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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https://youtu.be/frB184Npjx4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로마서 8:14-7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8:14-17, 성령강림절, 201969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인생이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꾸로 흐트러지는 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거는 생각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말씀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걸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한 조건들도 여기서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어떤 조건을 손에 넣으면 인생 성공이라는 주장은 좋게 봐서 선의의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조건 가운데서도 매 순간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리기보다는 일희일비하면서 삽니다. 비교적 사회적인 신분이 높은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완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인간 실존입니다.

이런 실존에서 최선의 삶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제가 개인적으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최선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인지를 여러분은 이미 눈치챘을 겁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삶이 최선입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간 사람을 가리켜서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롬 8: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바울의 이 진술은 폭탄 발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데, 바울은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놀랍지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17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상속받을 하나님의 유산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서만 우리의 인생은 완성됩니다. 그 생명을 상속받을 자격이 주어지기에 하나님의 아들은 이미 삶의 완성에 들어간 것입니다. 대기업 총수의 아들은 자기가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대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남성으로서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딸이라고 해도 됩니다. 17절에서는 중립적인 단어인 자녀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지 아닌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게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영으로 존재하는 분이기에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처음부터 성령 공동체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맞은 첫 번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경험된 사건을 가리킵니다. 오늘 제1독서로 읽은 사도행전 2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실감하기가 어렵다고 여기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숨을 쉬면서도 공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영과 바람과 호흡을 같다 보고, 그것을 루아흐라는 단어로 불렀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능력으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엄마의 자궁에서 나오면 스스로 숨을 쉬기 시작하고, 죽을 때는 숨이 그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의 영

바울은 15절에서 영을 두 가지로 구별했습니다. 하나는 종의 영이고, 다른 하나는 양자의 영입니다. 종의 영을 받느냐, 아니면 양자의 영을 받느냐에 따라서 삶이, 즉 인생이 달라진다고 보았습니다. 1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 삶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바울의 이 말을 부정하지는 않을 겁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종의 영은 무서움을 특징으로 합니다. 종은 주인의 눈치를 봅니다. 주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노심초사합니다. 수능시험을 앞둔 학생이 점수가 낮게 나올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종의 영은 인생이 실패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안식과 평화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삶에 매달리게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또 하나의 다른 단어인 사탄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들도 가끔 그런 말을 자녀에게 합니다. 현장 노동자들이 사고를 당한 뉴스를 접하면서 자녀들에게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런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해. 그러니 정신 차리고 공부 열심히 해.’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지만 종의 영을 추종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반복해서 듣고 자라는 아이는 인생을 무서워할 겁니다.

저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오늘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 중에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을 지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떤 사회현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여러분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증오와 혐오가 그 증거입니다. 반세기 전의 언어인 빨갱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내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현직 대통령을 빨갱이라고 선동합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 이끌림을 받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발언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지금 가난을 무서워합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만이 아니라 가난을 벗어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무서워하는 사회 분위기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조선일보는 얼마 전에 북한의 김정은이 지난 하노이 회담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한 사람은 처형, 다른 한 사람은 강제노역, 또 한 사람은 근신에 처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 신문은 김정은을 공포의 인물로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그 보도는 대체로 오보로 판명이 났습니다. 저는 김정은을 좋아하지 않지만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북한체제를 좋아하지 않지만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조선일보는 왜 대한민국 국민을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 사로잡히게 하는 걸까요? 그게 그들에게 장사가 되는 길이라는 답 말고는 다른 답을 찾기 힘듭니다.

