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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성령강림절 조회 수 1228 추천 수 0 2019.06.30 21:38:01
설교듣기 : https://youtu.be/Nylfzw-2iqI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열왕기하 2:1-2, 6-14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성령강림후 셋째 주일, 2019630

 

1.여호와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2.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6.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가니라 7.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서 있더니 8.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9.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10.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 11.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12.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13.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14.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 중에서 초자연적인 카리스마가 가장 출중했던 두 사람을 손에 꼽으라고 하면 누구나 기원전 9세기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엘리야와 엘리사를 거론할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사제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이들보다 훨씬 오래전에 활동한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도 초자연적인 카리스마가 강한 인물들로서 여호수아는 출애굽을 이끈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나안 땅에 자리를 잡게 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면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갈랐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엘리야의 마지막 순간

오늘 설교 본문은 엘리야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자리에 엘리사가 동행했습니다. 엘리야는 평소에도 드라마틱하게 산 것처럼 그의 마지막 장면 역시 매우 특이합니다. 왕하 2:1절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려고 했습니다. 그 진행 과정이 그 뒤로 설명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요단강을 건너서 요단 광야로 가기 위해 요단강 강가에 섰습니다. 엘리야가 겉옷을 벗어서 요단강 물을 내리치자 물이 갈라지면서 마른 땅이 드러났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를 때는 지팡이로 홍해 물을 쳤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요단강을 건너 요단 광야로 나갔습니다. 이제 정말 마지막 순간이 왔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엘리사에게 묻습니다. 엘리사는 성령의 능력을 갑절로 달라 했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면서 요단 광야를 지나는 중에 갑자기 불 수레와 불 말이 나타나서 두 사람을 갈라놓았습니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 장면을 왕하 2:11절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 수레와 불 말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엘리사는 다음과 같이 소리 질렀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는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요단강 강가에 서서 엘리야가 승천하면서 떨어뜨리고 간 겉옷으로 요단강 강물을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강물이 갈라졌고, 엘리사는 자기의 거처로 돌아갔습니다.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를 대하는 독자들은 엘리야가 실제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거냐, 아니냐, 하는 궁금증이 생길 겁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중국무협소설에 나오는 공중부양을 상상할지 모르겠습니다. 무협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나무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대나무 사이를 뚫고 날아다니고, 높은 담이나 지붕 위를 날짐승처럼 자유롭게 뛰어넘습니다. 무예의 절정 고수가 되면 우리가 볼 때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능력을 구사할 수 있긴 합니다. 기계체조 선수들도 중력을 초월한 듯이 자신들의 몸을 움직입니다. 엘리야에게 이런 능력이 있어서 승천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엘리야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28백 년 전의 일이라서 우리가 그 실체적 진실을 다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게 가장 타당하지 않을는지요.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 광야에서 길을 가는 중에 세 가지 자연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불 수레와 불 말과 회오리바람입니다. 불 수레와 불 말은 요단 광야에 불어오는 열기 아니겠습니까. 열기가 너무 강하니 불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엘리야와 함께 그 현장에 있었던 엘리사는 뜨거운 열기가 바로 하나님이 엘리야를 하늘로 끌어 올리기 위해서 보낸 불 수레와 불 말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강하게 불었습니다. 1미터 앞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황사현상도 수반되었을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단 광야에서 늙은 엘리야와 젊은 엘리사가 걸어가는 중입니다. 불덩어리 같은 열기를 품은 토네이도가 들이닥쳤습니다. 늙은 엘리야는 몸을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습니다. 짙은 황사를 동반했기에 앞을 볼 수 없어서 엘리사는 선생 엘리야를 구할 수 없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 토네이도가 사라졌지만 엘리사는 엘리야의 흔적을 엘리야의 겉옷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엘리야는 불 말이 끄는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인 고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위의 설명은 불편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종교적인 진리이지 사실 보도라는 점에서 진리는 아닙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이라는 말도 역시 사실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종교적인 진리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죽지 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죽었는데, 어떻게 엘리야가 죽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9)입니다. 엘리야가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 말씀에 어긋납니다. 오늘 본문도 엘리야가 죽지 않았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셨다고만 말합니다. 그 말은 곧 엘리야의 수명이 다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수명이 다하면 하나님이 불 수레와 불 말과 회오리바람을 보내서 하늘로 올리실 겁니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그런 현상이 경험될 테니, 기대하십시오.

