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lassic Style
- Zine Style
- Gallery Style
- Studio Style
- Blog Style
설교보기 : | https://youtu.be/O1VHhAJ9pho |
---|---|
성경본문 : | 요한복음 9:35-41 |
예수는 심판 주(主)다!
요 9:35-41, 사순절 넷째 주일, 2020년 3월22일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시각장애인 치유 사건
요 9장에는 요즘의 눈으로 볼 때 이상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의 장애가 당사자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예수께 물었습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질문이지만 고대 유대인들은 제자들과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답변은 제자들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저 사람의 선천성 시각장애는 죄 때문이 아니라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면서 이 사람의 장애를 고쳤습니다. 고치는 퍼포먼스가 평소와 다릅니다. 평소에는 그 사람의 몸에 손을 대고 기도하거나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라고 선언합니다. 이번에 예수는 자기의 침으로 진흙을 이겨 시각장애인의 눈에 바른 뒤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고, 눈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침에 치료의 효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흙과 샘이 솟는 연못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가 이런 퍼포먼스를 벌인 이유는 시각장애인에게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려는 조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이 이 정도로 끝났다면 예수의 치병, 치유 사건 중의 하나였을 겁니다.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예수가 이 시각장애인을 고친 날이 하필이면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을 비롯한 율법을 소중히 여기는 바리새인들 사이에 분란이 벌어졌습니다. 한쪽은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비난했고, 다른 쪽은 그가 죄인이었다면 어떻게 이런 놀라운 표적을 행했겠느냐면서 두둔했습니다. 이들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과 그의 부모를 불러서 자초지종을 확인했습니다.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던 게 아니라 예수에게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주지시키고 싶었습니다. 이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자기 눈을 뜨게 한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주장했습니다. 설득과 강요가 실패하자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의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발언을 하면서 쫓아냈습니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요 9:34). 장애인 비하 발언입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예수도 전해 들었습니다. 속으로 그가 기특하다고 생각했겠지요. 예수는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다행입니다. 만나지 못하고 예수가 그 마을을 떠났다면 마음의 빚이 계속 남았겠지요. 예수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그에게 하셨습니다. 일종의 천기누설에 해당합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요 9:35).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어떤 사본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온다는 각주가 달려 있습니다.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은 반대이지만, 개념적으로 본다면 동의어입니다. 예수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다만 사람의 아들, 즉 인자는 고대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에서 전문용어로 사용되던 낱말로서 세상 마지막 때 세상에 와서 정의로 심판할 자라는 의미였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푼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세상 마지막 때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할 자신의 일꾼, 즉 인자를 보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심판
이 사람은 “믿는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가 무슨 뜻으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정확히는 몰랐을 겁니다. 예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다시 말합니다.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 사람은 놀랐을 겁니다. 예수가 뭔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세상을 심판할 인자라는 건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요. 이 사람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다시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의 믿음은 이 한 사람만이 아니라 이 시각장애인이었다가 다시 시력을 회복한 이야기를 널리 전하는 요한복음 공동체 전체의 믿음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유대 전통이 말하는 ‘인자’, 즉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할 주라고 믿었습니다. 예수가 세상을 어떻게 심판할지에 관한 내용이 39절에 나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심판하러 세상에 왔다.”라는 예수의 발언이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하게 들릴 겁니다. 사람을 위협하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이 성경에 종종 나오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마 25장에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가 여럿 나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받아 그대로 땅에 묻어둔 사람에 대한 심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5:30). 눅 16:19절 이하에는 ‘부자와 거지’라는 비유가 나옵니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혀에 닿게 해달라고 할 정도의 고통을 받습니다.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 16:24). 막 9:48절에 나오는 지옥 표상은 구더기와 꺼지지 않는 불로 인한 고통입니다.
예수의 이런 말씀을 자칫 잘못 들으면 자신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람을 심리적으로 위협하는 사이비 교주의 발언처럼 들립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예수가 말하는 심판은 사람을 협박하거나 저주하는 게 아니라 구원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을 벌주는 게 아니라 세상이 벌주겠다고 소외시킨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복음이지 저주가 아닙니다. 그 복음은 우리를 기쁘게 하지 공포에 떨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복음의 시각으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는 시각장애인을 고치셨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여러분에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으면 몸에도 이상이 올 수 있습니다. 듣지 못하거나 말을 못 하거나 때에 따라서는 천천히 시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상처로 남은 트라우마가 나중에 치료되면 몸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늘 똑같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지만, 특별한 경우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의 의학 지식은 지금 우리와 달리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차원에 머물렀기에 사람이 실제로 죽었는지 아닌지, 저 사람이 걸린 병이 죽을병인지 아닌지 잘 몰랐습니다. 지금 팬데믹으로 자리 잡은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현상이 2천 년 전에 일어났다면 사람들은 귀신의 조화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 시각장애인은 실제로는 눈이 멀지 않았으나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이유로 살아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해서 아예 세상을 보지 않겠다는 태도로 살다가 예수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서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핵심은 예수의 심판이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거꾸로 보는 자들은 시각장애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심판은 역설적입니다.
