격체가 가정에서 남편의 역할을, 회사에서 직원의 역할을, 교회에서 집사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일종의 역할론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지만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이런 유비의 방식으로는 충분하게 해명될 수 없다. 조금 신학적인 방식으로 이 용어를 서술한다면 삼위일체 개념은 하나님이 위격으로는 셋으로 구분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로 통일된다는 의미이다. 아버지의 인격과 아들의 인격과 영의 인격이 각각 다르다는 말은 일단 크게 어려운 것 같지는 않다.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전능한 인격이며, 예수는 역사 안에 철저하게 의존해 있던 우리와 똑같은 인격이며, 영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관여하는 힘으로서의 인격이다. 그러나 이런 세 인격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여기서 인격과 본질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예수는 무슨 이유로 공생애 중에 이런 삼위일체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셨을까?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기독교의 신론은 유일신론이 아니라 삼신론에 가깝다는 말일까? 야훼 하나님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인데, 아들과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서로 모순 되는 주장이 아닐까?
삼위일체론에 관한 질문은 거의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포괄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두 가지로 집중시키려고 한다. 첫째, 삼위일체론은 일자무식의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할 기독교의 복음으로서는 무의미한 것은 아닐까? 사실 삼위일체만 이해하기 힘든 게 아니라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단순성과 복잡성이라는 양면성이 있다. 예컨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아주 간단한 교리이지만 과연 믿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매우 복잡해진다. 구원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없겠지만 그 구원의 심층적 의미로 들어가게 되면 알아들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 예수의 설교는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달리 모든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 어려워서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불평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지나치게 현학적이어서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거나 혹은 단지 지성적으로 접근하게 만드는 것도 문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나치게 단순한 형식논리에 빠져서 신자들의 신앙을 주술화하거나 편이주의에 치우치게 하는 것도 문제이다. 단순성과 복잡성이 적절한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만 기독교 교리는 생명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는 복음을 훼손하거나 복음의 근본과 무관한 게 아니라 복음의 의미를 심화하는 데 결정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이런 불가해한 교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우리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가 처음부터, 혹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게 아니라 주변 세계와의 대화 가운데서 ‘변증적’ 필요에 따라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에 관한 정체성을 해명하기 위해서 ‘참된 신이며, 참된 인간’이라는 기독론이 발생했듯이 삼위일체도 역시 유대교와 동일한 야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들이 부정한 역사적 인물인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믿는 자신들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해명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말이다. 특히 교부들이 신(新)플라토니즘과의 만남에서 이런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적 착상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학의 고유한 활동이 무엇인가를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신학은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보편적인 인식론에 근거해서 변증하기 위해 당시의 보편적 학문과의 대화를 진지하고 신중하게 이끌어야 한다. 이런 작업에 투철했던 교부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구도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검토하자.

유일신론과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은 기본적으로 유신론, 또는 유일신론의 극복이다. 원래 유대교의 유일신론으로부터 출발한 기독교가 예수와 성령까지 하나님으로 인식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하나님 인식의 형태를 갖추게 된 이 삼위일체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 사이에 상호 소통, 상호 의존이 있으며, 동시에 독립된 인격이면서 본질적으로 하나이고, 각각의 신성이 확보된다는 독특한 하나님 이해이다. 이런 관계에 대해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

하나의 인격적 하나님이라는 유신론적 사상은 사실 헤겔의 절대주체 논의에 반대하는 무신론적 비판이 제기한 것처럼 인간적 ‘자기’의 투사(投射)로서 평가된다. 삼위론적 도그마의 하나님 이해는 이러한 추상적 유신론을 지양한다. 말하자면 삼위적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며, 이 하나님이야말로 비인격적이지 않은 분이다. 삼위의 모든 인격은 각자 인격실존을 갖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삼위적 인격의 형태로서만 인격적인 분이다. 오히려 각기의 인격은 그 신성을 다른 이와의 중재를 통해서만 소유한다. 이처럼 아들은 영의 중재를 통한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신성에 참여한다.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그 하나의 하나님과 일치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서만,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높이는 영과의 일치 안에서만 그의 신성을 소유하는 것이다.(W. Pannenberg, GsTh 2, 110).

