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동네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냉이를 캐오시는 길이라고 하시네요.
아..! 그러고 보니 어느새 새 봄이 왔군요.
냉이를 캐오시는 할머니로 인해,
유년의 한 봄날이 떠올려집니다.
너무 오래되서 흑백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어쩌면 꿈 같기도 한... 따사로운 봄날의 추억 하나가.
이맘 때가 되면
친구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물을 캐러 다녔습니다.
그 봄날의 들녘엔 아롱아롱 아지랭이가 피어오르고 종달새도 날아올랐지요.
나물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던 친구들과는
달리 내 눈에는 왜 그렇게 달래, 냉이가 안보이던지요.
자연히 내 나물 바구니는
친구들 것에 비해 비어있기 일쑤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등 뒤에서 살그머니 한 웅큼의 나물을 넣어주는 손길을 느꼈습니다.
빈약한 내 바구니를 몰래 채워주던 정희언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 순간
내겐 전류가 찡하게 전해졌습니다.
자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영혼이 따뜻해지는 기분입니다.
그 때 정희언니가 건네 준 건 한 웅큼의 나물이라기보다는
어떤 위로나 품이 아니었을까요.
빈 바구니 같은 내 심연을 채워줄 넉넉함 같은 것 말입니다.
공연히 분주하면서 허허로웠던 도시의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동안,
내 속 깊은 곳에서는 그런 것이 절실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기치 않게도 시골살이에서 다시
정희언니의 손길들을 경험하고 있으니 은총이 아닐 수 없지요.
갓 짜 온 귀한 참기름을 넌즈시 가져다 주시는 동네 이장님,
겨우내 묻어 둔 무우며 배추를 이고 오셔서 현관문 앞에 내려놓고
총총히 사라지시는 건너편 집 아주머니,
땅에 묻은 김장 김치를 꺼내 먹음직스런
갓김치를 가득 담아주는 집주인 아주머니,
말도 없이 쌀자루를 놓고 가셔서 어리둥절하게 만든 심집사님....
텃밭에 심어놓은 열무를 맘껏 뽑아다 먹으라던 기봉 아저씨까지...!
그 옛날의 정희언니를 다시 만나곤 합니다.
그밖에도
TV를 보러 오는 해원이의 터진 볼,
녹은 땅을 뚫고 뽀족이 올라온 마늘 싹...
봄안개에 쌓인 남덕유산 봉우리...등
인생살이 한 모퉁이를 돌다 이렇게 만나는 정희언니들로 인해
삶의 고단함이 조금씩 풀리고 허허롭던 존재의 밑바닥에 뿌리가 내려지고 있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겠지요.
시골 소녀로 자라서 도시 청장년으로 살다가
다시 나이 들어서 시골에 자리를 잡으셨으니
하루하루가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겠군요.
한반도의 봄은 마술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