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신앙론

조직신학 조회 수 6350 추천 수 141 2005.09.28 23:09:22

14장
신앙론


우리는 앞장에서 ‘솔라 피데’에 근거해서 기독교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칭의론’에 관해서 생각을 나누었다. 그 논의의 핵심은 인간의 존재론적 변화인 칭의가 단지 믿음으로만 획득되는 것인지 아니면 행위도 여전히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내린 잠정적인 대답은, 모든 신학은 궁극적으로 잠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잠정적’인 대답이라는 표현이 옳은데,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행위가 폐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대립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호 보충적이지도 않다. 인간의 의로움이라는 사태 자체가 법적인 차원과 실체적인 차원으로 구분되기 때문에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관계를 우리는 나무와 열매에 대한 예수의 비유에서 배울 수 있다. 다시 한 번 더 정리한다면, 우리는 칭의 사건에서 믿음 이외에 행위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칭의를 얻은 자에게는 당연하게 그에 상응하는 행위가 따른다는 점에서 이 칭의론의 큰 틀에서 행위가 언급될 수 있을 뿐이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질문
이제 우리는 칭의의 토대인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가능하게 하는 그 믿음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우리의 능력인지, 아니면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은총인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그 믿음이 우리의 지성에 대립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 여기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믿기만 하면 모든 게 가능하다는 신앙 만능주의가 팽배한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이런 질문은 매우 시급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구원의 ‘확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확신이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태도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또한 구원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고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확신’을 말할 수는 있지만 기독교 신앙이 곧 주관적인 확신과 일치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좀 곤란하다. 구원의 확신만을 강조하게 될 경우에 몇 가지 문제가 따라오게 되어 있는데, 우선 이 주관적인 확신은 얼마든지 인간의 심리적 작용으로도 강화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는 전혀 믿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그쪽으로 밀고나감으로써 믿고 있는 것처럼 과장하는 태도가 곧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확신은 사이비 이단에 가까울수록 훨씬 중요한 요소로 강조되고 있다. 또한 구원을 확신의 차원에서 강조하게 되는 경우에 기독교 신앙은 인격적이라기보다는 그 인격 내부에서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감정의 차원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 인간 삶에 감정이 중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다만 그것이 독단적으로 어떤 진리를 규정하는 힘으로 작용할 경우에 벌어질 위험성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하기보다는 신앙 만능주의에 안주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그 대답이다. 기독교 신앙을 이용해서 자기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어가겠다는 일종의 실용주의적이고, 도구적인 생각이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사로잡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신앙의 본질로 들어갈 필요는 없으며, 단지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만 추구하게 된다. 예컨대 기독교 신자들은 내면세계의 가장 심층적 사건이라 할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인다. 기도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 전반에 대한 이해가 교회 현장에는 결정적으로 부족하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의 단일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며, 창조와 보존은총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오늘의 이 소비중심의 문명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서 무오설이나 창조과학회 유의 사고방식도 모두 기독교와 성서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결과들이다. 1958/59년도 겨울학기 쮜리히 대학교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강좌에서 게르하르트 에벨링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순수하고 솔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큰 기대를 갖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한 적이 있다.

여하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순수하고 솔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그것에 큰 기대를 걸고 묻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더구나 기독교에 익숙한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기대하기는 더욱 힘든 일이다. 사실 나 자신도 이 강의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기대대로 철저히 캐묻고 겸해서 다른 문제까지 솔직하게 물어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여하간 질문하는 우리는 잘못된 자명성을 한사코 고집하는 세찬 세력의 저항을 경험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따지면서 실제로 우리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면 하는 기대도 세찬 저항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움직이는 그 무엇, 적어도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이해를 우리에게 기대하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섬광 같은 불가항력의 것을 의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이 복잡한 시대에서 기독교 신앙이해에 필요한 새롭고 실제적인 모든 동기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서두에서 이미 우리 물음의 모험적 성격을 말한 바 있지만, 그것은 우리 물음의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갖춘 사람이라면, 결코 오늘 긴급하게 등장하고 있는 이해의 문제를 못 본 척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앙의 본질, 12).

