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하나님과 창조

조직신학 조회 수 6680 추천 수 101 2005.05.18 18:17:06
9장
하나님과 창조

화두
“이게 뭐꼬?” 이 짧은 화두에는 동양의 선승들이 어떤 실체에 도달해보려는, 그래서 도통(道通)해보려는 의도와 노력이 담겨 있다. 그냥 살면 충분한 거지 화두는 무슨 화두냐, 하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냥 산다는 것 자체가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화두를 붙들고 씨름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냥 산다는 걸 좋은 쪽으로 해석하면 자연의 흐름에 자기를 맡기고 산다는 뜻인데, 물론 이렇게 살기만 하면 더 이상 우울증, 자만, 두려움, 허무 같은 정신적 문제나, 또는 폭력, 전쟁, 학대 같은 사회적인 문제가 벌어지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자연의 속성에 철저하게 의존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끊임없는 자기집착과 욕망으로 인해서 자기와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자연에 따라서 산다는 게 간단하지 않다. 이러한 인간의 파괴적 경향으로 인해 벌어지는 인간 공동체의 훼손을 막기 위해 도덕, 윤리, 법, 교육제도가 생겼다.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규범을 아는 것이 인간다운 삶과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첩경이라는 생각이 거기에 깔려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그런 교육이 인간을 약간 쓸 만한 상태로 개량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새롭게 만들지 못한다. 최고의 문명을 일구고 있는 21세기 사회가 여전히, 혹은 더 심하게 파괴적이라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교육과 인간의 관계에 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니까 여기서 더 이상의 논의는 그만두자. 다만 화두는 그냥 사는 제1의 방식이나 교육을 통한 변화인 제2의 방식과 구별되는 제3의 방식이라는 사실만 지적하자. 즉 우리가 화두를 붙든다는 것은 근원을 인식할 경우에만, 더 정확히 말해서 근원과 소통되는 경우에만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왜 “이게 뭐꼬?”라는 화두를 붙들었을까? 이 질문은 두 가지 관점과 연관된다. 하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비하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이 신비한 이유를 일일이 나열하거나 논증할 필요는 없다. 시인들만이 아니라 물리학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이 세상과 그 물(物)의 세계를 들여다보려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그게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기 물 잔이 있다고 하자. 만약 이 잔을 우리가 물을 마실 때 사용하는 것에 불과한 사물로만 생각한다면 한편으로는 아주 명확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미한 대상이 불과하지만 그것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한편으로는 불확실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이 가득한 대상으로 변한다. 그 잔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만들어졌는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 잔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어떤 근원이 있는지 등등, 우리의 질문은 끝없이 계속될 수 있다. 또한 이 잔이 물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안에 무엇이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렇듯 하나의 사물조차도 우리가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어떤 심층의 세계를 담고 있다면 생명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화두와 연결된 또 하나의 관점은 이 세계는 부분과 전체가 신비한 방식으로 순환한다는 사실이다. 여기 한 개의 돌이 있다고 하자. 지구와 비교한다면 이 돌은 거의 무의미할지 모르지만 이 돌 안에 지구의 모든 게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지구라는 물체는 돌이라는 물체와 똑같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구 전체에는 돌과 다른 존재자들이 있지만 약간씩 형태만 달리할 뿐이지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따라서 지구, 더 나아가서 우주 전체를 우리가 뚫어보려면 부분에 불과한 돌을 뚫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이 된다. 지구의 모든 사물과 생명체가 소립자로 구성된다는 현대물리학의 해명으로 인해서 이런 부분과 전체의 공속(共屬)적 결합관계가 분명해졌다. 이 말은 곧 코끼리를 구성하는 소립자와 민들레의 소립자가 서로 소통될 수 있으며, 물과 나무의 소립자가 소통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민들레의 홀씨 하나를 통해서 이 지구 전체를 알 수 있다는 말도 역시 매우 논리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선승들은 작은 사물의 본질, 그 현상 중의 하나만 붙들고 그 안에서 세계 전체의 실체를 파악해보려고 노력했으며, 그 결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평생 장좌불와, 묵언수행을 통해서 도달한 결론이 범부들의 세계 인식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당혹해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냉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여전히 어떤 절대적인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명제가 가리키는 하나의 현상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선승들의 깨달음을 통한 그것의 깊이는 거의 끝없다고 보아야 한다. 현대인들은 산과 물을 이용할 대상으로만 여기지 그것의 존재론적 깊이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근대주의 이후 이 세계를 하나의 대상으로만 여긴 채 이용할 궁리에 빠져버린 근대주의가 산과 물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는 너무나 확실하니까 여기서 왈가왈부하지 말자.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떤 것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존재 앞에서의 충격이 곧 화두 공부의 목적이다. 그런 낱말 뜻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런 사실과 자기의 일치, 통전, 체화되는 차원을 가리킨다.

