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종말과 역사

조직신학 조회 수 9251 추천 수 133 2005.11.23 17:34:50
20장
종말과 역사
                                          
현대인들에게 종말은 아무런 관심이나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잘못된 말은 아니다. 저들은 기술과 산업사회를 지나 컴퓨터와 정보사회 안에서 물질과 기술(기술적 천년왕국:J. Moltmann)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과 그 소비를 흠뻑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 21세기는 다시 19세기와 같은 진보와 낙관적 사유가 지배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종말은 다만 광신자들(시한부 종말론자들과 같은)이나 외쳐대는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이들은 성서시대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기독교적인 종말론과 다른 일종의 세속적 종말론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뒤렌마트(F. Dürrenmatt)는 「Der Tunnel」에서 오늘의 기술지배의 묵시문학에 대해 분석한 바 있으며, 사르트르와 까뮤는 종말을 세속화했고(H. G. Pöhlmann, 교의학, 453)), 보베트는 현대인이 질병, 암, 노화, 죽음, 생활, 미래, 과거, 원자폭탄, 기술과 그 가능성들, 사회단체, 인간들, 정치세력들, 전체주의적 체제, 무와 공허, 그의 양심에 대한 불안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모든 불안들은 단지 “매우 방대한 대상 없는 불안”으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려는 올가미에 불과하다고 진술하고 있다. (Bovet, Angst und Geborgenheit, 1956, p. 3f).
  오늘의 신학과 교회는 사이비 종말론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말론적 사유에 대한 언어와 내용을 선포해야할 책임 안에 놓여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전통이 갖고 있는 종말의 표상들이 현대인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단적으로 “휴거”와 “7년 대환란”, 혹은 구름 타고 오시는 예수에 대해 더 이상 아무도 그 가능성이나 현실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교회에서조차 이러한 종말의 사건들은 짐짓 침묵되거나 여전히 고대의 우주관적 사고를 그대로 주입시키려 한다. 교회가 종말론적 공동체임에 틀림없거니와 오늘의 교회는 종말론적 존재양식에서 이탈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 메시지도 상실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오늘의 교회가 초대교회 안에 놓여 있던 묵시문학적 종말표상을 근본적으로 망각했거나, 아니면 해석학적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기존 정통교회에 해당되며, 후자는 시한부 종말론자들과 같은 소종파 운동에 해당된다. 양측 모두에게 가해질 수 있는 비판은 결국 저들에게 “종말론”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가 다루는 주제와 관련시켜 말한다면 종말의 “역사적 이해”가 실종되었다는 말이다.
종말은 말 그대로 마지막의 일 혹은 마지막 사건이다. 따라서 종말론이란 그 마지막의 일에 대한 가르침, 즉 인간과 인간역사와 세계의 종착점, 그리고 그 목적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 지성적 동물로서 유일한 존재인 인간이 그 마지막에 대해 언급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어려움이 놓여 있다. 기껏 우리는 인간이 죽는다는 것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인간 개체의 죽음만을 주제로 생각할 수는 없으며 종말론은 이미 그 안에 역사적 지평을 포함한다고 보아야한다. 말하자면 종말론이란 인간이 역사적 사유를 가지므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가다머의 설명에 의하면 역사적 본질에 대한 두 가지 전통이 있는데, 그 하나는 그리스인들의 생각으로서, 저들은 역사적 진리를 자연 안에 기초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역사를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다른 전통은 이스라엘인들의 생각이며 이들에게 역사는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이라는 것이다. 종말에서 역사의 통전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는 곧 역사적 종말에 의해 규정되며, 역으로 종말은 역사적 지평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종말론에는 매우 많은 주제가 따르게 된다. 인간의 죽음, 영혼의 불멸이냐 육체의 부활이냐, 또는 역사 내재적이냐 역사 초월적이냐, 그리고 현재적이냐 아니면 미래적이냐의 관점들이 논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시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종말의 역사적 관점을 벗어나지 않는 테두리 안에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종말의 “타계주의”에 놓여 있는 위험성을 내다보며, 종말론적 존재양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종말론적 존재양식은 개인 실존만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와 국가 등 전체 세계가 따라야 할 절대 가치이며 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아래와 같은 순서로 우리의 논의를 전개해보자.