둘째, 기독교 신자들은 다른 주제에서도 그렇지만 ‘신앙’ 문제를 생각하는 경우에도 그것 자체의 담론으로 들어가기보다는 그 주제가 교회 부흥에 실효성이 있는지 없는지의 차원으로 빠져든다.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도 역시 이런 바탕에서 실행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성서 텍스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청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설교 패턴이 반복됨으로써 결국 무엇을 설교해야 할는지 전혀 방향을 잡지 못하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물론 우리의 신학 논의에서 목회적 실효성을 우리가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그것과 상관없이 신학적인 판단을 가능한 정확하게 내린 다음에 목회적 실효성을 생각하는 게 바른 순서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신학적 반성을 통해서 이제 성서읽기의 깊은 영성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신앙에 관한 예비적 고찰
(이 대목은 주로 푈만의 <교의학>을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정리된 것이다.)
1) 성서: 구약성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믿음보다는 순종을 훨씬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이주했던 아브라함의 태도에도 역시 순종이 기초하고 있으며, 사무엘이 사울 왕을 책망할 때 내세운 논리도 역시 순종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이 믿음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크게 보면 순종 역시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행동이다. 구약성서에서의 믿음은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사 7:9)는 이사야의 호소처럼 끈기 있게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믿음은 “야훼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응답”이다. 그런데 신약성서에서 언급하는 믿음은 구약에 비해서 훨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신앙은 신뢰이며, 신앙의 내용을 인정하고 확신하고, 동시에 통찰하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의 저자들과 예수에게는 신뢰적 의미의 신앙이 내용적 신앙보다 전면으로 등장하지만, 요한에게서는 신뢰와 함께 ‘인식’도 신앙의 매우 중요한 구성요인이 된다. 신뢰와 인식이 늘 구별되지는 않지만,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서로 강조점의 차이만 보이지만 이 두 요소가 복음서에서 믿음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바울에게서 신앙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갈 2:16, 롬 3:22)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고전 1:9)이다. 물론 바울도 신앙의 내용을 소홀하게 다루는 건 아니다. 신앙은 어떤 것이 어떻다는 사실을 믿는 것, 즉 어떤 사실을 믿는 것이다.(살전 4:14, 롬 10:9). 그뿐만 아니라 바울에게는 이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그가 신앙의 성숙을(갈 4:1,2, 고전 3:1,2, 13:11)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말이다.
2) 중세기 신학: 여기서는 이제 신뢰하는 신앙으로부터 교회의 권위를 믿게 하는 ‘인정’의 신앙으로 그 중심이 옮겼다. 어거스틴도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는 신앙을 주장하였고, 안셀름도 어거스틴을 따라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고대와 중세가 교회의 권위에 따르는 믿음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교회의 권위를 의심하고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아벨라르드)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교회의 권위를 따랐다고 보아야 한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그것을 완성한다.”는 말에 볼 수 있듯이 아퀴나스는 믿음과 이성의 종합을 꾀했으며, 루터는 그것의 대립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루터도 역시 이성이 그 한계를 넘어갈 때만 철학과 이성을 비판했지 무조건적으로 비판한 것은 아니다.  
3) 정통주의: 이 믿음이 정통주의는 다음과 같은 세 단계의 신앙을 주장했다. 이 내용은 멜랑히톤의 <기독교 개요>(Loci, 1559)에서 정리된 것이다.
ㄱ. notitia(지식) - credere Deum(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
ㄴ. assensus(인정) - credere Deo(하나님을 믿는 것)
ㄷ. fiducia(신뢰) - credere in Deum(하나님을 기대어 신앙하는 것)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지식) 인정할 수는 없으며(인정),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면서(인정) 신뢰할 수는 없다.(신뢰), 이는 곧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것은(신뢰)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인정)을 전제하고, 그분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그분을 경청하는 것(지식)을 전제한다. 이런 점에서 정통주의는 지식의 단계에 비중을 둔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을 교회의 권위에 의지해서 믿는 그러한 몽롱한 ‘함축적 신앙 혹은 맹신’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신뢰(fiducia)라고 하는 세 번째 단계의 신앙으로서, 이 신뢰를 통하여 개개인은 구원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4) 신개신교주의: 여기서는 신앙이 특수한 신앙과 주관적 신앙으로 이해되고, 감정과 내면적 영역으로 축소되었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신앙을 지식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감정’이라고 주장했다. 헤겔에게는 “종교와 철학은 하나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철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곧 신학이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서 이성과 신앙의 대립은 해체되었다. 쉴라이에르마허에게서 감정의 영역으로 축소되었던 신앙의 문제가 이제는 철학이 시도하고 있는 절대정신의 세계로 지양된 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이성은 일반 이성이고 인간 속에 있는 신적인 것이다. 그리고 정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정신인 한에서 별들과 세상 저 너머에 있는 정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정신으로서 이 세상의 정신들과 영들 속에 현존하고 있다.” 이 신개신교주의에도 여러 갈래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신앙과 이성이 가능한대로 조화를 이루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위에서 신앙의 문제를 교리사적인 차원에서 성서로부터 19세기의 자유주의신학에 이르기까지 개괄적으로 검토하였다. 믿음은 주관적인 결단과 객관적인 판단이 서로 맞물려 있다. 주관적인 결단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객관적인 판단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을만한 대상으로 신뢰할 수 있다. 이 두 요소가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주관적인 쪽으로 기울 수도 있고, 객관적인 영역으로 남아있을 수고 있다. 이 믿음의 문제에서 또 하나 중요한 관점은 이성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이다. 이미 주관적 결단과 객관적 판단에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지만, 결국 여기서 이성은 우리의 믿음이 어떤 타당성을 얻을 수 있는 토대로 작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믿음의 토대로 간주되는 신학과 이성의 작용으로 간주되는 철학의 관계를 좀 더 정확하게 검토함으로써 역사의 기독교가 이 믿음 문제를 어떻게 인식해왔는지 살펴보자.

