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4:19-26, 영적으로 살자!

조회 수 9522 추천 수 2 2009.07.31 21:57:45
 

1996.3.17.  설교

영적으로 살자!

요4:19-26 


1965년에 <The secular city>의 출판을 계기로 세계적 신학자의 대열에 올랐으며, 지난 30년간 미국을 대표하는 종교, 사회학자로 왕성한 학문활동을 하던 하비 콕스가 작년에 또 하나의 새로운 책을 출판했습니다. <Fire from Heaven, -The Rise of Pentecostal Spirituality and the Resshaping of Religion in the Twenty-first Century>, 번역서는 <영성, 음악, 여성, -21세기 종교와 성령운동>으로 한국에서도 출판됐습니다. 콕스는 20세기 초에 일어난 미국의 영적 부흥운동을 사회학적, 혹은 교회사적으로 접근하면서, 자신의 어릴적 경험도 중요한 자료로 삼고, 현재 세계적으로 부흥하고 있는 오순절적 계통의 교회를 현상적으로 분석해 주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부흥하는 교회는 기독교 전통에 서 있는 장로교회나 , 감리교회, 침례교회, 루터교회가 아니라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신앙의 기초를 둔 오순절적 교회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미국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 특히 한국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소위 <순복음교회>가 바로 전형적인 오순절적 교회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여의도에 있는 순복음 교회라는 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교회들의 특징은 열광적인 예배의식, 신유와 방언의 강조에 있습니다. 밤새도록 울부짖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춤을 추며, 전적으로 헌신합니다. 전통적인 찬송가만 부르지 않고 째즈식으로 작곡되고 연주되는 복음송을 주로 부릅니다. 무당들이 하는 푸닥거리나 신내림 굿 처럼 노래와 춤과 기도가 폭포수 처럼 쏟아지므로써 본인과 주변의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뜨겁게 만듭니다. 하비 콕스는 21세기의 종교가 바로 이런 데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유형의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성령체험입니다. 영적인 뜨거움을 경험하는 종교가 되어야만 21세기 살아남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하비 콕스의 이런 기독교 분석을 보면 그가 전형적인 미국 학자라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그가 21세기에 기독교가 도모해야 할 신앙형식의 대안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영성의 교회는 다분히 실용주의적 계산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성서적으로, 교회사적으로, 그리고 교의학적으로 옳은가의 여부 보다는 무엇이 효과를 올리느냐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대단히 많은 수의 미국인들이 C.TV로 예배를 드리고 은행 지로로 헌금을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TV 스타 설교자가 양산되고 있는데, 이게 바로 미국의 특징입니다. 어떤 방식이든지 편리한 것만을, 실용적인 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그들의 철학이 신앙생활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만약 콕스의 주장이 옳다면, 겉으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장하면 그게 영생교였든, 전도관이었든, 통일교였든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양적인 부흥만을 목표로 한다면 현대인의 기호에 맞춘 교회형식을 만들어가는 게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프로 야구나 축구 경기장에 가서 환호성을 지르며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듯이 교회도 역시 그런 프로그람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런 걸 성령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반드시 열광주의적 체험에만 치중해야 할까요? 과연 영적으로 산다는 건 무얼 말할까요? 오늘 설교는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그 유명한 수가성 우물가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남쪽 유다지방에서 다시 북쪽 갈릴리로 가시던 중 중간 지역인 사마리아를 통과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수가성 부근의 우물가에서 어떤 여인을 만나셨는데, 그 여인은 일반 아낙네들이 물길러 오지 않는 정오에 물길러 나왔습니다. 그 여인과의 대화 중에 예배 처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이곳 사마리아의 그리심산을 거룩한 산으로 믿었으며 여기서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시온산이 거룩하다고 주장한다. 내가 당신을 만나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은데 도대체 어느 곳에 가야 가는가? 그리심산인가, 시온산인가? 이 여인의 질문은 일리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모리아 산이 바로 그리심산이라고 가르쳤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곳도 그곳이라고 가르쳤으며, 모세가 제일 먼저 제단을 세우고 희생을 드린 에발산(신27:4)도 역시 그리심산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사마리아 사람들의 주장에 반해 유대사람들은 성서적 전통에 의해 예루살렘과 시온산을 거룩한 곳으로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그리심산이나 시온산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 바로 기준이다. 앞으로 사람들이 자기들 멋대로 장소를 고집하지 않고 영적으로, 진리로 드리게 될 때가 오게 될텐데,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적인 예배야말로 하나님 아버지가 받으시는 예배다. 그렇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개역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번역은 우리에게 약간의 혼동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신령하다고 하면 무언가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것에 비켜 서 있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이를 보다 분명하게 번역해 주고 있습니다.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령과 진정이라는 단어의 원뜻은 바로 “영과 진리”입니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에도 “Geist und Wahrheit”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24절에 “하나님은 영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영이 바로 하나님의 존재양식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예수님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극단의 위험성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차원의 부정이며, 둘째는 영적인 차원의 주술화입니다.