보게 하며
이 이야기를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본다.”라는 게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본다는 말은 안다는 말과 같습니다. 바둑에서는 수를 본다고 표현합니다. 저 사람은 수를 멀리 본다거나, 수가 보이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수를 안다거나 모르겠다는 뜻입니다. 실력이 좋은 사람은 수를 10수, 20수 앞으로 내다보지만, 실력이 달리는 사람은 2, 3수만 봅니다. 수를 멀리 볼수록 승산이 높아집니다. 바둑에서 수가 보인다거나 보이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수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가리키는 “본다.”라는 말은 숨어 있는 하나님 나라를 안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예수가 공생애 초기부터 반복해서 선포한 내용입니다. 문제는 바둑에서 실력이 없으면 수가 보이지 않듯이 하나님 나라도 저절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왜 안 보일까요? 안 보인다면 없는 게 아닐까요? 실제로는 없지만 있는 것처럼 속이는 게 아닐까요? 만약 예수가 없는 걸 있다고 말했다면 그는 사기꾼입니다. 당시에 예수를 실제로 사기꾼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가 선포한 그 하나님 나라를 보고 있나요?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하는 건 아닐까요?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은 세상이 말하는 아주 단순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연봉에 따라서 직업의 높고 낮음을 평가하고, 교회 크기로 목사의 목회 능력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그런 세상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세상의 시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 나라는 더 멀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즉 생명의 나라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와 생명의 나라라는 단어가 손에 잡히지 않으면 행복한 삶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됩니다. 예수는 어떻게 행복한 삶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한다는 말인가요?
시각장애인을 고친 예수를 바리새인들이 트집 잡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보십시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겁니다. 안식일에는 모든 노동이 멈춰야 합니다. 돈벌이하지 말아야 하고, 밭도 갈지 말아야 하고, 밥도 하지 말아야 하고, 일정한 거리 이상을 걷지 말아야 합니다. 말 그대로 모든 일을 멈추고 쉬어야 합니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장애인을 고치거나 병자를 치료하는 일은 잘못입니다. 요 9:14절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라.” 진흙을 침과 섞는 일이 바로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노동행위라는 겁니다. 이렇게 엄격하게 안식일을 규정하는 게 무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엄격하게 시행하지 않으면 예외 규정이 끝없이 만들어질 겁니다. 추수 때에는 일손이 부족하니 안식일에도 일할 수 있게 하자거나 공장 운영이 어려울 때는 안식일에도 노동자들을 일하게 하자고 말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한 유대인들의 노력은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당시의 안식일 규정이 하나님 나라를 훼손시킨다고 보았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린다는 안식일의 본질은 잊히고 안식일의 세부 규칙이 사람을 지배하는 절대 기준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 제도와 규칙에 묶여서 실제 삶은 왜곡되고 위축되었습니다. 요즘 툭하면 종북 좌파야, 하는 식으로 상대방을 매도하는 사회 현상과 비슷합니다. 북한에서는 자기들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툭하면 반동이야, 하는 식으로 사람들의 삶을 위축시키겠지요.
하나님의 생명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한다.”라는 예수의 말은 삶에 대해서 세상이 말하는 기준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생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를 부정하라는 당시 종교 권력자들의 억압에 굴복당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웬만하면 권력자들과 타협합니다. 더구나 이 사람은 당시 죄인으로 취급받던 장애인이었습니다. 요 9:34절에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을 설득하다가 실패하자 그를 쫓아냈다는 말이 나옵니다. 요즘 말로 왕따 당해야 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예수를 부정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예수를 통한 생명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본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죄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 사람은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 종교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본 사람은 자유를 얻습니다.
예수는 당시 민중들의 삶을 파괴하는 힘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교 권력자들과 율법은 사람을 수단으로 다루었습니다. 똑똑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나누었습니다. 고상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들이 어울려서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에게나 본받을만한 사람들로 인정받았습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시각장애인은 죄인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인생은 실패야, 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서 지냈습니다. 마 11:19절에 따르면 예수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예수가 먹고 마시며 풍류를 즐기면서 사는 걸 좋아한 사람은 아닙니다.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 특히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도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기에 함께 어울려서 지냈을 뿐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사회 질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똑똑하고 잘난 사람만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메시지입니까? 얼마나 전복적인 말씀입니까? 이게 기존의 질서에 물든 사람에게는 아주 불편하게 들렸습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눅 15:11절 이하) 유산을 물 쓰듯 쓰다가 완전히 망해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푼 아버지를 못마땅해하는 큰아들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스스로 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의 일상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자본주의 세력이 지배할 수 없는 삶의 영역을 찾아보십시오. 그게 보이면 ‘보는’ 사람이고 그게 보이지 않으면 못 보는 사람입니다. 저의 경우를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종종 밤하늘의 별을 봅니다. 거기서 창조의 아득한 신비에 전율을 느낍니다. 그 어떤 힘도 저를 막지 못합니다. 가난해도, 친구 없이 외로워도 별은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별만이 아니라 제가 준비만 된다면 이런 영역은 수없이 많습니다. 저는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저를 방해하지 못합니다. 거기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안식을 경험합니다. 세상의 악한 힘은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제시한 기준에 들어가지 않으면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게 바로 죄의 능력입니다. 예수가 심판의 주라는 말은 그가 우리를 이런 죄의 능력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심판의 주이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보셨습니까?
심판은 가난한 자의 눈을 열어 생명의 심연을 보게 해주는 것이네요!
이런 의미에서는 심판의 자리에 가는게 복이네요.
조용히 눈을 감고 ' 너는 누구냐? 무엇을 보느냐?' 물어야 되겠습니다.
요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를 읽으며 시각과 청각, 실명과 침묵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중이였는데 하루 하루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실눈이라도 뜨는 은혜를 입길 소망합니다.
율법학자들 처럼 '난 본다' 라고 외칠 수 밖에 없는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의 짐이 느껴집니다.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