1. 종말론의 재발견과 그 유형
2. 종말론의 역사적 해석
3.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윤리
4. 종말과 하나님의 영광

1. 종말론의 재발견과 그 유형

종말론은 기독교 공동체가 종말론적이면서도 그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왔다. 종말론은 항상 교의학에서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부록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계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파루시아(parusia)의 연기로 인해 교회는 현재적-케리그마적 종말론으로 그 의미를 대체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시 오실 예수에 대한 기독론의 형성으로 구원 역사는 우주적 차원을 갖게 되었으며, 바울도 시간적 종말을 말하기보다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현재적 종말론의 경향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콘쩰만(H. Conzelmann)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종말의 “탈세계화”라는 것이다. 요한 역시 “우주론적 표상요인”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종말은 예수를 통한 현재적 구원이며, 교회가 종말적 사건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소종파에서만 묵시적인 종말을 강하게 주장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종말의 비역사화는 특히 19세기의 문화개신교주의에서 그 자유주의적 속성으로 기독교와 문화의 조화 내지 종합을 추구하므로써 더욱 철저히 기독교의 종말론적 특성은 그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칸트와 리츨 그리고 하르낙과 헤어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종교성과 윤리, 그리고 역사와 문화에 내재한 하나님과 그 계시에 대해서 주력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기독교는 역사 진보주의나 낙관주의와 같은 세계이해를 갖게 되었다. 이들에게 종말은 전혀 의미 있는 주제가 되지 못하였으며, 낭만주의의 영향 아래서 어떻게 하면 기독교가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느냐 하는 문제에 경도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요하네스 바이스와 슈바이쩌에 의해 기독교의 종말론적 지평이 새롭게 조명 받게 되었다. 바이쓰는 1892년 「Die Predigt Jesu vom Reiches Gottes」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예수가 이해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전혀 반대되는 단적으로 초세계적인 것이다.  … 이 관념이 지니고 있는 근원적으로 종말론적-묵시문학적 의미를 벗겨 버리고 종교적-윤리적으로 적용시킨 근대신학은 정당성이 없다. 사람들이 그 표현을 예수가 사용했던 것과는 다른 뜻으로 쓰면서 겉으로 보기에만 성서적으로 다루는 것같이 보였던 것이다.(p.49)

슈바이쩌의 입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는 1906년 <예수 연구 역사>에서 19세기 모든 자유주의적 예수像이 예수,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말하자면, 리츨과 같이 예수에게서 종말의 현대적 이념을 도출하려는 작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며, 예수가 말한 종말은 이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종말론적으로는 현대적 이념을 예수에게 옮겨서 신약신학을 통해서 다시 그 현대적 이념을 예수로부터 끌어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리츨은 거침없이 이런 짓을 했다.(322)

이들의 종말론적 경향을 소위 철저 종말론(Die konsequente Eschatologie)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요하네스 바이스와 알베르트 쉬바이쩌, 그리고 마틴 베르너와 프리츠 부리가 속한다. 저들에 의하면 예수는 종말을 당대에 임할 줄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의 종말이해를 오늘의 질서로 바꾸어 말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낡아버린 옷과 같은 것이다. 이들은 예수의 종말 이해가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그것의 윤리화, 또는 역사화를 문제 삼는 것이다. 오늘의 세상과 문명은 아무리 발전된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세계와는 결코 같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들의 문제 제기를 일단 정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종말이 아무리 절대적인 세계라고 하더라도, 거꾸로 오늘의 우리 삶이 아무리 상대적이라고 하더라도 종말과 현재가 이원론적으로 구분되거나 종말이 현재를 배제한다면 오늘에 대한 우리의 책임감이 간과될 염려가 있다. 흡사 열광적인 소종파처럼 그 완전하고 철저한 종말의 나라가 오기를 무조건 기다리는 게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는지.
이에 반해 도드(C.H.Dodd) 같은 이들은 종말이 예수의 오심에서 이미 실현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일컬어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라 부른다. 철저 종말론이 미래적이라 한다면 실현된 종말론은 종말의 현재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약성서의 저자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종말이 역사 속에 들어왔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통치가 계시되었다. 장차 올 세대가 도래했다. 초기 기독교 복음은 실현된 종말론의 복음이었다.”고 설명한다.
양측의 입장을 전향적으로 통합해 보려는 시도가 예레미야스, 큄멜, 오스카 쿨만과 같은 구속사학파 신학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저들은 종말의 미래적 속성과 현재적 속성을 구원의 드라마에서 “이미”(schon)과 “아직 아님”(noch nicht)의 긴장관계 속에서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를 구속사의 종말론(Die Eschatologie der Heilsgeschichte)이라고 한다. 물론 “이미”와 “아직 아님”이라는 변증법적 성격은 거의 모든 종말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개념이지만 구속사적 종말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명료화했을 뿐만 아니라 종말의 문제를 현재와 미래라는 관점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행위로 돌리는 작업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불트만의 종말론은 실존론적 종말론(Die existentiale Eschatolgie)이라는 특징이 있다. 불트만에 따르면 종말에 관한 신약성서의 진술은 현재의 세계관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탈신화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종말은 미래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실존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다. 불트만이 개인의 실존에서 종말을 해석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말의 미래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는 건 아니다. 각각의 개인들은 신앙을 통해서 죽음 너머에 이르는 미래를 기다린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차원에서 종말은 개인이 신앙을 결단하는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 역사성 안에 영원한 미래가 실현된다. 불트만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종말론적 이해가 이미 요한복음에 자리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으나, 누구든지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받은 것이다.”(요 3:18).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전통적인 신학의 언어로는 종말론이 최후의 사물에 관한 가르침이다. 여기서 ‘최후’는 시간적으로 마지막의 것이라는 뜻이다. 즉 세계의 종말은 현재의 미래가 급히 다가오듯이 절박해 있다. 그러나 예언자들과 예수의 설교에 보면 이 ‘최후’는 더 넓은 의미를 지닌다. 하늘이라는 관념이 공간적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표현하듯이 세계의 종말이라는 관념은 시간적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묘사하다. 그것은 물론 초월 자체의 이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이 지니고 있는 의미에 대한 이념이다. ...종말론적인 설교는 현재적 시간을 장래의 빛 비추어 보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현재의 세계, 자연과 역사의 세계, 우리가 그 속에 살면서 계획하고 있는 이 세계가 유일한 세계는 아니고, 도리어 이 세계는 시간적이고, 순간적이고 급기야 영원에 직면하면 공허하고 비현실적이라고 한다.(Glauben und Verstehen 4, 148)