기독교 신앙을 종의 영의 관점에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장 단적으로 구더기와 유황불로 표상되는 지옥에 대한 공포를 조장합니다. 이슬람교 포비아도 한국교회에 만연해있습니다. 심지어는 십일조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십일조를 빼먹었다가 집안에 큰 사고가 일어나서 더 많은 돈이 나갔다는 이야기도 나돕니다. ‘개콘에 나올 만한 소재인데도 일부 사람들에게 먹힙니다. 그렇게 행패를 부리는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는 게 여러분의 정신 건강에 더 좋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는 기쁨과 교회 공동체에 속한 도반들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거룩한 연대감으로 참여하는 것이지 두려움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세련된 방식의 율법 신앙도 기본적으로는 종의 영에서 나온 겁니다. 주로 청교도 신앙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신앙에 노출되면 자책감의 노예가 됩니다. 뻔뻔한 것보다는 낫지만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양자의 영

바울은 로마 기독교인들이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양자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제 인생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아빠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장 가깝게 부르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드릴 때 사용한 호칭입니다(14:6). 그냥 부르는 게 아니라 부르짖는 겁니다. 부르짖는다고 번역된 헬라어 크라제인은 환호성을 지른다는 뜻입니다. 종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가능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환호성을 외치듯이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환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고아였다가 친부모를 찾게 되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더구나 친부모가 전국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어른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환호성을 올릴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의 인생을 환호성을 치듯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종의 영을 받아서 무서워합니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른다는 말이 실제로 무슨 뜻인지 제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여기서 가장 중요합니다. 아버지가 어린 자녀들의 삶을 책임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저의 삶을 책임지는지는 제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간혹 불안하기도 합니다. 폭풍우 속을 아버지와 함께 걸어가는 아이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한편으로는 불안해도 근본에는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확실하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단계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이런 신앙은 모든 일이 잘 풀리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혼란스럽게 보이는 일마저 하나님 생명의 힘에 휩싸였다는 사실을 뚫어보는 것입니다.

저는 오래 테니스를 쳤습니다. 테니스는 제가 종종 한 이야기입니다. 군목으로 입대할 때부터 시작했으니까 대략 40년이 됩니다. 가장 좋아하는 취미생활입니다. 더 늙거나 몸을 다쳐서 앞으로 테니스를 전혀 할 수 없게 된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테니스가 아니면 대신 걸을 수는 있고, 걷지 못하면 휠체어는 탈 수 있으니까요.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 할 상황이 오더라도 책을 읽거나 기도를 드리고, 커피와 차를 마실 수 있으니 내가 생존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테니스를 즐기는 것에 비해서 차를 마시는 것이 내가 생명을 경험하는 데에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을병에 걸리거나 심한 장애를 입어도 괜찮다는 말이냐, 하고 묻고 싶은 분들이 계신가요? 그런 상황마저 제가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런 상황이 닥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저와 함께하실 것이니 미리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면서 환호성을 올리는 것이라고 믿기에 저는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광과 고난

하나님의 아들로 산다고 해서 모든 인생살이가 일시에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로 신경 거슬리는 때도 있고, 짜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도 종종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환호한다는 이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생명이 완성되는 종말에 가서야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 종말이 이르러야 우리는 하나님을 실제로 아빠 아버지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얼굴을 얼굴로 대면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불분명합니다. 종말이 되면 우리는 모든 죄와 죽음의 힘으로부터 실질적으로 해방될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시련과 어려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려움은 장애나 질병이나 가난만이 아니라 행복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것까지 포함한 인간 실존 전체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하기에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상속자에 대한 설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라는 표현을 덧붙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활의 영광과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듯이 우리도 영광을 받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광과 고난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삶에 이미 죽음이 들어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외면받습니다. 그의 고난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만 강조하지 우리도 고난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모른 척합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외면하면 기독교 신앙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것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말은 고난을 미화하는 게 아닙니다. 삶을 비관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고난이 없을 수 없는 이 현실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저항해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의 한 부류인 영지주의는 고난을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문제를 없는 것으로, ()실재로 간주했습니다. 세상은 모두 악하고 썩을 것이기에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악하고 영만 거룩하기에 육체에 속한 것들을 포기하고 영혼 구원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영지주의 신앙은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합니다. 교회라는 성채에 갇혀서 사회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기도와 말씀과 예배에만 관심을 둡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입니다.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나치 시대의 독일교회가 그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의 한국교회가 그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역사에 하나님 나라와 정의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에 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현실 속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데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불의한 역사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일상 자체가 사실은 고난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돈벌이를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은 많은 걸 고민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 불이익도 겪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강력한 식욕이 있습니다. 먹지 않고는 생존하지 못하기에 식욕은 우리의 본능에 자리합니다. 다른 동물까지 잡아먹습니다. 채식만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완전한 채식은 불가능합니다. 채식에도 균이 들어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용할 양식을 준비해야 하는데,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일용할 양식도 배려해야 합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우리는 어울려서 살아야 합니다.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과도 역시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일상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인지를 늘 초심으로 돌아가서 성찰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다 고난입니다. 양자의 영을 통해서 인생을 환호하듯이 살아가도록 이끌림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가 기꺼이 감당해야 할 인생의 숙제입니다.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든 크고 작은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의 빛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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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하늘연어

