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을 이용하시기 전에 먼저 <검색>을 이용해 보세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검색>을 통해서도 만족할만한 답을 얻지 못하였다면 이곳을 이용해 보세요.
글 수 509
목사님~
칼빈이 주장한 인간론 중 전적타락설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완전 타락 혹은 전적타락설의 본뜻이 인간이 완전히 타락했거나 부패했다면 선을 하나도 행할수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어서요. 그런데 인간은 실제로 살아가면서 악도 많이 저지르지만 그 와중에 선한 일도 행하지 않나요? 인간이 선을 행한다고 의롭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저도 확실히 이해하겠는데 도대체 칼빈의 전적타락설은 어떤 상황에서 나온 주장인가요? 제가 전적타락설을 오해했다면 한수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해야 논리적으로 맞는데, 인간에게 아직 선을 행하는 능력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완전히 부패"했다는 게 대체 말이 되는가? 자꾸 이런 의문이 들어서 질문을 올립니다. 제가 어설프게 질문을 던져도 목사님께서는 무슨 말인지 찰떡같이 알아듣고 능히 대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질문을 드리는 걸 보니 저는 아직 초보인가 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초보자도 알아들을수 있는 수준에서 한수 부탁드립니다.
칼빈이 주장한 인간론 중 전적타락설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완전 타락 혹은 전적타락설의 본뜻이 인간이 완전히 타락했거나 부패했다면 선을 하나도 행할수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어서요. 그런데 인간은 실제로 살아가면서 악도 많이 저지르지만 그 와중에 선한 일도 행하지 않나요? 인간이 선을 행한다고 의롭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저도 확실히 이해하겠는데 도대체 칼빈의 전적타락설은 어떤 상황에서 나온 주장인가요? 제가 전적타락설을 오해했다면 한수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해야 논리적으로 맞는데, 인간에게 아직 선을 행하는 능력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완전히 부패"했다는 게 대체 말이 되는가? 자꾸 이런 의문이 들어서 질문을 올립니다. 제가 어설프게 질문을 던져도 목사님께서는 무슨 말인지 찰떡같이 알아듣고 능히 대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질문을 드리는 걸 보니 저는 아직 초보인가 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초보자도 알아들을수 있는 수준에서 한수 부탁드립니다.
기독교 교리는 진리를 확정으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에요.
전적 타락설도 인간에게 나타나는 어느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라서
'인간에게 선한 구석이 하나도 없느냐?" 하고 묻는 건 의미가 없답니다.
전적 타락으로 볼 수밖에 없는 죄성이 인간에게 나타난다는 것이에요.
칼빈이 왜 저런 주장을 했는지는 제가 지금 설명할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그의 말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않아도
아우 님 자신을 돌아보면 저 말을 인정하게 될 겁니다.
<신학마당> 메뉴로 들어가면 "조직신학"이나 "기독교가 뭐꼬" 등에서 죄에 관한 글을 찾을 수 있어요.
일단 그런 글을 먼저 충분히 읽어주세요. 그중에 두 대목만 끌어다가 붙입니다.
성서의 인간 이해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서 나온 겁니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이나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 등, 성서에는 인간의 악에 대한 보도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 보도를 어떤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로 보면 곤란합니다. 그런 보도는 더 근원적인 어떤 사태를 전하려는 신학적 메타포에요. 구약성서 시대의 고대인들은 형제가 형제를 살해한다는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현실을 본 거죠. 도저히 다른 방식으로는 해명할 길이 없으니까요. 안 그런가요? 인간이 왜 그렇게 잔인한가요? 여러분, 죄의 현실을 봐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과 인간을 낭만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 깊이에서 보는 거예요. 또 제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 나왔군요. ‘존재론적으로’ 본다는 말이요. 죄는 인간에게 현실이잖아요. 개인이든 공동체든 우리에게 죄성이 강하게 나타나잖아요. 이 죄성이 개인보다 사회로 나가면 더 심해질 텐데요.
라인홀드 니버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착해도 그 개인은 구조 속에서 굴러가기 때문에 악할 수밖에 없다고요. 쇠고기 파동과 연관해서 졸속 협상을 했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꼼수를 쓰는 것이 모두 공무원들이잖아요. 그들을 하나하나 만나보면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아닐 거예요. 그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가는 거예요.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아침에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입맞춤하는 아주 자상한 아버지와 남편이었지만, 나치라는 구조에 들어가면 비인간적인 일을 서슴지 않고 했거든요. 이런 이중성을 얼마나 세련되게 감추는가, 아니면 드러내놓고 폭력적으로 하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이게 인간의 본질인 것 같아요. 어린아이를 유괴한다거나, 집단 폭력을 통한 내전 등이 일어나잖아요? 인간이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악을 저지르잖아요? 꼭 필요해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어느 단계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죽여요. 그리고 전쟁 때는 특히 부녀자 강간이 많이 일어납니다. 평소에는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그런 상황이 되면 그렇게 해요.
죄의 현실들은 아주 명백합니다. 성서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변화시키기만 하면 죄의 현실이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근원적인 힘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던 거예요. 그 힘을 사탄 혹은 마귀라고 본 건데요. 이것은 고대인들이 일종의 신인동성동형론적인 차원에서 신을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한 것뿐이에요. 여기서 핵심은 죄와 악에 존재론적 뿌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혹은 마귀가 시공간적인 범주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어요. 그것은 고대인들이 인식하는 통로였을 뿐이니까요. 오늘날에는 뭐가 악의 존재론적 뿌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프로이트라면 우리의 무의식이 그렇게 한다고 말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탄이나 마귀가 틀렸다는 말은 아니고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거죠. 동정녀 마리아가 오늘날의 생물학적 차원에서 보면 말이 안 되지만, 그것의 신학적 내용이 뭔지를 알면 충분한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이나 마귀의 신학적 내용이 뭔지를 모른다면, 그와 관련해서 엉뚱한 일도 많이 일어나게 되죠. 영안이 있다고 하는 교회 권사님들, 주로 기도를 열심히 하는 여자 분들이, 저 사람은 귀신이 턱에 달렸다거나 등에 시커먼 게 있다고 말하잖아요. 환각, 환청일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밤에 공동묘지 옆을 지나가면 나무에 뭐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어떤 사람의 얼굴이나 등에 귀신이 몇 마리 붙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신병적인 자기 암시를 통해 반복된 것이 표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탄과 마귀의 실체를 경험할 수는 없어요. 사탄이나 마귀의 방식으로 기독교가 말하려고 했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면 됩니다.
성서 기자는 우리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악의 근원을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악을 현실적으로 봤던 거예요. 뚫어지게 보고 있는 거죠. 죄를 순진하게 보지 않고 아주 근원적인 차원에서 봤어요. 그래서 존재론적이라고 말한 겁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인간이 투쟁해서 이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탄이 나오고 마귀가 나오는 거죠. 이건 존재론적 힘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투쟁하거나 노력해서 극복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되나요? 안 되죠? 그런 투쟁이나 노력이 우리의 악한 행위를 약간 줄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는 그런 경향 자체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죄가 구성적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무지가 죄라는 헬라 철학자들의 주장보다는 모든 인간이 총체적으로, 근본적으로 죄에 기울어졌다는 성서와 기독교의 주장에 훨씬 타당한 근거가 있다. 이미 오래전에 에릭 프롬이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에서 이런 문제를 여러모로 분석했는데, 그 책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약간씩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긴 하지만 인간에게 파괴적인 경향이 존재론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부정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런 죄의 현실이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서 어떻게 규명되고 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