삼위일체론적인 전통에 서 있는 기독교 신자라고 하더라도 대개는 절대적이고 자존적인 유일신론적 하나님을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팔머는 전통적인 유신론적 하나님 이해가 함축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의 지적은 곧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이해를 향한 신학적 단초가 될 수 있다. 성부가 독자적으로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아들과 성령과의 소통을 통해서 참된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론은 결국 하나님의 의존적인 성격을 의미한다. 약간 길지만 한 사상가의 깊이가 담겨 있는 내용이라 생각되어 아래에 인용해보겠다.

내가 보기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이미지에는 중요한 결점이 하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지으셨고, 언제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분이며, 모든 것을 조정하고 변화시킬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손대지 않은 채 영원히 지속되도록 해주는 분이다. 그런데 나는 이 하나님에게 별 흥미도 느끼지 못하며, 내가 경험한 하나님과도 너무 다른 것 같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나는 이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나 또한 그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역동적인 관계이며 둘 사이에는 끊임없는 에너지 교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주도자로 생각하면, 그러한 에너지는 생성되지 않는다. 엔트로피는 계속해서 생기고 우주는 차가워져 텅 빌 것이며, ‘위대한 작업’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종교적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엔트로피는 매우 흔하게 발견되는 것 같다. 아마도 우리에게는 필요하지만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지만 우리가 사랑하기에는 너무 빈틈이 없는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가르침을 끊임없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연약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습을 보일 때 비로소 사랑의 마음이 발동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이 각각 사랑의 에너지를 갖고 ‘위대한 작업’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참다운 상호관계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 관계가 완성될 때 우리는 혼자라는 망상에서 빠져 나올 수 있고, 나아가서는 관계하고 공유하고 함께 할 때 비로소 참다운 실천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Parker J. Palmer, The Active Life - A spirituality of work, creativity, and caring, 112).

유일신론을 극복하고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으로 넘어오는 길목에 기독론이 놓여 있다. 이는 곧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치열한 논쟁이 정리된 이후에나 삼위일체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앞에서 기독론을 다룰 때 언급한 것이지만 예수의 인성과 신앙의 문제는 그것 자체만이 아니라 전체 하나님 이해와 연관되어 있다. 예수를 통한 구원의 리얼리티를 경험한 사도와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예수는 당연히 하나님으로 고백되었다. 그 이전에 그들이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믿고 있던 절대적인 유일신인 하나님과 새롭게 메시아로 신앙하게 된 예수와의 관계를 설명해야만 했다. 하나님이 유일신이면서 동시에 예수도 신이라는 이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면 기독교의 기독론과 신론은 그 토대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해결하는 기초는 예수가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라는 구도였다. 이런 구도에서 기독교는 유대교의 유일신론을 넘어서 삼위일체론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초기 기독교 안에서 유대교의 유일신론이 쉽게 배격된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론이 기독교 안에서 정통의 신론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 수 세기에 걸친 이단논쟁이 전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이단은 ‘종속론’과 ‘양태론’이다.
종속론(subordinatianism)은 원래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에비온주의로부터 시작된 학설이다. 에비온주의는 하나님을 완전한 인격체로 생각하고 로고스, 혹은 아들과 지혜, 성령은 하나님의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다르며 인간으로서 신성을 입은 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아리우스를 대표로 하는 이 종속론에 따르면 예수는 결국 피조자로서 신적 존재이지 하나님 자체는 아니다. 아리우스는 예수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한다.

성자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지으신 것(포이에마)이다. 그는 그의 본질(우시아)에 있어서 성부와 같지 않으며 ··· 오히려 그는 창조된 존재들 가운데 하나이며 ··· 그는 우리 때문에 창조되었으며, 이것은 하나님이 마치 하나의 도구처럼(오르가논) 그를 통하여 우리를 창조하기 위함이었다. (Kirchen-und-Theologiegeschichte in Quellen 1, hrsg. von Ritter, Neukirchener Verlag 1977, 131. 김균진, 1권, 237에서 재인용).

