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5장 카스트 관습에 대한 기독교 선교단체의 태도

 

카스트 실천과 카스트에 기반을 둔 사회 계층은 인도의 독특한 현상이다. 이 카스트는 브라만, 크샤트리야, 바이샤와 수드라 등 넷으로 알려져있다. 사회학자들은 약 3천개의 하부 카스트가 있다고 추정한다. 카스트 체제하에 있지 않는 사람들은 카스트 외부인으로 취급되는데 근대에 와서 이 그룹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웠다. 억압된 계층, 지정된 카스트, 하리잔(신의 아들), 아디 드라비다르, 달리뜨 등등이 그 예다.

 

인도 카스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몇몇은 이것이 갖고 있는 직업에 기반을 두고 발전되었다고 한다. 다른 이들은 종족과 피부색깔에 따라 카스트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은 의견은 가장 정확한 힌두 체계는 힌두 경전, 정확히 말하면 브라만의 우수성과 탁월함을 강조한 리그베다와 마누가 그의 법전에 정의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푸루샤이론은 고대 인도를 네 개의 카스트로 인류를 분류하고 있다.

 

기독교는 이런 상황하의 인도로 들어왔다. 그래서 반드시 직면해야만 했다. 이 장은 교회와 선교사 협의회 또는 선교회들이 어떻게 카스트 관습을 다루어 왔는가 역사적인 관점에서 다룰 것이다.

 

카스트 구분을 그들 가운데 받아들이고 실천한 말라바르 시리안 크리스천들로부터 시작하자. 성 도마는 상위 카스트만 개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라바르에서 성 도마에 의해 개종되었다고 선언한 몇몇 상위 카스트의 가족들은 빠까로마땀, 산까라뿌리, 깔리까우, 꼬이깜, 마데이뿔, 무또달, 네둠빨리, 빠나깜마땀, 꼬타깔리 등이다. 성 도마에 의해 지명을 받은 초기 사역자들 역시 상위 카스트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 서기 4세기와 9세기 동안에 도마의 리더쉽 아래로 이민온 두 시리안 그룹인 카나와 마르완 사브리쇼에게 지역 통치자는 그들이 상위 카스트임을 증명하는 동판을 하사했다. 이에 기초하여 그들은 통치자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현존하는 말라바르 시리안 크리스천들은 노스디스트(바다꿈바가르)와 사우디스트(테꿈바가르)인데 이들은 자신들에 유지되어온 상위 카스트의 구별을 보여준다. 그들은 다른 종족과 결혼을 하지 않는다. 시리안 이민 그룹에게 부여된 특권 때문에 그들은 하위 카스트 사람들을 크리스천으로 개종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역 통치자의 호위대로 근무한다. 무역에 종사할 뿐만 아니라 지역 왕의 궁전에 고문으로나 그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한다.

 

로마 가톨릭의 경우를 보자.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1542-1552 인도지역 거주)는 무꾸바르와 코로만델 해안의 진주 조개잡이 같은 하위 카스트의 개종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상위 카스트의 개종이 어려움을 발견했다. 그 결과 로마 가톨릭 크리스천은 파랑기스(외국인)’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는데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상위 카스트들에게 하위 카스트 종교라고 취급을 받았다. 그것은 파랑기 마르가라고 알려졌다. ‘파랑기란 말이 특별히 포르투갈인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그것은 어떤 암축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육식, 음주, 안일한 삶, 거만한 사람 등을 암시했다. 그같은 사람과 사회적인 교제를 갖는다는 것은 사려깊지 못하고 불쾌한 일로 여겨졌다.