 

하늘과 땅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에 관한 것입니다. 형식은 죽음이지만 내용은 삶입니다. 엘리야의 삶은 그야말로 불이나 회오리바람과 같았다고 봐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불과 바람으로 자주 묘사됩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때 그 매개는 떨기나무의 불(3:2)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제사장들과 번제 싸움을 벌일 때 여호와의 불(왕상 18:36) 경험했습니다. 구약성경 언어인 히브리어 루아흐에는 영이라는 뜻과 바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바람을 생명의 영으로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인식과 경험은 신약성경에도 이어집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야기(2:1 이하)에 등장하는 두 가지 현상은 바람과 불꽃입니다. 불은 모든 사물을 해체하는 능력이고,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강력한 능력으로 작용한 물리현상입니다. 하나님을 은유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불과 바람이 가장 적합해서 성경 기자들이 이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엘리야가 불 수레를 타고 승천했다는 이야기는 엘리야가 평소에 하나님과 일치해서 살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일치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말이 손에 정확하게 잡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도 어려우니 하나님과의 일치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것은 종교 전문가인 목사나 신학자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적으로 진실한 기독교인들의 생각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일치에 신경 쓰기에는 오늘날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 어렵고 복잡하고 시급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최선은 가능한 예배에 빠지지 않고,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자신이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는지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세련된 모습은 어느 정도 갖춰지는 듯해도 내면은 제자리걸음입니다. 평생 테니스를 쳤는데도 실력이 늘지 않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일치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불 말이 끄는 불 수레를 타고 회오리바람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경험을 평소에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하나님과의 일치, 또는 하나님 경험은 생명의 신비, 또는 삶의 신비에 대한 경험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창조자이시며 우리를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이 자신을 만들었다는 주장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무기물에서 탄소와 결합하여 유기물이 되고, 그 유기물에서 단세포 생명체가 나오고, 이어서 다세포 생명체로 진화하면서 최종적으로 인간까지 왔다는 겁니다. 앞으로 또 어떻게 진화할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현대 생물학과 물리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무기물에서 인간에 이르는 진화의 과정이 옳다고 해서 오늘의 생명 현상이 다 해명되지는 않습니다. 진화 메커니즘이 모든 궁극적인 질문에 대답을 주지 못합니다. 왜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고 무()는 없는지를 진화 메커니즘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생물학은 생명의 진화에 대한 현상적 원리를 설명할 뿐이지 생명의 근원은 설명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과학의 한계입니다. 과학이 다룰 수 없는 영역을 가리켜서 생명의 신비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생명을 단순히 생물학적인 현상만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훨씬 포괄적이고 복잡하고 유기적입니다. 훨씬 다층적이고 심층적이고 시원적입니다. 성경은 생명의 이런 차원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그 마지막 지점은 하나님입니다. 삶의 가장 궁극적인 심연이 곧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을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서 특별한 언어로 표현합니다. ‘하늘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생명의 신비와 심연에 관한 은유적 표현이 바로 하늘입니다. 오늘 엘리야가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는 말은 생명의 근원이자 신비인 하나님에게로 수렴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주 공간인 하늘로 갈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이 이미 하늘입니다. 예수님은 반복해서 이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와 반대되는 말씀을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14:1절 이하를 따르면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라고 말씀하신 뒤에 제자들을 위해서 거처를 예비하러 가셔서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제자들을 그곳으로 안내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뒤에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씀을 근거로 하늘을 우주 공간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근원인 생명의 비밀, 생명의 신비, 생명의 심연에 예수님이 이르셨다는 말씀으로 봐야 합니다.