종속론과 대척점에 자리하는 양태론(modalim)은 원래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가현설로부터 시작된 학설이다. 가현설의 입장에 따르면 예수는 참된 인간이 아니라 단순히 유일신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세 가지 양태의 하나인 셈이다. 양태론의 주된 관심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도 유일신 신앙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215년 경 로마에서 가르쳤던 양태론의 태두라 할 사벨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하나님은 단일한 실체(mona)이다. 하나님의 존재 안에는 구별이 없으며, 단일체인 하나님은 세 가지의 상이한 당태, 혹은 형태로 자기를 나타낸다. 마치 연극배우가 관중 앞에서 세 가지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인격은 하나인 것과 같다.” 이러한 주장은 정통교회의 주장과 별반 다른 게 없는 것처럼 들리지만 근본적으로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예수의 인격이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에게서 ‘참 인간’을 제거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에 원래의 삼위일체론과는 거리가 멀다.
터툴리안(Tertulian)은 종론속과 양태론의 문제점을 나름으로 정리하면서 삼위일체론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삼위일체론이라기보다는 단지 삼위론에 머물렀기 때문에 여전히 유일신론적 범주 안에 있었다고 보아야 옳은 것이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하나님의 단일성은 일원론적 단일성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이미 구분되어 있는 단일성이다. 한 분 하나님은 그 자체 안에 셋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의 주장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1) 한 실체-세 인격(una substantia-tres personae). 2) 구분되어 있으나 나누어져 있지 않고, 구별되어 있으나 분리되어 있지 않음(distincti, non divisi, discreti, non separati). 3) 삼위일체(triniyas). 그러나 터툴리안의 신학에서는 유일신론이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성부는 실체 전부이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파생된 자이며, 성령은 성자의 한 부분이다. 성부는 전체로서의 신적인 실체이고, 성자와 성령은 전체의 부분들이다.
위에서 언급한 종속론, 양태론, 삼위론은 방향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유일신론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이들에게는 어떤 형태로든지 한 분 하나님의 절대적인 위치는 흔들리지 않았으며, 아들과 영에 비해 아버지의 본질이 우선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또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이해될 때 결국 아버지가 첫 번째의 자리에 서게 되고, 성령은 끝에 서게 된다. 몰트만의 설명에 따르면 아리우스의 종속론은 순수한 형태의 일신론적 기독론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포기될 수 있다. 또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도 아리우스의 종속론과 상반된 개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종속론의 다른 한 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양태론도 역시 기본적으로는 ‘단일 군주체제’의 기본사상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이 양태론에서 삼위적 사고는 종속론처럼 한 하나님에게 종속되지는 않지만 한 하나님 안으로 폐기된다고 한다. 한편 터툴리안도 역시 하나님을 근원적으로 한 분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노출한다.

삼위일체론의 교리사적 논쟁
앞에서 삼위일체론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기독론이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초기 교회의 상황을 좀더 정확하게 들여다본다면 삼위일체론보다는 기독론이 훨씬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그 이유는 유대교의 야훼 하나님에 관한 신앙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즉 예수의 본질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해명하는 것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현안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 유명한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사이에 벌어졌던 삼위일체 논쟁을, 특히 니케아 종교회의와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를 중심으로 검토해보자.
325년 세계 최초의 종교회의가 니케아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381년에는 제2차 종교회의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기독교를 국교화한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소집되어 주로 기독론이 논의되었다. 두 번에 걸친 종교회의와 그 어간에 걸쳐 벌어진, 그리고 약간은 교회의 정치적인 힘이 어울린 논쟁이 기독교 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를 결정했다. 니케아에서 열린 325년의 첫 번 회의에서 대표적으로 종속론의 아리우스와 동질론의 아다나시우스가 대결을 벌였다. 아리우스에 따르면 예수의 본질은 하나님과 다른 이질이며(헤테로 우시오스), 아다나시우스에 따르면 하나님과 같은 동질(호모 우시오스)이다. 이 회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 요약되어 있다. “아들은 창조되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태어났으나 아버지처럼 영원하고 아버지와 본질이 같다.” 일차 회의 이후에 계속된 신학 논쟁의 와중에 유질론(호모 이우시오스)이 등장한다. 유질론자들은 아리우스 쪽에 가담했던 이들로서 극단적인 아리우스의 위험성을 제지하기 위해 나중에 아다나시우스 편을 들게 된다. 이런 신학적 논쟁의 핵심은 예수의 본질이 하나님과 동질인가, 유질인가, 아니면 이질인가의 문제이다. 교리사적으로 이런 세 갈래의 주장이 몇 번의 반전에 반전을 거친 후 381년 회의에서 니케아 신조를 확인하고 아리우스주의를 완전히 배격해 버림으로써 삼위일체론이 확정되었다.