이러한 실존론적 종말론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그것으로 종말의 미래적이고 우주론적이고 목적론적이며 구원론적인 차원이 일소된 건 아니다. 종말의 현재성에 대한 강조는 처음의 창조와 그 보존과 완성을 끌어가는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신앙에서 완전한 대답을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말이다. 하인리히 오트는 이 문제를 이렇게 지적한다.

종말론은 단순히 구속사적 개요에서 마지막 장에 놓이는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실존론적 성격이 위험스럽게 되고, 종말론적 진술이 실존과 맺는 관계가 위험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종말론의 미래적 성격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신약에 대한 불트만의 실존론적 접근은 그 미래적 성격을 놓친 셈이다.(Eschatologie, 8f.).

베르크호프도 이렇게 말했다. “구속사라는 틀이 없으면 실존은 유령화하고 진화는 숙명론적으로 되고, 장래는 유토피아적으로 된다.”(H. Berkhof, Gegrunde Verwachtung, 100). 결국 우리는 우리 삶에 개입된 종말의 실존론적 현재성을 깊이 파악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우주론적 미래성을 통전적으로 묶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지 큰 틀에서 볼 때 불트만의 이 실존론적 종말론은 현재적 종말론과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진화론적 종말론(Die Evolutions-Eschatologie)을 주장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하나님의 현실성과 세계 현실성이 미래에 결합한다는 데에 있다. 그는 세계 현실성을 고정된 실체이거나 정(靜)적인 상태로 생각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이해한다. 이런 역사적 현실성은 곧 진화다. 우주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우주발생(Kosmogenese)이다. 이 우주발생은 생물발생(Biogenese)으로 시작하고, 정신발생(Noogenese)으로 계속되고, 그리스도 발생(Christogenese)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런 전체의 종합을 그는 ‘오메가’라고 부른다. 이 오메가는 우주적, 보편적 그리스도와 등가 개념이다. 오메가는 목표점일 뿐만 아니라 진화의 동력이기도 하다. 결국 이 세계는 오메가 포인트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가 곧 종말인 셈이다.
위에서 제시된 종말론 이외에도 변증법적 종말론, 목적론적 종말론, 초월적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내재적 종말론 등등, 강조점의 차이에 따라서 여러 유형이 보충될 수 있다. 이런 유형들은 서로 이합집산 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세부적으로 들어가지 말고, 여러 유형을 세 가지로 간추리는 것으로 이 대목을 정리하기로 하자. 그것은 곧 현재적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초월적 종말론이다. 현재적 종말론은 종말이 이 역사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며, 미래적 종말론은 종말을 미래의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며, 초월적 종말론은 종말의 현재와 미래의 차원보다는 초월적 성격에 초점을 두는 시각이다.
이런 논의를 좀 더 핵심적으로 좁혀 본다면 두 가지로 모아진다. 첫째는 성서가 말하는 미래적이고 우주적인 종말 이해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며, 둘째는 그런 종말과 오늘의 역사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어느 정도 설명이 제공되었다. 우리가 기독교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미래적이고 우주적인 종말을 결코 유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을 취하게 될지 우리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시간 안에 예수가 재림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그것이다. 만약 그런 차원이 실종된다면 오늘 우리의 모든 신앙적 행위는 그 토대를 상실할 것이다. 이런 문제는 아마 둘째 문제와 연계될 것이다. 그 미래적이고 우주적인 종말이 역사와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에 대한 것이 그것이다.  

