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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Duo8Jr4Ypm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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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린도전서 1:1-9 |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주현 후 둘째 주일, 2020년 1월12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신약성경은 기원후 40년대부터 시작해서 100년 어간에 여러 사도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27권 중에서 10권 내외가 바울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그중의 한 권이 오늘 설교 본문인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리스 도시인 고린도는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자리했습니다. 지협 오른편에 있는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64킬로 떨어진 곳입니다. 고린도는 당시에 2만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원형경기장이 있을 정도로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들어간 때가 기원후 50년 3월입니다. 그곳에서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교회의 토대를 다진 후 51년 9월경에 선교 활동을 위해서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고린도 교회에 관한 소식을 듣고 바울은 53년 말, 또는 54년 초에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관한 소식이 다 좋은 건 아니었습니다. 신자들이 서로 파벌을 지어 다투고, 열광적인 은사론에 떨어지고,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아닌지를 놓고 서로 반목했습니다. 오늘 교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가 고린도 교회에서도 벌어졌습니다.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이 고린도전서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고전 1:1-9절은 편지가 시작하는 인사입니다. 단순히 덕담으로 끝나지 않고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언급합니다. 이 구절이 고린도전서 전체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재림 신앙
우선 고전 1:1-3절은 의례적인 인사입니다. 3절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화가 있기는 바랍니다.” 은혜와 평화는 일반적인 인사로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이어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칭찬합니다. 5, 6절에 따르면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믿음이 확실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특이한 건 없습니다. 그런데 7, 8절을 읽다 보면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다시 읽을 테니까 한번 귀 기울여 보십시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7절에 나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라는 표현과 8절에 나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는 표현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이 두 표현의 내용이 거의 비슷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순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고 있는 예수 재림을 가리킵니다.
고린도전서에는 예수 재림을 직간접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고전 11:26절에서 바울은 성찬을 설명하면서 “너희가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15:23절에서는 기독교인의 부활을 설명하면서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마지막 대목인 16:22절은 이렇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우리말 성경인 개역개정을 보면 이 구절에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문장에 ‘마라나타’라는 각주가 달려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의 아람어입니다. 똑같은 문장이 요한계시록 마지막 대목인 계 22:20절에도 나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의 승천 전승을 전하는 행 1:6-11절에도 예수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 재림 신앙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만 재림 신앙을 실제 삶의 근거로 삼는 기독교인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 재림이 지난 2천 년 동안 실현되지 않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세계관과 오늘 우리의 세계관이 완전히 다르기에 예수 재림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광신자처럼 모든 합리적인 판단을 포기하고 예수 재림을 무조건 믿는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21세기에 그런 열광적인 신앙으로 살아가기는 어렵기도 하고 정당하지도 않습니다. 이게 우리에게 주어진 딜레마입니다. 성경의 재림 신앙을 무조건 따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의 가르침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대개는 재림 신앙 자체에 관해서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실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재림 신앙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의 본질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아주 강하게 나타납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몰라도 살아가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는 바울의 진술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그걸 믿는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일단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타나심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격려하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고 7절에서 말했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분이십니다. ‘나타나심’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아포칼립시스’의 번역입니다. 헬-영 사전에 따르면 아포칼립시스는 계시라는 뜻의 revelation입니다. 계시는 숨었던 것이 드러난다는 뜻으로, 보통 요한계시록을 ‘revelation’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라는 바울의 이 말은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우선 분명한 사실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는 말은 2천 년 전 목수로 살았던 그 역사적 예수가 당시의 모습 그대로 우리가 사는 지구에 다시 나타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의 당시 모습은 30대 초반의 전형적인 유대인 남자입니다. 유럽 화가들이 그린 성화에 나오는 멋진 금발의 백인 남성이 아니라 투박하게 생긴 목수 노동자였습니다. 3년 공생애를 지내면서 고단한 유랑생활을 했으니 외모가 깔끔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유대인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부활하고 승천했다고 믿습니다. 이를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표현했습니다. 종교적인 메타포입니다. 예수의 부활 승천은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한 예수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가신 겁니다. 성경 기자들은 그 세상을 하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질적으로 완전히 변화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2천 년 전 유대인 남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시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런 대목에도 불가역의 원리는 해당합니다. 우리가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멋지고 귀한 세계라고 하더라도 다시 지난날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시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위에서 언급한 헬라어 아포칼립시스라는 단어를 조금 더 자세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포칼립시스는 계시라는 의미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단어에는 묵시라는 뜻도 있습니다. 나타난다는 말과 계시, 또는 묵시라는 말은 비슷하기는 하나 뉘앙스, 또는 신학적인 깊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나타난다는 말은 비유적으로 보면, 어떤 신자가 특별한 사정으로 오래 교회에 나오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원래 알고 있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겁니다. 그러나 계시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도 비유적으로 말하면,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던 신자가 어느 날 갑자기 신학대학교 교수가 되어서, 또는 교황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사실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일이,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사건을 가리켜 아포칼립시스라고 표현합니다. 요한계시록이 반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고, 바울도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생한 생명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은 부활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실존을 지배하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일상적인 걱정에서 벗어나는 생명입니다. 이런 생명을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를 가리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런 신뢰를 통해서, 인간 삶을 위축시키고 파괴하는 세상의 악한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상대적인 자유만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자유의 완성이 생명 완성입니다. 생명 완성의 순간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라고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그 생명 완성의 순간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막연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하나님의 비밀인 생명 완성의 순간을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을 칭찬했습니다.