*교부시대에 신학적으로 중요한 결정이 내려진 종교회의가 주교나 감독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황제에 의해서 소집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별로 주목하지 않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성격을 언급할 때 중요한 요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은 곧 유럽의 교회 역사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단지 교회의 역사만이 아니라 신학의 내용까지도 역시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황제의 권위와 마찬가지로 교황의 권위가 강조되었고, 교황이 하나님의 영적인 대리자로 행세하듯이 황제는 하나님의 세속적 대리자로 자리를 잡았다. 황제와 교황의 공생적 관계가 과연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온전하게 지켜냈는지, 아니면 오히려 ‘현실유지’(status quo)의 이념으로 이용당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곧 오늘도 역시 교회가 세속적 권력을 이용하려는 유혹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세 가지 입장의 차이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기독교 교회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요소이다. 초기 기독교가 오랜 논쟁을 통해서 결국 ‘호모 우시오스’를 선택했다는 것은 하나님 이해의 혁명적인 전환인 셈이다. 예수에게서 인간성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하나님과 동질로 생각함으로써 이제 기독교는 유대교와 완전히 다른 하나님 이해에 도달한 한 것이다.
이 개념을 부연해서 설명하기 위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보자.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인간이 신으로 들어올림을 받을 수 있는가? 혹은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으로 내려올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의 인격을 가진 예수가 반신반인이 아니면서 온전한 인간성과 온전한 신성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런 문제들을 수학공식처럼 풀어낼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전개된 삼위일체론 논쟁을 통해서 ‘호모 우시오스’, 즉 예수가 하나님과 동질이라는 신학적 주장이 채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인간 예수가 하나님이 되었든(양자론), 아니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든(성육신론), 하나님 인식에서 가히 혁명적이라 부를만한 단안을 내렸다. 인간 예수는 하나님이라고 말이다.
초대교회는 어떻게 인간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본질인 신성을 인식하였으며, 어떻게 예수의 본질이 하나님과 동질이라고 믿게 되었을까? 그들은 왜 예수를 ‘주’라고 불렀을까? 예수가 스스로 “나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신이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렇게 말한 적도 없고 그럴 까닭도 없지만, 신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도들과 초대 기독교회가 예수에게서 메시야적 표징을 발견했다는 것이 그에 대한 대답이다. 복음서 곳곳에서 증언되는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인간 예수에게서, 그의 인격과 그의 행위에서, 궁극적으로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하나님의 메시야적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에게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이나 지혜의 가르침이나 초자연적 행위들은 그 자체로서 별로 큰 의미가 없었으며, 예수와 관련된 모든 진술과 사건은 구원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그의 메시야성 안에서만 그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이 그의 구원행위로 존재하는 것처럼 예수에게서 발생한 구원사건이 곧 하나님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였다는 사실이다.
이제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하나님 표상이었던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의 구원행위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분으로서 인식되었다. 예수는 온전한 인간이었지만 그에게서 온전한 메시야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역사의 실존, 역사의 한계 안에 들어온 하나님, 그 안에서 하나님과 동질의 격으로 올림 받은 예수, 즉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었다. 유대교는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용납할 수 없었으며, 로마인들도 역시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들이라고 여기고 무시했다. 이 틈바구니에서 그들과 구별된 새로운 종교, 바로 기독교가 시작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삼위일체론의 교리사적 과정에서 예수의 본질이 관건이었던 반면에 성령은 그렇게 현안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아마 교부들의 생각에 성령론은 기독론의 결정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보았을지 모른다. 이질론을 주장한 아리우스는 성령도 아들처럼 피조물로 보는 반면에, 아다나시우스는 성령을 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동질로 보았다. 그렇지만 삼위일체론의 과정에서 성령론의 핵심은 동질성 여부보다는 ‘필리오크베’(filo que, 그리고 성자로부터), 즉 성령이 아버지에게서만이 아니라 아들로부터도 발현하다는 생각이었다. 이 필리오크베 문제는 결국 로마교회와 동방교회가 분리되는 신학적 논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유출되는가, 아니면 성자에게서도 역시 유출되는가 하는 문제는, 즉 단출설과 복출설 문제는 매우 복잡한 신학적 배경이 있기 때문에 전반적인 것을 다루기보다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와 연관된 부분만 짚어보겠다. 기독교 신론이 삼위일체론으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예수의 신성과 인성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대두된 현안은 삼위격인 성령을 어떤 위치에 놓는가 하는 점이었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처음 결정된 신조에는 “우리가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우리는 성부에게서 나신 성령을 믿습니다.”로 변경되었다. 이 신조를 모든 교회들이 받아들였다. 589년 톨레도에서 열린 제3차 종교회의에서는 니케아신조 라틴어판에 처음으로 ‘필리오크베’라는 구절을 삽입하게 되었다. 서방교회에서는 전반적으로 받아들인 반면에 동방교회에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함으로써 양측 교회는 이 신학적 문구를 두고 오랜 세월에 걸쳐 반목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하다. 개신교회는 이 문제에서만큼은 로마 가톨릭과 입장을 같이 한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초대교회가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인식하게 된 이유는 상충되는 두 개의 성서적 진술을 통합해 보고자 하는 신학적 노력 때문이었다. 그 상충되는 진술이란 “하나님은 유일한 존재이다.”과 “그리스도와 성령은 둘 다 하나님이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유일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와 성령이 동시에 하나님일 수 있는가? 결국 초대교회가 선택한 해결점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삼위일체론’이었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셋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위로 존재하지 않은 그 하나님을 우리가 단지 그렇게 인식할 뿐인가, 하는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혼선을 일으키는 것 같다. 