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다르멘마크트

언젠가 내가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베를린에서 가장 역사적인 의미가 있고 품위 있는 건물들은 거의 옛 동베를린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뚫린 그 유명한 ‘운터 덴 린덴’ 가(街) 양쪽으로 그런 건물들이 즐비하다. 운터 덴 린덴에서 남쪽으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겐다르멘마크트(Gendarmenmarkt)가 있다. 이 이름 끝에 ‘-markt’가 붙은 걸 보면 이곳이 옛날에 시장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찌이텐 파노라마 출판사에서 출판한 베를린 사진첩의 설명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2세 시절에 이곳에서 군사훈련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 나에게는 이곳의 역사적 배경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베를린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알려져 있는 그곳에서 내가 맛본 평화스럽고 감미로웠던 몇 장면을 스케치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우리 가족이 살던 알트모아비트 야고보 스트라세(街)에서 겐다르멘마크트에 가려면 우선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은 ‘6월17일’ 가(街)를 타고 브란덴부르크까지 가야 한다. 베를린에서 가장 긴 직선도로인 6월17일 가(街)는 브란덴부르크 문 서쪽에서 시작되는 ‘티어가르텐’ 숲을 동서로 가로 지르는 간선도로이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일단 우회한 후, 다시 좌회전 한 후 일방통행 도로를 거치다보면 동베를린의 전형적인 건물인 4,5층짜리 빌딩 숲 사이에 넓게 자리하고 있는 겐다르멘마크트에 도착한다. 여기에 세 채의 건물이 동쪽을 향해서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건물 앞이 광장이다. 광장에서 볼 때 오른쪽의 건물이 프랑스 돔인데, 프랑스 로마가톨릭의 종교박해 때 베를린으로 피신 온 위그노파의 교회당이다. 왼편에는 독일 돔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 오른 편의 프랑스 돔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건축된 게 아닐까 생각된다. 가운데 자리한 건물이 ‘샤우슈필하우스’인데, 그냥 우리말로 극장이라고 보면 된다.
서베를린 지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 건축한 베를린 필이 연주회장으로 이름이 있었지만 동베를린에서는 역사적 깊이가 있던 이 샤우슈필하우스가 유명했다. 집사람이 거의 직업적으로 이런 음악회를 찾아다닌 탓에 나는 주로 그 사람을 차로 데려다주는 운전기사 역할을 하거나, 아주 드물게는 함께 감상하느라 이곳을 자주 찾았다. 음악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한국의 시골교회 목사가 유럽에서 가장 고전적인 극장을 드나들었다는 건 돼지의 진주 목걸이 형국인지 모르지만, 그런대로 추억만은 따뜻하게 간직되어 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집사람을 샤우슈필하우스에 데려다주고 부근 적당한 곳에 주차한 후 혼자서 두 시간 가까이 이 겐다르멘마크트 주변을 산책했다. 유럽은 여름철에 시간을 한 시간 앞당기기 때문에 저녁 9시가 되어도 여전히 황혼이다. 특히 베를린처럼 북쪽에 위치한 도시의 황혼은 유난히 길어서 산책하기에 좋다. 그날 나는 아무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세 채의 건물을 빙빙 돌거나 광장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거나, 심심하면 다시 일어나서 옛 동베를린의 심장부답게 화려하게 꾸며진 부근 상점 쇼윈도를 기웃거리면서 어둠이 겐다르멘마크트를 감싸 안을 때까지 어슬렁거렸다. 카페로 사용되고 있는 프랑스 돔 뒤편의 부속 건물 안에서 은은하게 감도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으며, 카페 밖에 설치된 탁자 위로 밤안개 같은 가로등 불빛이 내리비추고 있었다. 콘서트가 열리고 있는 샤우슈필하우스 창문에서도 여러 색깔의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적당한 어둠이 깔린 광장, 세 건물을 밝혀주는 조명, 벤치에 앉아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커플이나 산책하는 노인 부부들, 반바지에 샌들을 끌고  어슬렁거리던 나도 그런 꿈속 같은 장면의 한 장식품이었다. 운전 계획만 없었더라면 카페 앞마당 노천 탁자 앉아 이국 풍경을 만끽하면서 맥주 한잔을 마셨을 텐데, 어쩔 수 없이 구경만 했다.  
정확한 일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인가 그 날도 역시 겐다르멘마크트 광장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샤우슈필하우스(독일 돔?)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상 군(群)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뜨였다. 그는 예술 사진을 찍는 전문가였다. 예술가들의 행동은 늘 그렇지만 내 눈에 단순하게 보이는 석상에서 무얼 찾겠다는 것인지 그는 삼각대를 여러 곳으로 옮기면서 사진 찍기에 열심이었다. 나에게는 그가 찍으려는 그 대상보다 그 사람이 더 재미가 있어 보였다. 아마 그 사람은 이 장소에 수없이 나왔을 것이다. 똑같은 대상이지만 전혀 다른 깊이로 다가오게 될 그 순간을 포착하려고 저렇게 지루한 반복 작업을 펼치는 것 같았다. 그 작가가 찍고 있는 석상은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여러 상들이 둘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심인물이 누군지 호기심이 나서 그에게 묻자 그는 시인 쉴러라고 대답했다. 나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게르만족 출신의 황제도 아니고, 세계적 철학자 칸트도 아니고, 국민작가 괴테도 아니고 쉴러라니 무슨 말인가. 그가 독일 문명을 대표한다는 말인지.
독일을 떠나야 할 시간이 가까운 12월 초에 우리 가족은 놀이삼아 다시 겐다르멘마크트에 갔다. 그날 광장에 성탄목을 세우는 공사가 있었다. 거의 돔 높이에 닿을 정도의 키 큰 성탄목을 세우기 위해 기중기까지 동원된 큰 공사였다. 12월 중순 쯤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그곳에서는 성탄 오색등이 장식된 성탄목 옆에서 노동단체의 특별 행사가 있었다. 그 행사는 다행히 공짜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설치해놓은 야외 스탠드 한쪽에 자리를 얻어 구경했다. 노동문제를 주제로 한 무대였는데, 노래와 브라스 벤드 연주, 풍자극 등이 펼쳐진 것으로 기억된다. 그 무대가 내게는 독일 사람들의 과거역사와 현재가 어우러진 한판 ‘마당극’처럼 보였다.


사진설명
광장의 성탄목 앞에서(밤이라서 뒷 건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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