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과 예수와의 관계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현상은 예수의 부활을 왜 제자들만 경험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부활의 예수가 제자들이 모인 방에 나타났듯이 산헤드린 공회에 나타났다면,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 광장에 나타났다면 많은 사람이 부활을 경험했을 텐데 말이다. 복음서와 서신이 이에 관해서 자세하게 보도하지 않기에 우리는 당시에 예수 부활과 연관해서 어떤 사태가 실제로 벌어졌는지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다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전에 예수와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부활의 예수께서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예수께서 나타나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들이 어떤 영적 사건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었기에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지금도 편견에 떨어진 우리가 모든 실체를 다 보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두 가지 예외가 있긴 하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예수의 동생이었지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부활 공동체인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다. 그는 예수 생전에 일면식이 없었는데도 부활의 예수를 만났다고 주장한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사도행전은 바울의 이 경험을 세 번에 걸쳐서 약간씩 다른 버전으로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 이후에 바울을 만나려고 하늘에서 다시 내려온 것처럼 상상하게 만든다. 사도행전의 이런 표현을 사실 보도로 읽으면 곤란하다. 사도행전에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천사가 기적적으로 구출하는 이야기 말이다. 소위 다메섹 도상의 회심 이야기는 종교 경험에 대한 은유로 읽어야 한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한둘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는 예수와의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제자들만이 십자가에 처형당해 죽었던 예수를 ‘살아있는 자’로 경험했다. 부활을 경험한 이들의 목록은 고전 15:1-8에 나온다. 예수 부활과 제자들의 경험에는 우리가 쉽게 가닿기 힘든, 그리고 제자들 스스로 당혹스러워한 생명의 심연이 놓여 있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