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에 관한 신학적 고찰

오늘의 상식적인 세계에서는 어느 누구도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말을 기독교의 사도신경이 명시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그대로 믿지 않는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여자가 합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피임도 하지 않은 채 성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일이 그렇게 꼬였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성폭력을 당해서 어쩔 수 없이 사생아를 낳게 된 건 아닌가 하고 여러 모양으로 상상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의 의학기술이 남녀의 성관계 없이도 여자의 난자에 정자를 착상시킬 수 있을 정도로 발달했으니까 처녀의 도덕성이 의심받지 않는 상태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사도신경에 진술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문장은 이런 오늘의 의학적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이 마리아의 처녀성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처녀출산 문제를 어느 종교에서나 볼 수 있듯이 단순히 종교 창시자에게 따라붙게 된 신화적인 요소라고 간단하게 처리해버릴 수도 있지만, 외경이 아니라 정경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기독교 신앙고백의 중추인 사도신경이 이 사실을 정식으로 거론하고 있다는 것은 그 문제가 기독교의 정체성과 직결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비록 그 사태*가 자못 복잡하고 미묘하더라도 확실하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지만, 실제로 나의 신학대학교 1년 선배 한 분은 동정녀 문제에 대해서 명쾌하게 답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목사 구술시험에서 떨어졌다. 그 선배로부터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동정녀 탄생을 믿느냐 하고 질문하는 시험관들 앞에서 불트만을 비롯한 몇몇 신학자들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설명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 후부터 그 선배는 “동정녀 탄생을 부인한 사람”이라는 오명을 씻어버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고 있다. 이만큼 한국 교회에서는 이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들의 신앙을 규정할 수 있는 시금석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처녀 마리아의 출산 사건 앞에서 한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보이는 태도는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소박한 기독교 신자들은 동정녀 출생 사건을 기독교의 우월성이 보장되는 단서로 받아들인다. “봐라. 마리아가 처녀인 상태에서 예수를 출산했다는 건 바로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이 임했다는 증거가 아니냐?” 또 다른 기독교인들은 이 동정녀 출생 사건 앞에서 매우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니 자신의 지성이 용납하지 않고, 밀쳐내자니 신앙적인 면에서 불안하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이 문제가 순전히 종교적인 차원에 속하는 거니까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믿는 게 별로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는 반대로 이것은 바로 기독교의 미숙성을 드러내는 단적인 증거라고 보는 이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교회 안이나 밖이나 상관없이 이 문제는 보기에 따라서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또는 뜨거운 감자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직접 질문하자. 마리아의 처녀출산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초자연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조건 그 사실을 믿어야 하나? 아니면 그 사건은 자연과학에 위배되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신화에 불과한 것인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입장에 대해
성모 마리아를 자신들의 신앙생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과 달리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개신교 신자들 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말에 대해서는 별로 의심하지 않고,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믿는다. 아마 그들도 역시 생물학적인 면에서 난자와 정자의 결합 없이 인간 생명이 생성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하겠지만 그래도 믿음으로 보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동정녀 출생 사건이야말로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확증해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논리적 토대에는 믿음과 성서가 있다.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게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이런 믿음의 눈으로 성서를 보면 그 모든 진술들이 사실이고 진리라는 게 드러난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성서의 언어가, 그리고 그 언어가 가리키고 있는 세계가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된다. 그들은 이런 신앙지상주의적 사유에 근거해서 성서의 모든 초자연적 사건들을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믿는다.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 태양과 별이 잠시 운행을 멈추는 사건, 술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 등. 이런 초자연적 사건들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일보의 양보도 없이 이것들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서를 이렇게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고지식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기독교는 매우 오랫동안 이 세계의 모든 학문을 재단했다. 르네상스 이후로 세계의 학문이 교회의 테두리가 아니라 자신들 안에서 진리의 기준을 확보해 나가기 시작하게 됨으로써 교회는 더욱 극단적으로 세계 학문과 투쟁적 자세를 보였다. 자연과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의 의견이 교회의 견해와 배치될 경우에 그것이 명백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성서와 교회 전통의 권위로 그들의 주장을 억압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음과 성서를(또는 교회의 전통)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고 해도 그 내용이 진리가 아니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세계와 교회의 싸움은 급기야 지동설과 진화론 논쟁으로 인해서 확연하게 결판이 났다.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참담한 결과였다. 세계는 교회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더라도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네 앞가림이나 잘해라. 우리는 더 이상 교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인간에게 희망을 걸고 살겠다. 니체가 볼 때 기독교는 땅에 있는 삶을 무시하고 추상적인 하늘만 외쳐대면서 인간의 죄의식에 기생하는 집단이었다. 인간을 가축 떼처럼 다루는 그런 신은 죽어야만 했다. 프로이트의 눈에는 종교가 집단적 노이로제 현상으로 보였다. 마르크스와 러셀까지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지성을 희생시킨 채 믿음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교회는 더 이상 이 세계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이제 교회는 세계 문제에 참견하지 말고 죽은 사람의 장례식이나 엄숙하게 집행하는 역할에 머물러야만 했다.