신학과 철학의 관계
우선 간단한 질문으로부터 이 문제를 풀어보자. 신학과 철학 중에서 어떤 쪽이 기독교 전통에 가까울까? 대개의 사람들은 ‘두 말하면 잔소리’라는 식으로 신학이 기독교의 전통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생각은 반쯤만 옳다. 원래 신학(神學)이라는 용어는 플라톤에 의해서 최초로 사용되었는데, 그 당시에 이 신학은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신학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철학(哲學)에 기울어져 있었다. 철학은 신화처럼 허황한 이야기를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검증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진리로 생각했던 교부들은 기독교야말로 가장 참된 철학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는 신학이라는 용어를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해서 받아들임으로써, 이제 신학은 철학에 의해서 그 토대가 검증받아야 할 신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철학 중에서 가장 확실한 철학으로서의 자리를 다지게 되었다.
오늘의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철학을 기독교 신학과 대립되는 학문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인용되는 대표적인 교부가 터툴리안인데, 그는 “아테네는 예루살렘과 함께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 아카데미는 교회와 함께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루터 역시 철학적인 이성을 창녀라는 극단적인 말로 표현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터툴리안도 스토아 철학을 받아들였으며, 자신을 가리켜 오캄주의자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 루터 역시 로마 가톨릭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비난했을 뿐이다. 우리는 교부들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독교 신학이 철학과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았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플라톤의 철학 안에 삼위일체론이 내재되어 있다고까지 언급한 어거스틴에게서 볼 수 있듯이 신학은 철학과 도반(道伴)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학과 철학 사이에 역사적으로 전개된 이런 깊은 연관성은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하나님의 역사가 곧 사랑의 세계라고 본 헤겔 이후에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에 의해서 새롭게 전개된 인간 중심적 세계관, 그리고 다윈과 파블로프 같은 이들에 의해서 발전된 생물학적 인간론은 신학으로 하여금 더 이상 이 세상의 학문과 길동무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현상은 교회 외부의 인간학적 착상에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기독교 내부의 원인이 훨씬 크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제기한 지동설을 학문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종교적 권위로 억압하던 교회가 그 이후의 모든 학문을 향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불신 당하게 된 것이다. 이런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 쉴라이에르마허 같은 학자는 기독교 신앙을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규정했으며, 리츨은 칸트의 영향을 받아 ‘윤리적 요청’에서 하나님의 존재 가능성을 확보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정도로는 신학과 철학의 관계가 복원되기 어려웠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남보다 못한 관계로 발전했다.
오늘 기독교 신학이 처한 형편은 어떤가? 1921년 ‘로마서 주석’ 2판을 펴낸 칼 바르트는 기독교 교부 시대에 있었던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보다는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적 전통에 집중함으로써 기독교 신학의 내적 정당성을 마련해보려고 했다. 바르트와 쌍벽을 이루는 루돌프 불트만은 실존철학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신앙적 실존을 기독교 신학의 토대로 삼아보려고 했다. 바르트 신학을 말씀 객관주의라고 한다면 불트만 신학은 말씀 주관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들에 의해서 20세기 전반부 개신교 신학이 지배당했다.  
이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의 기독교 운동과 신학은 양극단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한쪽은 이 역사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해방신학이며, 다른 한쪽은 여전히 개인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구원에만 천착하는 근본주의신학이다. 물론 이 양 극단 사이의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그 여러 갈래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기 힘들지만 거칠게 윤관만 잡아서 본다면 다음과 같이 두 경향으로 구획 정리할 수 있다. 전자는 사회, 역사, 혁명이, 후자는 개인, 도덕성, 개량이 그 중심축으로 작용하다. 이들이 사회와 교회, 역사와 실존이라는 양 극단으로 구별되어 있지만 철학과의 대화에 성실하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물론 넓게 보면 해방신학은 마르크시즘에, 근본주의는 케인즈와 막스 베버의 경제철학과 선을 대고 있지만 교회 현장에서, 특히 설교 현장에서 그런 철학적 치열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서 해방신학적 전통과 근본주의적 전통을 싸잡아 철학의 부재라고 비판하는 것은 물론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다. 해방신학적 전통은 경우에 따라 기계적이고 낙관주의적인 역사관에 빠지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사의 신비를 향한 영성이 탄탄하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와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부들과 지난 2천 년간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철학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그리고 오늘 우리도 여전히 그런 전통을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도그마가 보편적 진리로서 손색이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런 보편적 진리의 지평을 확보하기 위해서 가장 적절한 도구가 바로 철학이라는 사실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은 단지 역사에 등장했던 구체적인 사조로서의 철학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역사의 리얼리티를 해명하려는 모든 인문학적이고 자연과학적인 담론을 일컫는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창조하고 예수 사건을 야기했으며, 종말을 완성하실 하나님, 그리고 이 세상을 끌어가는 생명의 영인 성령을 훨씬 더 적절하게 변증할 수 있을 것이다.