June 10, 2019
*.86.237.246

"폭풍우 속을 아버지와 함께 걸어가는 아이의 심정처럼,

죽음마저 두려워 하지 않는 단계로 나아갔으면 한다"는 설교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감정이 이입되었고, 짧은 시간이나마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왜인지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진리가 교감되는 순간적인 벅참이

저를 견딜 수 없게 한 것같습니다.


"모든 크고 작은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의 빛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 세상에서의 싦이 그렇게 두렵지마는 않습니다.


지난 대구 샘터교회 창립일 때 대구에 가서 예배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목사님과 대구샘터교회 교우들께서 기다리고 준비하셨음을,

주간일지를 읽으며 알았고(예상도 했지만....), 마음 아팠습니다.

많은 다비안들이 그 자리에 함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정 목사님으로 인하여 영성이 증폭되고, 교감되고,

두려움 없는 기독교 정신의 정점에 서서 제가 기독교를 관조할 수 있게 되어 가는 것이

신비롭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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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4]정용섭

June 10, 2019
*.182.156.135

모든 인간의 삶에 뿌리박혀 있는 고난을 피하지 말고,

그 고난을 감싸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의 빛에 온전히 조명받는 것이

기독교 영성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한두 번 깨달았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서

철저하게 이해타산으로 작동되는 세속에 사는 일반 신자들에게

기독교 영성의 중심으로 들어오라고,

왜 들어오지 않고 망설이냐고 말하기가 망설여집니다.

그래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니, 그리고 다른 길이 없으니

불문곡직하고 내가 아는 한계 안에서 복음을,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삶의 환희와 자유를 전할 뿐입니다.

모든 것은 성령에게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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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알아야

June 11, 2019
*.144.217.110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께 가까이 가까이 가도록 도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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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4]정용섭

June 11, 2019
*.182.156.135

알아야 님, 오랜만에 반갑습니다.

아기 잘 크겠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말보다 더 정확한 것은

이미 가까이 오신 하나님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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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알아야

June 12, 2019
*.187.14.236

와! 목사님 절 기억해주셔서 저희 아이까지도 기억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 설교를 들으며 태교했던게 엊그제같은데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요! 그리고 지금 여기 저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잠시 잊있던 저를 돌아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주 서울 샘터교회를 처음 가 보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오신다고해서 31개월 아이를 아빠한테 맡기고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가서 설교를 듣는데... 주말내 아이랑 놀고 대장내시경 검사로 금식을 하느라 피곤해 설교를 듣다 잠이 들어서 싸이트에 들어와 다시 설교를 읽다가 글을 남겼습니다.

지난 3년 아기를 키우고 직장 생활하느라 말씀을 깊이 공부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되어보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알 것같아요. 하나님을 인간에 빗대면 안 되겠지만, 자녀를 향한 그 분의 마음이 부모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한 없이 조건없이 사랑해 주고싶은 마음이요. 그런데 많은 교회와 목회자님들으 아직도 어떤 조건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는 종의 모습을 갖도록 설교하시고 강요하시고 그런 분위기를 만드시는 것같아요. 그런 분위기에서 신앙 생활하신 분들은 그런 틀 안에서 나오기 어려워하시고요. 그것 밖에 몰라서요. 암튼, 이런 현실때문에 양자의 영을 맘껏 누리지 못하는 현실이 슬프고 답답하고 아이러니입니다. 이런 상황도 우리가 감당해야하는 고난이겠죠!
다음 달에 꼭 서울에서 뵙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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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4]정용섭

June 12, 2019
*.182.156.135

앗, 지난 주일 서울샘터교회 예배에서 출입구 쪽에 앉았던 분이군요.