이 세계의 공적인 영역에서 발언권을 상실한 기독교는 이 종교문제를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시켜버리고 말았다. 쉴라이에르마허가 1789년에 <종교를 멸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기독교 지성인들을 향한 종교강연>에서 종교는 “절대의존 감정”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미 칸트도 종교 문제를 윤리적 영역에서만 타당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리츨이나 헤어만 등 19세기 신학자들은 거의 이런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을 이해했다. 사실 1919년에 <로마서 강해>를 저술함으로써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론적 착상을 분쇄한 칼 바르트나 현대신학사에서 그와 쌍벽을 이루면서 탈신화화 논의를 주도했던 루돌프 불트만도 역시 기독교 신앙을 세계 전체가 아니라 성서나 실존이라는 작은 범주에 속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지금도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들과 신자들은 기독교의 관심사를 순전히 이원론적인 의미에서 종교적인 차원에 한정시킨다. 이런 상황은 지난날 이 세계와 무모하게 대결하다가 실격 당한 이후에 기독교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당연한 귀결이다. 계몽된 세계 앞에서 여전히 미몽으로, 또는 독단의 방식으로 대처한 우리 기독교의 자업자득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단순히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거나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일방적인 말로는 정당화시킬 수 없다.
아마 어떤 이들은 마틴 루터의 “솔라 피데”(오직 믿음)과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서)라는 문구를 기억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가 “솔라 피데”(오직 믿음)이라고 말한 것은 지성을 희생시킨 채 무조건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인간의 행위보다 존재(믿음)가 앞선다는 뜻이었다. 기독교 안에서 믿음이 아무리 중요한 주제라 하더라도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요소는 그 대상이 얼마나 믿을만한 내용을 확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솔라 스크립투라”라는 루터의 말은 성서의 서술이 문자적으로 무조건 사실이거나 옳다는 게 아니라 신자들의 삶에 대한 지침으로서 교회보다 성서가 우월하다는 뜻이었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같은 성서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가 성서를 문자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자칫 신앙은 광신, 미신, 맹신의 개연성이 있으며, 성서는 잘못 해석될 경우에 요설(妖舌)이 될 수도 있다. 1960년대의 박태선의 전도관 운동이나 문선명의 통일교 운동에서 그런 왜곡된 현상을 볼 수 있으며, 앞서 말한 대로 정통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그런 흔적이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동정녀 탄생이라는 표현을 정당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그것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거나 교회의 가르침이라거나 믿어야만 한다는 말로만은 충분하지 않다. 아니 그런 논리가 계속되는 한 기독교의 진리론적 토대는 몰락의 길을 간다. 그런 독단은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용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가 진리를 추구하던 전통과도 위배된다. 비록 기독교 일부가, 또는 성숙한 세계의 도전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위기를 느끼던 그 시대의 주류 교회가 교권에 근거해서 세계를 억압한 역사적 흔적이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기독교가 그런 길을 걸어오지 않았다. 기독교의 교리는 자신의 주장을 늘 진리 요청에 근거해서 새롭게 변형시켜왔는데, 그게 바로 기독교 사상사다. 기독교의 교리는 어떤 것이었든지 그것이 참이라는 근거를 보편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 때만 용납된다.