2. 종말의 역사적 이해

리츨을 중심으로 한 19세기의 기독교와 문화의 종합은 앞서 말한 대로 기독교회의 신학적 뿌리를 종말론(묵시문학)에서 찾은 바이스와 쉬바이쩌에 의해 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로부터 시작한 종말론의 신학적 각인은 20세기 전반기의 신학에 있어서 종말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예컨대 칼 바르트는 이렇게 진술했다. “완전히, 철저하게, 전적으로 종말론이 아닌 기독교는 완전히, 철저하게,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Der Römerbrief, 2. Aufl. 1922, 298).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함으로써 결정적인 종말론(endgeschichtliche Eschatologie)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낸다. “마지막은 원역사와 같은 의미이다. 즉 원역사가 언급하고 있는 시간의 한계는 모든, 각각의 시간의 한계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시간의 근원과 연결되는 게 틀림없다.”(Die Auferstehung der Toten, 2. Aufl. 1926, 59). 루돌프 불트만도 만년에 “Geschichte und Eschatologie”(2. Aufl. 1964, 184)에서 “모든 순간에는 종말론적 순간이 숨어 있다. 당신은 그 순간을 깨워야 한다.”고 피력함으로써 실존적 역사성으로 환원하고 있다.
종말을 가장 분명하고 일관성 있게 역사적으로 해석한 인물은 위르겐 몰트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은 ‘하나님의 초월적 주관성의 신학’이며, 불트만의 입장은 ‘인간의 초월적 주관성의 신학’이기 때문에 그들의 종말론은 결국 역사의 지평을 상실했으며, 따라서 ‘초월적 종말론’으로 규정될 수 있다(Theologie der Hoffnung zur Begründung und zu den Konsquenzen einer christlichen Eschatologie, 1964, 31ff.). 초월적 종말론에서는 계시의 미래와 목표가 “지향성이 근원이며, 목표가 계시의 근원과 동일시된다.”는 사유 안에서 종말이 하나님의 초월성 속에, 또는 인간의 초월성 속에 숨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종말론을 교의학의 부록이나 하나의 항목으로서가 아니라 준거의 틀로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기독교 교리의 한 부분일 수 없다. 오히려 기독교의 선포, 기독교의 실존 그리고 전체 교회의 성격은 종말론적으로 지배되어 있다. 기독교 신학에는 하나의 현실적인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의 대상에 의하여 설정되고 그 신학에 의하여 인류와 인간의 사고에 주어지는 것, 곧 미래의 문제이다. … 여기서의 하나님은 세계 안, 혹은 세계 밖의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론적 특성을 지닌 희망의 하나님”(Der Gott der Hoffnung als Seinsbeschaffenheit, E. Bloch)이며 … 따라서 인간이 소유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적극적으로 희망하면서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  종말은 마지막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희망의 신학, 12).

몰트만은 종말론을 신학의 마지막이 아니라 그 시작으로 설정한다. 이러한 미래의 지평은 그가 여러 번 지적하고 있듯이 에른스트 블로흐 철학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블로흐는 “실재의 기원은 시작에 있지 않고 그 마지막에 있다.”(희망의 원리, 1959, 1628), 또는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1404)고 말했는데, 이는 곧 “전체성 안에 있는 희망”을 추구한 것이다. 블로흐의 이런 견해에 기대서 몰트만은 종말론적 희망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 결국 몰트만에게 종말론적 사유는 이전에 종말론적 지평을 언급한 이들에게서 나타난 것처럼 종말의 성격이 초월되어 버린 종말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그 미래에 근거하여 오늘의 역사와 세계를 변혁하고 갱신시키고자 이 세계를 종말의 지평에 근거시키려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의 역사적 해석이라 할 수 잇다. 그에게서 종말이 미래적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단순히 ‘미래주의’와 같은 의미에서 미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말의 미래가 오늘의 역사를 이끌어가고 규정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종말을 역사적으로 해석한다는 관점에서 미래의 지평이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다 하겠다. 여기서 무엇을 역사적이라고 보는가에 대한 문제만 하더라도 매우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겠지만, 최소한 인간의 실재적인 역사 사건과 역사 경험에 근거한 이해라는 것만이라도 분명히 해야 한다. 현실이 원역사나 실존적 해석으로 말미암아 그 본래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 역사의 지평이 실종되는 위험성을 막아야 한다는 말이다. 몰트만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종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사건이며 시간이다. 이 약속과 성취 사이가 역사이며, 이 역사 안에 인간의 자유가 놓여 있다. 자유는 동시에 인간의 책임을 의미하며, 이런 면에서 인간은 자유와 책임을 갖고 그 중간시간 사이에 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인간 역사의 점진적인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이 역사와 관계없는 초월적인 사건이라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 역사는 종말의 지평에서 개혁되고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 문제를 몰트만과 다르게 해석하는 이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 Panennberg)이다. 그는 몰트만처럼 약속의 개념 위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보편사의 지평에서 역사와 계시의 관계를 제시한다. 그가 볼 때 “역사는 신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이다. Geschichte ist der umfassendste Horizont christlicher Theologie”(GsTh 1, 22). 따라서 종말은 ‘역사로서의 계시’가 온전히 발생하는 장소이다. 판넨베르크는 몰트만과 같이 역사를 종말의 빛에서 보고 있긴 하지만 역사를 계시자체로 본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종말을 역사적으로 해석한다기보다는 역사를 종말론적으로 해석한다고 보아야 한다. 즉 역사에 대한 종말론적인 해석이다.

