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 오후, 함께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을 빌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묵상을 성도님들에게 전했습니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주제임을 알면서도 심하게 무리수를 둔 것이지요. 아래는 그 원고의 일부입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노무현의 죽음과 부활
- 하나님 나라와 사람 사는 세상
일주일 전 토요일에 날아든 비보는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분이 투신을 통해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건 자체보다도 더 놀라운 장면들은, 그의 서거 이후에 나타난 국민들의 뜨거운 추모 열기였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오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분향소를 찾고, 일찍 찾아온 무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기나긴 행렬을 이루고, 각종 매체들을 온통 그에 대한 추모의 마음으로 채우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노대통령을 한때 적극 지지했던 사람으로서 일산에 분향소가 차려진 첫날 그곳으로 달려가 회한과 슬픔 속에 밤을 지새우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의아했습니다. 더도 말고 딱 열흘전으로만 돌아가보면, 노무현 대통령은 모든 면에서 철저히 실패한 대통령이었을 뿐이니까요. 정권을 재탄생시키는데 실패했고, 그를 계승할 아무런 정치적 조직도 남겨두지 못했고, 대통령 시절 그가 추진했던 의미있는 사업들은 전면 축소되거나 아예 폐지되어버리는 것을 힘없이 지켜보더니, 결국엔 측근들과 가족들마저도 위협받는 맹렬한 정치 보복의 발톱 앞에서 사면초가의 신세가 아니었습니까. 아무도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보호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처한 현실을 동정하기는 했지만, 그저 역사 속에서 잊혀져 가도록 외면하는 듯 했습니다. 단지 열흘전의 풍경이 분명 그러했는데, 지금의 이 뜨겁고도 자발적인 열기는 과연 무엇인지요?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아마도 ‘죽음’이 남은 자들에 의해 ‘해석’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당사자는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도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그들의 삶에 대한 참다운 의미가 평가되고 해석되었던 것을 보지 않습니까. 그러니 경우에 따라 죽음은 언어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말걸기의 시작인 셈이지요. 노무현 대통령 역시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 말걸기에 대한 응대로서 저 역시도 노무현 대통령의 삶을 다시 한 번 차분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조금은 엉뚱하게도 노무현 대통령의의 삶과 죽음이 예수님의 그것과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모습을 복원하기란 요원한 일이지만, 복음서를 통해 보여진 큰 가닥만 보더라도 세상속에서 예수님이 지향하신 삶의 방향은 분명하게 드러나니까요.
성급한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결코 한 인간에 불과한 노무현 대통령을 예수님과 동급으로 비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만 노 대통령과 예수님의 삶의 궤적을 나란히 들여다 봄으로서, 이천년전 유대사회와 오늘날의 대한민국 사회가 기나긴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비슷한지를 살펴보고자 함입니다. 성급히 말하자면, 정말이지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인간들이 사는 세상의 속성은 본질적으로 한치도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삶과 노무현의 삶을 비교하고자 합니다. 조금은 거친 논리와 상투적인 도식화의 폐단을 어느 정도 전제하고서 말입니다.
(※ 이하 ‘노무현 전 대통령’ 을 줄여서 ‘노통’으로 표기함을 양해 바랍니다.)
1) 목수의 아들 / 촌부의 아들
지금의 우리들이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라 고백하지만, 당시의 이웃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평범한 목수집 아들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오래도록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자라난 동네 역시 선한 것이 나올리 없는 땅 나사렛이었구요.
노통 역시 별다른 배경 없이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변변한 재력과 인맥과 학맥 중 어느 것도 그의 몫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남들보다 나쁘지 않은 지적 능력과 굳은 심지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2) 부르심에 응답함 / 뜻을 세움
때가 임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일상의 삶에서 공생의 삶으로 전환을 합니다. 광야에서의 고난은 그 지난한 통과 의례를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노통 역시 오랜 고학 끝에 변호사로서 입신을 시작하던 무렵, 조금은 남다른 소명을 자각하게 됩니다. 개인을 넘어 더 큰 자아를 위한 삶을 살기로 뜻을 세운 것이지요.