이런 설명이 조금 멀리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생명 완성의 순간을 죽음의 순간이라고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죽음은 그야말로 자기 실존의 파멸이기에 생명 완성과는 완전히 반대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생명 완성이야말로 사실은 제한적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오래 살고, 조금 더 건강하게 살고, 조금 더 행복하게 사는 것만을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 차이라는 게 별거 아니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다 아실 겁니다. 그 방식으로 우리 생명이 완성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즉 영혼의 만족이 가능하지 못하다는 사실도 다 아실 겁니다. 생명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에 하나님만이 완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알고 있는 생명 현상은 일부 중의 일부입니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봤던 고린도 교인들은 생명이 완성될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도 지금 그런 태도로 삽니다. 그런 믿음과 희망이 없으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
앞에서 짚었듯이 바울은 8절에서 예수의 나타나심을 약간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는 표현은 ‘심판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심판은 생명 심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생명 완성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생명 심판이 일어난다는 말은 맞습니다. 이런 심판에 대한 진술이 고린도전서에 종종 나옵니다(3:13, 4:3).
심판이라는 말은 일단 뭔가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합니다. 꺼지지 않는 불과 유황, 지옥, 구더기가 들끓는 곳, 저주 등등, 아주 끔찍스러운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이 성경에 나오기는 합니다. 이런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신자들을 불안하게 하거나 심리적인 공황에 떨어지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믿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경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공포심을 이용한 종교 장사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심판의 날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날입니다. 구원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묘사하려고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운명을 끔찍하게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구원입니다. 그런 순간이 바로 주님의 날입니다. 바울은 주의 날에 책망할 게 없는 자로 하나님이 고린도 교인들을 세우신다고 격려했습니다. 이 말은 격려이면서 동시에 그렇게 살라는 충고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날에 합당한 자로 살고 싶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생명 심판을 받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얻느냐, 또는 제외되느냐가 결정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명이 실감 나게 들리는 이도 있고, 낯설거나 멀리 느껴지는 이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무엇을 생명의 실재(reality of life)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대개 사람들은 세상의 설계에 따른 생명 개념에 머물러 있습니다. 개인의 실존을 예로 들어봅시다. 어떤 이는 인생살이의 설계를 성취함으로써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돈도 가능하면 많이 벌고, 취미생활도 멋지고 하고, 그야말로 신나는 인생을 사는 것이 그에게 실재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생의 꿈은 그야말로 뜬구름과 같습니다. 삼국 시대의 영웅들, 로마 시대의 귀족들은 지금 다 어디 갔습니까? 밤새도록 술 마시고 춤추고 떠들면서 지내면서 그것만을 인생의 모든 것으로 생각한다면 다음 날 더 큰 공허를 경험할 것입니다. 공허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삶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가장 궁극적인 현실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여깁니다. 거기서만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는 바울의 메시지는 이런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코이노니아
이제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게 없는 자로 살려면 실제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그 길을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입니다. 교제로 번역된 헬라어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시인이 되려면 언어와의 친교에 들어가야 하고, 예술가가 되려면 사물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미학과의 깊은 친교에 들어가야 하듯이 생명 완성의 순간을 기다리는 거룩한 시인, 거룩한 예술가가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단순히 교회에 잘 나와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생한 구원, 즉 안식과 자유와 해방의 능력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라는 말도 모호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에 관해서 더 긴 설명을 지금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으로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질 여러분의 궁극적인 미래가, 죽음까지 포함한 그 미래가 생일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지십니까? 아니면 막연하거나 ‘될 대로 돼라.’ 하는 생각에 머물러 있습니까.
목사님 안녕하세요? 얼마 전 서울샘터교회에 등록하고, 목사님께서 서울에 오실 때마다 인사드리고 있는 윤*식입니다. 그동안 다비아의 글들과 댓글들을 읽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댓글을 남깁니다.
만인구원과 선택구원... 제가 다비아를 접한 이후 가장 관심있는 주제이고, 전자가 맞기를 바라며 항상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주제인데, 우리가 지금 궁극적인 결론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하고 긴장되기도 하지만, 요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만인구원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라 하더라도, 그걸 인간들이 알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 결국 인간들의 죄인된 본성 때문이 아닐까요? 소위 구원파처럼 '이미 구원을 확실히 약속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책임감과 긴장감이 실종된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말이죠.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식이 그런 식으로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아버지이자 창조주로 고백하는 하나님께서도 같은 마음이 아니실까요?
지금처럼 선택구원이 기독교 신앙의 대세로 종말 때까지 이어지다가, 종말에 이르러서 만인구원이 맞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이것 또한 목사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때까지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감을 항상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최선일까요?
죽음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지다니 저에게는 아직 갈길이 먼것 같습니다만 그것만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과정이고 생명완성의 길이니 기쁨으로 그 길을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