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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창세기 읽기 006(창 3:1~7), 대구 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강해, 2023년 3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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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창세기 읽기 006(창 3:1~7), 대구 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강해, 2023년 3월8일
아놔.. 목사님, 슬슬 지겹기 시작했어요. 이제 때려치워야겠습니다.ㅋㅋ
창세기 읽기, 여섯 번째, 3장 1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창세기 3장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음으로써 그 죄가 인류에게 이어지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뭐기에 인류 전체 운명이 거기서 결정되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트집을 잡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아예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지 마시지 왜 그걸 만들어서 사람이 유혹에 빠지게 하느냐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지으실 때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실 수 없었나 하는 질문도 가능합니다. 본문에 나오겠지만 왜 뱀을 만들어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게 했느냐 하는 질문도 가능해요. 이건 끝없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저런 신화들은 논리적으로 앞뒤 딱딱 맞도록 설명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의 사실만 전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 자체 안에 모순이 있는 것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타락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죄가 인간의 본성이 돼 버리고 말았다는 뜻이죠. 그러면 왜 하나님이 완벽하게 지으시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현재 인간이 그렇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걸 신화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거죠. 뱀이 유혹했다, 여자가 먼저 유혹에 넘어갔고 남자를 거기에 끌어들였다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인간에게 저런 유혹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거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신처럼 돼 보려는 욕망이 강합니다. 핵심이 거기 있어요. 눈이 밝아져서 신처럼 된다, 죽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 욕망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고대의 모든 제국들은 자신들이 신처럼 되려는 욕망에서 그런 일을 한 거예요. 신처럼 된다는 것은 생명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높이려는 태도. 지금도 사실 마찬가지죠. 대기업들이 하는 행태들이 다 신성화 아닙니까. 자연과학도 마찬가지죠. 기술이 인류에게 좋게 되겠냐는 확신이 없어요. 그러면서 무조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에 대한 성경의 신화적 설명이 아담과 이브가 뱀에게 유혹당하여 타락했다는 이야기로 나오는 겁니다. 결국 실낙원이 돼 버리고 말았죠. 오늘의 현실이 3장부터 시작됩니다. 3장까지는 현실이 아니었어요. 에덴동산이니까 거기엔 지금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는 조건들이 없었습니다. 2장 마지막 절에 보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하죠. 이건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 기자들도 재미있습니다.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됐을텐데 말이죠. 창조라는 엄청난 사건이 있는데 곧바로 타락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창조 이야기를 좀더 끌어가지 않고 인간의 운명이 불행에 떨어지게 된 선악과 이야기를 창세기 초장부터 드러내요. 선악과라는 말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줄여서 하는 말이에요. 따로 있는 건 아니고요. 어떻게 생긴 건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림 같은 데 보면 사과처럼 생겼더라고요. 사과가 선악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을 좀 볼까요?
1절에 뱀이 나와요. 모든 사람들에게 뱀이 꺼림칙한 동물이니까 나오지 않았을까요? 영악한 부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파충류라고 하죠. 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뱀을 가깝게 느끼는 사람이 있기는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죠. 뱀을 직접 만져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차갑다고 하잖아요. 느낌이 싸늘하죠. 기어다니니까 움직이는 형태도 별로 우리들에게 호감을 주지는 못합니다. 1절,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여기서 간교하다는 것은 나쁜 뜻이라기보다는 영악하다는 뜻이 강하다고 하네요. 원래 히브리어 의미로 그렇게 나쁜 뜻은 아니라고 합니다. 제가 다른 주석은 안 보는데 설교 준비할 때는 국제성서주석을 봐요. 창세기 읽기에는 그런 주석까지 다 읽으면서 하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서 간단한 주석을 봅니다. 마르틴 루터 성경에 있는 주석을 번역해서 우리말 성경에 넣어놓은 책입니다. “관주해설성경전서” 이렇게 제목이 돼 있어요. 요즘은 안 나온다고 그러네요. 이 안에 짤막하게 내용이 나오는데 참 좋습니다. 내용은 짧지만 독일 성서 주석학자들이 간략하면서도 정확하게 주석해 놓은 거예요. 여기에 보니까 간교하다는 게 그렇게 나쁜 뜻이 아니고 영리하다는 뜻이라고 해요. 전반적인 흐름에서 인간의 타락에 대한 책임을 뱀이나 어느 누구에게 전가하지 않고, 사람 자신에게 돌립니다. 전반적인 흐름이 그렇다는 거예요.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이런 걸 보더라도 이게 신화적이라는 걸 알겠죠? 에덴동산에서는 모든 생명체가 다 대화를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신화입니다. 신화는 인간의 근원적인 세계를 이야기식으로 만든 것, 느낌으로는 있는데 그걸 정확하게 말로 전달하려니 잘 안 되네요.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게 아와 어가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참으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늬앙스가 다른 겁니다. 진짜야? 아니지 않느냐? 그러한 뜻이 들어 있는 거예요. 진짜 인간 내면에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신화는 인간 내면에 솟아있는 혹은 들어있는 욕망들을 만화처럼 그리죠. 만화가 아니라 신들의 이야기잖아요. 나중에 제가 신화에 대해서 좀 찾아봐야겠습니다.