3) 하나님 나라 / 사람 사는 세상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무력이나 관습이나 율법이나 소유의 유무가 삶의 근거가 되는 세상을 너머,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노통이 꿈꾸었던 세상은 사람 사는 세상이었습니다. 억울함이 없고, 상식이 통하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대우 받는, 당연한 듯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여전히 너무도 요원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당겨오고 싶었습니다.
4) 검을 주러 온 자 / 반골의 싸움꾼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현실을 지배하는 통치 원리와 근본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끊임없이 율법을 기반으로 한 회당체제와, 그리고 무력을 기반으로 한 로마의 권력과 갈등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사랑의 실체이시지만, 경우에 따라서 공격적이었고 비타협적이었습니다. 율법에 도전하고, 성전의 권위를 부정하는 행위는 매우 위험한 자살 행위였으니까요.
노통이 꿈꾸었던 사람 사는 세상 역시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치열한 싸움을 통해 얻어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권 변호사 시절에는 수많은 시위와 쟁의의 현장에 뛰어들었고,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에도 독재정권과, 재벌과, 보수 언론과, 그리고 지역주의와의 끝없는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5) 호산나의 영광 / 노짱 열풍
예수님은 자신이 선포한 메시지의 전복성으로 인해 주로 당대의 소외된 민중들로부터 열광적 지지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지닌 독보적이고도 복합적인 카리스마에 매료되어 자신들이 갈망하는 각기 다른 소망들을 예수님에게 투영하려고도 했습니다.
노통 역시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 정점에서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아무런 수구적 기반 없이 오로지 국민들의 지지만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 됩니다. 한때나마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정치인이었음에 분명합니다.
6) 실패한 선동가 / 패배한 대통령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회당과 로마 제국 공동의 표적이 됩니다. 그것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힘이었습니다. 애초부터 비교가 되지 않는 갈등의 결과는 자명했습니다.
노통 역시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수구적 기득권 카르텔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그가 재임했던 5년간은 기득권 세력의 견고한 벽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참담한 절망의 시간으로 점철됩니다.
7) 제자들의 배신 / 지지자들의 외면
예수님, 그리고 노통이 대립자들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는 모습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정작 이해하기 힘든 일은 둘 다 자신들의 적극적인 지지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요청이 자신들이 품었던 다양한 열망들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대중들이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입들은 곧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더니 종국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서 그와 함께 운명을 걸었던 제자들 역시 그를 배신하거나, 부인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버립니다.
노통의 운명도 비슷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길이 우리들의 욕망을 끝없이 충족시켜 주는데는 그다지 신통한 방식이 아님을 깨달은 대중들은 너무도 쉽게 노통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노통 주변으로 몰려들던 정치인들은 대중들의 외면에 당황하며 제각기 자신들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각개전투를 벌였습니다. 한편으로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을 관철하고자 했던 이들은 그를 비겁한 타협주의자로 몰아붙이며 가장 맹렬한 비판자로 돌변했습니다. 그들의 외면과 비판은 불행히도 5년 후 노통과 가장 다른 길을 제시하는 이를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8) 끔찍한 처형 / 비참한 자살
결국 예수님은 흉악한 정치범으로 규정되어 가장 끔찍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합니다. 주변의 어느 누구도 그의 곁에 남아있지 않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노통 또한 비슷한 최후를 맞습니다. 비록 권력에 의한 직접적인 사살은 아니라지만, 자신의 측근들과 가족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도덕성과 진정성마저 무참히 짖밟히고, 모든 이들이 등을 돌린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홀로 바위에 올라 몸을 던져 세상을 등집니다.