그같은 정황속에서 이태리 예수회 수사인 로버트 드 노빌리가 왔다. 1606년 마두라이에 도착한 그는 그같은 상위 카스트들의 의견을 바꾸기를 원했고 기독교를 토착화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아마 그는 중국에 있는 다른 예수회 수사인 중국 공자 형태를 사용한 마태오 리치(Fr. Matteo Ricci)가 적용한 방법에 동기를 부여받았을 것이다.(리치는 중국에서 1583-1610간 살았다.) 힌두와 크리스천 카스트 사이에 현격한 차가 있음을 깨닫고 방법의 변화가 필요함을 확신했다. 그는 자신을 인도화 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태리 귀족계급에서 왔으므로 그 자신은 크샤트리야와 동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산야시-구루라고 불려질 수 있음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삶의 형태를 응용하기 위하여 그의 상관에게 허락을 구했다. 허가가 되자 그는 브라만 요리사를 고용하고 인도인 삶의 형태로 살기 시작했다.

 

160711월에 그는 성직자들이 입는 검은 평상복 대신에 인도 산야시들이 사용하는 까비의복을 입고 가죽신 대신에 나무 샌달을 신도록 허락되었다. 그의 새로운 방법으로 마루라이 선교회의 더 오래된 회원인 페르난데즈(Fr. Fernandez)과 떨어져야만 했다. 그는 마두라이의 다른 부분에 얼마의 땅을 사고 멋트를 세웠다. 그는 전형적인 인도 고행자의 삶을 살았다. 밥과 채소, 과일과 우유를 먹고 마시며 하루 한 끼를 먹고 은둔자의 삶을 살았다. 텔루구 브라만 제사장인 시바다르마(Sivadarma)의 도움으로 산스끄리트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브라만 만이 베다를 공부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더라도 그는 시바다르마를 설득하여 그에게 베다 경전의 얼마를 가르쳐 주도록 했고 그것을 문서의 형태로 만들었다. 노빌리는 이것이 브라만들과 대화하기에 매우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이 새로운 방법은 지역 상위 카스트 젊은이들에게 매혹적이었고 그 결과는 개종으로 나타났다. 그 개종은 브라만을 포함한 몇몇 카스트들에서 일어났다. 개종이 라틴 규례에 따라 삼위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으나 그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이상 카스트를 버리거나 옷이나 음식, 생활양식을 바꾸도록 요구되지 않았고 파라바 회중에 참여하도록 요구되지 않았다.’ 그들은 성사를 걸치고 쿠드미라는 머릿술을 갖도록 허용되었다. 의식 목욕과 몇몇 다른 의식 절차를 거행하는 동안 크리스천 기도는 힌두 만뜨라로 대체되었다. 노빌리는 카스트를 유럽의 계급과 신분의 구분과 동등한 사회 제도와 관습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기독교를 받아들일때 카스트나 삶의 기반을 떠날 필요가 없다고 믿고 공개적으로 가르쳤다. 그의 방법은 적응 이론(Accomodation Theory)"라고 알려졌다.

 

노블리의 방법은 포르투갈 로마 가톨릭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에게서도 반발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 논쟁은 지속되었다. 그 결과 조지 15세 교황은 미워하는 논쟁의 대상이 된 로버트 드 노빌리의 선교 방법를 연구하기 위하여 아르마그의 대주교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와 리스본 심문을 지명하였다. 1623131일 짧은 칙서인 ‘Romanaee Sedis Antistites'에서 노빌리의 손을 들어주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브라만과 개종한 다른 이들은 고귀함, 사회적 신분과 기도생활을 상징하는 성사(聖絲)를 두르고, 다양한 카스트와 구별되도록 하는 머릿술등의 관습을 따르도록 허용되었다. 나아가 몸의 장식인 샌달 착용이 허용되었고 건강과 청결을 위한 목욕도 허용되었다.‘ 상기 짧은 칙서는 미신을 제거하기 위하여 힌두 기도와 만뜨라의 사용을 금하였다. 이것은 ’3겹으로 만들어진 성사는 우상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삼위일체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1623년 드 노빌리는 그의 활동영역을 살렘, 띠루치라빨리와 모라만갈람으로 확장했다. 이 기간동안 수드라 카스트와 아디 드라비다로부터 더 많은 개종자가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을 돌보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얼마동안 선교사들은 낮에는 상위 카스트, 밤에는 하위 카스트들을 섬기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이것은 불만족 스러웠다. 그래서 하위 카스트들을 섬기기 위해 판다라스와미라 불리는 특별한 선교사들을 임명하도록 결정했다. 상위 카스트 개종자들을 섬기는 선교사들은 브라만 산야시라 알려졌다.