존재론과 인식론이 관점에 따라서 대립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사태에 관한 다른 지평의 접근일 뿐이다. 즉 존재론은 존재의 근원을 파악하는 관점이라고 한다면 인식론은 그것을 인식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존재라는 게, 특히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의 실증적 접근으로 확인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는 셋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로 존재하는 것을 경험하거나 확인할 수 없는 지평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는 아직 존재론적으로 확인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사건과 성령의 활동을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의 방식으로 하나님과 아들과 영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뿐이다. 우리의 인식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을 통해서 계시하는 분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적인 인식은 결국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삼위일체론이 실증적 증명의 주제라거나 또는 인간의 단순한 사변놀음에 불과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향한 인간의 진지한 인식론적 치열성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사실은 모든 기독교적 도그마가 시대정신과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그런 신학적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리의 배경이 되는 시대정신을 읽는 일은 피치 못할 작업이다. 도대체 1천6백 년 전 초대교회가 어떤 문제의식을 생각했기에 상당히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표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까?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이 삼위일체론을 하나님 이해의 중심으로 잡고 있을까? 이런 질문의 가장 밑층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인간구원’이다. 즉 초대교회와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가 여전히 삼위일체론을 뿌리에 두는 이유는 바로 ‘인간구원’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 구원의 경륜(經綸)을 갖고 계신 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6)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구원 경륜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고, 거기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이런 개념을 가리켜 우리는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성부로서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구원을 위한 재창조를 계속하신다. 그의 창조는 결국 인간의 구원까지를 포함한 고유한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성자로서의 하나님은 그의 공생애 사역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통해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셨다.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은 현재 거룩한 영으로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신다. 이렇게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은 한결같이 구원의 경륜에서 일치한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경륜적’이라는 용어가 담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의 존재를 이 땅과 역사, 즉 그것의 구원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역사의 의존적이다.” 이 말은 듣기에 따라 매우 위험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만약 인간의 구원 경륜이 하나님의 존재 근거라고 한다면 인간이 없이 하나님도 없다는 말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구원경륜에서 삼위일체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것과 상관없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 우리는 그런 개념을 ‘내재적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이 내재적 삼위일체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하나님, 영으로서의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자존하신다는 말이다.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즉 영원무궁토록 내재적으로 자존하신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과 이 세상의 구원 경륜 가운데 존재하는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은 상호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은 경륜적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인식되고, 경륜적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은 내재적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으로 인해 구원의 근거가 되신다. 조금 쉽게 설명하면,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를 ‘내재적 삼위일체’라고, 보이는 삼위일체를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두 개념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예컨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보이는 아들로서의 하나님에 의한 구원경륜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보이지 않은 내재적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이나 섭리이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조직신학에서 가장 까다로운 부분을 검토했다. 삼위일체론은 어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기독교 교리를 그럴듯하게 설득시키기 위한 요설이 아니라 초대 기독교의 사상적 궤적이 이룩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지평의 심화다. 자존적이고 무소불위한 하나님이 역사의 한계 안에 인간의 육신으로 존재했으며, 예수의 부활승천 사건 이후에 그는 생명의 영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생명의 영이며, 창조의 영이고, 사랑의 영이다. 만약 교회가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역사 속에서 고통당하는 (십자가에 달린) 이들을 돌보아야 하고, 세상에 생명이 풍요로워지도록 (성령충만) 최선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만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세계 전체에서 죽음의 질서를 생명의 질서로 바꾸는 그 영에 순종해야 한다.
이런 삼위일체의 신앙적인 의미를 새길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의 기초인 예수의 신성 문제를 좀더 실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 주제와 연관한 설교를 한편 읽으려고 한다.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요 14:1-14)라는 제목의 이 설교는 필자가 2005년 4월24일 ‘샘터교회’ 주일예배 때 행한 것이다.  