9) 그러나.... 다시 살아나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집니다. 그 죽음으로 인해서 노통이 다시금 우리들 마음속에서 부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의 삶을 다시 재조명하고, 그를 죽음으로 내 몬 냉혹한 현실을 비판하고, 무엇보다도 그가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던, 함부로 폐기처분하려 했던 이상과 가치들을 다시 한 번 꺼내들어 먼지를 털어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참다운 의미에서 부활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 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노통의 부활처럼 단순한 마음속의 부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의 궁극적 차원을 완성하심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신 유일회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내용이지만 오늘의 논점에서는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우리들은 항상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 그리스도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점만은 짚고 싶습니다. 예수가 따름의 대상이라면 그리스도는 신앙의 대상이겠지요. 다시 말해 우리들 크리스찬들은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는 예수님과, 우리의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사이에서 긴밀하고 지속적인 일치를 이루어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노통의 삶은 예수님의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당연히 이때의 예수님은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적 예수를 말합니다. 노통이 품었던 꿈도 그의 비극적 죽음으로 인해서 오히려 커다란 각성을 던져주며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다시금 부활합니다. 물론 여기서의 부활 역시 인류의 역사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의로운 이들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유지(遺志)의 부활을 뜻하는 제한적인 의미입니다.
그러한 기본적 이해를 전제한 후, 비로소 우리들은 노통이 외쳤던 사람 사는 세상과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상관관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노통이 외쳤던 사람 사는 세상과 예수님이 외쳤던 하나님 나라는 서로 일치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둘 다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분명 노통이 주장한 사람 사는 세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현실 세상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좌표로서 사람 사는 세상이 내포하는 수많은 가치들을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 사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의 충분조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당연한 필요조건이 아니겠습니까. 사람 사는 세상은 이 땅에서,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구현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가장 기초적인 항목들이라는 말입니다.
모두의 외면 속에서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가 뜻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아직은 접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노무현이라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수많은 열매로 다시 태어나는 소망을 봅니다. 이때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최소한의 필요조건으로서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다시금 우리들 영성의 촉각을 다듬어야 할 때입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당연하게도 저의 생각은 많은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나봅니다. 우선, 노무현을 감히 예수님과 비교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가장 컸고, 그가 자살했다는 점, 그의 죽음과 장례가 불교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 그가 위험한 좌익이라는 점 등등을 조목조목 지적하시는 성도님들의 즉각적이고도 강력한 항의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하여, 솔직히 말하면 저는 지금 여러모로 반성하고 있습니다. 나야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맘대로 해 본 것이지만,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분들에게 심대한 상처와 실망을 안겨드린 것 같다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결국 제 경솔함으로 인해 교회 내에서 여러 사람이 불편해지는 결과만 초래한 듯합니다. 그래도 다비안들께서는 많이 혼내지 않으시고 차분히 제 생각의 모자람을 지적해 주시리라 생각하며 부족한 글 올립니다.)

이력의 유사성이 강조된 듯 하네요.
이런 식이라면 저는 별로 예수를 믿고싶지 않습니다.
저도 하나 이력을 보태고 싶네요.
간음하고 끌려온 여인이 모든 사람들이 돌로 치려고 할 때
예수께서는 그녀를 감싸고 그 긴장 안에서 구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고 노통은 반대였지요?
고 남상국씨를 공개적인 기자회견에서 언급하여 수치를 안기고
바로 그를 투신자살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이 생생합니다.
덩치 큰 20대 초반의 그의 아들과 아내가 검은 상복을 입고
너무나 단촐하게 노출되어 있는데 카메라 플러시만 터지더군요.
사람 하나 저렇게 죽는 거 일도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노통의 소식을 대하고 잠시의 눈물 후에
바로 그 두 모자의 광경이 떠올랐습니다. 고 정몽헌 보다 먼저요.
얼마 전에 진중권의 자살세 언급 반성소식도 있었지만...
그리고 예수께서는 가족들을 별로 끼고 도시지않으신 듯 합니다.
노통의 상황은 가족들의 괴로움이 큰 요인이기도 합니다.
모처럼 anti picnic 이었습니다.
그리고 자료를 찾아보니 노건평 씨가 직접 남상국 사장을 찾아가서 돈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있구요... 그런 상황에서 실명까지 공개되었고 자신이 마치 노건평에게 청탁을 한 것처럼 되어버리까 너무 너무 억울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상 인간 노무현도 자신의 "공"과 더불어 "과"가 존재하는 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그의 공이 그의 과를 덮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개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구요...