 

드 노빌리 후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드 노빌리의 방법을 예수 위원회’(the Society of Jesus)1773년 교황 클레멘트 14세에게 압력을 받을 때까지 따랐다. 그러나 판다라스와미와 비교해 볼때 브라만 산야시는 숫적으로 얼마되지 않았다. 상위 카스트 개종자 또한 얼마되지 않았다. 대부분 개종자가 수드라 카스트와 억압받는 계급에서 나왔다. 그래서 숫적인 측면에서 드 노빌리의 순응의 방법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드 노빌리와 마두라이 미션의 그의 예수회 후계자들이 힌두이즘과 너무 가까이 기독교를 동화시켰다고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는 믿음의 본질에 있어 타협하지 않았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는 껍질을 바꾸었지 알맹이를 바꾼 것이 아니다. 그의 시대에 기독교 인도화를 위한 용감한 시도는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드 노빌리의 방법은 크리스천들을 카스트에 기초하여 나누었고 이 영향은 꽤 오래갔다. 초기에는 예배 장소의 분리가 없었으나 그 건물은 카스트와 아웃 카스트들이 분리된 부분을 지키도록 정리되었다.’ 그러나 후에 다른 카스트 그룹울 위해 분리된 예배가 시행되었다. 분리된 장지등도 있었다. 몇몇 교회 건물에서는 카스트에 기초하여 회중들을 분리하도록 내부에 분리벽을 세웠다.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는 상위 카스트에게 먼저 분배되고 그런 다음 다른 이의 차례가 되었다. 이 관례는 거의 20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다.

 

프로테스탄트

 

덴마크 왕 프레드릭 4세의 시작으로 인도에 첫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그룹이 발을 내딛게 되었다. 첫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인 바돌로매 지에젠발그와 헨리 플루에스차우는 루터 교회 출신이었고 독일 경건주의의 산물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로 개종한 몇 사람은 그들 사이에 카스트 구별을 한 로마 교회로부터 왔다. 지에젠발그는 그의 개종자들 사이에 카스트 구분을 없애기 위한 어떤 분명한 결정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 그의 개척하는 선교사 사역에서 많은 문제들을 직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새 예루살렘 교회라 명명한 트라쿠에르바에 세워진 교회 건물은 십자가 형이었다. 이 교회에 수드라 남성이 신랑(身廊) 한 측에 앉았고 다른 사람은 다른 측에 앉았다. 그와 같이 수드라 여성도 수랑(袖廊)에 앉고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측에 앉았다. 성찬식에 모든 수드라 남녀가 처음 빵을 떼고 다른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 비록 선교사들이 때가 되면 포르투갈인의 신분으로 만들기 위해 아디 드라비다 아이들에게 서양옷을 입히며 포르투갈 아이들보다 더 많이 가르쳤으나 비슷한 구분이 학교에서도 생겨났다. 1720트란쿠에바르 선교회의 수장이었던 슐츠(Schultze)는 선교회내에 카스트 구분을 지키는 정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완곡하게 말하지 않고 이것을 공격했다. 그는 이것을 명령을 통해 그치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반대와 불협화음을 낳았다. 인도 크리스천 개종자들 몇몇은 트란쿠에바르 선교회를 떠나 로마 교회에 가겠다고 위협했다. 그 결과 덴마크-할레 선교회는 슐츠를 불러들여야 했다. 그가 떠난후 왈터(Walther)와 프레시에르(Pressier)1725년 선교사로서 인도에 와서 옛날 관습을 회복했다.