비과학적 진술이라는 주장에 대해
교회를 향한, 교회의 교리를 향한 비판은 여러 층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과학과 배치된다는, 혹은 비합리적이라는 소리가 가장 강고(强固)하다. 앞서 지적한대로 이것은 특히 지동설과 진화론 논쟁에서 기독교가 일방적으로 패배한 이후에 생긴 당연한 결과인 것 같다. 그런데 지금도 역시 기독교를 자연과학적으로도 진리라는 점을 증명하려고 절치부심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다. 이들은 소위 “창조과학회” 유의 사람들인데, 얼마 전 노아 홍수 때 사용된 방주의 유적을 찾기 위해서 어느 유명한 산악인을 대동하고 터어키의 아라랏 산으로 탐사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나는 이런 이벤트가 순수한 종교적 열성에 연유한 것인지 아니면 이런 일에 돈이 모일 가능성이 있다거나 혹은 어느 단체의 이름을 선전할 수 있다는 호기심에 연유한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이들이 비록 종교적 권위로 과학을 제압하려는 이들과는 달리 나름대로 과학적 근거로 성서의 권위를 지켜내려고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이들의 성서 해석학도 역시 정당하지 못하다. 성서는 어떤 범주 안에서 일정한 규칙을 보이고 있는 자연 원리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그런 원리를 뛰어넘는 세계 전체와 연관된다. 영의 세계나, 참된 생명의 세계다. 성서 시대의 자연현상에 대한 진술을 오늘의 자연과학적 원리로 풀어내는 일은 신학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런 작업이 기독교적으로 어떤 성과를 이끌어낸다고 하더라도 세계 전체와 연관된 기독교의 자리를 부분적인 원리에 축소시켜버리는 꼴이다.
그러나 이런 창조과학회 유의 사람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성서와 기독교가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는 식의 주장도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오늘 우리의 논의 주제인 동정녀 사태가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정녀 사건이 비과학적(초자연적)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은 더더구나 아니다. 다만 과학적이라거나 비과학적이라는, 또는 합리적이라거나 비합리적이라는 그 잣대 자체를 문제로 삼으려는 것이다.
“자연과학”, 또는 “과학”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바로 참된 것,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자연과학이 급속도로 발전된 근대 이후 우리에게 각인된 오해다. 자연과학이 말하는 원리가 나름대로 어떤 주어진 범주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뉴톤의 기계적 물리학이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에서는 진리가 될 수 없으며, 지구의 중력이 다른 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 자연과학은 이렇게 잠정적이고 한시적이고 지엽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과학적인 현상을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이 확인될 뿐이지 그 이상을 기대할 것이 없다. 생각해 보라. 물질은 어느 정도로 작아지는가? 우주는 어느 정도로 큰가? 라이프니쯔와 하이데거의 말대로 “왜 존재자는 있고, 도대체 무(無)는 없는가?” 오늘 이 세계는 왜 이런 모습이어야만 하는지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리스 시대의 사람들보다 오늘 우리가 과학적으로, 역사학적으로 훨씬 계몽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단순히 정보의 양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근본적인 앎에서는 2천5백 년 전 사람들이나 오늘 우리나 무지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2천5백년 이후의 사람들도 역시 여전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 입문>에서 “주석자는 과학적 해석에 의해서는 더 이상 찾아질 수 없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해야한다. 왜냐하면 과학적 해석은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무엇이든지 비과학적인 것으로 낙인찍어 버리기 때문에 진정으로 본질적인 것을 파악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런 면에서 궁극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침묵할 수밖에 없는 과학을 잣대로 기독교와 같은 어떤 역사적 진술을, 오늘의 논제인 동정녀 사건을 진리다, 혹은 아니라고 재단하는 태도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독교의 역사적 진술에 대한 해석학적 기준은 무엇일까?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작업은 동정녀 마리아에 관련된 역사적 지평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의 현실성(Wirklichkeit)을 확보하는 일이다. 만약에 이 동정녀 사건이 명실상부하게 초기 기독교가 생각했던 바의 그것 자체라고 한다면 비록 오늘의 시점에서 비과학적이라고 하더라도 기독교인은 그것을 믿어야한다. 이것보다 훨씬 심한 비과학적 진술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에서 참된 진리는 과거로부터 파생되는 원리가 아니라 미래와 연관된 생기(生起)라는 점에서 종말론적 전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적 판단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초기 기독교가 훨씬 심원한 지평에서 사유했던 문제를 무조건 객관적 사실로 믿어야 한다느니, 또는 과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느니 하는 단선적 구조로 접근한다면 그것이 바로 기독교 본질의 훼손이다. 따라서 이 동정녀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서 중요한 점은 그것을 믿느냐 아니냐 하는 게 아니라 초기 기독교가 이런 진술을 통해서 말하려고 했던 현실성이 무엇이었는지를 바로 찾아내는 일이다.