그중 고 남상국 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경솔한 언행이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노무현에 대한 공과 사를 놓고 판단할 때 공이 크다고 생각되니까
국민들의 추모 열기가 뜨거운 것이겠지요.
특히 그분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다만
소풍님이 제한적이라고 하셨지만 굳이 예수님과 비교할 것까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하시고자 하는 뜻은 알겠지만 ^^
어쨌든 노통은 제도권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고 예수님은 아니라는 점일 겁니다.
노통은 그의 전매특허였던 불의를 향한 의분이 대통령의 위치에서는 이전과 달리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 사건 전에는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는 자비를 베풀었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독사의 새끼라고 저주했습니다.
예수님이 정치적 힘은 없으셨으니 그런 말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살은 커녕 꿈적도 않았겠지만
예수님이 만약 그런 힘이 있으셨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자비와 공의라는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치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요?
우선, 제 글이 이력의 유사성을 강조하고자 한 글로 읽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제 글쓰기의 실수입니다.
뒤늦은 수습 같지만
노무현과 예수님을 비교한 제 의도의 핵심은
기득권에 도전하는 자를 대하는 세상의 방식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말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단순 비교가 너무 반복 강조되어 논점을 제대로 끌어내지를 못했네요.
그러므로 유니스님의 오해는 전적으로 제 글쓰기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합니다.
어쨌든 애초의 의도가 노무현을 예수님에 버금가는 의로운 인간으로 주장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기에
유니스님께서 구체적인 사안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예수님의 수준(?)에 턱없이 못 미치는 노무현의 됨됨이를 지적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코멘트를 덧붙이기가 좀 그렇습니다.
그리고, 가장 걸리는 부분
'이런 식이라면 저는 별로 예수를 믿고싶지 않습니다.' 라고 쓰셨는데
말씀하시는 이런 식의 예수란 정확히 어떤 예수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노무현과 단순 비교된 예수? 그걸 말씀하시는 거라면 다시 한번 오해 푸시기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제 경솔함을 사과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혹 노무현과는 별개로, 위에서 제가 요약한 예수의 생애에 관한 한 관점,
다시 말해 기득권에 대한 저항가로서의 예수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만약 후자라면 서로간에 나눠야 할 이야기가 좀 더 남아있을것도 같네요.
저는 부드러운...아니...강한...에잇..저도 저를 모릅니다.
소풍님께서 교회에서 어려운 나눔을 하셨다는 그 어려움 만큼
저도 다비아의 분위기에서 어려운(?)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유도하신 소풍님께 박수를 드립니다.
사랑채에서 임마누엘님께서 올리신 글에 언급된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
저도 쥐스킨트의 팬으로서 반복하는 작품인데요,
죽은 자에 대한 '깊이에의 강요'...저는 이것이 싫다는 겁니다.
소풍님의 글도 그 선상으로 보였기도 하구요. 변명 완전 사절!!!
그런 예수를 믿지않겠다는 저의 발언은
노통에서 역추적한 예수의 모습에서 말한 것입니다.
예수와 노통이 확연히 다른 것은 그 죽음에서 입니다.
예수께서는 수치를 무릅쓰고 죽음을 택한 것이고
노통은 자존심을 위해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이 모진 세상을 그의 지지자와 같이 견디어내는 것이
차라리 십자가의 형벌일 겁니다.
이건 고인을 깎아내자는 것이 아니라 아쉬운 점이지요.
제가 이렇게 지독하게(?) 말하는 것은
예수가 노통에 의해서 하향조정되는 감이 있어서
이즈음에는 줄을 한번 긋자는 것이고,
산 자들이 그를 '노란 우상'으로 만드는 것같기도 하구요.
여하튼 소풍님, Have a nice day~~~
저는 의문이 생기는것이 과연 노대통령께서 고 남사장님에 대하여 악의적 감정을 가지고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자신의 별 볼일 없는 형님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메세지가 아니었을까요
그런 말에 자살한다면 목회자들 목회 하겠어요
야단친다고 자살하고 간접적으로 비난한다고 자살하고 ...........
