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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 https://youtu.be/xH-rbzbuaP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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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afreecatv.com/nfermata |
성경본문 : | 누가복음 13:10-17 |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성령강림 후 열한째 주일, 2019년 8월25일
10.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3:10-17절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하실 때 벌어진 한 사건이 나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서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건물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교회당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만 해도 회당 출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회당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부터는 회당 출입이 봉쇄되었습니다. 관계가 나빠지게 된 계기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열여덟 해 동안 귀신 들려 앓으며 허리를 펴지 못한 여자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회당의 앞이나 중간이 아니라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을 겁니다. 여자인 데다가 장애인이니 환영받기는 힘듭니다. 설교하던 예수님의 눈에 이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 여자를 굳이 불러냈습니다. 앞자리로 나왔겠지요. 그 상황이 눈에 선합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부끄러워했겠습니까. 당시에 장애인으로 산다는 건 죄인으로 사는 겁니다. 십팔 년이나 허리를 펴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로 이런 장애를 입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게 실제로 허리 디스크에 문제가 생긴 건지 아니면 심리적인 문제로 이렇게 된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질병 현상과 그 원인은 첨단 의학 시대인 지금도 다 알지 못합니다. 요즘 저는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쓴 <건강의 배신>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과잉 건강 관리(헬스 케어)와 성공적인 노화가 핵심 주제입니다. ‘건강염려에 중독된 사람들’이라는 항목에서 유럽과 북아메리카 여성들이 받은 갑상선암 수술의 70-80%는 불필요했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특이하게 한국의 예도 나옵니다. 한국의 경우는 90%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암에 대한 지나친 염려가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세포들의 반란’ 항목에는 우리 몸의 세포가 면역체계를 무조건 따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의지가 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설명도 나옵니다. 인간의 몸은 과학으로 통제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말씀하시고 안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본문은 이 여자의 장애가 치료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고대 사회에서 일반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척추 환자가 수술을 받든지 아니면 비수술 방식으로 완쾌되었다는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본문이 말하려는 핵심은 이 사건에 대한 관점들이 서로 충돌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장면을 본 회당장의 반응이 14절에 자세하게 묘사됩니다. 본문을 직접 읽겠습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회당장이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분을 내어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책임자로 있는 회당 예배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는 예수님에게 직접 따지지는 못하고, 대신 일반 신자들에게 충고했습니다. 초청 설교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담임 목사가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의 규칙을 가르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에게 문제를 제기하는지도 모릅니다.
회당장이 제기한 문제는 안식일 규정입니다. 그는 다른 날도 있으니 굳이 안식일에 병 고침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이 크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지금 십팔 년 장애를 앓은 여자가 하루 참았다가 안식일 다음 날에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이 여자의 목숨이 지금 경각에 달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회당장의 주장은 합리적입니다. 만약 이런 일들이 앞으로 반복된다면 안식일 개념은 점점 힘을 잃게 될 겁니다. 안식일이 지난 적당한 날을 택해서 치료를 받는다면 안식일을 지켜서 좋고, 이 여자도 치료받게 되어서 좋습니다. 이런 회당장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의 주장에 수긍했을 겁니다.