고별설교
요한복음 14-17장은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직전에 행하신 ‘고별설교’입니다. 이 고별설교는 흡사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처럼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텍스트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음 앞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긴 설교를 하실 수도 있긴 하지만, 이런 장문의 텍스트가 실제로 행해진 설교라고 한다면 공관복음에서 다루지 않았을 까닭이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요한의 독특한 신학에 의해서 고별설교가 이 대목에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신학의 특징은 서두에 ‘로고스’를 언급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사변적이고 대화 중심이고 변증적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이런 특징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 진리, 생명(14:6)은 무엇일까요?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9)이라는 말씀은 또한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있다(10)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매우 철학적 변론처럼 들리는 이런 말씀은 그 뒤로 17장 끝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을 ‘고별설교’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이 3년 가까운 공생애를 끝내고 이제 제자들과 헤어져야 할 그 순간에 행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난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이 한번 세상에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운명을 가리키는 걸까요? 물론 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건 본인에게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자기 가족 중의 한 사람이 늙어서, 또는 병이 들어서, 사고를 당해서 죽는 일은 우리 주변에 흔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런 일과는 별로 상관없는 것처럼 일상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준비 없이 살다가 그런 일을 닥치면 정신적으로 큰 혼란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단지 가까운 사람과 헤어지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슬픔을 위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단순히 선생, 친구, 아는 사람, 또는 가족이 아니라 전혀 다른 대상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고별설교를 듣고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버리고, 직업도 포기했습니다. 일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그런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았던 예수님이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상황이 닥쳤습니다. 모든 것을 걸었던 그 대상이 없어진다면 결국 자신의 존재 의미마저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고별설교는 단지 제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말씀은 아닙니다. 제자들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은 요한공동체, 또는 초기 기독교,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도 역시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살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없는 세상에서도 역시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하듯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이 없는 세상에서 그런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없지만 영적으로 함께 하신다고 말을 합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하게 해석되지 않으면 무의미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주장은 단지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에 도취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흡사 사랑하던 아내, 혹은 남편이 죽었지만 자신의 마음에 살아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여자, 혹은 남자가 생기면 이런 마음은 사라질 겁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 마음속에 무언가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훨씬 근원적인 리얼리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야 한다는 이 엄청난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한 기독교 신앙의 깊이와 그 신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고별설교는 우리 기독교 신앙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변증하고 있습니다.