노대통령의 자살을 미화하자는 것은 아닌데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명예스럽게 여겼든 부분의 상실감 주변 사람들에게 몰아 닥치는 칼바람
국민들에 대한 면목없음 등등의 자괴감으로 죽음을 부른것이 아닐까요
내가 신뢰할수 있는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뿐으로 생각하고 산다면
상실할것도 없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고 그래서 복음전파가 더 소중한것 같습니다
그냥 한마디 해봤습니다
p.s. 생뚱맞은데요. 노무현대통령 서거하시고, 일주일만에 모든 일이 끝났잖아요.(분향 및 영결식 및 화장..유골 안장까지)
여러 의혹들이 많이 있던데 조사를 더 하고 해도 되는 것 아닌가요?
너무 빠르게 모든 일이 치러진 것 같아서요.
아무리 내용이 알차도 형식이 구구하면
독자의 기세에 아니 스스로에게도 눌려지거든요
미리 도식화의 위험을 언급하시기도 했지만 이해만으론 부족한 아쉬움이 있네요
정치인에 관한 이야기라 별로 할말은 없지만
지금 추모 열기속의 노무현이
또다른 권력과 매체가 쏘아대는 팬텀이 아닐까 염려됩니다
저에게 가장 영양가 있는 말씀을 주셔서 가장 먼저 댓글 답니다 ^^*
시그림님의 지적이 전적으로 맞습니다.
다시 읽어봐도 역시 이 글은 형식면에서 도식적이고 내용면에서 논리가 빈약하네요.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이 글은 칼럼방에 올리려고 쓴 글이 아니라
교회에서 나눌 이야기를 준비한 원고의 일부입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쓰는 글은 일반 글쓰기와는 달리 일정부분 도식화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이번 글 역시 나름대로는 내 생각을 담아보려 했으면서도
형식면에서는 상투적인 패턴화를 나도 모르게 시도했던 것 같습니다.
부족함을 알면서도 못난 생김새 그대로 올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한 것이
결코 인간 노무현에 대한 과잉된 고양이 아니라는 것은 이해 하시리라 믿습니다.
불의한 기득권에 도전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혹한 현실속에서 처하는 비극적 운명이
역사속에서 수없이 반복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품었던 뜻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다시금 피어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다시 노무현을 허깨비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광적 추모가 잦아든 자리를
그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그가 꿈꾸었던 가치에 대한 차분하고 단단한 성찰로 채워야 하겠지요.
작년촛불정국,반대하면 대운하 안하겠다, 현 정부의 실정,용산참사등 독재의 도피처가 노짱으로 승화되는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보노무현에 천착하는 모습은 구세주로 바라봄으로 현실의 아픔을 구원하는 종교적 현상에
놀라며 우리는 구세주 착시현상을 경계하고 그 현상에서 한 걸음 뒤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바라봐야 겠습니다.
사건의 전말이나 노대통령의 죽음(자살??)과 단순비교는 어렵지 않나하는 의견을 표합니다.
물론 노통이 굳이 '대우건설사장'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도 없었고 이 부분
분명 잘못이 일정 부분 있슴은 사실입니다.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언제고
후회나 사과를 했을랑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것처럼
포털사이트에는 한나라당 국민소통위원이라 불리는 일명'알바'들의
호도된 글은 거의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의 명예가 부당하게 억울하게, 더렵혀졋을때 자살이라고 하면 노통의 책임은
더 커질 수 잇겠지만 비자금을 조성하여 정치인들에게 주고, 노건평씨에게
금품청탁을 하고(법원의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는 판결문 대목) 대통령의
인터뷰내용을 집에서 TV로 보고 자살을 결심하였다고 하지만 직전 김우중 전회장의
귀국로비가 실패하고 유언무언의 압력(같은편이었던 조중동,정치권)을 받고 검찰 담당검사와
회사법무팀등과의 통화등을 하고 생을 포기한 그분에게는 인간적인 애도와 명복을 기원
할 수는 있어도 책임론으로 굳이 따져본다면 이번 노통의 수사도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검찰에게 무게가 실려야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분명히 사람 하나 저렇게 죽이지 않았습니다.