처녀출산의 신학적 현실성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라는 신앙고백이 말하려는 바는 도대체 무엇인가? 오늘 우리에게 전승된 이 사도신경이 처음부터 이런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던 게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훨씬 소박하고 다층적 진술들이, 즉 다양한 전승의 역사가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었다. 여러 형태의 고백문들이 역사 과정을 통과하면서 오늘의 사도신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늘과 같은 형태를 갖춘 최초의 사도신경은 710-724년 어간에 발견되며, 그에 앞선 형태는 아를레스의 케사리우스(Caesarius von Arles, 542년 졸)의 설교(De symboli fide et bonis operibus)에도 발견되며, 가장 초기의 형태는 원시 로마 교회의 세례 고백문에 등장한다. 이런 사도신경이라는 고백문이 하나의 공식적 문서로 설정되기까지는 교회 안과 밖에서 전개된 격렬한 신학논쟁의 역사가 작용했다. 이 사도신경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모든 도그마는 그런 철학적, 신학적 논쟁 과정을 통해서 자리매김 되었는데, 그 역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며, 모든 진리가 완전히 드러나는 종말까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교리는 결국 4세기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는데, 사도신경도 역시 이런 교리사적 배경에서 형성되었다. 그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몇 단계로 구별해서 검토하는 게 효과적일 것 같다.

1) 3세기의 로마 교회에서 사용된 사도신경의 이 동정녀 탄생 구절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 ”가 아니라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qui natus est de Spiritus sancto et Maria virgine)였다. 오늘의 사도신경은 두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한 문장, 즉 성령과 마리아가 한 묶음으로 처리되었다. 이 말은 곧 예수의 출생이 하나님만이 아니라 인간과도 연관된다는 뜻이다. 그냥 단순하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성령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굳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나셨다는 구절이 삽입된 데는 초기 기독교 당시에 영지주의(gnosticism)와 심각하게 투쟁한 역사가 놓여 있다. 그 당시에 유럽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세력을 떨치고 있던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출생하고 고통을 당하고 죽어야 할 인간과 실제로 하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영지주의는 원래 인간을 영육 이원론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영은 순수하고 절대적이지만 육은 유한하고 악하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영이 육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사건이라고 까지 생각했다. 어떤 면에서 이들의 주장은 아주 세련되고 나름대로 탄탄한 설득력이 있었다. 만약 예수가 명실상부하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래서 하나님 자체라고 한다면 유한하고 악한 육으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다. 헬라의 모든 신들이 그런 것처럼 신은 원래 초월적이고 비물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도 역시 인간과 똑같은 육체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의 바탕에서 예수의 육체성을 부정하고 신성만 강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였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예수가 이 땅에 실제로 인간으로 살았던 게 아니라 그림자처럼 가현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소위 가현설(docetism)이 그것이다. 아마 요즘도 상당히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심정적으로 이런 가현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할 것이다. 메시아인 예수가 우리와 똑같이 먹고 마시고 배설하며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별로 유쾌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에 반해 “2세기의 반(反)영지주의 교부들”은 예수의 역사성, 그의 육체성, 인간성을 추호도 흐트러짐이 없이 고수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이 세상에 가현된 게 아니라 실제로 유한한 육체를 갖고 살았다는 점을 일관되게 주장하면서 영지주의자들과 투쟁해나갔다. 이런 교부들의 주장이 오늘 사도신경의 한 문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마리아라는 여자의 몸을 통해서 태어났다”고. 성령만이 아니라 한 여자인 마리아의 몸으로 세상에 태어났다고.