종말을 역사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첫째, 기존의 이원론적 역사이해를 극복한다. 종말의 성서적 사유는 무엇보다도 묵시문학적 종말표상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는데(R. Bultmann, 역사와 종말, 36), 묵시문학에서 볼 수 있는 종말은 가시적인 이 세계의 대재난이며 대파국이다. 새로운 세계(에온)에 대한 기대는 초자연적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고대의 우주관 안에서 설정된 세계이해를 오늘의 사람들에게 문자적으로 전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2천 년 전과 오늘 사이에는 현실성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묵시문학이 갖고 있는 그 당시성에 묶일 것이 아니라 그것의 종말론적 세계이해, 즉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생명 세계를 선포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누구든지 종말에 대해서 언급할 자유를 갖고 있으며,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할지라도 남아 있다. 왜냐하면 아직 종말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는 말하기를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의 진리성을 결정적으로 증명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 세계와 인간의 본성과 모든 사물의 신적인 근원의 본질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Theologie und Philosophie,492). 따라서 우리가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문제를 다룰 때 그들이 종말의 시기를 단정한다는 사실만을 부각시킬 게 아니라 그들의 종말론이 갖고 있는 현실성의 상실, 즉 이원론적 사유방식에 훨씬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다는 사실에 집중해야만 한다. 이원론적 사유는 구약성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헬라적 사유 방식인데, 부분적으로는 어거스틴이나 마틴 루터의 신학을 통해서 기독교 전통 안에도 전승되어 왔다. 이런 이원론적 사유방식에서는 인간을 영과 육으로 구분하듯이 하나님 나라의 차안성과 피안성이 대칭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역사적 책임성은 소멸되고, 따라서 종말은 철저하게 몰역사적 사건으로 그 무게가 가벼워진다.
둘째, 종말의 역사적 해석은 역사주의를 극복한다. 역사진보주의와 역사결정론을 극복함으로써 종말의 지평과 미래의 개방을 획득하게 된다. 역사주의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언급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역사의 ‘인과율적발전’이라는 특징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불트만의 설명에 따르면 임마누엘 칸트의 비판철학에 의해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역사관은 철학적인 진리로서 세속화되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역사는 합리성으로 향하는, 그리고 합리적 종교로 향하는, 도덕적 신앙으로 향하는 진보이다. 그의 역사관은 피히테와 쉘링에 의해서 계승되고 수정되었으며, 특히 헤겔에 의해 절대정신이 변증법적으로 역사 안에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헤겔에 의하면 절대정신은 역사 안에서 그 목적을 갖는다. 헤겔의 역사 변증법을 스스로 가장 바르게 완성시켰다고 생각한 이는 칼 마르크스이며, 그가 비록 역사의 정신이 아니라 유물론적 입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역사의 진보와 발전이라는 생각에서는, 즉 역사철학적 사유의 전통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18세기의 계몽주의로부터 그 기초가 세워졌다고 볼 수 있는 역사진보사상은 헤겔의 관념주의나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막론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19세기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의 문턱에 다다른 오늘에도 역시 지배적인 시대정신이다. 이들에게는 역사법칙에 따라 이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며 복지사회의 건설이 바로 종말론적 희망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종말론은 이러한 낙관적인 진보사관을 지양한다. 판넨베르크와 몰트만에 의해 ‘열려진 역사의 미래’는 이와 같은 역사결정론을 부정한다. 역사는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혹은 그의 약속에 따라 움직이며, 특히 종말에서만 그 온전한 의미를 알 수 있다. 종말의 미래는 열려져 있으며 이 열려진 미래는 현재를 규정하는 능력이다. 비록 역사 상대주의 입장에 있지만 딜타이(W. Dilthey)는 역사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한 완전한 재료를 가지려면 역사의 종국을 기다려야만 한다고 말했으며(Gesammelte Schriften Ⅶ. 233), 프라이어(H. Freyer)는 “그의 종말에서부터, 즉 아직 역사화 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역사는 이루어진다.”고 언급했다. 즉 종말을 역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역사결정론에 빠지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를 신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윤리

종말은 하나님이 지배하는 그 미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종말론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즉 종말, 하나님, 계시, 혹은 ‘하나님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알트하우스(P. Althaus)가 밝히고 있듯이 기독교적 희망인 종말의 교의학적 이해는 동시에 기독교인의 윤리를 요청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기대하는 기독교인들의 경우에 그 윤리의 근거와 방향을 모색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 건강한 종말론이 살아있는지 검증하기 위해서는 종말론적 윤리가 그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역사적 종말이해를 근거로 ‘종말론적 하나님 통치인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해명해야만 한다.