도마와 빌립보의 질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문을 여셨습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만일 거기에 있을 곳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겠느냐?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 제자들의 걱정이 어디 한 두 가지였겠습니까? 자신들의 운명을 맡겼던 그 분이 없어지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모든 희망이 물거품이 되는 거니까 걱정이 태산 같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일단 그들에게 걱정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도마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5). 이 도마의 질문은 매우 정직합니다. 예수님이 떠나간다는 말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도마로서는 제자들이 이미 ‘길’을 알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선생이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듣는 제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제자들은 이미 제자가 아니라 또 다른 선생입니다. 그런데 선생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 건 훨씬 큰 문제입니다. 간혹 기독교는 무조건 믿는 것이지 질문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건 광신이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도마가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지 않고 직접 질문했다는 건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신앙적 자세입니다.
도마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6,7). 도마의 질문은 ‘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길은 곧 하나님에게 이르는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미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답변이 제자들에게 그렇게 명쾌하게 들린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예언자도 아닌 자신들이 하나님을 알고 보았다는 건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가 구체적으로 이렇게 요구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8). 제자들도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이런 요구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실증적으로 확인해야만 참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원한 것도 역시 이런 일반적인 욕망입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도 역시 무엇을 통해서 확실하게 확인하려고 합니다.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게 우리의 세상살이 방식입니다. 사랑은 결코 그런 방식으로 증거를 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은 사랑하는 시늉일 뿐이지 사랑 자체는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도 역시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보의 요구와 비슷한 차원에서 어떤 절대적인 것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든지, 매머드 교회당 건축 같은 것들을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건 아무런 증거가 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요구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빌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9). 예수님의 이 대답은 빌립보가 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훨씬 엄청난 사건, 훨씬 신비로운 일들,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소리할 수 없을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예상외의 대답 앞에서 아마 제자들은 당황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했겠지요. 예수님이 떠나는 이 고별의 순간에 어떤 결정적인 대답이나 증거를 받고 싶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경천동지할만한 걸 제시하지 않았으니까 실망했겠지요.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이 대답은 별 볼일 없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이 예수님의 대답은 기독교의 존재 근거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시한 대답인 것 같지만 여기서만 우리의 신앙은 유지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대답은 바로 예수님과 하나님이, 즉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동일성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9). 이 말씀은 단지 빌립보만을 향한 대답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와 오늘 우리를 향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곧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과연 이 예수님의 말씀은 옳은 걸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시면서 그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하나님은 구별된다는 게 틀림없습니다. 서로 구별되는 인격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말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둘이면 둘이지 어떻게 둘이면서 하나라는 말인가요? 이건 말장난이 아닐까요?
우리 인간의 삶에서 그 유비를 찾아본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두 사람은 서로 같은 마음을 품고 있고 성격도 비슷해서 한 사람만 보아도 다른 사람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쌍둥이라면 이런 느낌이 훨씬 강하게 들 겁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아무리 서로 비슷한 관계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따라서 죽을 수도 없고, 설령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동반 자살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배타적이며 반생명적이라는 점에서 일치할 뿐이지 세계를 향해서는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이 되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고 하니까 그냥 믿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여봅시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11).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라는 말은 곧 서로가 서로의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안’에 있다는 말은 단순히 서로를 생각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의 심리상태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어떤 근원적인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자신을 완전하게 의존시켰다는 뜻입니다. 자기 개인의 생각은 철저하게 부정하고 완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만 자기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로 자기도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에 자기를 의존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 하나님의 생각을 정확하게 인식해야만 하는데, 우리는 그런 인식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혼동합니다. 자기의 짧은 생각, 혹은 자기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신학 공부를 하거나 교회를 개척했으면서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었다고 우깁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완전하게 인식하고 그 생각에 완전하게 순종하신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말은 앞의 명제를 뒤집어 표현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가 임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통치를 온전하게 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믿기 힘들면 “내가 하는 일들을 보아서”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행위, 그의 운명이 곧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심으로써 하나님과 하나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이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본 사람은 곧 하나님을 본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된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된다면, 결국 우리도 역시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삶이 진리라고 믿고 사는 게 곧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민들레

