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당 야트마한 언덕에 자리한 우리집 내 서재 지금 온도는 17도다. 바깥은 4도다.
이런 정도면 내낼만하다. 장갑을 끼고 자판을 두드린다.
바르트의 글을 다시 읽다보니 예수 탄생의 그 순간으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하다.
영혼의 평화와 각성, 용기와 기쁨이 밀려온다. 몇 단락을 여기 초벌 번역으로 올린다.
다비안들에게도 같은 성탄의 기쁨이 경험되기를 바라면서...
성탄절의 기적
12월24일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눅 2:11).
<너희에게> 오늘 구주가 나셨다고 주님의 천사가 말합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높이려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자신과 하나 되게 하시려고 자신을 포기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 소유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여러분과 우리를 위해서 이런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성탄 이야기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와 더불어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다르게 말한다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에 관한 소식은 우리가 동화책을 읽고 받게 되는 감동이나 느낌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천사는 저처럼 교수가 아니었습니다. 교수는 그저 구주가 사람을 위해 태어나셨다는 방식으로 말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람을 위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 일이 나에게 관계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만 관계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흡사 우리가 영화나 연극을 보러 가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자신은 그런 관객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는 목자들과 우리를 가리킵니다. 그의 소식은 일종의 구체적인 ‘말 건넴’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오늘 구주가 나셨습니다! 우리가 이 소식을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우리가 선하고 경건한 사람인지 아닌지, 우리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묻지 않고 ‘여러분’이라고만 말합니다. 바로 여러분을 향한 말씀입니다! 이 일은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말입니다. 보십시오. 성탄 이야기는 우리와 상관없이 일어난 게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이 이야기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들레헴에서 아기가 태어났다는 이 소식을 단지 우리가 잘 지내고 있는지 어떤지 안부를 묻는 것처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체부가 오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온 편지가 있는가 하고 묻듯이 말입니다. 편지를 받아들고 읽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어깨너머로 들여다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혼자 그 편지를 읽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사적인 용무이니까요. 그런데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일은 결코 사적인 용건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구주가 태어나셨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당신과 나를 가리키며 ‘너희에게!’라고 말합니다. 그가 가져온 소식은 아버지가 보내준 예쁜 선물을 받아든 남매들처럼 우리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여기에는 일등도 없고, 꼴등도 없습니다. 뛰어난 사람도, 뒤처진 사람도 없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실패한 사람도 상관없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분은 우리 모두의 <공동의 맏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를 그분의 이름으로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일용할 양식을 ‘나에게’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우리에게> 오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식탁인 성만찬에 참여해서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고, 하나의 잔으로 나누어 마십니다. “받아서 잡수십시오! 모두 받아 마시십시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전체 삶은 바로 거대한 성찬 예식입니다. 즉 구주와 함께 하는 친교이며, 따라서 상호 간 친밀해지는 사귐입니다. 구주와의 친교가 없는 곳에는 사람들 상호 간의 사귐도 없습니다. 사람들 상호 간의 사귐이 없는 곳에는 구주와의 친교도 없습니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한 <너희에게!>라는 호칭에 들어있습니다.
성탄절 전야
오늘! 주님의 천사는 여러분에게 <오늘!>이라고 말합니다. 구주가 태어난 때가 바로 오늘이라는 뜻입니다! 한밤중에 새로운 날이 열렸습니다. 주님이 바로 이날의 해(日)였으며, 모든 날의 해이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 새로운 날은 성탄절만이 아닙니다. 이날은 우리의 메일입니다.
<오늘>은 단지 <그 당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옛날이야기를 들어라.”라는 게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목자들에게 말했던 것과 똑같이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날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형편과 인간관계, 일상사, 더욱이 세계사마저도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졌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지난날의 슬픔, 잘못, 그리고 두려움이 여전히 우리 옆에 있지만, 은혜로 덮였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구주가 태어나시어 모든 것이 더는 우리에게 상처를 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되었으며, 정신을 차리고, 새롭게 시도하고 확신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우리 스스로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천사가 우리에게 말합니다. 구주가 태어났기 때문에 새로운 오늘이 열린 것입니다.