2) 그런데 오늘 우리는 마리아라는 여자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 “동정녀” 때문에 약간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 그냥 “성령으로” 태어났다고 하든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동정녀라는 문구가 거의 마리아라는 이름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바람에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발생한다. 한쪽에서는 이것을 초월적인 능력이 임한 것이라고 보거나,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주장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초기 기독교에서 전개되었던 어떤 전승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도그마들이 하루아침에 결정되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원래 기독교 초기에 가장 원형적인 주장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역사적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언이었다. 이 사신(使信)은 기독교가 선포되는 모든 곳에 한결같은 무게로 전해졌다. 동정녀라는 사실은 별로 강조되지 않거나 거의 언급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런데 이 사신을 접한 헬라 문명권의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그들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제우스의 아들들인 페르세우스와 헤라클레스의 경우와 같이 중요한 인물이나 영웅들은 그 출생 자체가 벌써 어떤 신(神)적인 유래와 연관되어 있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예수의 출생도 역시 삼손(삿13:5)이나 예레미야(렘1:5), 하나님의 종(사49:5)에게 까지 소급되어야만 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 얽힌 출생 설화가 신화적인 표상  가운데서도 독특한 전승 층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은 원래 “동정녀”라는 표현이 없어도 무방했지만 역사적 예수가 선재적인 존재(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되는, 혹은 해석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앙적 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동정녀 출생을 최초로 언급한 이들의 생각이 이 동정녀라는 수식어 없이 단순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이들의 생각과 달랐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동정녀라는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아들” 칭호에 대한 새로운 부가적 해석이라는 뜻이다.  

3) 이렇게 복잡한 양상을 깔고 전개된 초기 교회의 동정녀 전승사 문제는 신약성서에도 그대로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네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 이 사건을 보도하지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더구나 네 복음서의 기록 연대를 감안하면 이 문제가 더 이상하게 보인다. 복음서 중에서 최초로 기록된 마가복음의 연대는 기원 후 60년대이고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은 90년대이다. 마가복음은 예수에 대한 전승을 최초로 수집하고 편집하면서도 이 동정녀 사건을 생략해버렸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요한복음은 이미 여러 복음서의 내용을, 특히 동정녀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마태와 누가복음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이 사실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동정녀 출생 전승이 그 당시 아주 일반적이었으며 본질적이었다고 전제한다면 이런 사태를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기독교 역사의 중심 무대에서 활동한 사도 바울도 역시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다. 그는 오히려 이 동정녀 출생에 반대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살게 하신 것은 ... ”(갈 4:4).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우연한 일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속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이것은 곧 위에서 언급한대로 예수에 대한 상이한 전승 층이 형성되면서 일어나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 사도신경 해설, 참조).

해석학적 요청
다시 정리해보자. 초기 기독교 전승에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동정녀 출생이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예수의 하나님 아들 칭호가 동정녀 출생 전승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었으며, 동정녀 출생에 관한 역사는 이 하나님 아들 칭호를 추가적으로 설명해나가는 전승의 결과였다.
이런 신학적 결론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두 가지 질문이 생길 것이다. 한 가지는 “당신은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는가?”이다. 이런 질문은 그리스도교가 걸어오는 진리의 길과 종교재판의 길 중에서 후자에서 속한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교리를 독단론에 치우쳐서 지켜내려고만 하고 주변의 보편적인 진리와의 대화를 단절했다면 지금처럼 생명의 영이 가득한 내용을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틴 루터의 신학적 문제 제기를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권으로 억압했기 때문에 결국 교회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분열을 가져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믿는 공동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일방적인 재단의 방식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개방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야만 한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의 문제는 그것을 사실대로 믿는가 아닌가의 차원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차원에 속한다. 만약 나에게 “당신은 동정녀 탄생을 믿는가?”하고 묻는다면 “믿는다.”고 대답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할 것이다.  
다른 하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동정녀 설화가 그렇게 기독교의 본질에 속하는 게 아니라면, 또한 이로 인한 오해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사도신경에서 제외시키는 게 정당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도 나름으로 의미는 있다. 과학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일종의 스캔들처럼 보일 수 있는 그런 사건을 매 주일 암송한다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문제제기이다. 그러나 굳이 그런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이것의 전승사를 바로 이해하고 초기 그리스도교가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생각했는지 바르게 해석할 수만 있다면 2천년 역사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그래서 나름대로 교회 일치에 기여하고 있다면, 또한 예배에서 중요한 기능을 감당한다면 그대로 존치시키는 게 훨씬 지혜로운 일이다. 결국 그리스도교 신학은 해석의 역사이다. 사실 우리가 신앙의 준거로 삼고 있는 성서 자체가 해석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가 그리스도교 전통과 오늘 현실의 문제를 얼마나 치열하게 해석해나가야 할는지 이미 대답은 주어진 셈이다.  