세계
이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와 하나 되기 위해서 화두를 붙들었던 선승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에서도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그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신앙적, 신학적 사유의 대상을 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구약성서의 첫머리에 배치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말은 곧 그들도 역시 자신들 앞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의 힘과 그 신비 앞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밤하늘의 총총한 별, 태풍, 지진, 화산폭발, 가뭄 등등, 그들의 인식론적 한계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이 세계를 언급하지 않은 채 하나님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더 근본적으로 이런 세상의 비밀(E. Jü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에 야훼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설화만이 아니라 구약성서 전체에는 이런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런 유대교의 창조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사도신경의 첫 항목이 ‘천지를 창조한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간혹 죽음 이후나 최후심판 이후의 세계를 무조건 초월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이 가리키고 있는 그런 새로운 생명의 세계는 단순히 이 땅의 삶이 연장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초월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과 이원론적으로 구분되는 세계는 아니다. 차안과 피안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세계관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가리키는 것이지 성서의 가르침은 아니다.
이런 대목에서 오늘 우리의 신앙은 자칫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 기독교 신앙이 초월적 열광주의에 빠지거나 극단적인 실존주의에 빠짐으로써 이 세상, 이 세상의 물(物), 이 세상의 역사가 간과되거나 해체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특히 한국 기독교가 몸의 감각적인 경험을 낮추어보는 청교도적인 윤리관에 치우친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감각적인 경험의 대상인 세상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 버리고 십자가 보네’ 유의 신앙이 순수한 것 같지만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기독교의 첫 신앙고백을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별로 순수한 신앙은 아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그 몸을 갖고 사는 우리가 몸과 자연의 일치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태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금욕적이고 청교도적이고 세상 도피적인 신앙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신학적 관점을 검토해야만 한다. 하나는 우리의 몸과 자연의 일치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선언하신 이 세상을 인간이 몸으로 즐긴다는 건 바로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향한 찬양(doxology)이다. 요르트 칭크는 우리가 “모든 존재하는 것을 모든 감각과 모든 능력으로 지각해야 한다.”면서 아래와 같이 자신의 입장을 진술했다.

저는 숲 가장자리로 걸어갑니다. 저는 나무들 사이의 빈 곳으로 가서 땅을 바라봅니다. 그때는 생명이 약동하는 이른 아침일 때도 있고 만물이 고요해지는 저녁일 때도 있습니다. 들판과 초원, 길과 꽃 그리고 집들이 제 앞에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저 홀로.
저는 저의 뼈와 발바닥으로 서서 제 무게를 느낍니다. 저는 나무처럼 꼿꼿하게 서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집처럼 굳건한 바탕 위에 서 있고 들판처럼 폭을 갖고 있음을 느끼고 있지요, 제 발 아래에는 반석 같은 굳건함이 있지요. 신뢰감. 저는 서 있습니다. 저는 오래도록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저의 발아래에는 지속적인 것, 움직이지 않는 것, 곧 땅이 있어요. 중력은 아래로 향하지요. 그리고 저는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으로 그것에 응답하지요. 중력은 저에게 바람에 불려가지 않는 굳건함을 주지요. 저는 굳건함과 지속성이 존재하는 이곳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이곳이 바로 나의 자리입니다.(Jorg Zink, Erde, Feuer, Luft und Wasser: Der Gesang der Schöpfung und das Lied des Menschen,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32).    