<오늘>, 이 오늘은 물론 <내일>을 뜻하는 게 아니지만, 분명히 <내일>이기도 합니다. 2천 년 전 그때 태어난 분은 더는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영원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내일을 시샘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단지 오늘만을 위한 게 아니라 내일, 그 내일을 위해서...”라고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외치면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바젤시(市)에서 활동하는 입찰자들을 반대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더 많은 선동을!>이라는 구호는 분명히 위험한 낱말입니다. 우리가 내일도 역시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게 분명할까요? 구주는 분명히 살아계시겠지만, 우리는 어떨까요? 과연 우리가 값진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는 말을 내일도 듣고 사들이고, 그래서 쾌적하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런 문제는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바로 어제 예레미야스 고트헬프(Jeremias Gotthelf)의 글을 읽었습니다. “삶은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빛을 점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불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불꽃으로 이 세상을 태웠으며, 다시 오시어 태우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는 이런 불꽃의 시간을 <오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고트헬프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오늘, 여러분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녹슬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천사가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단어로 말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성탄절 기도
주님이신 우리의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높이시려고 낮아지셨나이다. 당신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시려고 가난해지셨나이다. 당신은 우리가 당신 옆으로 가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셨나이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케 하려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나이다. 당신은 하늘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사시려고 땅으로 내려오셨나이다. 다스리는 것만이 아니라 섬기시려고 오셨나이다. 당신은 영원한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사람으로 태어나시고, 사시고 죽으셨나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의 모든 어둠과 고통을 기억하나이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모순과 오해를 기억하나이다.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시대의 완고한 현실을, 이 세상을 위태롭게 하는 무시무시한 위험들을 기억하나이다. 우리가 늘 겪어야 하지만 어디서도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위험들을, 냉전에 몰두하는 광대들의 놀이와 상호 위협을 막아주소서. 오늘 모든 민족이 몸서리나는 이런 위험 앞에서 살아가나이다. 공공의 일에 책임이 있는 정부와 사람들에게 오늘 인류에게 필요한 새로운 지혜와 인내와 결단력을 허락해주소서. 그들이 최선을 다 기울여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유지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당신의 지혜를 허락하시어 그들이 진정으로 이 세상에 평화를 일구어 가도록!
우리는 육체가 병든 사람들과 영혼이 병든 사람들을 기억하나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난민들, 억압받는 사람들과 불법적으로 고난받는 사람들, 부모가 없거나 홀 부모 밑에 사는 어린이들을 기억하나이다. 또한, 우리는 여러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책임이 주어진 사람들을 기억하나이다. 판사, 공무원, 교사, 보육사, 책과 신문에 글을 쓰는 사람들, 양로원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 멀리 가까이에 있는 다양한 교회와 공동체에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을 기억하나이다. 우리는 성탄의 빛을 그들에게 밝혀주는, 이전보다 훨씬 더 환하게 밝혀주는, 그래서 그들과 우리를 돕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성탄 축제 1
구주! 구주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돕고, 우리를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돕는 분이며, 해방자이며 구원자이십니다. 어떤 인간도 그를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존재하실 수 있으며, 존재하시는 하나님만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는 우리가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모든 궁핍에서 우리를 해방하셨으며, 도우셨으며,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버림받을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곳에 구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주는 우리에게 값없이, 은총으로, 우리의 업적이나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훗날 우리에게 계산서가 날아오는 일 없이 구원을 주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우리는 단지 손을 펴서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구주는 그 어떤 제한이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완전히 단순하게 베푸시는 바로 그분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며, 그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이 되심으로 우리 모두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성탄절 이야기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무시하지 않는 한,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고 강요된 모든 것들과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무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들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곳에 구주가 계십니다. 우리의 크신 하나님과 구주가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우리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나와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옳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함께 듣지 않은 채, 단 한 번에 우리를 위해서 일어난 위대한 변화에 대해서 듣지 않은 채, 우리를 위해 이미 준비된 위대한 기쁨에 관해서 듣지 않은 채, 이로써 우리의 삶에 개입한 위대한 부름에 대해서 듣지 않은 채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가 우리에게 지시하신 그 길로 들어서도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파멸로, 불신앙으로, 그래서 몇몇 아름다운 성탄절의 감정 속으로 돌진해야 합니까? 아니면 우리는 지금 정신 차리고 일어서서 돌아서야 합니까? 주님의 천사는 아무도 강제적인 힘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더욱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라 할 수 있는 이 성탄절 이야기를 강제로 듣는다거나 그 이야기에 강제로 협력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이 이야기를 자유롭게 듣고, 자유롭게 협력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수많은 천군이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 중의 평화로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천사들에게 속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땅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찬양에서 이 사실을 듣고, 하나님이 이런 천사들만 보내신 게 아니라 수많은 천군이 찬양할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안다면 우리가 천사들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도 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떤 행진곡을 듣고 같은 보조를 맞추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또는 우리가 잘 아는 멜로디가 울리는 것 같지 않을까요? 그 멜로디에 따라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리고 휘파람을 불게 됩니다. 명심하십시오. 성탄절은 축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성탄절 이야기를 자유롭게 들으시고 자유롭게 협력하는 것입니다.