산을 옮기는 믿음
위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에 나타난 믿음이 단순히 인간의 ‘믿는다’는 주관적 사실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믿고 있는 그 대상에 대한 ‘이해’와 긴밀히 연결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 현실에서는 여전히 신앙의 이해 부분이 거의 무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 여기에는 간질병 소년을 고치신 예수가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오늘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간주되기 때문일 것이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 17:20). 오늘 우리는 이 구절을 주석할 생각은 없다. 이 구절을 거의 문자의 차원에서만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는 그런 신앙적 태도가 과연 성서적으로 옳은가 아닌가 하는 점은 좀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이 구절이 오늘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듯이 일종의 신앙 만능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면 바울은 다음과 같인 진술하지 않았을 것이다.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전 13:2). 아마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라는 표현은 그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어떤 사태를 강조하기 위해서 관례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수는 이런 관용어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갖고 있어야 할 삶의 태도를 가르치신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 믿음을 상대화하는 바울의 진술도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이 세상의 이치를 정직하게 들여다본다면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예수에 대한 신앙 유무에 상관없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음을 통해서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이런 신앙*이 한국교회 안에 자리하게 된 이유는 근본적으로는 성서와 신학에 대한 이해가 매우 취약하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강일상 목사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는 구절이 한국교회 안에서 크게 곡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통탄한 적이 있다. “아마 한국교회 교인들 중에서 이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기억할 때마다 한국교회에서 이른바 성공적인 목회를 했다고 하는 일부 목사들을 떠올리며, 나도 그렇게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YES, I CAN!’이라는 스티커를 자동차 유리창에 붙이고 성공 가도를 질주하는 사람들도 허다할 것이다. 과연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신 이 말씀이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식으로 설교되어도 좋은 것일까? 그 잘못된 설교가 수많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면, 이 한 구절에 대한 올바른 해석 역시 그 어떤 신학적인 고담준론보다 더 시급한 응급담론으로 논의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성서 자체의 해석도 중요하지만, 그 해석을 통해서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는 일도 신학 하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등한히 여겨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기상, 2005년 10월, 146).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런 신앙적 정서를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아마 ‘반지성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에도 이런 반지성주의는 수도 없이 많았다.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은 이에 대한 아주 두드러진 사건들이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타종교를 말살하려고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그들에게도 모슬렘들에게 빼앗긴 기독교 성지를 되찾자는 명분이 있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명분에는 단지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인 것이 훨씬 강하게 작용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도 현대판 십자군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벌어졌던 종교재판도 형식적으로는 신학적인 것 같지만 결국은 반지성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세계 기독교 역사에는 진리에 대한 탐구와 순전한 선교적 열정에 못지않게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박해의 흔적도 많다. 수많은 물리과학자, 천문학자, 인문학자, 신학자, 또는 집시들이 종교재판을 받고, 때에 따라서는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이런 반지성주의는 우리의 일상적 신앙생활에서도 역시 교묘하게 작용함으로써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믿음은 무조건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전가의 보도처럼 행사된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사태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이해의 관계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옳으니 그르니 너무 따지지 말고 믿어야 돼!” 이런 말을 우리는 귀가 따갑도록 듣는다. 교회의 주류가 그런 쪽에 있으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이해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물론 믿음은 아주 독특한 삶의 결단이고 체험이며, 모든 사물이나 이론들은 결국 믿음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원칙적인 점에서 이 말은 옳다. 그러나 문제는 믿음 일방주의가 우리의 지성적 활동을 불신앙적인 것으로 몰아간다는 데에 있다. 큰 병에 걸린 사람을 병원에 데리고 갈 생각은 않고, 안수 기도로 치료하겠다고 하면 이게 어디 정상적인 신앙이겠는가. 경기도 포천에 있는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정통 교회에서도 이런 일에 관심이 많다는 걸 보면 한국교회의 반지성적이고, 신앙 만능주의적인 성격을 알 수 있다.