1) 기독교인의 종말론적 윤리는 기본적으로 온 세계의 구원을 지향한다. 기독교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는 종말론에 근거한 기독교의 윤리는 이 세상의 역사적 구원을 지향한다는 말이다. 오늘의 교회가 구원을 말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피안적이고 내세적이며, 매우 개인적인 특성 안에서 설명되고 추구될 뿐이다. 교회는 오늘의 역사적 구원을 메시지 안에 담고 있어야 하며, 기독교인의 행동은 이러한 역사적 구원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이 구원은 온 세계의 구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온 세계의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며, 그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온 세계를 향한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이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다섯 가지 지평은 우리가 음미해볼 만하다(Der gekreuzigte Gott).
첫째는 삶의 경제적 차원으로서, 이 세상에 경제 정의를 올곧게 세워내는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가난의 악순환이 착취와 계급지배로 인해서 야기되기 때문에 사회정의는 오직 경제적 능력의 재분배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안에 놓여 있는 경제적 악순환을 보완할 수 있는 방향에서 발전되어야 한다.  
둘째는 삶의 정치적 차원으로서 권력의 악순환을 극복하는 작업이다. 정치로부터의 소외되는 현상을 우리는 독재국가에서 발견한다. 몇몇 정치 엘리트에 의해서 독점되는 정치문화는 경제적 악순환과의 연관 속에서 인간을 비인간화 한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정치적 책임감을 유지하는 일은 민주주의의 요체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한 형식에 속한다.
셋째는 삶의 문화적 차원으로서, 문화적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연대성을 말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소외가 증폭됨으로써 인간은 죠지 오웰의 작품 <1984년>에서 묘사되고 있듯이 ‘빅브라더’에 의해서 철저하게 조종받는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인간이 인종적 차이나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소외와 비인간화의 악순환은 해결될 수 없다. 엘에이 흑인 폭동, 영호남의 지역감정 같은 현상들은 인종적, 문화적 소외의 한 표본이다. 인간은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통해 인간의 연대성을 회복해야 한다. 소외로부터의 해방은 이웃과의 참된 사귐을 가져다 줄 것이며, 여기서 인간은 <전체와 부분의 변증법>을 통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넷째는 자연과의 평화관계를 회복하는 차원으로서 생태학적 평화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환경의 파괴는 인간의 모든 진보사관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삶에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자연을 인간의 소비와 생산성이라는 구도로부터 해방시키지 않는다면 결국 인간의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소외의 악순환을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의 지배 영역에 있는 자연을 인간화하는 일은 인간이 동시에 ‘자연화’ 될 때만 인간을 인간화시킬 수 있게 한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는 삶의 의미를 확보하는 차원으로서 인간 삶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 통합적으로 기울이는 노력이다. 아무리 우리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복지사회가 건설된다고 하더라도 삶의 무의미로부터 인간은 위협을 받는다. 풍요로운 삶 속에서도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할 수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이것은 무의식적인 죽음의 충동으로 진행될 수 있다. 이러한 충동에서 인간은 때로 자학적인, 혹은 가학적인 행위에 빠지게 된다. 삶의 의미를 담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앙을 필요로 한다. “신앙은 의미의 완성에 대한 희망이 된다. 그러므로 용기를 상실케 하는 사회의 상황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희망의 답변이 되며, 공포와 무감정과 도피와 죽음에 대한 흥미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 증명된다.”

