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 오후, 함께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을 빌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묵상을 성도님들에게 전했습니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주제임을 알면서도 심하게 무리수를 둔 것이지요. 아래는 그 원고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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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죽음과 부활
- 하나님 나라와 사람 사는 세상  

일주일 전 토요일에 날아든 비보는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분이 투신을 통해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건 자체보다도 더 놀라운 장면들은, 그의 서거 이후에 나타난 국민들의 뜨거운 추모 열기였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오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분향소를 찾고, 일찍 찾아온 무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기나긴 행렬을 이루고, 각종 매체들을 온통 그에 대한 추모의 마음으로 채우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노대통령을 한때 적극 지지했던 사람으로서 일산에 분향소가 차려진 첫날 그곳으로 달려가 회한과 슬픔 속에 밤을 지새우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의아했습니다. 더도 말고 딱 열흘전으로만 돌아가보면, 노무현 대통령은 모든 면에서 철저히 실패한 대통령이었을 뿐이니까요. 정권을 재탄생시키는데 실패했고, 그를 계승할 아무런 정치적 조직도 남겨두지 못했고, 대통령 시절 그가 추진했던 의미있는 사업들은 전면 축소되거나 아예 폐지되어버리는 것을 힘없이 지켜보더니, 결국엔 측근들과 가족들마저도 위협받는 맹렬한 정치 보복의 발톱 앞에서 사면초가의 신세가 아니었습니까. 아무도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보호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처한 현실을 동정하기는 했지만, 그저 역사 속에서 잊혀져 가도록 외면하는 듯 했습니다. 단지 열흘전의 풍경이 분명 그러했는데, 지금의 이 뜨겁고도 자발적인 열기는 과연 무엇인지요?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아마도 ‘죽음’이 남은 자들에 의해 ‘해석’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당사자는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도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그들의 삶에 대한 참다운 의미가 평가되고 해석되었던 것을 보지 않습니까. 그러니 경우에 따라 죽음은 언어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말걸기의 시작인 셈이지요. 노무현 대통령 역시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 말걸기에 대한 응대로서 저 역시도 노무현 대통령의 삶을 다시 한 번 차분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조금은 엉뚱하게도 노무현 대통령의의 삶과 죽음이 예수님의 그것과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모습을 복원하기란 요원한 일이지만, 복음서를 통해 보여진 큰 가닥만 보더라도 세상속에서 예수님이 지향하신 삶의 방향은 분명하게 드러나니까요.

성급한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결코 한 인간에 불과한 노무현 대통령을 예수님과 동급으로 비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만 노 대통령과 예수님의 삶의 궤적을 나란히 들여다 봄으로서, 이천년전 유대사회와 오늘날의 대한민국 사회가 기나긴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비슷한지를 살펴보고자 함입니다. 성급히 말하자면, 정말이지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인간들이 사는 세상의 속성은 본질적으로 한치도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삶과 노무현의 삶을 비교하고자 합니다. 조금은 거친 논리와 상투적인 도식화의 폐단을 어느 정도 전제하고서 말입니다.

(※ 이하 ‘노무현 전 대통령’ 을 줄여서 ‘노통’으로 표기함을 양해 바랍니다.)

1) 목수의 아들 / 촌부의 아들
지금의 우리들이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라 고백하지만, 당시의 이웃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평범한 목수집 아들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오래도록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자라난 동네 역시 선한 것이 나올리 없는 땅 나사렛이었구요.
노통 역시 별다른 배경 없이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변변한 재력과 인맥과 학맥 중 어느 것도 그의 몫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남들보다 나쁘지 않은 지적 능력과 굳은 심지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2) 부르심에 응답함 / 뜻을 세움
때가 임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일상의 삶에서 공생의 삶으로 전환을 합니다. 광야에서의 고난은 그 지난한 통과 의례를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노통 역시 오랜 고학 끝에 변호사로서 입신을 시작하던 무렵, 조금은 남다른 소명을 자각하게 됩니다. 개인을 넘어 더 큰 자아를 위한 삶을 살기로 뜻을 세운 것이지요.

3) 하나님 나라 / 사람 사는 세상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무력이나 관습이나 율법이나 소유의 유무가 삶의 근거가 되는 세상을 너머,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노통이 꿈꾸었던 세상은 사람 사는 세상이었습니다. 억울함이 없고, 상식이 통하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대우 받는, 당연한 듯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여전히 너무도 요원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당겨오고 싶었습니다.

4) 검을 주러 온 자 / 반골의 싸움꾼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현실을 지배하는 통치 원리와 근본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끊임없이 율법을 기반으로 한 회당체제와, 그리고 무력을 기반으로 한 로마의 권력과 갈등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사랑의 실체이시지만, 경우에 따라서 공격적이었고 비타협적이었습니다. 율법에 도전하고, 성전의 권위를 부정하는 행위는 매우 위험한 자살 행위였으니까요.
노통이 꿈꾸었던 사람 사는 세상 역시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치열한 싸움을 통해 얻어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권 변호사 시절에는 수많은 시위와 쟁의의 현장에 뛰어들었고,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에도 독재정권과, 재벌과, 보수 언론과, 그리고 지역주의와의 끝없는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5) 호산나의 영광 / 노짱 열풍
예수님은 자신이 선포한 메시지의 전복성으로 인해 주로 당대의 소외된 민중들로부터 열광적 지지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지닌 독보적이고도 복합적인 카리스마에 매료되어 자신들이 갈망하는 각기 다른 소망들을 예수님에게 투영하려고도 했습니다.
노통 역시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 정점에서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아무런 수구적 기반 없이 오로지 국민들의 지지만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 됩니다. 한때나마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정치인이었음에 분명합니다.