 

불 수레와 토네이도

우리는 불 수레와 회오리바람으로 묘사된 엘리야의 승천 경험을 일상에서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우선 가장 일반적이고 쉽고 재미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방탄소년단 콘서트에 가보십시오. 열광적인 분위기가 불 수레와 토네이도를 타고 승천하는 느낌 못지않을 겁니다. 그들의 콘서트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생명 에너지를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든 분들은 나훈아 콘서트에 가도 됩니다. 이런 가수들의 콘서트 입장권은 발매 10분 만에 매진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여러 종류의 이런 경험을 찾으면서 평생을 삽니다. 문제는 콘서트의 열광적인 느낌은 계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음원이나 시디로 느낌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불 수레를 타는 듯한 황홀한 느낌을 비교적 오래 유지해주는 대상은 문학과 철학, 즉 인문학입니다. 대중음악과 인문학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중가요 콘서트는 우리의 정서와 감정을 끌어올리지만, 인문학은 우리의 세계관을 끌어올립니다. 대중음악이 수준이 낮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라 특징을 말하는 것이니, 오해는 마십시오. 예를 들자면 소로우의 <월든>이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또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통해서 삶을 혁명적으로 새롭게 이해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는 말은 옳습니다. 그 훈련을 통해서 삶의 본질을 이해할 것이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 겁니다.

가장 정확하고 바른 방법은 종교 경험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예수 경험입니다. 예수 경험은 엘리야의 승천에서 보듯이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경험과 같습니다. 여기서 불 수레는 궁극적인 생명을 얻는 경험을 가리킵니다. 앞에서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승천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사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사건이 구원, 즉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라서 출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통해서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런 신앙 경험을 압축적으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5,26).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이 진술과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는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승천했다고, 즉 예수가 부활했다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평생 예수를 믿고 살면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듯은 경험은 없었다고 말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상이 더 시급해서 불 수레에 관해서는 생각할 여유도 없을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게 현실이긴 합니다. 혹시 저에게 정 목사, 당신은 그런 경험이 있나?”라고 묻고 싶을지 모르겠군요. 그런 경험 없이 어떻게 설교자로 살겠습니까. 문제는 불 수레를 타고 올라가다가 종종 땅바닥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몸을 다시 추슬러서 불 수레를 탑니다. 바라기는 앞으로도 오르다가 떨어지더라도 땅바닥까지는 떨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다 보면 높이가 조금이라도 더 높아지겠지요.

저의 불 수레 경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사로잡힌다는 사실입니다. 죄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데서 삶을 확인하려는 태도이자 욕망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저는 십자가와 같은 치욕스러운 삶에 떨어질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치욕스러운 운명에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으며, 거꾸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음으로써 하나님과 더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상적인 삶에 숨어있는 생명의 신비를 엿보고 맛본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생명의 신비는 돈이 들지 않고, 세상의 부와 명예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천으로 널린 매실 향이나 민들레꽃에서 생명의 신비를 맛보듯이 그냥 그것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서 죄의 짐을 벗었다는 사실과 일상에 깃든 생명의 신비가 제 안에서 스파크를 일으킬 때 저는 엘리야의 불 수레를 타고 승천하듯이 모든 세상의 억압과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비슷한 경험을 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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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브니엘남

June 30, 2019
*.118.85.188

불 수레와 물 말이 나타나서 두 사람을 갈라놓았습니다. 물 말을 불 말로 고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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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당진구세군

July 02, 2019
*.160.198.36

엘리야의 승천이 곧 나의 승천이라는 것은 지금 나의 하나님 경험이군요. 저도 엘리야와 엘리사의 하나님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만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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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4]정용섭

July 02, 2019
*.182.156.135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 계신 곳이 하늘이니

여기서 하나님을 경험하면 여기가 하늘입니다.

개구리 소리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험한답니다.

가장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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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알아야

July 03, 2019
*.187.14.236

4 아이를 키우면서 저는 매일 생명 경험을 합니다. 저희 아들은 매일. “이게 뭐야? 그러지? 어떻게?”라는 질문을 순간 달고 다닙니다. 제가 질문 하나하나에 아이가 아는 단어나/개념을 가지고 답을 해주니, 아이의 언어 발달도, 어휘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합니다. 피곤하지만, 읽어 주기와, 질문에 해주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려고 매일 노력합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육아서를 읽는데, 최근하브르타 대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질문과 토론을 통해 배움을 확장시켜가는 이스라엘의 공부 방법이라는데, 과거 신앙생활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질문을 하지 않고, 나는 어떻게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왔을까? 나는 그저 교회 안의 설교와 예배 프로그램을 주어진 책을 읽듯(Text 대하듯) 쓰인 대로 이해만 하려고 아닐까? 그래서 교회의 예배 순서와 교회의 문화 프로그램 어떤 일이 있는지 꿰고 있지만, 말씀을 들은 대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어요. 사실 교회 안에서 말씀에 대한 질문은 약간 금기시되는 듯한 분위기도 있고, 믿음 없는 자처럼 보는 시선도 있었어요. 그래서 용기를 내어 목사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

지난주 설교를 읽고 나서 저의 발견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생명을 경험하는 , 삶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과 일치하는 삶이고, 지금 저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순간 체험하는 것이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와의 시간은 그런 생명 체험을 깊이 주고요.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매일매일이 행복해서요.