성탄축제 2
여관에 방이 없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여관에서 자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태어나야만 할, 실제로 태어난 아이에게 방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어줄 방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 당시 여관은 오늘 우리가 허름하다거나, 또는 조금 나은 호텔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숙소를 가리켰습니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아름다운 집은 아닙니다. 그 집은 응접실과 식당과 객실이 딸려 있겠지요. 오늘날에는 그런 여관에 큰 지하실도 딸려 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지 사람이 거처하고 휴식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장소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런 거처하기 좋은 곳에 아쉽게도 그 당시에 태어나야 할 아이를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런 손님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신분이 높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리는 있었습니다. 이렇게 차별하는 여관이라니, 유감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그곳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완전히 다른 곳에서 태어나셔야만 했습니다.
오늘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의 상황 말입니다. 물론 구주는 더는 태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역사에서 한번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그는 우리를 진지하게 대하시며 능력으로 대하십니다. 바로 그분이 구주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 종류의 여관은 어떤 상태인가요? 시청, 카지노, 혹은 대학교, 대성당 같은 것들은 당연히 이런 여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바젤시(市)에 있는 많은 개인 주택, 호화저택, 음식점과 가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른시에 있는 연방의회 건물, 또는 모스크바의 크렘린, 로마의 바티칸, 워싱턴의 백악관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렇게 큰 여관에 구주는 찾아오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왜 안 되는 거죠? 이 모든 집에는 물론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구주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사람들, 이 모든 사람을 찾아오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여관에 그를 위한 방이 없을까요? 그곳에는 훨씬 좋은, 훨씬 바쁜, 훨씬 유식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구주를 위한 방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오려고 하는 이가 누구인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구주가 바로 그들 편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그래서 구주가 그들에게 전적으로, 몹시 필요한 분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여관이 그분에게 문을 닫아건다면, 그가 우리와 함께할 수 없어서 모든 것들이, 지난날의 모든 것들이 낡아빠진 그대로 남아있다면 어쩌란 말인가요? 그가 완전히 다른 곳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가야만 한다면, 훨씬 멀리, 아마 아프리카나 아시아로 가야만 한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요? 저는 이 순간에 나의 사랑하는 일본 친구를 생각합니다. 그는 세례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25년 동안 고민한 끝에 최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 그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른 이들이, 여기서 멀리 아주 멀리 떨어진 다른 이들이 똑같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구주가 문이 닫힌 우리의 여관을 스쳐 지나가 버리고 만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요? 여기에 대해 뭐라고 할 말이 있을까요?
여관에 관한 성탄절 복음은, 그 여관에 사는 사람들을 향한 성탄절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렇습니다. 여기서 문을 “열면”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여러 종류의 여관을 생각하는 경우에 성탄절 복음은 분명히 큰 질문이 될 것입니다.
목사님. 반갑습니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신 주님을 느끼고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론 슬픔도 있지만 참기름 한 방울과 같은 주님의 은총이 인생을 맛난 것으로 만들어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기쁨과 슬픔이 굽이 치는 나의 인생일지라도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을 원망하는 마음을 원망하는 마음보다 좀 더 저에게 남겨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님을 알게 되어 기쁨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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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목사님 서재가 너무 썰렁한 거 아니예요?
지금 여기 밖은 영하 4.6도인데...
장갑을 끼고 자판을 두드릴 정도면 어떻게라도 단열을 보강하셔야 할 듯.
사모님은 추위를 안타시는지요?
저는 22,3도여도 불을 지펴야 삽니다. 추위에 취약해서요.
목사님 실내 온도를 들으니 저까지 춥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