또 하나의 다른 신학적 관점은 우리 앞에 생태계 파괴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세계의 파괴 앞에서 무엇을 생각하며, 무슨 실천을 모색해야만 하는가? 우리가 단지 영혼구원에만 몰두하는 소종파가 아니라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하는 하나님을 보편사적 지평에서 믿는 종교라고 한다면 왜곡된 역사와 자연 앞에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 창조 문제가 해석되지 않는 교회는 결코 건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몰트만은 히틀러 독재 집권 시기의 독일 교회에서 창조론이 별로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히틀러 독재재가 집권하던 시기에 <고백교회>와 <독일 기독교인> 사이의 논쟁 이후로 창조론은 개신교 신학에서 별로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지 못했다. 다만 민족, 종족, 히틀러의 집권역사에 있는 하나님의 뜻 같은 자연적 소여성으로부터 하나님의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모색한 <자연신학>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1934년에 선포된 “바르멘 신학선언”(Barmer Theologische Erklärung)의 첫 명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계시신학>을 받아들이든지 양자택일만 주어졌다. 그 당시 바르트와 에밀 브룬너, 고가르텐과 알트하우스에 의해서 전개된 유럽신학의 핵심 문제는 전혀 극복되지 못했다.
오늘날 그 당시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질문이 전면에 나타났다. 요즘처럼 산업화로 인해서 자연이 파괴되고 있는 시점에서 하나님 창조자에 관한 믿음은, 그리고 세상을 창조로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소위 <생태위기>는 인간 환경의 위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자체의 위기와 마찬가지이다. 그 위기는 총체적이고 불가역적이기 때문에 지구라는 혹성에서 벌어지는 생명의 묵시록적 위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위기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위기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모든 예측이며, 지구에서 벌어지는 창조가 죽음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예측이다.(J. Moltmann, Gott in der Schöpfung, Vorwort 11).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을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주변적인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본질적인 작업이다. 그동안 이 창조문제는 심리적인 차원이나 더 심하게는 인간의 탁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로만 언급되곤 했다. 심리적인 차원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가 위대하다거나 아름답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지 그 세계 자체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는 의미이다. 즉 종교 심리학적 위로를 받기 위해서 창조 문제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인간학적으로 접근했다는 말은 근대주의의 주객도식에 근거해서 인간이 자연보다 얼마나 뛰어난 존재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자연을 이용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가능한대로 이 세계를 물리학과 철학의 도움으로 정확하게 파악해야하며, 생태계의 위기를 몰고 온 이유에 대한 사회과학적인 분석도 필요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성서의 창조 이해와 신학적 개념을 충분하게 따라잡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전반적인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신학적 창조론의 지평을 훨씬 심화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설화
성서가 진술하고 있는 창조설화를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부터 다루도록 하자. 어떤 논리라고 하더라도 성서의 가르침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기도 하지만, 이 문제가 정리되지 않으면 우리의 논의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맴돌 염려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 완고한 근본주의자들이 아닌 한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오류가 없는 문서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논리는 창조에 관한 성서의 진술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이 6일 만에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시간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비록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하더라도 그 천년을 창조 당시의 하루와 연결시킨다는 것도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했다고 진술하고 있는 창세기의 창조설화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창세기의 창조 설화나 노아홍수 설화가 바벨론 설화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는 역사비평을 자세하게 다루지 말자. 그 저간의 사정이 매우 복잡할 뿐만 아니라 이런 문제들은 이미 학계에서 정리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바벨론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 출신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기본적으로 근동의 여러 민족과 문명 세계가 그런 설화를 공유했으리라는 게 분명하다면 창조설화와 노아홍수 설화가 그 당시의 가장 문명이 발달한 바벨론 설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록 성서가 그런 주변의 설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성서의 권위는 하나도 손상되지 않는다. 신약성서도 빛과 어둠을 대비하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로고스를 주장하는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 역사적 사실이다. 그 뒤로 기독교의 모든 도그마는 주변 사상과의 대결, 조화, 경쟁의 과정을 통해서 발전해왔다. 이렇게 성서와 기독교 사상이 주변의 위대한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고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는 것은 기독교가 죽어있는 가르침이 아니라 종말을 향해서 열려있는, 즉 생명이 가득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창조설화가 바벨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해서 구약성서의 권위가 상처 나는 일은 없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성서 기자들이 자기가 살던 당시의 물리학적 지식과 생활 풍습, 또는 윤리관에 지배받았다는 사실을 전제해야만 한다. 그들은 이 세계가 삼층, 곧 하늘과 땅과 지하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하늘에서 비와 눈이 오고, 번개가 치고,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다면 당연히 그 하늘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세계와 완전히 구별된 하나의 절대적인 세계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지진이 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바다 속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지하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만이 아니라 높은 산이나 고목은 어떤 영적인 힘이 내재해 있으며, 자연재해는 신의 분노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대홍수 사건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여긴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구약에서 먹을거리를 구분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근동이라는 악조건의 환경 속에서 최상의 생존 조건을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은 게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한 것은 곧 그것이 바로 그들의 생존을 지켜주는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구약의 율법은 한결같이 유대인의 생존을 위한 법령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생존 조건은 그들의 삼층의 우주관이 오늘 우리에게 무의미하듯이 오늘 우리에게 별로 효력이 없다.
우리가 구약의 창조설화를 이해할 때 근본적으로 중요한 또 하나의 시각은 역사적 구원신앙이 창조 신앙을 규정하고, 구원이 역사적 구원 신앙을 규정하는 것처럼 종말이 역사의 경험과 창조에 대한 신앙을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몰트만은 구약성서의 창조설화를 주석할 때 조직신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이스라엘의 창조신앙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하나님 경험에서, 즉 출애굽, 계약, 가나안 점령의 경험에서 생성되었다. 즉 이스라엘은 창조 사역을 구원론적으로 이해하였다.
둘째, J문서와 P문서에서 태초의 창조는 건강한 태초의 상태를 뜻하는 게 아니라 구원사에 대한 전(前)역사를 의미한다. 따라서 창조는 그 질서에서 야훼의 은혜를 나타내며, 태초의 창조와 함께 역사의 지평이 열린다. “구약성서 신학에서 창조는 종말론적 개념이다.”(L. Köhler,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es, 1966, 72.).
셋째,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창조로 인해서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태초의 창조로부터 시간이 시작되었다면 창조는 처음부터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창조가 처음부터 변화될 수 있고 시간에 대해서 개방되어 있다면, 그것은 ‘폐쇄된 체계’가 아니라 ‘개방되어 있는 체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 기자는 ‘태초의 창조’와 함께 ‘종말에’ 있을 창조의 완성을 이미 목도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태초에 대한 생각은 끝에 대한 생각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몰트만, 과학과 지혜, 63,64쪽 참조).

구약의 창조설화가 신화적인 시대에 기록된 텍스트이며, 또한 훗날의 역사에서서 귀납적으로 내려진 구원론적 진술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적극적인 의미와 소극적인 의미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적극적인 의미는 이 세상이 신성에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되었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이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에 바로 예술가의 영혼이 담겨 있듯이 이 세상은 곧 하나님의 영이 운행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존재한다면 이 세상을 창조한 그 말씀이 이 세상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을 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한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창조 사건에 대한 소극적인 의미는 성서가 이 세상을 절대화하지 않고 피조성의 차원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집트도 그렇고 근동의 대부분 종교는 자연을 절대화한다. 그들에게는 태양이 곧 신과 다름없다. 그러나 성서는 아무리 위대하게 보이는 자연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거의 모든 근동의 종교가 자연 신앙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구약성서는 자연을 상대화함으로써 유대민족으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신앙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성서의 창조설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신앙의 의미는 위에서 거론한 바로 그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해서 결국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에 있다. 한편으로는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다룸으로써 그 중요성을 공고히 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피조성을 인정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를 소중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것에 종속되지 않는 삶의 방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그 세계의 적극적인 부분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와 투쟁해야 하며, 자연의 피조성을 강조한다면 우리가 단지 생태학적인 지평에 모든 희망을 걸어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 중심의 산업발전으로 인한 생태계의 소외도 잘못이고, 그렇다고 해서 생태환경 지상주의도 역시 그렇게 절대적으로 옳은 태도는 아니다. 이 두 관점 사이에서 우리가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인 긴장을 유지하는 게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적 사명이며 신학적 숙제이다.