 

트란쿠에바르 선교회에 덴마크-할레 선교사로서 인도에 온 츠와르츠(C.F. Schwartz)1750-1762년 동안 이곳에서 사역을 했다. 후에 그는 영국 선교회에 그들의 선교사가 되기 위해 S.P.C.K에 영입되었다. 그는 인도 크리스천사이에 카스트 구분의 관습을 없애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은 개종자의 엄격한 교육을 거침으로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상위 카스트 남녀는 교회의 한 측면에 앉았고 하위 카스트는 다른 쪽에 앉았다. 그는 상위 카스트들에게 존중을 받도록 하기 위해 하위 카스트 개종자에게 깨끗한 옷을 입게 하였다. 그의 활동 기간동안 지역 목사와 전도사는 일반적으로 상위 카스트의 하나에 속했다. 츠와르츠는 그의 전도사 중 하나인 가브리엘이라 이름하는 전도사는 하위 카스트 출신이었으나 상위 카스트 사라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것은 가브리엘이 깨끗한 용모로 옷을 입는데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 같은 교류는 시골의 내부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츠와르츠는 말한다. 그는 그의 개종자 사이에 카스트 구분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고 때가 되면 전적으로 잊혀질 것이라고 소망했다.

 

윌리암 캐리, 조수아 마르슈만과 윌리암 와드가 이끄는 세람포 침례 선교회는 그들의 개종자 사이에 카스트 구분을 허용하지 않았다. 선교회 시작부터 그들은 이 문제를 매우 관심있게 다루었는데 그것은 힌두사회에 있어 카스트 구분은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철저히 종교의 문제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803년 브라만 개종자인 크리슈나 프라사드는 수드라인 크리슈나 팔의 둘째 딸 오눈다와 결혼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할 만한 일이었는데 그것은 카스트 장벽은 결혼에 있어 가장 엄격했기 때문이다. 세람포 선교사들은 그 결혼식에 참여하였고 다음날 결혼한 신랑 신부와 친구들은 크리슈나 팔의 집에서 같은 식탁에서 결혼 음식을 먹었다. 그 같은 정책은 북인도 선교회 사이의 일반적인 기준이 되었다.

 

인도내 영국 성공회뿐만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한 협의회(S.P.G: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는 다양한 관점을 지녔다. 레지날드 헤버(Reginald Heber)감독은 1826526일 자 그의 편지에서 남인도와 스리랑카 크리스천에 의해 보존된 카스트를 포함한 많은 고대 인도 관행의 보존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오래된 학교 선교사들은 이 모든 것을 단순히 시민 계보의 문제이자 세계적인 구분으로 보고 이것을 감내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개종자들이 좀더 계몽되면 그같은 구분은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 영향은 추종되지 않았다. 한편 독일과 영국의 젊은 선교사들 일부는 열렬히 카스트를 대적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학교 경영과 회중의 인도에 있어 가능한 한 그것을 방해하도록 노력했다. 인도 성공회 관구는 영국 의회에 의해 1813년 동인도 회사의 칙허의 갱신의 결과로 생겨났다. 제니날드 헤버 주교는 4번째 주교였고 그의 활동무대는 캘커타였다. 그는 1827년 방문때 띠루치라빨리에서 익사했다. 위의 언급한 성명서에서 복음전파 협의회는 인도 개종자 사이에 카스트 관습을 없애려고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책은 인도 크리스천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첸나이 회중들은 그들의 교회에 수드라 어린이들을 아디-드라비다 아이들과 함께 앉도록 선교사가 시켰을 때 흥분했다. 그 문제는 남인도 선교사들에게 상담한 헤베르 주교에게 상정되었고 다수의 선교사들이 카스트 편견에 대해 직접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선교사의 책임을 물어 첸나이에서 탄자브르로 전근 시켰다.