지성을 넘어서
물론 근대주의의 그 지성이 세계사를 질곡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그런 지성을 경계해야 할 필요도 있다. “아는 것은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경구는 이미 그 천박한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낸 바 있다. 그런 지성의 축적으로 이룩한 현대의 삶이 비록 외양으로는 풍요를 구가하지만 그 질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궁핍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성은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어떤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성의 양면을 보아야 한다. 한 면은 말 그대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사실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일종의 계몽의 역할이, 신앙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역할이 기대된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사람보다는 대학을 나온 사람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좀 더 많이 알 수 있다. 교회에서도 보면 지성을 갖춘 사람과는 최소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 면은 지식 자체만으로는 궁극적인 가치를 생산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참으로 까다로운 문제인 것 같다. 이렇게 설명해보자. 인간은 지성을 통해서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수학의 함수관계나 기업의 메커니즘이나 법의 운용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머리가 좋은 사람은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고, 사법고시에 합격할 수도 있다. 이런 능력은 지성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지적인 수준이 높을 수 있다는 나쁠 건 없지만, 그 지성은 그것만으로 끝이지 좀 더 가치 있는 차원으로 올라가지는 못한다. 예컨대 우리의 현대사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유신헌법’을 만든 사람은 그 당시에 가장 지성적인 집단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법의 원리만 알았지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또는 알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유신헌법을 만들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지성이 늘 이렇게 불의하게 사용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무엇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 답은 이성이다. 지성과 이성을 이렇게 구분해보자. 지성은 단순한 정보에 불과하지만 이성은 그 정보를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판단하는 기능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성은 단순한 앎이라고 한다면 이성은 그것의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는 앎이다. 이런 점에서 이성이 훨씬 근원적인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의학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지성이지만 그 의술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변호사나 판사는 법에 대한 앎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반드시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의술과 법이 나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성은 있는데 이성은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성적인 사람은 비록 지성적이지 않더라도 지성적이면서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바람직하고 의미 있게 살아간다.
성서는 인간의 이성을 기독교 신앙의 실체라 할 영성과 대립시키지 않는다. 예컨대 로마서 12장1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영적인 예배’라는 단어를 공동번역은 ‘진정한 예배’라고 표현하고, 루터번역은 ‘vernünftiger Gottesdienst’(이성적인 예배)라고 번역했다. 원래 헬라어 성경에는 ‘로기켄 라트레이안’인데, 로기켄의 원형인 로기코스(이 형용사는 로고스라는 명사에서 왔음)라는 헬라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rational, 다른 하나는 spiritual이다. 개역성경은 로기코스를 영적인 것으로, 루터는 이성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진정한’이라는 뜻으로 번역한 공동번역은 그 중간의 입장이다. 아마 바울이 살던 그 시대에는 이성과 영성을 같은 것으로 본 것 같다. 오늘 우리의 눈에는 이성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당연히 달라야 하는데 헬라 사람들은, 그리고 그런 헬라 사람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바울 같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이 두 개념을 하나로 보았다는 것이다.