“한 처음”
창세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창 :1, 공동번역). 여기서 ‘한 처음’이 어떤 신학적인 깊이와 영적인 깊이를 내포하고 있는지 인문학적 시각을 배경에 두고 검토해보자. 이런 작업을 통해서 우리의 성서읽기는 훨씬 심화,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우주물리학자들은 우주의 나이가 줄잡아 1백10억 년쯤 된다고 하는데, 창세기 1장1절이 가리키고 있는 ‘한 처음’이 바로 이 시기를 말하는 것일까? 어떤 점에서 이런 질문은 별로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주물리학자들의 이런 계산법이 얼마나 정확한지 우리가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설령 그게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성서는 이런 물리학적 사실을 분석하고 증명하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객관적 사실만을 중하게 여기지만 성서와 신학은 물리적 사실 그 너머에 관심을 둔다. 성서가 늘 중심 주제로 붙들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가시적 형태가 아니라 그것 너머에 있는 분으로 서술된다는 말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인간의 몸만 지배하는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삶을 지배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비록 구약성서에 하나님이 불이나 바람같이 어떤 게슈탈트(형태)나 물리(피직)적 사물로 형상화 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런 것들은 대개가 하나님을 직접 묘사한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현상학적 서술일 뿐이다. 즉 폭풍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힘으로 서술하기 위해서 끌어온 상징일 뿐이다. 결국 성서는 물리 세계를 뛰어넘는 세계에 영원히 참된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메타-피직(Meta-Physik)이다.
그렇지만 신학과 신앙이 물리적 세계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사실상 이런 물리적 사실과 상관없는 메타피직(형이상학)은 가능하지 않다. 일단 우리의 감각세계 안에 들어온 세계는 이런 피직밖에 없으니까 아무리 그것 너머의 사실이 참되다고 하더라도 역시 이 피직을 근거로 해서 언급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만약 피직을 근거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너머의 세계를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추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의 언어를 매우 구체적으로 명백한 물리적 현상 가운데서 해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런 토대 없이 막연한 말로만 성서 언어를 치장하기 시작하면 기독교는 점점 보편적 타당성을 상실하는, 그래서 매우 개인적, 심리적 차원의 종교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끊임없이 철학과의 대화를 시도해나가야 할 것이다. 다만 신학은 철학과 비슷한 인식과정을 통해서 그들과는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와 하이덱거의 존재, 그리고 장자의 도가 바로 성서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논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늘 전체 세계를 자기 사유의 화두로 삼고 있어야한다. 이미 구약성서가 태초라는 말로 이런 사유의 단초를 제공했다.
마틴 루터의 번역본에는 창세기 1장1절이 이렇게 시작된다. ‘Am Anfang’. 안팡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시작, 시초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1장1절에도 똑같이 등장한다. 단지 요한복음에는 전치사가 in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여기서 ‘한 처음’, 또는 시초, 태초라는 단어는 당연히 가시적 우주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창세기의 창조기사가 전승되던 그 시기의 사람들은 지중해 연안의 세계를 모든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늘의 해와 달, 별들도 역시 자기들이 거처하고 있는 그 대지에 속해있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생각한 태초는 분명히 그들이 확인할 수 있는 세계의 시작만을 의미한다. 그들의 감각 세계에 들어온 우주 이외에도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던 그들은 그런 범주 안에서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세계가 시작되기 이전에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었다. 이 태초에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한 처음은 그 이전에 아무 것도 없었다가 무언가 존재하기 시작하기 시작한 그 순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무엇이지 알지 못한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아무 것도 없었다니!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것들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의 사슬고리인데, 이런 것들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를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애당초 가능하지 않다. 여기 내 앞에 볼펜이 있다. 이게 그냥 여기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게 여기 있게 된 여러 원인들이 앞서 있었다. 내가 볼펜을 누구에게 얻었든지, 가게에서 사 왔을 것이다. 이 볼펜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볼펜 공장은 그 원료를 어디선가 구입해왔다. 이렇게 계속 따지고 들어가 보면 볼펜은 결국 지구의 안에 있는 물질일 뿐이다. 물론 더 소급해본다면 태양이 만들어질 때의 그 가스들이 이 볼펜의 원인일 수 있다. 이처럼 지구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은 이런 원인과 결과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출현한 것들이다. 지구 밖에서 들어온 혜성 조각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그런 물리적 원인에 의한 것이다. 우주의 별들이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현상도 역시 우리가 아직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그 어떤 물리적 작용에 의한 결과이다. 정확한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소위 나비이론이 그것 아닐까? 미국의 한 들판에 있었던 나비의 날갯짓이 원인이 되어 결국 우리나라에 태풍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이론 말이다. 단지 우리가 그 과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뿐이지 결국 모든 사태와 사물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서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증언한다. 즉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다.