예배 마치기 전에 이미 눈에 안 보이기에

설교가 마음에 안들어서 일찌감히 도망갔나 했습니다.

다음달에 얼굴 봅시다. 알아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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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부스러기은혜

June 12, 2019
*.229.148.165

고난은 영광의 빛에 휩싸여있는 것이다...

고난은 영광에 이르는 통과의례요 관문이 아닌,
고난이 곧 영광이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요 ,
고난이 곧 구원인것이다...라고 해석할수 있겠죠?

문득 당나라 고승의 어록들을 떠올리게 하는 결론을 내려주셨군요
'번뇌가 곧 부처요, 부처가 번뇌이다...'

' 누심(漏心 )과 부처는 둘이 아니다'

고통이 득도요,득도가 곧 고통이다...

변덕스럽기 이를데 없는 천한 마음이 곧 부처요 득도다...라는 뜻이겠지요.


때론  도망가고 싶고, 외면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눈 앞의 현실이
하나님 나라를 포함하는 것이지, 현실을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가,

구원이 따로 존재하는게 아니라고 해석할수 있을까요?

대안이 있을수 없는, 고난으로 점철되는 현실을 우린 오늘

로마서를 쓴 바울의 시각처럼 구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걸까요?

고난앞에서 사망이 역사했던 욥과, 일관된 신념으로 그들이 생명으로 여겼던 신앙의 소유자인 욥의 친구들 사이에서,
욥의 가슴에 들끓고 있던 사망을 생명이라고 인정해주신 하나님은,

오늘 누구에게 들킬까봐 내색도 못하며 남모를 갈등과 신앙의 회의속에서 영적인 홍역을 치루고 있는

우리 가운데 이미 임재해계실터인데....
그런 그분을 현실의 리얼리티로, 떨리는 광휘로 경험하려면 영적 임계량 수위를 부단히 채워가는 것 말고

 다른 지름길은 없는 것인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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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하늘연어

June 12, 2019
*.86.237.246

부스러기은혜님 반갑습니다.

실존에서 득도에 의한 자기완성이 가하다면,

분명 부스러기님은 득도완성자일겁니다.ㅎ


주파수가 동조되면 잡음이 없어지듯,

우리 삶도 분명한 기준점이 있으니,

혼란한 삶에서 맑은 소리를  분별하고 통찰하며 살아봅시다...


날도 더워지는데 우리 시원한 냉면 어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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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4]정용섭

June 12, 2019
*.182.156.135

부스러기 님이 제가 한 문장으로 표현했으나

정말 설교에서 하고 싶었던 것을 꼭 찝어내셨군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실제로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불교의 내용을 실제로 알고 절에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지 않은 것처럼이요.

지금도 멀었지만 지난날을 생각하면 신학생 시절과 젊은 목사 시절의 저도

참된 믿음은 둘째 치고 기독교가 뭔지 모르고 지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정작 중요한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은

목사나 일반 신자 가리지 않고 대단히 불안할 겁니다.

손에 잡히는 건 없는데 믿음생활은 열심히 해야하니까요.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열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습니까.

고난과 영광의 관계는 도식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고난은 실제로 당하는 불행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고난은 깊숙한 곳에 자리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구체적인 일상에 깃든 영광의 빛을 보는 게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1)존재의 신비 앞에서 황홀해할 줄 알고