2008.03.20 06:34:21
*.144.20.18

위의 글 중에서 생소한 부분이 나옵니다.

.......유대교는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용납할 수 없었으며, 로마인들도 역시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들이라고 여기고 무시했다. 이 틈바구니에서 그들과 구별된 새로운 종교, 바로 기독교가 시작하게 되었다......

로마인들이 기독교인을 무신론자라고 여기고 무시했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로마인들이 말한 무신론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다신들을 외면했기 때문에 그런뜻으로 한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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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3.20 14:45:44
*.181.51.93

민들레 님,
본인이 설명한 그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 사건은 신성모독이구요,
로마인들에게는 무신론적 착상입니다.
로마인들이 보기에 어떻게 예수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는 거지요.
헬라의 수많은 신들을 부정한다면
결국 무신론이 아닐까요?

[레벨:0]열나무

2008.09.29 10:58:53
*.80.188.63

유한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정의한다는 것 자체에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자칫 이런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성도들의 신앙에 해악을 가져다 줄 수 있기에 심히 가슴이 떨립니다. 저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고 있지만 뭐라고 딱 부러지게 말 할 수 없기에 각 위의 사역을 설명하고 이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우주적 경륜과 구원 섭리쪽에 비중을 두어 설명을 하곤 했습니다. 물론 듣는 쪽에서는 머리를 갸웃거리는 일 밖에는 할 일이 없었겠지요.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권면 뿐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리우스가 승리를 했다면? 우리는 지금의 삼위일체론을 고수하지 못했을 것이고 현제 우리의 신학은 이단이라고 불라는 자들의 교리를 정통 교리로 받아들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겠지요... 이런 인간이 관여된 역사적 맥락의 삼위일체가 아닌, 보다 영적이고 보다 신적인 증명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현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 말 중에 "유행은 돌고 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보다 적절히 인간의 한계를 대변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반세기 밖에 지나지 않은 이때에 벌써 변질 되어가는 개신교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생각을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교회의 권위가 말씀 위에 서고 물질을 탐하여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이 변질 되어가는 모습을 개탄하던 종교개혁자들의 땀과 피와 그들이 기도가 불과 반세기도 채 안되서 다시 개혁 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현재의 개신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를 떠나 천주교를 비롯한 이방 종교를 향해 발길을 돌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방 종교와 비교해 다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죠...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제2의 종교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가 지금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한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경륜에 순종하고 감사하는 자들로서의 참 하나님께 대한 이해가 그 어떤 교리적 정의보다 지금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좁은 소견을 옮겨보았습니다. 넓으신 아량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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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조직신학 9장: 하나님과 창조 [2] 2005-05-18 6680
66 여성신학 10장. 여성은 베일을 써야하는가? 2005-05-17 4505
» 조직신학 8장: 삼위일체에 관해서 [3] 2005-04-27 6893
64 여성신학 9장: 인간은 왜 남성과 여성인가? 2005-04-25 4273
63 조직신학 7장: 유신론과 무신론 2005-04-20 5571
62 여성신학 8장: 여성신학과 기독교 인간론 2005-04-19 5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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