다시 한 번 더 정리하자. 동정녀 출생의 실질적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 실제로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와 일치한다. 둘째, 이 역사적 예수가 어떤 한 시점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게 아니라 그 인간성을 유지한 채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통치를 중재하는 자였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고유한 기독교 사상과 만난 셈이다. 역사적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시간을 초월해 있다는 ‘예수의 선재성’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 내재와 역사 초월이 이미 예수의 탄생 설화에 개입해 있는데, 이런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수 이해는 오늘까지 지속된다.
과연 이런 그리스도교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오늘의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접어두고, 다만 그런 변증의 단초만 암시적으로 제시하려고 한다. 만약 어떤 역사적 사건이 우주의 종말에 일어날 그 미래의 선취(Prolepsis)로서 해석되고 증명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사건의 메시야적 가능성을 열어두어야만 할 것이다. 아직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사건이 이미 종말의 선취라는 사실이 증명될 수만 있다면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흡사 씨앗은 외양상 죽은 듯하지만 그 안에 화려한 색과 모양의 꽃(생명)이 은폐해 있듯이 예수의 사건이, 즉 그의 인격, 운명, 그의 부활이 바로 종말의 선취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면 역사적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기독교의 주장은 그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자연과학과의 보편적 담론의 자리를 통해서 자신의 진리론적 지평을 확대해나가야만 할 것이다. 자연과학이 다루고 있는 이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그 세상의 미래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편적으로 논증하지 않는 한 신학은 설득력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이런 작업도 역시 신학적 해석학이라 할 수 있다.  

영육불이(靈肉不二)
우리는 위에서 조직신학적인 관점으로 다룬 마리아의 ‘동정녀 출산’ 문제가 도대체 여성신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검토할 차례가 되었다. 아무리 현학적인 논리로 그리스도교의 도그마를 정당화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주제라고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는 신학 전반에 연관된다. 많은 설교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대목은 기독교의 도그마가 담고 있는 삶과 역사의 현실들을 놓쳐버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신앙생활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상태, 또는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주어진 신앙생활의 형식에 실용적으로 필요한 것만 교리에서 발췌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 우리의 모습이다. 신학자들이나 또는 설교자들도 자신들의 신학적 인식이 어떤 현실성에 토대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동정녀 출산 교리는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삶의 문제를 지시하고 있다.

*예컨대 그리스도교 하나님 이해를 가장 또렷하게 구별하고 있는 ‘삼위일체’가 어떤 현실적 토대와 연관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신학자와 설교자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대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은 삼위일체론이 극복하고 있는 ‘유일신론’을 그리스도교의 신론으로 착각하고 있다. 전지전능한, 무소불위한 하나님이 역사에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한다면 우리는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이 차안의 문제들이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훨씬 심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론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자주 언급되는 ‘영성’ 문제도 거의 주술화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첫째, ‘영육불이’이가 그것이다. 초기 기독교가 영지주의와의 투쟁과정에서 예수의 육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순수 심령주의를 배격한다는 것이다. 흔히들 기독교는 영혼의 구원만을 말한다고 하지만 사실 기독교는 영육이원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독교의 영은 육체와 이원론적으로 구별된 어떤 차원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적 힘을 가리킨다. 구약성서의 “루아흐”나 신약성서의 “프뉴마”가 바로 그런 생명의 힘을 의미하고 있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오히려 영육 일원론에 근거한다. 