2)예수를 믿음으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이 분명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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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 부활절 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서 (행 16:16-34) [4] 2019-06-02 1485
797 부활절 예수의 평화 (요 14:23-29) [4] 2019-05-26 1508
796 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2019-05-19 1109
795 부활절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5] 2019-05-13 1411
794 부활절 바울,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행 9:1-6) [4] 2019-05-05 1326
793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1327
792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1440
791 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4] 2019-04-14 1343
790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1462
789 사순절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5] 2019-03-31 1632
788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1631
787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1440
786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1512
785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1291
784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1704
783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1686
782 주현절 예수 부활의 증인들 (고전 15:1-11) [8] 2019-02-12 1854
781 주현절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6] 2019-02-03 1920
780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2102
779 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6] 2019-01-21 1612
778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1831
777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1630
776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2235
775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1617
774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1492
773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1604
772 대림절 예수 강림! (살전 3:9-13) [6] 2018-12-02 1733
771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1281
770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2084
769 창조절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6] 2018-11-12 2268
768 창조절 나오미와 룻 (룻 1:1-18) [10] 2018-11-04 2154
767 창조절 바디매오의 구원 이야기 (막 10:46-52) [4] 2018-10-28 2025
766 창조절 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욥 38:1-7) [20] 2018-10-21 2065
765 창조절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4:12-16) [2] 2018-10-15 1481
764 창조절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2018-10-08 2276
763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2537
762 창조절 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막 9:30-37) [4] 2018-09-24 1771
761 창조절 종의 노래 Ⅲ (사 50:4-9) [2] 2018-09-16 1450
760 창조절 '힐링'의 원천 (막 7:24-37) [2] 2018-09-10 1842
759 창조절 말씀과 삶의 일치로 인한 복 (약 1:17-27) [4] 2018-09-02 2257
758 성령강림절 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6] 2018-08-26 2239
757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13] 2018-08-19 2455
756 성령강림절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사랑 (엡 4:25-5:2) [4] 2018-08-13 1901
755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 충만이다! (요 6:24-35) [2] 2018-08-05 1862
754 성령강림절 예수는 왕인가? (요 6:1-15) [8] 2018-07-29 2003
753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1991
752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2344
751 성령강림절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8] 2018-07-09 2312
750 성령강림절 연보도 은혜다! (고후 8:7-15) [6] 2018-07-01 1872
749 성령강림절 두려움의 대상 (막 4:35-41) [4] 2018-06-24 2444
748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비유 (막 4:26-34) [5] 2018-06-17 2626
747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10] 2018-06-11 2169
746 성령강림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4] 2018-06-03 2732
745 성령강림절 거듭남과 성령 (요 3:1-13) [2] 2018-05-27 2371
744 성령강림절 성령이 도우시리라! (롬 8:22-27) [4] 2018-05-20 2367
743 부활절 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2] 2018-05-14 2369
742 부활절 성령 임재의 증거 (행 10:44-48) 2018-05-06 2231
741 부활절 복음의 보편적 능력 (행 8:26-40) [4] 2018-04-29 2686
740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3:16-24) 2018-04-22 2074
739 부활절 예수의 살과 뼈 (눅 24:36-48) [4] 2018-04-15 2161
738 부활절 오래된 미래 (행 4:32-35) [4] 2018-04-09 2566
737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2580
736 사순절 예수의 죽음과 매장 (막 15:33-47) [4] 2018-03-25 2327
735 사순절 예수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 (요 12:20-33) [4] 2018-03-18 2201
734 사순절 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2018-03-11 2643
733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3127
732 사순절 "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1-38) [7] 2018-02-25 2802
731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3036
730 주현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8] 2018-02-12 2115
729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2508
728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4] 2018-01-28 2231
727 주현절 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6] 2018-01-21 2353
726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2356
725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3384
724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2848
723 대림절 구원의 바위 (시 89:1-4, 19-26) [4] 2017-12-24 2351
722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살전 5:16-24) [4] 2017-12-17 2219
721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3] 2017-12-11 2860
720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3060
719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9] 2017-11-26 2460
71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3104
717 창조절 언약을 통한 생명 경험 (수 24:19-25) [12] 2017-11-12 2223
716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3931
715 창조절 왜 복음인가? (롬 1:8-17) [7] 2017-10-29 4178
714 창조절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 (출 33:12-23) [2] 2017-10-22 2254
713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3731
712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마 21:33-46) 2017-10-08 2798
711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3416
710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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