간음한 여인에게는 정죄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구주로 믿고 자기딸의 귀신을 쫓아달라는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 라는 강한 모욕에
이 여인이 자살로 결말이 나지 않은것처럼 답지 않으신 성경비유을 드신듯 합니다.
모처럼도 아닌 다비아에서는 처음인듯한 반론댓글 올립니다.
서프라이즈에서 퍼온 글입니다.
머나먼 아프리카 땅입니다. 노통 가신 지 벌써 엿새째, 내 마음은 이미 봉하에, 서울 광장에 가 있건만, 찾아가 뵙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서럽고 슬픕니다.
나의 희망이며 나의 사랑이었던, 노.무.현. 이름 석자...
영면하시기전 다시 한번 불러봅니다. 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곳 아프리카 어느 구석 후미진 곳에 교민들을 위해 마련된 분향소에 아내와 함께 님을 송별하러 갔습니다.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어색한 양복을 정성껏 챙겨입고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드렸습니다. 큰 절 올려 드린 뒤, 방명록에 님을 그리워하는 문구 하나 썼습니다.
"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
큰 절 올려 드릴 때,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꾸욱 참고 눌렀습니다. 아니 엿새 동안 몇 번이고 솟구치려는 눈물이었으나 나오지 않도록 두 눈 크게 뜨고 짓눌러 막았습니다. 눈물을 모두 분노로 승화시켜 채곡채곡 채워두고 싶어서입니다. 눈물이 쏟아지면 내 안의 분노가 사라질까 두려워서였습니다. 극한의 분노로 온몸이 채워질 때까지 울지 않으려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은 나에게 두 번째 예수입니다. 나에게 유일하신 분, 첫 번째 예수는 낮은 곳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손을 잡으시고 차별받는 자들을 품으러 오신 분이십니다. 님도 그러하셨습니다. 두 번째 예수가 되시어 똑같이 우리를 품으러 다가오셨습니다. 또한 님은 저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저의 고향이 광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바보같던 부산에서의 그 "공터의 연설"을..
님은 왜 그때 홀로 거기에 서셨던 것입니까. 모두가 떠난 자리, 아무도 듣지 않던 연설, 그럼에도 우렁찼던 님의 목소리. 하지만 님의 공터의 외침에서 저는 가슴 한편이 찢어지던 님의 고독을 읽었습니다.
저는 잘 압니다. 님이 왜 그 공터에 홀로 서야 했는지 말입니다. 바로 광주, 우리를 품고자함이었습니다. 아니 이 땅의 소외된 자와 약자를 품기 위해 님은 그렇게 고향의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님은 "농부가 밭을 탓해선 안된다"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에게는 님의 그 말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까지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예수의 기도인듯 들렸습니다. 하여 님은 다시 한번 나에게 두 번째 예수이신 것입니다.
큰 빚을 진 광주는 님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빚을 갚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광주는 채무 관계가 정리된 듯, 님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님은 또 다시 광주에 말할 수 없이 큰 부끄러움과 빚을 안겨주고 가셨습니다. 님이 죽으신 이유는 본질상 또 다시 광주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님은 부엉이 바위, 벼랑 끝에 홀로 서 계셨습니다. 모두가 님을 떠나고 세상이 님을 등지어 다시 한번 그 "공터"에서 덩그러니 혼자가 되셨습니다. 이번에는 광주마저도 거기에 없었습니다.