 

카스트 준수의 질문은 복음 전파 협의회의 논쟁의 정점이었다. 이것은 1828년 다니엘 윌슨 주교가 회람한 질문서에 대한 답으로 트란자브르에 있는 선교사들의 답변에서 보여진다. 그는 헤베르 주교를 승계했다. 탄야브르 선교사들은 인도 크리스천은 여전히 카스트 구별을 준수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논쟁의 문제가 되지 않고 그들은 이것을 사려깊게 대처했다. 다니엘 윌슨 주교는 인도 크리스천사이의 카스트 구별의 유지에 대하여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3375일 히람에서 다니엘 윌슨 주교는 캘터타 교구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인도 크리스천사이의 카스트 구별을 폐지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카스트의 구별은 의도적으로 즉시,최종적으로 버려져야 한다. 복음은 이교도 관습이 강요하는 카스트와 같은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다.”첸나이에 미션 처치에 견신정사와 성찬식을 거행한 후 그는 1835127일 일기에 카스트와 계급의 구별은 무시한다고 썼다.

 

그러나 다니엘 윌슨 주교의 엄격한 태도는 반발을 가져왔다. 첸나이의 상위 카스트 인도 크리스천의 몇몇은 다니엘 윌슨 주교의 입장에 굴복하지 않았고 첸나이에 있는 레입지크 복음 루터교회 선교회(L.E.L.M.)의 회중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덴마크-할레 선교회로부터 온 트란쿠에바르 선교회의 원조를 받는 이 루터교회 선교회는 카스트 준수를 받아들이기로 한 정책을 따랐다. 그래서 이 문제의 종결을 원하는 복음 전파 협의 선교회의 사람들은 상기 루터교회 선교회에 참여하고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이슈가 되었고 두 선교회 사이에 의견을 교환했다.

 

띠루넬벨리의 빨라이암코띠의 교회 선교사 협의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CMS)의 선교사 레이누스(C.T.E. Rhenius)는 그의 신학교 학생들에게 카스트 구별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그의 지시를 어겼을때 그는 잠시 동안 신학교 문을 닫고 그 학생이 그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에 동조 했을 때 다시 문을 열었다. 이것이 1825년 일이었다.

 

카나라의 바셀 선교회는 선교회의 개종자 사이에 카스트 구별을 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1834년부터 이것은 인도 개종자들이 자신들의 기원과는 아주 멀리 떨어지도록 정착되었다. 그들의 직업과 교육 기관에서 서로 섞여서 살아가는 정책을 따랐다.

 

1858419일에서 55일간에 오따카문드에서 열린 첫 남인도 지역 선교사 컨퍼런스에서 자국어를 사용한 복음 전파, 토착 기관, 여성 교육, 교육적인 정책과 카스트와 같은 문제들을 받아들이는 많은 결정이 있었다. 카스트에 관한 것은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 “이론과 실천에 있어 힌두 카스트에 관하여 이 수양회는 단순한 사회 질서의 구분이 아니라 강조된 종교적 기관으로 보고 이것의 진정한 성격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분명코 잔악무도한 인도의 악이며 그 힘과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고 사회 구석구석에 넘쳐나며 그 법과 규례는 전제 군주적이며 잔인하고 매우 엄격하며 정확을 요구하며 사소한 거역조차에도 현재의 비난과 미래의 처벌은 너무 무시무시하고 그 자체의 명시에 있어서는 매우 변화무쌍하고 융통성이 많아 수 천년동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앞에 무력하게 굴복한 것이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것의 억압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만한 육신이 없다.”

 

2. 모든 적절한 기회를 통해, 불합리하고 거짓됨을 드러내기 위해, 카스트의 사악함을 비난함으로서, 그들의 일시적인 상황의 개선을 위한 모든 노력에 대한 저해요인 뿐만 아니라 영혼을 파괴시키는 영향 및 주변의 모든 계층에게 준 거대한 아픔을 보여주기 위하여 고통을 당할 각오를 하는 것이 모든 선교사들의 의무다.

 

3. 구원자의 반열에 참여하고 기독교의 직업을 갖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 그것의 모든 드러난 표현으로 솔직하고 모호하지 않는 폐기를 요구하는 것이 또한 모든 선교사들의 의무다..

 

1879년 방갈로어에서 열린 남인도와 실론 선교사 수양회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를 했다.