오늘의 논쟁
지난 2천년 역사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은 주관적인 부분과 객관적인 부분을 양 날개로 삼아왔다. 경우에 따라서 주관적인 신앙이 강조될 때도 있거나, 반대로 객관적인 신앙이 강조될 때도 있긴 했지만 그 밑자락에는 늘 양측 면이 변증법적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의거할 근거(Halt)이면서 동시에 내용(Inhalt)이며, 신뢰(Zuversicht)이면서 동시에 통찰(Einsicht)이고, 당신에 대한 신앙(Duglaube)이면서 동시에 다실에 대한 신앙(Daßglaube)”라는 푈만의 지적은 옳다.(교의학, 104).
변증법 신학에서 초기 바르트는 주로 주관적 신앙에 무게를 두었다면 후기 바르트는 신앙을 ‘앎’, ‘인지적 사건’으로 이해했다. 불트만은 권위에 의존하는 정통주의 신앙뿐만 아니라 증명에 의한 신앙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면서 주관적 신앙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에게 신앙은 늘 ‘이해’이면서도 동시에 실존적 ‘결단’이기도 하다. 그에게 신앙은 “오직 실존하는 중에서만 현실적이며, 교리를 무조건 모두 옳다고 여기는 게 아니다.” 그가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주관적 차원을 언급하지만 바르트처럼 객관적인 하나님과 그 말씀을 전제하는 게 아니라 그것과의 실존적인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와 구별된다.
에벨링은 불트만과 마찬가지로 맹목적인 신앙과 투쟁했다. “신앙은 곧장 솔직하고 학문적인 이성의 사용과 현실에 대해 열린 눈을 요구한다. 신앙은 미신과 환상의 가장 예리한 적이다.”(Das Wesen des Glaubens, 91).
판넨베르크는 실존주의 신앙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고 나선 신학자이다. 그에게 계시는 ‘간접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있는 이성의 눈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 이 말은 곧 기독교 계시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기 위해서 미리 신앙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이 사건을 편견 없이 인지함으로써 진정한 믿음이 일어난다. 따라서 그에게 기독교 신앙은 초자연적 어떤 사건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거나, 아니면 인간의 실존적 경험에 타당한 것만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보편사적인 지평에서 옳은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신앙은 근거가 있는 모험이다. “완전히 맹목적으로 믿는 자”가 가장 잘 믿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부여받은 이성 앞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 변명하는 자가 가장 잘 믿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실존적 차원인 주관적 신앙과 항상 대립적인 객관적 신앙이야말로 인간을 위한 실존적 의미를 지닌다.
결국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참된 신뢰라는 건 신뢰하는 사람이 자신의 그 신뢰를 어디에 토대할 것인가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즉 판넨베르크에게는 하나님이 믿을 만하다는 판단이 전제되어야만 거기서 참된 신앙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기독교인들에게 믿으라는 말을 반복할 게 아니라 그들이 믿어야 할 하나님에 대해서 해명하는 일에 천착해야만 한다. 예컨대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승천 사건처럼 계몽주의 이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성서의 보도를 무조건 믿으라는 말로 해결할 수는 없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진리론과 직결된다. 하나님이 실제로 참이지 않는 한 기독교 신앙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 신앙과 참에 대한 인식이 세 차원에서 연결된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현존 세계 안에 있는 가시적인 근거가 하나의 차원이다. 인간의 신뢰는 바로 그 근거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사도신경의 두 번째 항목이 거론하고 있는 예수의 역사적 사건, 그리고 첫 항목과 연관되어 있는 창조의 세계이다.
2) 신뢰는 이러한 근거에서 신뢰가 실제로 관계되어 있는 불가시적 현실성을 기대한다. 이 불가시적 현실성은 각각의 근거에서 인식되는데, 사도신경에서는 이 문제가 바로 하나님의 현실성이며, 신적인 존엄의 정당을 위해서 고양된 하나님 아들의 현실성이고, 교회의 삶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비밀이 가득한 심층에서 활동하는 성령의 현실성이다.
3) 신뢰는 의지할 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기대하는 것과 연관된다. 사도신경에서 이것은 죄의 용서,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영생에 해당된다.
판넨베르크가 볼 때 이러한 세 차원에서 신뢰는 진리, 즉 의지할 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전제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다. 신뢰는 그 기초적 근거에 진리성이 없으면 존속할 수 없다는 말이다. 결국 판넨베르크에게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이 어떤 진리론적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가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과연 판넨베르크가 주장하고 있는 진리론적 근거를 신학이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그 근거가 어느 정도의 보편적 설득력이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기독교 신앙이 단지 학문적 유희로 떨어질 개연성은 없는지에 관한 문제는 앞으로 더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문제가 훨씬 중요한 주제로 부각될 조짐을 보이는 21세기에 기독교 신학과 신앙이 자신의 진리론적 토대를 심화, 확대해야 한다는 요청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신앙의 주체성과 연대성