성속은 구별되지 않고 일치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6). 유대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장소로 여겨졌던 성전이 이제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는 인간의 몸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런 발상의 전환은 이미 예수의 삶에 드러나 있던 바다. 예수는 성속 이원론적인 구도로 해석되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사유를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적 삶을,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 삶을 받아들였다. 일종의 밥상 공동체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창녀나 세리나, 그 당시에 죄인이라고 일컬어지던 사람들과 격의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예수와 바울이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희생시키고 초월적인 하늘만 강조한다고 비판한 니체는 예수와 바울을 정확하게 이해했다가 보다는 19세기의 유럽 교회에서 편향적으로 해석된 도그마를 그 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다. 물론 예수나 바울은 한결같이 이 세상과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를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차원이 다를 뿐이지 철저하게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세계다. 이는 곧 물(物)의 영성화이며, 영의 물화라고 볼 수 있다. 물과 영이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를 형성한다. 오늘도 기독교는 이 세상의 물에서, 특히 인간의 물인 몸에서 영성*을 발견하고 하나님 나라 표상에서 물적 토대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구미정 박사는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몸통한 영성’(embodied spirituality)에 근거해야 한다는 글 “몸의 신학”에서 인간의 몸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살’은 동물과 식물의 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나의 살과 연결된다. 나의 몸은 결국 세계의 살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공간이다. 식사(食事)를 통해 무수한 생명체의 살들이 우리 몸속에 들어오니, 식사는 곧 장사(葬事)라는 말이 얼마나 절묘한지 모르겠다. 심지어 햇살이 없으면 당장에 죽는다는 것이 뭇 생명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몸살을 앓는다는 것은 나의 몸이 다른 생명의 몸/살과 공명하고 있다는 신호가 아닐까? 가족이 아프면 나 역시 편하게 밥을 넘기기가 미안해진다. 이웃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내 살도 덩달아 떨려온다. 환경에 문제가 있으면 내 피부는 당장에 아토피로 반응한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몸살을 통해서 우리는 몸통한 영성을 훈련하고 점검하는 절호의 기회를 삼을 수 있는 것이다.(기독교사상, 2006년 6월호)    
  
전통적 형이상학이 안고 있는 “존재망각”을 적발하고 무(無)로서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그 존재 자체에 관심을 기울였던 하이데거가 후기에 이르러 놀랍게도 물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물은 존재의 밝혀줌 지평에 속한다. 그는 “Das Ding”이라는 강연에서 잔을 예로 들면서 이 문제를 해명했다. “그릇의 담는 것은 비어 있음이다. 비어 있음, 즉 잔에 있어서의 이러한 무는 제작의 손길마다를 규정한다. 그릇의 물적인 것은 결코 재료에 있지 않고 도리어 담고 있는 비어 있음에 있다.”(167). 비어 있음으로 해서 무엇이 차게 되고 그것은 다시 따라냄으로써 선물이 된다. “잔의 본질 속에는 땅과 하늘이 체재한다. 부은 것의 선물은 사멸할 자들을 위한 마심이다. ... 부은 것은 불사적인 신들에게 올리는 마실 것이다.”(170쪽, 하인리히 오트의 “사유와 존재” 234에서 재인용). 물은 사중자(Gevierte)가 회집하는 장소가 된다. 하이데거에게도 역시 물은 신비(영성)의 주제다. 오늘의 물리학적 근거에서 보더라도 물과 영은 변증법적이다. 장(場) 이론에 따르면 사물은 그저 단순하게 죽어있는 기계적 역학관계가 아니라 보다 심원한 차원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사실 그 무엇이 “있음” 자체가, 또한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의 유기적 상호 연관성이 놀라운 일이며 신비 아닌가?
특히 물적인 토대를 기술공학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가 일방적으로 득세하고 있는 오늘 한국적 상황에서는 이런 물의 영성화, 동시에 영성의 구체화라는 상호성 안에서 이 세계를 훨씬 심층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일이 시급하게 요청된다. 교회는 이런 점에서 이 시대정신과 구원론적인 경쟁관계에 있다. 교회는 자연을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 이 시대를 향해서 그 자연의 영성을 창조론과 종말론적 깊이에서 해석해야만 한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교의 영성*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성령과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명제는 곧 영과 육이 불이(不二)라는 뜻이 아닐까?

