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3.16.토


퇴원 후

경과를 보고 치료를 받느라 며칠을

성남의 시어머님이 사시는 아파트에서 지냈다.

시장을 봐서 남편의 식사를 챙기는 일과,

함께 운동을 위해 산책을 나가는 일이 하루 일과의 전부가 됬다.

남편이 아프고부터는 서로 밀착될 수 밖에 없는 시간이다.

결혼한 이후 첨이다. 이렇게  밀도있게 붙어 지내는 것도,

남편의 상태를 민감하게 주시한 적도,

음식을 이렇게 신경을 써서 만들어 먹이는 것도.

내게 주어진 축복의 시간이다. 다행이 잘 먹어서 고맙다.


춘삼월의 봄바람이 살랑거린다.

아파트 뒤의 공원을 걸으면서 남편이 뒤끝을 흐리며 말한다.

"사는 게 참 별 게 아닌데...."

 비로소 뒤를 돌아 보게 되는가보다.


 남편을 만나서 삼십여년을 살았다.

말 그대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패기 만만한 청년시절과,

잘 나가던 중년을 지나 노년의 초입에 들어서기까지.

대개의 부부들이 그렇듯이

때때로 서로에게 실망하고, 고마워 하면서..

순간이긴 하지만 잡아먹을 듯 미워하기도, 또 가장 의지하면서...

서로에게 공기같은 대상으로 말이다.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크고 작은 굴곡이 있었지만

이렇게 남편이 허약해 보인 적이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너지 넘치고 건강했는데.. 그 때와는 달리 약한 모습이다.

곧 부서질 것만 같은 모습에 연민이 인다.

이상하다.

 가장 약한 모습일 때 왜 가장 큰 연민을 갖게 되는 걸까. 참 묘한 역설이다.

어디 연민이 이는 게 남편 뿐이랴...

세상의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따지고보면 다 슬프다.


공원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니  곳곳에 고층 아파트들이 늘어섰다.

산등성이에는 아직도 밀집된 주택들... 옛날의 잔재를 느끼게 해주는 그 주택들은

 내 속 깊은 곳 어딘가의 애달픈 정서를 건드린다.

내가 말했다.

" 내가 어릴 때는 말이야...

학교 앞 먼지나는 길가엔 뽁기 장수들이 있었어.

연탄불을 피워놓고 설탕에 소다를 넣어 녹여주는...달고나도 있었지.

아이들이 얼마나 사 먹었을까...하루종일 팔아도 하루치 양식이나 됬을런지..."

남편이 듣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혼자 독백처럼 이어갔다.


"학교 소풍 장소가 늘 남한산성이었다.

갈 곳도 없고 없고... 얼마나 열악했었는데..

이런 봄날이면, 갈 곳도 딱히 없고 돈두 없는 교회청년들은 예배 후 그냥 몰려다녔어.

봄바람처럼 이리저리.

하릴없이 공원에도 오르고..

어떨 때는 모란으로 이어지는 뚝길을 걷기도 했구..

 언니를 따라 그 청년 무리에 속해 두어번 나도 따라간 적이 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이었어."

그때 그 사람들.. 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남편이 말한다.

"나두 고등학교 때  와 본 적이 있어. 가구공장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 보러.

근데  진흙탕이고.. 와.. 정말 난감하더라.,,이런 곳도 있나 싶더라고. "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남편은 그때 와 본 성남의 생경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후 약 오십년 후,

그 성남의 소녀와  서울의 소년이 부부가 되어 다시 이 곳을 걷을  줄이야... !

그것도 한 사람은 병자가 되어 말이다. 참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2020.3.18. 수.


세번째로 꿰맨 입천정이 이제는 아물었는지 더 이상 코로 물이 나오지 않는다.

진안으로 내려왔다.

3주만에 집에 오니 뜨락에 봄이 먼저 와 있다.

앞마당 한 켠에 심은 마늘 싹이 뾰족히 올라오고 튤립도 뚫고 나왔다.  

보라가 뛰어오를 듯 반가워하고.. 마당에 나와 있던 옆집 아주머니께서 웃으며 맞아주신다.

비워놓은 집은 바깥공기보다 더 썰렁하다.

서둘러 불을 피워 공기를 덥혔다. 

"집에 오니 마음이 편하다. 그지?"

"응"

갑자기 할 게 많아진다. 

밖에는 꽃봉우리를 조롱조롱 매달고 있는 매화가지가 잘려있다.

윗집에서 전지를 하고 갔나보다. 윗집은 전주에 살면서 가끔 내려와 농사를 짓는다.

밀린 일을 하느라 이틀이 지난 다음에야 벼려진 매화가지들에 눈이 간다.

꽃망울이 달린 가지를 속아내 꽃병에 꽃았다.

언제 잘렸는지 모르지만 혹시나 물에 꽂아두면 꽃이 필까.. 싶은 마음에서.

매화가지를 꽂으면서 간절히 바래본다.

'이 가지에 꽃이 피면 남편도 깨끗히 회복될거야...'


그리고 다음날 새벽 미명에 일어나자마자 꽃병에 꽂힌 매화부터 보러갔다.

아.. 어쩜,이럴 수가..! 꽃망울 한 개가 살포시 벌어져 있질 않은가!

눈을 비비고 자세히 다시 봤다. 꽃이 벌어진 게 맞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꽃이 핀 건 좋은 징조지요?

아침에 남편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

"여보~! 저 매화가 피었다!? 며칠이나 잘려있었는데도."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당연하지! "한다.

"가지에 물기가 안 말랐으면 피는 거 몰라? "

그리고 한심하다는 듯 덧붙인다. "당신은 정말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했구나...'

당연한 거라구? 이게 어째서 당연하냐 말이다.. 며칠이나 잘려 있었는데.. 

그리고, 물기가 있건 없건 그게 중요하냐 말이다.

봄이 됬다고 마른 가지에 조롱조롱 꽃망울이 맺힌 것이,

또 잘린 가지에서 이렇게 활짝 꽃이 피는 것이 당연하다구?


내게는 마치 주님께서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봐라, 난 이런 존재야...

잘린 가지에서 꽃을 피우는 것 뿐 아니라

온 세상 만물의 모든 생명이 나로부터 나온단다...알겠니?

아침에 우리집 창가는 매화로 생기 가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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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찍은 사진.

Before를 찍어두지 못한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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