어떻게 무로부터 유를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거야 하나님이니까 할 수 있지, 하고 대답하면 아주 간단하게 처리될 수 있긴 하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 일단 우리는 무엇이 있는 상태와 없는 상태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이런 혼란이 제기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여길 뿐이지 그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강, 산, 곤충, 짐승, 별 같은 사물을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또는 인간의 여러 정신과 심리 활동도 역시 이런 존재하는 것들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정말 존재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훨씬 깊은 차원이 아닐까? 또는 아직 존재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존재하게 될 그 어떤 것이 훨씬 확실한 존재가 아닐까? 성서의 하나님을 가리켜 이미 존재하는 분이며 동시에 앞으로 존재하게 될 분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이런 존재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신다. 우리가 있다, 또는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 존재 양식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성서는 그런 상태를 언어로 그려낼 수 없기 때문에 거룩, 영광, 존귀 같은 용어로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궁극적 진리를 완전히 담아낼 수 있는 인간 언어는 가능하지 않다. 어쨌든지, 이런 점에서 태초는 오늘의 존재양식과 전혀 다른 존재양식을 구분할 수 있는 한 기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다른 존재양식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 무라고 부를 뿐이다.
우리의 생각을 약간 돌려서 보면, 창조론은 사실 종말론과 연장선상에 있는 개념이다. 이 세계의 창조는 곧 이 세계의 종말에 완성되니까 말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종말을 가리켜 이 세상의 마지막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의미이다. 이 세상이 끝난다는 것은 모든 게 완전히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시작된다는 뜻이다. 새 예루살렘의 시작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표현되고 있듯이 우리의 상상력이 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생명세계의 시작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라고 생각하는 태초 이전의 세계와 종말 이후에 시작될 새로운 세계 사이인 그 과도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물리학에서는 태초에 빅뱅(대폭발)이 있었다고 하는데, 창세기는 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고백한다. 빅뱅이나 태초(아르케)나 모두 한 점을 가리킨다는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치인지 당연한 논리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면에서 여기에 바로 물리학과 신학의 접점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쨌든지 이 세상을 하늘과 땅이라는 구도로 본 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삼층 구조가 고대인들의 우주관이었다. 지금 우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 위에 있는 하늘과 인간이 살아가는 땅과 인간 밑에 있는 지하의 세계라는 이런 구조는 이미 지나간 패러다임이다. 우주 전체를 보면 위도 없고 아래도 없고, 동서남북도 없다. 이제 우리는 창조론에 대한 이해를 좀더 새롭게 전개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도대체 지구로부터 수십 억 광년 떨어진 곳에 별들이 생성되고 사라지게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우주 현상을 기독교의 창조론이 어떤 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참으로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풀어나갈 만큼 이 세상과 우주의 비밀이 드러나 있지 않은 상태이니까 우리는 조금 더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지금 인간의 우주 탐험은 거의 초보단계이다. 무인 우주선은 금성과 화성, 목성 근처까지 갔지만 유인우주선은 겨우 달에 흔적을 남겼을 뿐이다. 앞으로 수천, 수 만년이 흘러야 태양계 밖의 우주에 발을 디딜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아예 불가능할지 모른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빛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나 광대한 우주를 하늘이라는 단 한마디로 정의해버린 고대인들에 비해서 우리는 조금 더 철이 들긴 했지만 그 세계를 여전히 모른다는 점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이다. 이런 상태에서 창조 문제를 억지로 풀어내는 것보다는 그 세계가 우리에게 좀더 가까이 올 때까지, 또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 세계가 완성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게 훨씬 지혜롭다. 즉 창조론의 자리를 우주에 설정하기는 오늘 인류의 지혜가 너무 부족하니까 일단 지구 현상 안에 두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는 말이다. 다만 앞으로 점차 열리게 될 우주 현상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을 열어두는 일만은 분명히 해야 한다.
한 처음은, 더 정확히 말해서 한 처음 이전은 인간 자체가 태초 이후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해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종말 이후는 오늘 우리 인간의 생명 현상 이후의 세계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식 대상이 될 수 없다. 다만 태초 이후와 종말 이전의 이 세상은 태초 이전과 종말 이후를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잘 읽을 수 있다면 부분적으로나마 그 이전을 해석할 수 있고, 이 이후를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우 80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 주제에 1백10억년이라는 그 엄청난 태초의 시간을 생각한다는 것은 오만방자한 일일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 처음으로부터 이 시간에 이르는 그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와 생명역사를 약간이나마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영적인 존재로서의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영적 희열이 아닐까?