2) 기독교의 종말론적 윤리는 인간의 모든 실천을 상대화한다. 비록 인간의 선행과 의(義)가 높은 윤리적 가치를 지녔다 해도 종말론적 하나님의 구원행위 앞에서 항상 불완전성을 고백해야 한다. 바르트는 “복음과 율법”에서 인간의 업적의(義)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칼빈도 마찬가지이다. 종말론적 지평에서 볼 때 이 세상의 문화와 질서는 항상 상대화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 교회는 이 세상의 질서를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왕권 앞에 노출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은 사회주의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안에도 놓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알트하우스가 말하듯이 “종말론은 그리스도교적 세계봉사를 모든 시민적 혹은 마르크스적 진보와 실제화의 신앙으로부터 구별한다.” 기독교를 국교화 한다거나 혹은 시민종교화 하는 것은 기독교의 정체성, 즉 사회와 국가를 하나님의 주권 앞에 소송해야만 하는 그 정체성의 상실이라고 몰트만도 경고하고 있다. 온전한 평화와 정의를 지향하는 자유의 나라인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고안한 가장 높은 가치를 상대화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한은 무한을 품을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질서는 종말의 질서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교회가 정치적 이념이나 경제적 이념을 합리화하는 일에 빠지게 된다면(히틀러의 이념에 대한 독일국가교회와 고백교회의 갈등을 참조할 것) 스스로 종말론적 공동체임을 포기하는 셈이다. 상대화되어야 할 질서는 정치와 경제만이 아니라 종교도 역시 포함된다. 그리스도 교회는 교회로 하여금 항상 회개하는 공동체로 남아있게 하여야 한다. 교회가 진리를 항시적으로 온전히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하며, 더구나 종교적 경건이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오해를 불식해야 한다. 교회는 구원을 베푸는 자존적(自存的) 기관이라 할 수 없으며, 교회 역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을 바라보며 자기를 낮추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은 하나님에게서(von Gott her) 오는 것이지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어떤 이 세상의 질서도 하나님의 종말론적 왕권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행위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인 존재로서 미래로부터 우리를 이끌어 가는 분이다. 이것을 우리는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변증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철저하게 역사적이며, 그러나 철저하게 역사초월적 임재를 상호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경륜적 삼위일체( ökonomische Trinität)로서의 하나님은 인간구원을 위해 역사에 자신을 계시하는 분이며, 동시에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e Trinität)로서의 하나님은 스스로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것이 성서적 전망에서 본 하나님 이해이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모든 질서를 지양하게 하며, 오직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며 동시에 세상의 질서와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종말과 역사는 기독교 신앙이 이 세계와 그 목표를 이해하는 가장 타당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즉 종말은 역사를 종말론적으로 방향 제시하며, 역사는 역사적으로 종말의 내용을 제공한다. 종말과 역사의 상호순환적 이해야말로 성서적 전통과 역사철학을 다함께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견지해야할 가장 소중한 개념이다.


4. 종말과 하나님의 영광

우리가 위에서 기독교 신학 역사에 나타난 종말의 유형을 살피고, 종말과 역사의 관계를 검토한 다음에 그것의 실천이라 할 종말론적 윤리에 대해서 몇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이런 논의는 결국 다시 창조의 문제로 귀결된다. 종말론은 곧 창조론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종말은 곧 창조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과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어떤 종말을 맞아서, 어떻게 새롭게 시작할 것인가? 성서 기자들과 전혀 다른 세계관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복잡하고 심각하게 다가온다. 우선 몰트만의 문제제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성서의 문헌 전통들을 강한 인간적 원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두 가지 창조 보도(창 1-3장)는 인간의 창조를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인간을 중심 자리에 세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성적 인간이 생명의 진화에서 매우 늦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성서의 문헌 전통들은 수백 억년에 달하는 공룡의 역사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다. 다른 한편 성서의 종말론의 모든 상들을, 이 세계의 마지막은 인간의 마지막과 함께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대 안에 오든지, 아니면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은 다음에, 아니면 언제든지 하나님이 원하는 때에 올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기독교의 신앙고백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올 것이다. 다시 말하여 다시 오실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인류 전체는 사멸할 수 있으며, ‘먼 미래의 우주’(far-future Universe)는 인간 없는 -어쨌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인간 없는- 우주일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몰트만, 과학과 지혜, 115).
  