*창조와 창조의 완성인 종말 사이에서 그 내면의 깊이를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영성이 고갈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물론 교회가 나름으로 영성을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감상주의적 영성과 율법주의적 영성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매우 미흡하거나 더 나아가서 왜곡되었다. 소위 ‘경배와 찬양’ 유의 집회로 특징화 한 센티멘털리즘은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의 깊이로 들어간다기보다는 단지 인간의 감정만 자극한다. 그런 형태로 아무리 뜨거운 종교적 열정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생교와 같은 사이비 이단들의 집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열광주의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십일조와 성수주일로 대표되는 율법주의적 영성은 문선명을 위해서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통일교 신자들의 종교적 헌신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이런 토양에서 신앙생활을 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자연, 인간, 역사의 내면을 향한 영성을 발견할 없게 되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세계 선교사를 보내겠다는 열정은 교회에 차고 넘치지만 한국교회의 분열을 교회의 본질과 연관해서 성찰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목소리를 없다. 결국 교회 현장에 인간을 자극하는 이벤트뿐이고 영성의 심화는 실종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자의 몸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진술을 조금 더 확대 해석하면, 그것은 곧 여자의 몸이 메시야적 특성을 지닌다는 의미이다.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업적을 보장하는 상품이 아니며, 또한 남성의 성적 유희의 대상도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론적 차원에 속하는 생명의 토대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에 천착하는 기독교는 여성의 몸과 성을 구원론적인 차원에까지 승화될 수 있도록 신학적, 실천적 작업을 펼쳐나가야 한다. 그런데 지난 과거만이 아니라 오늘도 교회는 여전히 인간의 몸과 성을 금욕주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거나 아니면 무관심 속에 내버려둔다. 그것은 일종의 타부의 대상으로 다루어졌다. 이런 시각을 교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몸과 성이 도구적으로만 사용되는 오늘의 이 시대정신 속에서 기독교의 선교적 사명을 올바르게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의 몸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셨다는 사도신경의 고백은 오늘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이 시대정신과 대화하고, 경우에 따라서 다투어야 할는지 그 방향을 지시해 줄 것이다.
지난 수백만 년, 수천만 년 이상의 진화과정을 통해서, 또한 생명의 영이 그렇게 활동한 결과에 따라서 정착되었던 여성의 몸을 통한 출산이 근본적으로 경쟁력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를 새로운 시대가 우리에게 열리고 있다. 매우 불안한 삶을 살다가 죽었지만 그래도 유전공학의 새로운 장을 연 복제양 돌리 이후, 그리고 세기의 사기극으로 일컬어지지만 그래도 불치병 치료의 가능성을 확산시킨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논란 이후로 생명의 유일한 방식이었던 여성의 몸을 통한 출생은 큰 위협을 받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시험관 아기가 불임부부들에게 후세를 얻을 수 있는 대안으로 현실화했지만 그것은 정자를 난자에 착상시키는 단계까지만 과학기술이 참여하는 것이지 그 뒤로는 여전히 여성의 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패러다임 쉬프트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전공학은 이런 여성의 몸과 상관없이 생명을 출현시킬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놓게 된 셈이다.
소위 복제인간의 가능성은 학자들에 따라서 다르게 보고 있는 것 같다. 수백만 년의 진화과정을 통해서 자리를 잡은 인간 생명의 비밀을 유전공학으로 완전히 해명해낼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시간이 문제이지 결국은 인간이 그런 문제를 극복할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조금 더 비관적으로 본다면 복제인간의 실험은 결국 인간에게 판도라 상자를 여는 행위와 비슷할지 모른다. 반대로 낙관적으로 본다면 인간의 기술공학이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느 쪽에 더 큰 무게를 느끼는가? 이미 고도의 기술을 맛본 현대인들은 낙관론으로 흐를 것 같다. 이 세계에 던져진 인간이 과연 이 세계를 그렇게 도구적으로 다루어도 좋은가 하는 철학적, 신학적 문제를 제기해도 그들의 귀에는 심각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며, 설령 실제로 비관적인 조짐이 많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호기심에 사로잡힌 인간은 인간복제 기술개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다. 복제 인간의 현실화 이후의 시대에도 여성의 몸은 메시야적 특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는 ‘여성신학’의 범주를 벗어나기 때문에 여기서 더 이상 논의하지는 말자. 이 질문은 먼 미래에 출현하게 될지도 모를 우리의 후손들에게 위임하는 게 좋겠다. 왜냐하면 그 미래의 인간은 오늘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것이며, 따라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에 따라서 살고 있은 현재의 우리는 동정녀 마리아의 출산이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적 기초라는 사실만 확실히 하고, 나머지는 유보하는 게 지혜롭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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