회당장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유대인들의 안식일 개념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그 무엇으로 대체시킬 수 없는 절대 규범입니다. 오늘의 요일 개념으로 토요일에 해당하는 안식일은 일상을 멈추는 날입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의 역사적 기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창조 사건(창세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엿새 동안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쉬셨으니 사람들도 쉬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의 출애굽 사건(출애굽기)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해방하신 사건을 기리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고집스럽게 안식일 전통을 지켰습니다. 이에 관한 시행세칙도 많았습니다. 안식일에 소나 양이 새끼를 낳거나 위험에 빠졌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도 있습니다. 목숨이 달린 사안이 아닌 한 모든 인간 노동은 멈춰야만 했습니다. 오늘 주간 52시간 노동 시간에 관련된 논의도 안식일 개념과 연관됩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으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그 자리에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비판은 다른 복음서에도 종종 나옵니다. 마 23:13절은 이렇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런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마 23:24). 율법을 핑계로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행동은 위선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회당장의 주장이 왜 위선적인지를 설명하십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끌고 나가서 물을 마시게 합니다. 이것도 사실은 노동입니다. 엄격하게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면 이런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불도 피우지 않았기에 안식일에는 따뜻한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아주 엄격하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보여도 가축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예외 조항이 있었던 겁니다. 따뜻한 밥은 먹지 않아도 그런대로 견딜 수 있지만, 가축에게 물을 주기 위해서 끌고 나가지 않으면 재산상의 큰 불이익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축에게 물을 주는 행동이 잘못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건 잘하는 겁니다. 가축보다 더 귀한 장애인을 고치는 일을 안식일 규정을 빌미로 반대하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1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지금 양쪽의 입장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한쪽은 회당장의 입장입니다. 그는 앞에서 짚은 대로 다른 육일이 있으니 굳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쪽은 예수님의 입장입니다. 안식일 규정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되는 것이니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여자의 병을 고치는 게 옳다는 것입니다. 한쪽은 가능한 법을 지키자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법보다 인간 구원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지지하십니까? 애매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니 당연히 예수님의 입장을 지지하겠지만 실제로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살기가 힘듭니다. 예를 들자면 대도시 번화가에서의 노점 행상은 불법입니다. 구청장은 노점 행상을 막아야 합니다. 그게 법입니다. 노점 행상을 하는 이들이 불쌍하다고 해서 버려둔다면 여러 가지 혼란이 일어날 겁니다. 그 구청장은 다음 지방선거에서 떨어지겠지요.
오늘 이야기는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종교 전통과 인간 삶에 대한 예수님의 고유한 생각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는 안식일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안식일 규정의 핵심은 말 그대로 안식입니다. 안식은 쉼입니다. 쉼이 필요한 사람들은 일상에서 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지주나 귀족들은 평소에 노동하지 않았기에 쉼이 필요 없었습니다. 평범한 농부, 소상공인, 특히 소작농이나 종들은 일 년 내내 쉴 수가 없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으로 강제해야만 그들은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쉴 수 있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지주나 소작인이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가리지 않고 모두 똑같이 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 짐승도 쉬어야 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완전히 평등한 세상이 실현되는 겁니다. 안식일 전통은 사회 과학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합니다.
안식일에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였습니다. 요즘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회당에서 그들은 시편을 노래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해방하셨다는 사실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안식일은 ‘나’ 혹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확인해주는 날입니다. 다른 날은 인간이 만든 억압적인 구조에 매달려야만 합니다. 다니기 싫은 직장에도 다녀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보통 날의 세상에서 우리는 사장과 직원 사이에 나타나는 차별을 절감합니다. 경쟁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거기서는 내가 누군지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선생, 학생, 의사, 환자, 노동자, 사장, 남편과 아내 등등으로 자기를 확인할 뿐입니다. 그게 실제의 자기는 아닙니다. 안식일 앞에서는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게 실제의 자기입니다. 안 그런가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말을 불편하게 여깁니다. 자신의 주체성과 자유 의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일수록 더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대 지성인들이 실제로 주체적으로 살고 있을까요? 자기 돈으로 집과 차를 사고 여행 다니고 여러 고상한 취미활동을 하는 삶을 주체적이라고 생각하겠지요. 미안하지만 사람은 누구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합니다. 