님의 편을 드는 척 하던 모든 자들마저 님을 등지고 오히려 마음 껏 저주하고 조롱했습니다. 모든 자들이 님을 그렇게 벼랑으로 몰아 거기 홀로 서게 했습니다. 님을 따르는 무리는 이제 한 줌 뿐이듯 보였습니다. 그렇게 님은 거기에 외로이 홀로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님은 그곳에서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가장 우렁찬 최후의 연설로 모든 자를 깨어나게 하고, 모든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첫번째 예수가 그랬듯이, 님은 수치를 주려했던 위선자들을 오히려 수치스럽게 하고, 그들을 고발하여 거짓을 발가벗기고, 진리와 정의를 밝히 드러내고, 돌같은 죽은 백성의 양심을 깨우기 위해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과 모든 계층이었습니다. 철천지 원수이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를 살해하는 음모에 하루 밤 사이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앞잡이 권력가들에게 예수는 혁명을 꿈꾸는 정치범이었습니다.
종교적 사제들에게 그는 유대교의 전통을 깨는 이단이었습니다. 부자를 질타한 설교를 듣던 부유한 기득권에게는 그는 너무도 불편한 존재였씁니다.
그러나 예수는 혁명가도 이단아도 아닌, 그저 민중을 사랑하고 백성의 친구가 되고 소외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천국의 소유권을 보장해주었을 뿐입니다.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놓으라하고, 전통과 죽은 율법으로 민중을 종교적으로 억압하지말며, 인간에 대한 차별, 지역의 차별을 철폐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정치적 관점에서 예수는 바로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서 "처형" 당했습니다. 정치적, 종교적, 지역적 기득권과 견고한 권력의 카르텔에 도전하여 세상을 시끄럽게 한 죄목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는 당시의 "광주"를 품고 껴안아 준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댓가로 내놓아야 했습니다.
예수가 그렇게 죽음을 당할 때, 예루살렘의 모든 세력이 하나가 되어 그를 사냥했고 당시의 권력가는 여론을 조장하여 군중들의 "십자가! 십자가!" 구호를 이끌어 내어 마지막엔 제자들까지 모조리 배반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홀로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대통령,
사무치도록 그리운 나의 대통령, 노무현님...
님이 바로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노무현, 당신께서 두번째 예수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님의 죽음이 바로 예수의 정치적 죽음의 반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님은 홀로 지역주의, 비인권적 전통, 기득권과 독점 세력, 그리고 온갖 부조리한 제도와 거대한 종교 권력에 맞서 싸우다 한 줌의 재로 자신을 불살랐습니다. 모든 이가 그 싸움을 피하고 비겁하게 변절하거나 사라졌을 때, 님은 마지막까지 홀로 싸우다 외로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광주는 그래서 님에게 너무도 큰 빚을 졌습니다. 님이 품어주셨던 이 땅의 모든 광주, 무정하기만 했던 모든 이들이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바로 우리 때문에 님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광주는 영원히 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빚진 자의 몫으로 남은 숙제를 기꺼이 떠 안을 것입니다. 님의 뼈가루는 봉하에 묻히겠지만, 광주가 님을 영원히 모실 것입니다.
공터에 홀로 섰던 님, 그리고 벼랑 위에 마지막 순간 홀로 계셨던 님, 이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버렸으나 모든 것을 얻으셨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님이 남기고 가신 한줌의 재가 한송이 꽃으로 피어나 분명코 거짓 세력을 몰아내고, 영남을 깨우쳐 호남과 화해하고, 님이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에 들꽃이 만발한 봄이 오게 할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울지 않겠습니다. 온 몸에 차오른 분노를 한꺼번에 쏟아 내어 님의 한을 다 풀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영면하소서, 님이시여.
"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아프리카 땅에서
님을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며
- peacist -
소위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나 가족에게는
어떠한 변명도 위로가 되질 않겠지요?
주위 몇몇은 이를 갈고 있더군요.
하지만 최고 권자에서 대중을 향한 낮은 자세
기득권의 아성에 맞선 거친 변혁의 몸부림
후세 역사앞에 재평가 되리라 봅니다
소풍님의 설교의 진의가 댓글을 통해
더욱 더 허물을 벗고 다가 옵니다~^^*
mb의 저열한 인간성이나, 제도의 결함으로 환원되지 않는,
나의 내면까지 점령한, 저 악의 강고한 현실성.
그러나 예측 못한 순간, 거듭 되살아나는 생명의 바람.