2절,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절,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앞쪽으로 잠깐 돌아가 볼까요?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뱀의 말에 2장 17절 그대로 이브가 대답하지 않고 약간 비틀어서 대답했네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이렇게까지는 아니었잖아요. 이브가 없는 말을 하고 있네요. 어떻게 보면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이브가 혹은 인류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약간 비틀어서 기분나쁘게 생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어요. “먹지말라 네가 죽을까 하노라” 하면 담백한데 “만지지도 말라” 이렇게 멋있게(?) 말했네요. 저도 담백하게 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중요한 사태 앞에서는 훨씬 비틀어요. 그게 표시가 날 때가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저절로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4절, 뱀이 말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이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을 할까요? 하나님을 미리 잘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으리라고 처음에 말씀하신 건 분명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만든 것을 죽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뱀이 볼 때 분명한 거예요. 하나님의 속성을 이미 꿰뚫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죽는다는 말씀이 분명히 있었는데 죽지 않잖아요. 뒤에 가면 오히려 더 보호하시잖아요. 신화는 사실이 아니라고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는데 사실보다 더 근원적인 거예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실 정도로 보호하셨으니까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성경 기자들은 인간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악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악했을 때 그를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해요. 이게 모순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아요.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이 후회하시기도 하고 자기 생각을 바꾸시기도 해요. 이게 하나님의 속성이 무너지는 거잖아요. 미래까지 다 아시는 분인데 인간이 그렇게 될 줄 모르고 인간을 만든 걸 후회하신다, 그게 말이 되냐는 거죠. 그런 대목들이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완벽하게 앞뒤가 맞도록 설명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냥 있는대로 직관적으로 설명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그런 질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뱀이 하나님의 속성을 더 정확하게 알았나 봅니다. 인간이 가장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욕망이에요.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밝아지고 싶고, 알고 싶은 거죠. 피조물인데 피조물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은 겁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거예요. 똑같은 얘기에요. 이 대목에서 여자가 앞장을 서네요. 여자분들은 기분이 좀 나쁘죠. 다른 데에서는 남자가 앞장서는데 타락하는 데에서는 여자가 앞장서는 것처럼 성경에 말하니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시대 상황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거죠. 여자와 아이들은 사람 숫자에 넣지도 않았으니까요. 페미니즘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진 게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가 오래 전에 발전했다고 하는 유럽이나 미국도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지 오래되지 않았을 걸요. 여자와 뱀의 대화가 계속되고 있어요.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큰 능력이에요. 사람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저런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요.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 흉내를 내는 거죠. 황제와 같은 권력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그 권력을 좋게만 사용할까요? 좋게 사용할 수도 있겠으나 나쁘게도 사용합니다. 똑같습니다. 사람은 피조물이라서 신처럼 자기의 능력을 선하게 사용할 수 없어요. 표현이 딱 떨어지진 않지만 어떤 뜻인지 여러분들이 아셨을 겁니다. 저런 능력이 있었으면 좋은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이거든요. 우린 눈앞에 종이 한 장만 있어도 앞에 뭐가 있는지 모르잖아요. 인간은 제한을 받는데 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걸 여러 가지 기술을 통해서 인간은 극복해보려 하는 거죠. 능력을 얻게 되는 겁니다. 본질 자체가 피조물인데 능력 밖의 능력을 소유하려 하다 보니까 감당하지 못하는 거죠. 인간은 권력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목회도 일종의 권력이에요. 대형 교회 수만 명씩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목사가 목사 카리스마를 제대로 행사하기 어려워요. 왜 그런지는 아시겠죠? 이용하게 됩니다. 아무리 자기 훈련이 된 사람이더라도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어요.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믿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자기 영혼을 불사를만한 대상인 거죠. 우리가 저렇게 매혹적인 데 빠지면서 사는 경우가 많이 있잖아요. 꼭 저게 나쁜 뜻만은 아니에요. 일종의 에로스죠. 모든 열정을 다 쏟아붓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렇게 되면 남편은 책임이 없는 것처럼 보이죠. 그렇게는 읽지 마십시오. 그 당시 시대상이 남자 중심이라서 나쁜 일에는 여자가 주도적인 것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1절부터 7절까지 인류 조상인 아담과 이브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은 이야기가 나왔어요. 성경은 재미있게 읽으셔야 합니다. 어떤 걸 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