6) 실패한 선동가 / 패배한 대통령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회당과 로마 제국 공동의 표적이 됩니다. 그것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힘이었습니다. 애초부터 비교가 되지 않는 갈등의 결과는 자명했습니다.
노통 역시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수구적 기득권 카르텔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그가 재임했던 5년간은 기득권 세력의 견고한 벽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참담한 절망의 시간으로 점철됩니다.

7) 제자들의 배신 / 지지자들의 외면
예수님, 그리고 노통이 대립자들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는 모습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정작 이해하기 힘든 일은 둘 다 자신들의 적극적인 지지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요청이 자신들이 품었던 다양한 열망들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대중들이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입들은 곧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더니 종국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서 그와 함께 운명을 걸었던 제자들 역시 그를 배신하거나, 부인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버립니다.
노통의 운명도 비슷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길이 우리들의 욕망을 끝없이 충족시켜 주는데는 그다지 신통한 방식이 아님을 깨달은 대중들은 너무도 쉽게 노통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노통 주변으로 몰려들던 정치인들은 대중들의 외면에 당황하며 제각기 자신들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각개전투를 벌였습니다. 한편으로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을 관철하고자 했던 이들은 그를 비겁한 타협주의자로 몰아붙이며 가장 맹렬한 비판자로 돌변했습니다. 그들의 외면과 비판은 불행히도 5년 후 노통과 가장 다른 길을 제시하는 이를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8) 끔찍한 처형 / 비참한 자살
결국 예수님은 흉악한 정치범으로 규정되어 가장 끔찍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합니다. 주변의 어느 누구도 그의 곁에 남아있지 않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노통 또한 비슷한 최후를 맞습니다. 비록 권력에 의한 직접적인 사살은 아니라지만, 자신의 측근들과 가족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도덕성과 진정성마저 무참히 짖밟히고, 모든 이들이 등을 돌린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홀로 바위에 올라 몸을 던져 세상을 등집니다.

9) 그러나.... 다시 살아나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집니다. 그 죽음으로 인해서 노통이 다시금 우리들 마음속에서 부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의 삶을 다시 재조명하고, 그를 죽음으로 내 몬 냉혹한 현실을 비판하고, 무엇보다도 그가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던, 함부로 폐기처분하려 했던 이상과 가치들을 다시 한 번 꺼내들어 먼지를 털어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참다운 의미에서 부활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 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노통의 부활처럼 단순한 마음속의 부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의 궁극적 차원을 완성하심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신 유일회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내용이지만 오늘의 논점에서는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우리들은 항상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 그리스도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점만은 짚고 싶습니다. 예수가 따름의 대상이라면 그리스도는 신앙의 대상이겠지요. 다시 말해 우리들 크리스찬들은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는 예수님과, 우리의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사이에서 긴밀하고 지속적인 일치를 이루어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노통의 삶은 예수님의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당연히 이때의 예수님은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적 예수를 말합니다. 노통이 품었던 꿈도 그의 비극적 죽음으로 인해서 오히려 커다란 각성을 던져주며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다시금 부활합니다. 물론 여기서의 부활 역시 인류의 역사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의로운 이들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유지(遺志)의 부활을 뜻하는 제한적인 의미입니다.

그러한 기본적 이해를 전제한 후, 비로소 우리들은 노통이 외쳤던 사람 사는 세상과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상관관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노통이 외쳤던 사람 사는 세상과 예수님이 외쳤던 하나님 나라는 서로 일치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둘 다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분명 노통이 주장한 사람 사는 세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현실 세상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좌표로서 사람 사는 세상이 내포하는 수많은 가치들을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 사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의 충분조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당연한 필요조건이 아니겠습니까. 사람 사는 세상은 이 땅에서,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구현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가장 기초적인 항목들이라는 말입니다.

모두의 외면 속에서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가 뜻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아직은 접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노무현이라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수많은 열매로 다시 태어나는 소망을 봅니다. 이때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최소한의 필요조건으로서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다시금 우리들 영성의 촉각을 다듬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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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하게도 저의 생각은 많은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나봅니다. 우선, 노무현을 감히 예수님과 비교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가장 컸고, 그가 자살했다는 점, 그의 죽음과 장례가 불교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 그가 위험한 좌익이라는 점 등등을 조목조목 지적하시는 성도님들의 즉각적이고도 강력한 항의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하여, 솔직히 말하면 저는 지금 여러모로 반성하고 있습니다. 나야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맘대로 해 본 것이지만,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분들에게 심대한 상처와 실망을 안겨드린 것 같다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결국 제 경솔함으로 인해 교회 내에서 여러 사람이 불편해지는 결과만 초래한 듯합니다. 그래도 다비안들께서는 많이 혼내지 않으시고 차분히 제 생각의 모자람을 지적해 주시리라 생각하며 부족한 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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