하나님과 세계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창조의 문제로 들어가야겠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일까? 하나님이 이 세계에 범신론적으로 내재해 있는지, 아니면 이 세계와 상관없이 초월해 계시는지, 또는 내재와 초월이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고대와 중세기에 기독교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세 철학 사조가 지금까지 그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이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그 세 철학 사조는 다음과 같다. 1) 이데아 세계는 그림자에 불과한 감각세계를 초월해 있다는 플라톤의 관념주의적 세계상: 플라톤 사상은 이데아 세계를 참된 존재라고 본 어거스틴의 실재적 관념주의에 흔적이 남겼으며, 어거스틴 이후 중세기까지 육체적, 피조적인 것을 평가절하 하는 계시를 마련했다. 2) 이데아는 감각세계 속에 있으며, 신은 원인이 없는 세계 최초의 원인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주의적 세계이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은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주의에 영향을 미쳤으며,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끼쳤다.  3) 세계를 향한 신의 유출과 세계로부터의 신의 복귀, 세계 속의 존재의 다양한 밀집도는 이 존재가 짙어지는 존재의 정점인 신을 추론한다는 신플라톤주의의 범신론적 세계해명.(Pöhlmann, 교의학, 170 참조).
중세기의 보편논쟁도 역시 이런 일련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있는 사물 이전의 보편개념(universalis ante res)이 실제적인 원형으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보편개념은 아무런 실재도 없는, 단지 이름에 불과한지에 관한 논쟁이었다. 보편개념이 존재한다는 ‘실재론’은, 예컨대 이 세상이 여러 종류의 구체적인 나무가 있기 이전에 나무라는 보편개념이 실재한다는 주장이며, 보편개념이 아니라 단지 이름뿐이라는 유명론은, 예컨대 여러 종류의 구체적인 나무들이 존재한 다음에 나무라는 보편개념이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들이 오늘 우리의 눈에 무의미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이 세상을 이해하려는 매우 중요한 논쟁이었다. 이런 논쟁은 지금도 하나님과 이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할 때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세상과 그 근원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런 방식으로 어느 정도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줄여서 말한다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 초월하시는가, 내재하시는가에 관한 논의이다. 이 대목은 푈판의 설명을 따라가도록 하자.
알트하우스에 따르면 창조사상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양자를 보증한다. 하나님은 창조자이고 세계가 그 피조물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독립성과 자유,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엄격한 차이, 본질적인 상이성을 말한다. 둘째, 세계가 그 형성되고 존속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위에 의한 것이다.(P. Althaus, D. christli. Wahrheit, 302). 창조신앙은 이처럼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할 능력과 함께 하나님의 세계 현존을 표현한다.