주체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은 이미 다른 힘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요즘 법무부 장관 후보자 문제로 정국이 시끄럽습니다. 그의 딸이 일반 대학교와 의학전문대학원 입시 과정에서 부당한 이득을 보았다는 게 핵심으로 보입니다. 소위 말하는 불공정하게 스펙을 쌓았다는 비난이 많습니다. 아마 해당하는 학생의 어머니가 깊숙이 개입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교육에 열성적인 어머니와 무관심한 아버지와 부자 조부모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하고 좀더 구체적인 팩트가 확인되지 않은 그런 일의 잘잘못을 설교 시간에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또는 모호한 상황에서 자녀의 스펙을 쌓아준다는 판단이 주체적인 것처럼 보이겠으나 실제로는 가장 비주체적인 판단이라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번 경우만이겠습니까. 주체적으로 산다고 말하는 현대인들은 자본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주체적으로 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세상의 잘못된 억압구조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안식일 개념이 구약성경의 두 사건에 기원한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창조와 출애굽 해방입니다. 두 가지는 깊이 연루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말은 해방된 존재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해방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십팔 년 동안 허리를 펴지 못한 여인에게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이 선포는 안식일의 본질에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이제 마지막 논점은 이 여자의 치료를 하루 늦출 수 없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미 십팔 년 동안 어려움을 겪었는데, 하루 참지 못할 일도 없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하루를 기다리지 않으셨을까요? 저는 바로 이 대목에 종교의 가장 근원적인 본질이 놓였다고 봅니다. 그것은 곧 해방되어야 할 인간에 대한 ‘연민’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설교하면서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한 여자를 이미 보셨을 겁니다. 그 여자는 오늘도 안식일을 맞아 회당을 찾아왔습니다. 이 여자가 하나님의 딸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의식이 있었을지, 죽고 싶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을지, 예수님이 설교한다는 소식을 미리 듣고 뭔가 기대했을지, 본문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녀가 지금 절박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익숙한 풍경이라서 그냥 지나쳤을지 모르나 예수님은 그녀에게 아주 특별한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하루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마음의 저 깊은 곳이 뜨거운 사람은 조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산에 철저한 냉소적인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연민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성경 기자들은 자주 말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는 기독교의 2천 년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도입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연민은 슬픈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은 다음에 밀려드는 슬픈 감정만이 아닙니다. 더 크고 깊은 영성입니다. 세상과 사람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바라는 보는 데서 나오는 영적인 현상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이 불쌍합니다. 못난 사람도 불쌍하고 잘난 사람도 불쌍합니다. 반사회적이고 파렴치한 사람들을 보면 분노가 치밀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불쌍합니다. 아무리 많이 채워도 영혼이 채워지지 않기에 벌어지는 일탈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베도, 트럼프도, 김정은도 불쌍합니다. 모든 사람이 불쌍하니 악을 행해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은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연민이 자리합니다. 철부지 아들이나 딸을 둔 부모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십팔 년 된 장애인이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회당과 다를 게 없습니다. 남북분단 체제가 바로 장애인이 아니겠습니까. 수능점수에 목을 매는 청소년들과 그 가족도 역시 십팔 년 된 장애인입니다. 혹시 저나 여러분이 그 당사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회당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일반 회중들은 그날도 평범하게 안식일 예배만 드렸습니다. 회당장은 안식일 규정을 잘 지켜야 한다고 다그쳤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셨습니다. 십팔 년 동안 사탄에 묶였던 사람을 그 매임에서 푸는 일이었습니다. 지난 어느 날 여러분은 바로 그 예수님을 만났을 것이며, 아직 아니라면 앞으로 언젠가는 만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따르면 예수님을 반대했던 사람은 부끄러워했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부끄러워하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진심으로 기뻐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살이에 쫓겨서 바쁘게만 지내셨습니까?
목사님의 설교를 접할 때마다 분출되는 마그마의 뜨거움처럼 믿음에 대한 확신이 더욱 용솟음 칩니다.
저눈 목사님을 통해서 비로서 예수 안에서의 안식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제 곁에... 우리 곁에..... 정용섭 목사님이 계셔서.
================= 오자 수정들어갑니다 ^^;; ======
1. "냉소적인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2. "하나님의 심정으로 바라는 보는 데서 나오는 영적인 현상입니다."---------> 바라보는('는' 삭제 및 붙여쓰기)
정목사님...
늘 느끼지만, 주말을 타지에서 일을 해야 하는 저에게 정목사님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연결고리입니다. 오늘 말씀은 지평을 열어주시면서도 위로가 충만한 영혼의 울림까지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위에 예시하신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쓴 '건강의 배신' 이라는 책은 저도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쓴 수필집에 나오는 '식물들의 반란', '세포들의 반란' 의 제목과 똑같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