과연 인간 이후에도 지구와 우주의 역사는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에 종말이 올 것인가?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와 역사는 언젠가 끝나는가, 아니면 영원히 이렇게 계속될 것인가? 오늘 우리의 일상적 경험으로만 생각하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다. 비록 50억년 후에 태양의 수명이 다 하면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라고 불리는 이 작은 혹성도 일찌감치 끝장이 나겠지만, 그 50억년이라는 시간이 우리 한 인간의 인생 시간에 비하면 거의 무한에 가깝기 때문에 종말은 우리의 체감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도 있다. 그 태양이 내일도 다시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느낌일 뿐이지 변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은 아니다. 오히려 내일 태양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개연성이 훨씬 높다. 현재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만 있으며, 역으로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태양은 언젠가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50억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사라진다. 그것으로 우리의 모든 존재 근거도 끝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우선 인간은 태양의 수명이 끝나기 이전에 자기 종족을 연장해나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요즘과 같이 자연과학의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를 생각한다면 1억 년쯤 후에는 우리 후손들이 우주 어느 곳인가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혹성을 발견해서 이주할 수 있으리라고 추정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이 TV화면으로 지구가 폭발하는 마지막 순간을 감상하다가, 그 별의 수명이 다하면 또 다시 다른 별을 찾는 방식으로 인간 종족이 영원하게 생존해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구와 비슷한 다른 별을 발견하기 전에, 또는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기술이 발견되기 전에 지구와 그 생명체가 소멸될 수 있는 가능성은 너무나 많다. 지구에 다시 빙하기가 찾아온다든지, 혜성과의 충돌이라든지, 심지어는 핵전쟁 같은 방식으로도 지구와 인간의 문명은 아주 간단하게 해체된다. 어디 그것만이겠는가? 지구 온난화의 가속화, 악성 바이러스의 이상증식, 지구의 사막화, 연료 에너지의 고갈, 공기 구성비율의 파괴 등등. 이런 문제들은 사전에 예방이 가능한 것도 있긴 하지만 우리가 전혀 손을 쓰지 못할 것도 많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지구와 우주의 관계라는 것이 어느 순간 까지는 정상적인 것처럼 유지되다가도 그 순간을 넘어서기만 하면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난다는 점을 유의해야만 한다. 물이 99도이면 여전히 그대로 물이지만 100도가 되면 수증기가 되는 것처럼 미세한 차이에 의해서 우주와 지구의 생태적 균형이 유지되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한다는 말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이 그저 우연하게 생긴 게 아니라 어떤 인격적인 의지가 작용해서 현상으로 드러났다고 본다. 그 창조의 순간으로부터 이 세계가 지금까지 지내왔으며, 종말 때까지만 존재하게 된다. 이런 기독교적 종말론에 의하면 이 세계는 늘 잠정적이고 무상하지 결코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영원하고 궁극적인 세계는 이 세계가 끝나고 다시 새롭게 시작된다. 역사의 종말은 곧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이를 가리켜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른다. 그 세계는 오늘의 이 세계와 어떻게 다른가? 이 역사가 단절되고 전혀 다른 세계가 시작되는가, 아니면 이 역사와 연속적인 관계를 맺는가?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인식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단지 오늘 우리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것뿐인데, 이것이 끝나고 새롭게 시작되는 세계를 우리가 인식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사과 맛, 아카시아 꽃향기, 사회제도 같은 것으로 구성된 이 세계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세계를 생각해내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성서는 이 세상의 이런 생명의 차원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생명의 차원을 가리켜서 부활이라고 일컫고 있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잠시 있다가 없어질 이런 생명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그런 궁극적 생명의 세계를, 즉 사랑 자체인 하나님과 늘 함께 있는 그런 세계를 말한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숙명처럼 안고 있는 죽음과 파멸의 그림자를 보긴 하지만 그것과 전혀 다른 생명과 사랑의 세계를 확연하게는 보지는 못한다. 바울의 고백처럼 지금 우리는 여전히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며, 그러나 희망하며 산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계와 역사를 절대화해서도 안 되지만 동시에 종말을 주술화해서도 안 된다. 역사와 종말의 변증적 역동성은 그 무엇보다도 역사적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 의해서 해석되고 확보될 수 있는데, 이것의 보편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앞으로 훨씬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재림으로 이 모든 것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드러날 것이다. 그때가 곧 하나님의 영광이 실현되는 종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대림절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다. 마라나 타!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 조직신학 20장. 종말과 역사 2005-11-23 9251
80 조직신학 19장 성서에 대해 [4] 2005-11-16 7765
79 조직신학 18장: 진아(眞我)를 찾아서 (11월10일) [3] 2005-11-06 7100
78 조직신학 17장: 교회란 무엇인가? [5] 2005-10-19 7887
77 조직신학 16장: 성령에 대해 2005-10-12 7306
76 조직신학 15장: 기독교 영성 [3] 2005-10-03 6222
75 조직신학 14장: 신앙론 [2] 2005-09-28 6350
74 조직신학 13장: 칭의와 성화 [7] 2005-09-22 8954
73 조직신학 12장: 은총론 2005-09-14 5857
72 조직신학 11장: 죄에 대해 [1] 2005-09-04 8102
71 조직신학 조직신학(2) 강의안내 2005-08-31 6711
70 조직신학 10장: 인간에 대한 물음 2005-05-25 6159
69 여성신학 12장: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에 관한 신학적 고찰 2005-05-23 5864
68 여성신학 11장 바울의 동성애 비난에 대해서 [4] 2005-05-23 7978
67 조직신학 9장: 하나님과 창조 [2] 2005-05-18 6680
66 여성신학 10장. 여성은 베일을 써야하는가? 2005-05-17 4508
65 조직신학 8장: 삼위일체에 관해서 [3] 2005-04-27 6894
64 여성신학 9장: 인간은 왜 남성과 여성인가? 2005-04-25 4274
63 조직신학 7장: 유신론과 무신론 2005-04-20 5571
62 여성신학 8장: 여성신학과 기독교 인간론 2005-04-19 5031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