“1. 힌두 카스트에 대하여 이 수양회는 이론과 실제에 있어 이것이 단순한 사회적 질서의 구분이아니라 강력한 종교적 기관으로 간주한다.

2. 이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인간 본성의 하나됨과 모든 진정한 크리스천들의 형제애에 관한 크리스천 교리에 정변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오기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 의해 그들의 모든 외부로 드러난 표현으로 카스트의 폐기를 요구하는 것이 모든 선교사들과 교회들의 의무다.”

 

190012일에서 5일사이에 마드라스(첸나이)에서 열린 남인도 선교사 수양회에서는 남인도 크리스천 교회내 카스트의 악함을 극복해야 하므로 카스트의 표현은 전적으로 금지시켜야 한다. 우리는 카스트 편견의 우둔함과 사악함을 선교사 협의회와 우리 선교 교회들에게 확신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결정했다.

 

1858년에서 1902년 사이에 열린 거의 모든 남인도 선교사 수양회에서 인도 크리스천에 의해 카스트 준수에 의문이 던져진 사실은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이 그 폐지를 바랐지만 인도 크리스천 공동체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것을 증명한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기관을 통하여 카스트 구별을 지키는 것의 허망함을 교육하려고 노력했다. 선교사 교육기관 소속 학생들은 그들의 카스트에 관계없이 함께 앉아 수업을 했다. 선교사 병원과 건강 진료소에 온 환자들은 동일한 대우를 받았고 입원환자들의 침대 또한 구별이 없었다. 기술학교와 직업학교의 경우도 동일했다. 카스트의 실천과 편견의 준수를 전멸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공업화, 서구형 교육도 카스트의 구별을 줄이는데 한 몫을 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독립 인도의 교회 내외부에 카스트 감정의 팽배를 본다. 교회내 선거에 있어서도 카스트 기반으로 경쟁한다. 종파주의와 대지의 아들이론 또한 꾸준히 자라왔다. 장차 카스트에 연관된 차별이 뿌리 뽑아지고 사회 정의, 사랑과 인류에 대한 존경이 기반된 평등사회가 존재할 그날을 소망해보자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70 인도의 길 델리의 사람들-서론 및 바띠아편 file [2] 2019-07-11 763
69 인도기독교사 크리스천과 민족운동 [1] 2019-06-03 402
68 인도기독교사 여성 및 아동교육의 발전과 기독교 선교단체 2019-06-03 256
» 인도기독교사 카스트 관습에 대한 기독교 선교단체의 태도 2019-06-03 441
66 인도기독교사 의료사업과 기독교 선교단체 2019-06-03 231
65 인도의 길 인도 수상 모디 청렴의 비결 file [2] 2018-10-13 695
64 인도의 길 인도인의 다양성 [2] 2017-03-14 877
63 인도의 길 우파니샤드와 붓다 [7] 2016-12-27 1976
62 인도의 길 바가바드 기따의 아들 간디 file [12] 2016-06-23 2120
61 인도의 길 인도에서 듣는 개성공단 중단소식 [6] 2016-02-16 1215
60 스탠리 존스 제8장 간디의 금식들 file [2] 2016-02-02 1727
59 인도의 길 모디가 이끌어갈 인도의 미래 file [2] 2016-01-08 1495
58 인도가 바라는 선교사 9장 반대와 핍박에 직면하기 [2] 2015-08-30 1048
57 인도가 바라는 선교사 8장 지속적인 헌신 - 2 [2] 2015-08-04 1047
56 인도가 바라는 선교사 7장 지속적인 헌신-1 [2] 2015-07-30 953
55 인도가 바라는 선교사 6장 모범적인 가정생활 [2] 2015-07-17 1309
54 인도가 바라는 선교사 5장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2 [2] 2015-07-12 1147
53 인도가 바라는 선교사 4장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1 2014-03-22 2606
52 인도가 바라는 선교사 3장 영성 훈련 2014-03-08 2330
51 인도가 바라는 선교사 2장 전적인 헌신 [2] 2014-02-27 2180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