지금까지 진행된 우리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답이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여전히 주관적 신앙과 객관적 신앙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듯이 오가고 있을 뿐이다. 실존신학의 주관적 신앙과 역사신학의 객관적 신앙이 지난 2천년 동안 내려온 신앙 논쟁을 마무리한 게 아니라 그것을 확인한 셈이다. 이 양 극단을 푈만은 폰 라트가 자신의 구약학 연구에서 제시한 지혜 개념으로 극복하고 있긴 하다. 지혜는 세속적 영역과 종교적 영역을 모두 포괄한다. 지혜는 실천적 일상경험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혜는 지식이면서 동시에 신앙이기도 하다. 지혜는 지식을 통과한 신앙이며, 신앙을 통과한 지식이다. 지혜는 아는 신앙이며, 믿는 지식이다.”(110). 그에 의하면 신앙이 지혜로 이해되면 신앙이냐 이성이냐, 혹은 계시냐 경험이냐 하는 양자택일은 극복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혜가 그 양자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푈만이 주장하는 그 지혜는 곧 기독교의 영성과 연관되는 개념이 아닐까? 영성은 단지 믿는 것만도 아니라 아는 것도 포함하며, 거꾸로 안다는 사실에 머물지 않고 깨달음의 차원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런 연결이 가능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영성은 단지 우리의 종교적 취향을 확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구원의 차원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영성의 구도 안에서 이런 신앙의 본질을 정리하는 게 괜찮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다음 장에서 기독교 영성에 대해서 다룰 예정이니까 여기서는 영성의 토대인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피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성령의 말걸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신앙의 주관적인 부분과 객관적인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신앙의 본질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인 각자가 성령과의 소통을 통해서 삶의 내용과 의미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런 정도에 머물지 않는다. 두 가지 차원에서 이 말은 심화되어야 한다. (아래의 내용은 2005년 8월15일, 대구남덕교회 청년회 특강 중 일부이다.).
하나는 신앙의 주체성이다. 성령은 자유로운 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과 고유한 방식으로 접촉한다. 따라서 기독교인 각자는 아무에게서도 간섭을 받지 않고 성령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바로 성숙한 영성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특징은 신자들이 어린아이처럼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주체적이지 못하고 의타적으로 생활하는 어린이처럼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떤 교권에 의존한다거나 어떤 권위에 굴복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는 말처럼 순종의 영성이 기본적으로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어린아이 같은 신자가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연대성이다. 이 연대성은 성령의 활동에서 개인주의에 빠지지 않고 심층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영성이 맑고 깊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성령의 활동을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포착되었다면 당연히 자기를 포기하고 그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라는 게 분명하게 판단되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포기하고 그 일을 중심으로 동료들과 하나 된다는 게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다. 이런 구체적인 상황은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본인이 판단하고 결단해야 할 부분으로 남겨두는 게 좋은 것이다. 다만 성령의 부르심을 의식하는 사람은 이런 연대성을 유지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신앙의 주체성과 여기서 언급하는 연대성은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성숙한 신앙이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주체성이 강한 사람만 연대성을 확보하고 살아갈 수 있다. 실제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남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한정시킬 수 있는 법이다.    
이제 오늘 우리의 논의를 마치면서 짧은 글 한편을 읽겠다. 28세의 젊은 시절에 ‘월든’이라는 숲속의 호숫가에서 스스로 오두막을 짓고 2년 동안 생활했던 경험을 매우 민감한 영적 감수성으로 서술한 소로우의 <월든>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할 우리 기독교 신자들에게 영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글이 아닐까 생각해서, 여기에 소개한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鼓手)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던,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의 천성에 맞는 여러 여건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대신 끌어다 댈 수 있는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헛된 현실이라는 암초에 우리의 배를 난파시켜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애를 써서 머리 위에 청색 유리로 된 하늘을 만들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이 완성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분명 그런 것은 없다는 듯이 그 훨씬 너머로 정기에 가득 찬 진짜 하늘을 바라볼 것인데.”  