세계는 어떤 동일성의 의미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하나님 자체가 아니며, 세계는 하나님과 세계 존재의 어떤 연속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만약 이 연속성이 진보나 발전에 의해 주어진다면, 하나님은 기껏해야 이 발전이 이루어짐으로써 세상 속에서 비로소 완전해지고, 그 완전한 존재에 이르게 되는 셈이다. 마치 하나님과 세계가 영원히 합치되어 상호제약성 속에서 서로를 관통하는 존재를 함께 구성하듯, 그러한 존재의 연속성이라는 의미에서 세계가 하느님에게 속해 있는 것도 아니다.(위의 책, 302).

조금 더 알트하우스의 설명을 따라가자.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제약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세계에 의해서 제약받는 게 아니다. 세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동반자가 아니다. 마치 세계가 하나님의 현실성의 필연적 결과인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세계 원인인 것처럼, 세계가 그러한 인과관계의 의미에서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원인(Ursache)이 아니라 원동자(Urheber)이다.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도 않았으며(무로부터 나왔음: 필자 주), 하나님 안에 있거나 하나님에게 속해 있지 않고, 하나님과 대립해 있는 바로 그 세계는 그 근거를 자신 안에 두고 있지 않으며, 처음부터 항상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의지로 말미암아 존속하고 있다. ··· 하나님은 세계를 움직이고, 자신의 활동적 현존으로써 세계를 관통한다.”(위의 곳).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서 범신론은 독특한 입장을 견지한다. 하나님의 초월성이 부정되고 단지 이 세상에 내재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아무리 신을 부정하지 않는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무신론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런 범신론을 정중한 무신론이라고 했는데, 정확한 지적이다. 결국 범신론에서는 이 세계가 지나치게 중요한 대상으로 부각된다. 물론 이 세상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세계이며, 우리 인간 자체가 하이데거의 표현으로 ‘세계내존재’라는 점에서 세계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도 불가능하긴 하지만 성서는 이 세계마저도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간단없이 선포한다.
초월적 유신론은 이 세계가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즉 타락 이후에도 세상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처럼 그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로마서 주석>을 쓴 초기 바르트는 이런 초월적 유신론의 흔적을 보인다. 하나님과 혼돈에 빠진 세계 사이의 유일한 관계는 양자 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이다.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과 인간의 거리를 벌려놓음으로써만 이 거리를 잇는다. 예수는 이 세계 안에 오직 ‘포탄흔적’과 ‘빈터’만을 남겨 놓았다. 그의 부활 속에서 ‘새 세계’는 ‘옛 세계’와 접촉하지만 그것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오직 이러한 세계의 ‘위기’ 에서만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이해된다.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서는 이 세계가 더 이상 선한 창조물로 인식되지 못한다. 세계는 은총을 폐기한, 그리고 은총과 접촉되지 않는 부정적 실체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대략 <교회 교의학> 3권1부터 위기 신학을 창조신학으로 수정한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모든 자연적 존재유비(analogia entis)를 부정했다.
우리는 아직도 종말을 향한 그 과정에서 잠정적인 인식론에 갇혀서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이 세상의 관계를 실증적으로 해명할 수는 없다. 이 세계를 하나님 자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이 세계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세계를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이 세계를 모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는 이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세상을 절대화하지도 말아야 하며, 하나의 소모품으로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의 정확한 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신학적 인식을 심화하고 아울러 윤리적 책임도 분명히 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창조와 보존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다음에 저절로 굴러가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보존 은총으로 함께 하시며, 결국 종말의 새로운 생명까지 이끌어 가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창조와 보존
오토 베버(O. Wever)는 창조가 무로부터 일어났다는 점에서 보존(섭리)와 구별한다. 말하자면 섭리는 간접적 창조이지만 창조는 직접적 창조이다. 알트하우스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이유로 창조와 보존을 구별했다. 첫째, 창조는 보존과 달리 ‘시초’라는 본질적인 요소가 있다. 세계는 아무런 시초도 갖고 있지 않다고 본 쉴라이에르마허의 범신론적 세계이해에는 창조와 보존의 차이점이 존재할 수 없다. 둘째, 세계의 현실 속에는 항상 연속성과 신기원이 병존하기 때문에 창조와 보존을 구분되어야 한다. 창조와 보존이 구분은 되어야 하지만 분리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보존이 바로 계속적 창조이기 때문이다. 창조된 것은 그 자체 안에 존재의 능력, 계속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존재와 계속은 매순간마다 오직 세계의 시초를 놓은 동일한 활동적 창조자의 의지로부터만 일어난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존재는 그 기원인 무(無)로 다시 떨어지고 만다. 이런 점에서 창조행위는 일회적인, 또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현재적인 것이다.
창조가 언젠가 무로부터 창조되었고, 무를 넘어서 보존된다는 생각은 세계를 그 자체 안에서 조화되고 인과적으로 결정되는 무한한 우주로 보던 근대에서는 인정받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데 현대 자연과학에서는 성서적 창조개념이 다시 개연성이 있는 것이 되었다. 바이체커(C.F. v. Weizsäcker)는 근대의 자연과학에 의해서 배양된 무한세계의 표상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것은 대체종교이지 과학의 가정이 아니다. “사건들은 시간 속에서 하나의 시작을 가졌음이 틀림없고, 열(熱)이 소진됨으로서 끝장날 일이 남아 있다.” 결국 자율적 우주의 토대가 흔들린 셈이다. 우주의 시작과 끝에 관한 질문은 의미심장한 것이 되었으며, 그 질문은 우주 전체 안에서 비존재적 요소를 가리킨다.
물론 2004년 말에 일어난 남아시아의 쓰나미 재앙 앞에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섭리로 진행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인간의 산업화와 문명의 발달로 인해서 소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이와 비례해서 자연이 파괴되고 있는 이러한 현실 앞에서 보존 은총을 무조건 선포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어쩌면 이 창조와 보존의 문제도 궁극적으로는 신앙의 차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른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창조와 보존에서 어긋나 보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숨어있는 손길을 믿을 수 있다면 이런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이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기보다는 최대한 그런 신학적 합리성을 찾아야 하며, 신앙은 양쪽의 개연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할 경우에 현안으로 등장한다. 이제 이런 곤란한 문제 중에서 ‘무죄한 자의 고난’과 연관된 신정론 문제를 한번 검토하자. 이 세상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보존 은총 아래 놓여 있다면 왜 무죄한 자들이 고난 받아야 하는가?