노무현을 통해, 전태일을 통해, 역사적 예수를 통해, 거듭 불어오는 바람.
우리의 경악, 분노, 통회, 회심이 바람 따라 회오리치고,
어디서 왔는지 알기도 전에, 이 바람은 스러지듯 사라지겠지만,
그 적막한 자리에서, 우린 자신의 발로 첫걸음을 뗄 겁니다.
예수 뒤에서, 노무현을 내세우며,
mb라는 허깨비와, 에둘러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태풍 속으로, 그 적막한 중심으로, ‘사람’을 만나러 갑시다.
아니 모 꼭 오늘 모임을 지칭하는 건 아님다.
ㅋㅋ^^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 혹은 그가 남긴 공과를 넘어 그를 추모(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세상의 방식"이 여전히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의 기득권이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이라는 이미지를 덮어 씌우고 빌라도 앞에서는 반역의 이미지를 이용하였던 것처럼 한국의 기득권은 사실여부는 제쳐두고 노 전 대통령에게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 덮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유대인이 단지 그 이미지에 현혹되어 십자가를 외쳤던 것처럼 대다수의 한국인들도 별 의심없이 그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 죽음이라는 충격이 없었다면 이러한 이미지들은 사라지지 않고 감춰진 진실은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노 전 대통령과 예수님을 나란히 놓고 그 의미를 숙고해야할 지점은 바로 여기인 것 같습니다. 그의 '삶'이 예수님과 닮았다기 보다는 그를 죽음으로 내몬 '상황'이 십자가의 '상황'과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살피고 싶었던, 그러나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부분을 정확히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명 권요안님 지적처럼 상황의 유사성을 염두에 두고 원고를 시작했는데
글을 써 내려가면서 저도 모르게 삶의 유사성을 끼워맞추는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문장 속에 '노통의 삶은 예수님의 그것과 닮았다' 는 문장이 떡하니 박혀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교우들에게 좀 더 극적인 반응을 끌어내려는 조바심에 사로잡힌 결과인 듯합니다.
이번 글쓰기를 통해, 그리고 교회와 다비아에서의 애정 어린 검증을 통해
제 스스로 많은 점을 배우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
모두 흥분을 가라앉히고 역사가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 차분히 기다려보는게
오히려 더 신앙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정치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노통은 상대적으로 통치철학과
자기색깔이 분명한 정치인이었다는 정도로 코멘트 해도 될성 싶은데요.
아직 사건의 실체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인간 노무현도 그의 정치행적을 추적해 보면 약점이 있는 사람인데도
그 분을 예수님과 동일선에 놓고 비교한다는게
자칫 기독교를 천박하게 만들 위험의 소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자리에서 그의 인간적 약점들을 거론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부적절하지만요.
저도 노통을 마음으로 좋아했던 사람 중에 한사람이고
그분의 죽음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지만
그 분을 예수님과 나란히 놓고 수평비교하는 것에는
별로 공감이 안 되네요.
그 분의 삶을 놓고 비교한다면
노무현 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걸요.
지난 며칠간 인터넷으로
올곧게 사셨던 그 분의 삶을 보고 느끼며,
예수님의 고난의 삶을 많이 떠올렸습니다.
그 분의 희생적인 죽음앞에
크리스챤으로서 너무 많이 부끄러웠고,
살아 있는 것 조차 구차하게 느껴젔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많은 교회의 메세지가
노대통령의 죽음을 폄하하고,,
그 본질을 보지 못하는 시각이 너무 많아
역사의식도 문제의식도 없는 한국기독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내가 크리스챤이라는 생각에 많은 회의가 왔습니다.
지금은 다시 삶으로 돌아와 그분의 뜻 마음에 새겨
크리스챤으로서도 진리를 향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웃의 아픔 돌아보며,
자신의 희생 마다하지 않는 올곧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소풍
늘오늘
유니스
그늘
시와그림
희망봉
새하늘



예수 그리스도에 붙어있는 "금기" 의 메카니즘이 참 불편해요... 그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