[레벨:0]

2005.09.30 01:15:12
*.187.239.89

늘 꾸준하신 열정에 감사드리며
항상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강의의 주제와는 약간 빗겨나지만
문득 신앙의 필요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단어선택도 질문도 불경하지만

기독신앙이 왜 필요한 것일까요.

하나님께 잘 보임으로 윤택한 생활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조금 발전하여, 구원의 확신을 통한 심적 위안감이 그 목적인지
그도 아니면 무엇인가 당위적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어찌보면 참 별것 아닌 문제로 보이기도 하네요

하지만 많은 신자들이 신앙 만능주의에 침착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질문들 속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세상사에 지쳐 교회에 가고,
내적 성장과 영적 성숙과는 관계없이
한 주간의 예배에, 기도회에 참석한 숫자와
성경을 읽어낸 횟수
제자훈련이나 해외 전도등의 교회 활동이 쌓임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하고 그것에 위안받는 것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진 이유라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요.
어느새부턴가 교회 또한
지금의 소비문화의 전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이
맹목적 믿음이 가장 좋고
생각이나 의심, 의문은 시험에 드는 것이라는 생각들이 지배적인 곳에서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고
잘못하다간 주위에서 질타당할 수 잇는 배척받는

기독교 신앙을 통한 영적 ‘성찰’
그리고 좀더 깊은 본질적 세계에 대한 ‘탐구’
과연 이런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주위에서 너나 잘해! 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군요


문득 횡설수설 쓰고보니
매번 목사님의 설교에서 보았던 내용이네요


‘기독교에 익숙한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기대하기는 더욱 힘든 일이다’


이 글이 너무 쓰리게 다가와서 끄적여 보았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09.30 13:10:53
*.249.178.6

설 선생,
믿음 자체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산다는 건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태도입니다.
이미 그런 문제의식 안으로 깊이 들어간 것 같군요.
문제를 그 대답을 어떻게 찾아가는가에 있습니다.
왕도는 없습니다.
어쩌면 '어떻게'라는 방법론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기독교 신앙을 수행의 과정으로 여기고 그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어느날 갑자기 큰 '깨우침'으로 신앙의 본질의 정체가
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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