신정론 문제
간혹 “병원 24시”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는데, 불의의 사고를 만난다거나 불치병에 걸려 투병하는 사람들 앞에서 무슨 이유나 위로를 제시하기가 힘들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장애를 갖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볼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기가 매우 조심스럽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의, 사랑, 전능과 같은 속성의 하나님 바로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런 숙명적 고난의 이유를 해명할 길이 막막하다는 말이다. 의롭지 않든지, 아니면 전능하지 않든지, 아니면 인간 세상의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무감정의 존재이어야만 이런 이유가 그나마 조금이라고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직신학의 신정론(神正論, Theodizee)이라는 주제로 어느 정도 대답을 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인리히 오트가 정리한 것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답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욥의 대답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무지로 말하였습니다. ··· 당신에 대해서는 내가 듣기만 했으나 이제는 내가 당신을 눈으로 봅니다.” 즉 이런 궁극적인 고난에 관한 질문에는 하나님만이 대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십자가 신학의 대답으로서 악과 고난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이런 논리로 집필된 책이다. 셋째는 부활신학의 입장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무의미성이라는 무로부터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넷째는 종말론적 대답으로서 마지막 날이 이르면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윤리적 대답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면서 끊임없이 고난과 악에 대항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대답들이 나름대로의 성서적,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하나의 대답이 악과 고난과 무의미성의 모든 근원적 문제를 완전하게 풀어줄 수 없다는 점에서 이제 우리는 종합적으로 접근해보려고 한다.
우선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명제 중에서 네 번째에 해당되는 논의에서, 즉 이 세상은 여전히 비밀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이 문제를 풀어 가는 게 좋을 듯하다.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이라서 그런지 늘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것만을 참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의 인식 능력을 약간만이라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한 이유 없는 고난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그래서 신비한 현상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책상 위에 귤이 놓여 있다. 이게 무엇일까? 어디서 왔을까? 왜 이 시간에 내 앞에서 있어서 나의 미각을 자극하는 것일까? 당연한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하나의 귤이 완성되려면 태양과 물과 탄소가 물리, 화학작용을 일으켜야 하며, 어느 농부의 손을 빌려 이런 준비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 태양의 출처는 어디이며, 지구의 물과 탄소는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우리는 그 자세한 경로를 알지 못한다. 과학자들의 설명은 우리가 과학의 원리라고 생각하는 그런 범주 안에 들어온 현상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게 없다.
한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서도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듯이 피투적 존재로서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런 마당에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해서 완벽한 대답을 바란다는 것은 속된 말로 장님이 코끼리 만져 보고 모든 실체를 말하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작은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만 어렴풋이 짐작하며 살아갈 뿐이지 이것이 전체적으로 어떤 근원과 목표를 갖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렇다면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한 질문 앞에서 “우리가 아는 것이 없다”는 대답으로 설명이 충분한 것일까? 솔직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보충해보자.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생명 형식과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 형식의 세계가 도래할 때 우리는 이 모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이유 없는 고난은 흡사 수술을 받고 있는 중환자의 경우와 비슷해서, 현재는 고통으로 견딜 수 없지만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리면 그 고통의 이유를 알게 되고 훨씬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아무런 고난과 아픔 없이 사는 것을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시작된다면 그 때는 여기서 고난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절대적인 세계에서는 그 이전의 상대적인 세계가 별 큰 의미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가 예수의 부활에서 이미 선취되었다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믿는다. 이유 없는 고난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십자가가 비록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사건이었지만 부활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로 지양된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이유 없는 고난이 언젠가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고난의 미학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고난은 결국 극복되어야 할 사건이라는 점에서 비록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의미로 지양되는 날을 향해 희망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과학신학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는 게 그렇게 많지 않다. 더구나 우리가 세상을 알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의 본 모습이 우리에게 완전하게 노출되지는 않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무죄한 자의 고난’처럼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운명 자체가 우리의 예측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 자체가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종말로 열려있는 유기적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한계가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이 세상의 창조자로 고백하기 때문에 이 자연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곧 자연과학이다. 훨씬 자연과학적인 힘에 의해서 작동하게 될 21세기에 신학이 이 과학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창조 신앙에 상응하는 것인지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과학신학의 자리매김이다.  
우리는 일단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과학자와 신학자는 분명히 다른 영역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결국은 하나의 대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과 신학은 같은 길을 간다. 과학은 이 세상의 물리적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그것의 궁극적인 내용에 접근하는 것이며,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에서 이해된 도그마에 근거해서 오늘의 세계를 분석함으로써 그 모든 것의 근원자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진화의 현상을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래의 힘을 찾아갈 수 있다. 물질의 근원을 해명해나가는 물리학도 역시 원자와 그것보다 작은 소립자의 세계를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힘을 드러내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훨씬 타당하게 풀어낼 수 있다면 우리 신학자들은 그들의 도움으로 그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이 세상에 훨씬 명쾌하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학과 신학이 늘 이렇게 상부상조한다는 말은 아니다. 적지 않는 과학자들은 이 과학의 원리를 절대화함으로써 인격적 존재라고 일컬어지는 하나님을 부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것이 어떤 원리와 사실을 밝혀내는 그 순간에 그것보다 더 깊은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과학을 통해서 절대 생명의 근원자인 하나님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 신학자들은 공연히 잘 알지도 못하는 과학 행위 자체를 놓고 그들과의 부질없는 논쟁에 빠져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과학적 노력에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우리의 역할을 제한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역할은 소극적인 게 아니라 종말론적인 면에서 신학의 한계를 전제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하나의 진리로 집중시키는 적극적인 과업이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크가 ‘과학자들에게 던지는 신학적인 물음들’을 한번 검토하는 것이 우리의 논의를 마감하는 데 적절할 것이다. 그는 “성서의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라면, 그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고 자연 과정들을 완벽하게, 혹은 적절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박일준 역, 자연과학, 37. 이하 쪽수는 본서). 거꾸로 자연 과정이 성서의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고도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가 될 수 없으며, 결국 그런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현실성은 자연 과정들의 규칙성들과 관련된 추상적 형태의 지식과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추상적 지식들은 물리적 현실성의 구체성으로부터 추상된 것으로서, 따라서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추상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규칙성들로부터 추상된 그와 같은 지식만을 자연을 설명할 수 있는 완전하고 배타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고 과신되어서는 안 된다.”(같은 곳). 즉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근대과학의 방법론적 무신론은 순수한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 전혀 아니며, 그런 무신론이야말로 상당히 애매모호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결국 자연의 규칙성에 관한 연구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자연적 상황을 도외시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38). 그는 다섯 항목의 질문을 아래와 같이 제기한다.
1. 자연 과정 속에서 우연성이 중요하다는 관점에 근거해서 관성의 원리나 혹은 적어도 그에 대한 해석을 정정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겠는가?
2. 자연의 현실성은 우연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자연 과정들은 불가역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가?
3. 유기체의 한계들을 초월하는 생명의 기원으로서 신적인 영을 언급하는 성서적 개념에 상응하는 동의어가 근대 생물학에는 있는가?
4. 물리 우주의 시공간적 구조와 영원성의 개념 사이에서 어떤 적극적인 관계성이 의식될 수 있겠는가?
5. 현재로 돌입하는 이 세계에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독교의 확신은 우주가 이미 수십억 년 이상이나 계속 존재해왔다는 과학의 외삽적 추론과 일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판넨베르크가 제기하고 있는 물음에 대해서 더 이상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다만 기독교의 중요한 도그마가 자연과학적인 지평에서도 여전히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신학 사유가 심화, 확대되어야 한다는 사실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하자.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이 세계의 창조자로 믿고 있는 기독교 신학은 그 세계의 규칙을 모색하는 자연과학과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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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 선

2014.08.03 14:27:02
*.224.3.13

지금 제 방으로 들어오는 바람, 숨을 쉬는 것, 우리집 애완견이 자고있는 것 이 모두 생명현상이겠죠?


눈에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지평 너머의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이 관념적으로 어렴풋이 기대할 따름입니다.


이것을 기대하고 그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 신학공부인가요? 어렵기도 하고 할수록 궁금함이 생기는 매력적인 공부인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4.08.05 09:48:34
*.94.91.64

Way 님,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재(reality)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의 눈, 코, 귀, 피부 등은 아주 제한적이어서

근원적인 것을 다 파악할 수 없어요.

그게 피조물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는 것만큼만 우리는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게 신학공부지요.

재미 있으면 꾸준히 공부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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