적지 않은 신자들이 예배를 통해서 영적인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의 형식적인 예배에 잠시 참석하는 것 뿐이지 하나님과의 영적인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가 지루해지고, 겨우 의무적으로 참석할 뿐이고, 영적인 뜨거움이 자리가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아마 속으로 “그래, 예배는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드리는거지 뭐. 드리지 않으면 섭섭하고 마음이 허전하니까 할 수 없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상당수에 달할 겁니다. 찬송을 불러도 마음의 감동이 없고, 말씀을 듣거나 설교를 들어도 무덤덤합니다. 이런 시간에 재미난 연속극이나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예배를 영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배를 복받는 수단으로만 생각해서 열광하는 이들도 문제입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이런 류에 있는 이들은 신앙을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자기들만 축복해 주실 거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예배의 두 차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 가운데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영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입니다. 영과 진리는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구별됩니다. 영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진리는 그것의 성격을 드러내는 형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예배는 진리의 영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사랑과 충성과 희생과 기쁨, 정의와 평화라는 진리 가운데서 영적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존재하십니다. 영적인 하나님은 참된 영입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예배를 드리기 원한다면 순전히 인간적인 판단에 따른 무미건조한 형식주의가 아니고, 그렇다고 맹목적이고 영광주의적이고 주술적인 이기주의가 아닌 마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건 바로 간절한 심정으로 진리를 사모하는 자세를 뜻합니다.


영적인 예배는 예배의 차원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차원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영적인 삶의 차원이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자체를 예배로 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영적으로 살고 있습니까? 위에서 영적인 예배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 위험성이 영적인 삶의 차원에도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삶의 영적인 차원의 부정이고, 둘재는 삶의 주술화입니다.

오늘의 시대가 얼마나 무신론적인지, 얼마나 물신주의적인지 섬뜩한 느낌을 감출 수 없습니다. 모두가 물질을 신 처럼 섬기며 살아갑니다. 모든 걸 경제적 가치기준으로만 판단하고 있습니다. 요즘 4.11 총선을 앞두고 각 당이 제시하는 정책도 한결 같이 물신적입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와 체제가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잘사는 것만이 참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북한에 쌀을 보내야 하는가, 마는가 하는 주제로 TV방송이 있었습니다.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훨씬 많았습니다. 양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몇몇 출연인사 중에서 귀순 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처함찬 굶주림 가운데 빠져 있는 북한주민을 도와주면 비록 부분적으로 군량미로 돌려지는 일이 있어도 결국은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며, 북한 집권층이 적대감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더라고 북한 주민의 마음은 남한을 향해 열려지게 될 것이라고 하소연 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매정하지만 북한이 완전히 손을 들고 항복하지 않는 한 쌀 한톨 보내면 안된다고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인정머리입니다. 서로 경쟁관계에 있으면 인정사정 없이 밀어부치는 게 우리입니다. 저는 이런 우리의 얼굴에서 철저하게 자본제적, 물신적 처세술에 찌든 사나운 놀부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30%에 가깝다고 하는 남한 사회가 여전히 영적인 것과는 거리가 참 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적으로 산다는 건 하나님의 영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회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지, 어떻게 낮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를 마음의 중심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반면에, 삶의 주술화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얼마 전 독일에서 공부하는 조카가 잠시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나에게 들렸을 때 대구 서점에 들어갔습니다. 많은 종류의 책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만 놀랍게도 주술, 역에 관한 책이 엄청나게 많았고 또 많이 팔리고 있었습니다. 최첨단의 과학 시대에 살면서 자신의 운명을 애매한 역술에 맡겨 놓는게, 더구나 이기적인 생각으로 그걸 이용한다는 게 참으로 딱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영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영적인 삶은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이 세상의 물질적으로 보이는 것에만 삶의 가치를 두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삶, 즉 사랑과 평화와 정의와 기쁨에 삶의 중심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하나님을 미신적으로 이용하는 게 아니라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럴 경우에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작은 역할이나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양극단의 질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영적 가치를 무시하는 질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술적 관심이 판을 치는 질서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하는 이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영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영적 다이나믹이 우리를 구원에 참여케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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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2016.02.17 23:55:28

하나님의 마음(사랑)으로 관계(이웃과)를 맺으며 살라는 말씀이군요..

이 삶이 예배(신령과 진정한)의 삶이고, 하나님 뜻을 이루는 것이구요.

이 삶이 영적인 삶이고, 이 땅에서 살아야할 기독교 윤리라고 말씀하시는 거 같습니다.ㅎ

[레벨:17]홍새로

2017.05.23 12:22:39

사람에게 물질로 채워지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다는것을 사유하게된 인간은

영적으로 살수 밖에 없는것 같습니다.

이원론적으로 이땅의 것들이 무가치한것은 아니고

삶의 가치를 물질적으로 나타난 것에만 두는것도 아니라

생명의 깊이에서 세상을 보면 자유, 기쁨, 평화속에 있을수 

있다고 믿습니다. 

슬프게도 실제로는 더 많은 시간을 물질세계에

매몰되어 있는 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전에 저는 하늘이 어디인가 하며 막연해 했었는데,

하늘은 그리심산이나 시온산 같은 공간적 장소가 아닌

진리의 영을 따라 사는 자체가 하늘이다 하는것을

잊지말아야 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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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2017.05.23 21:06:16

아주 오래 전 설교를 은나라 님과 에스더 님이

찾아 읽으시고 대글을 다셨네요.

제가 죽어도 다비아가 폐쇄되지만 않는다면

누군가 설교를 읽겠군요.

이미 죽은 사람의 설교를 읽는 기분이 어떨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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