밥만 먹고살고, 잠만 자고, 있어서 감사하고 좋은 , 나은 생활에 필요한 것들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추면, 생명의 신비를 찾기가 쉬울까요? 사회와 주변인들이 정해 놓은 기준에 나를 맞추려 하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실패자라고 비난하든 수군거리든 신경 쓰지 않으면), 하나님 안에서 나를 지키며 살아가면, 하나님과 일치하는 삶을 있을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건 다른 질문입니다! 인간에게 고통(병치레나 사별 ) 발생하면, 고통을 느껴 신체적으로 아프고, 심리적으로 영향을 받도록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가 인간인데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생명을 체험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고통이 느껴지도록 인간을 설계하셨고, 고통은 피할 없는 것인데, 어떻게 고통을 경험하면서 생명을 체험할 있을까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오랫동안 병을 앓아 오셨고 그런 아버지를 보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 적은 사실 없었던 같습니다. 없는 문제를 , 고통을 바라만 보고, 많이 답답했습니다. 삶을 살다 보면, 해결이 되는 문제들을 대면하는데요, 그런 삶의 상황을 어떻게 대해야/바라보고 이해해야 저는 생명을 경험하고 살까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의도) 무엇인가 찾아야 하는 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냥 받아들이면 될까요? 제가 신앙의 초자라서,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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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알아야

July 03, 2019
*.187.14.236

댓글을 읽다 깨닫게 됩니다. 아이를 통한 생명 경험이나, 아픈 몸을 통한 생명 경험이 뭐가 다를까? 삶의 event/ blessings으로 같은 것이 아닌가? 좋고 싫음의 기준을 버리고 보니, 삶에 일어나는 해프닝이라는 면에서는 같네요. 그런데 이런 fact를 받아들이기에는 고통은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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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4]정용섭

July 03, 2019
*.182.156.135

알아야 님, 고통 문제는 직접 당하지 않으면 말을 꺼내지 않는 게 그나마 최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폐암 말기 환자 교우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라거나 천국 희망을 품으라고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지만

환자 본인이 준비 되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것으로 목사의 의무를 다한 것도 당연히 아니고요.

제가 직접 그런 끔찍한 고통과 고난을 당하지 않았기에 말하기 어렵지만

'인간의 고난과 신앙'이라는 주제로 열린 신학대학원 세미나 시간이라 생각하고 간단히 말씀드리겠어요.

여러 관점을 말해야 하나 한 가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선하신 분이 인간 고통을 즐길 수는 없습니다. 아니 방관할 수 없습니다.

인간 고통이 왜 주어졌는지는 모르나 그 고통 순간에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느끼시는지요? 그렇게 느끼면 십자가 신앙의 중심에 들어간 겁니다.

이게 기독교의 말장난이 아닙니다. 고통은 우리가 투쟁해야 하나 그 과정에서, 또는 마지막에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안식이 주어집니다. 극심한 가난이나 고독도 마찬가지입니다.

극심한 고통은 평상시에 걱정하던 모든 것들을 일시에 몰아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고통이 줄어들면 희열을 느끼겠지요.

죽음까지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됩니다.

요즘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통증 완화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일부러 통증을 감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든지 하나님은 선한 창조주이시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고통의 현장에 함께 하신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알아야 님이 깨달았다는 그 말과 비슷하군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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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알아야

July 08, 2019
*.187.14.236

목사님 답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해와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고,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고통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부분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런  하나님을 믿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글을 읽다보면, '죽음'이 꼭 나쁘거나, 피하고 싶은 것으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오히려 편안한 안식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죽음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는,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입니다. '신학대학원 세미나' 감사합니다. 사실 더 많은 내용을, 더  오래 듣고 싶은 짧지만 알찬 세미나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서울에서 꼭 뵙고 인사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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