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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LVgnZj7qBV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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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에스겔 37:1-14 |
여호와의 손과 영
겔 37:1-14, 사순절 다섯째 주일, 2020년 3월29일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마른 뼈 환상
선지자 에스겔은 어느 날 환상을 보았습니다. 꿈에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시인이나 화가처럼 예술적 감수성으로 신비로운 장면을 상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을 어느 골짜기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그 골짜기는 그가 젊었을 때 본 공동묘지이거나 사형 집행장소였을까요? 말라비틀어진 뼈 무더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오싹하는 기분이 들었을 겁니다. 저게 뭐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순간에 여호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말이 안 되는 질문입니다. 저 뼈에 붙어 있던 살덩이와 핏줄과 피부는 이미 오래전에 모두 원소로 해체되었습니다. 에스겔은 “그건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했었어야 했지만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둘러서 대답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안 되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믿는다는 뜻으로 그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 뼈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대신 전하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5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에스겔이 말을 마치자 뼈들이 서로 연결되어 사람 형체를 갖추었습니다. 사람 몸의 뼈는 206개인데, 뼈로 된 사람 모형을 생각하면 됩니다.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였다고 합니다. 이제 완전히 사람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생기는 없었습니다. 배터리가 없는 로봇을 생각하면 됩니다. 에스겔은 다시 다음과 같은 여호와의 음성을 듣습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에스겔이 그 명령에 따라서 그 말씀을 선포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갔고, 그들이 살아나서 벌떡 일어서니 큰 군대를 이룰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대한 설명이 겔 37:11-14절에 나옵니다. 이 뼈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기원전 587년 바벨론 제국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궁이 무너지고 도시 전체가 붕괴하였으며 귀중품이 약탈당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난민이 되기도 했으며, 지도급 인사들은 모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의 신세는 골짜기에 무더기로 쌓인 마른 뼈와 같았습니다. 살아있다고 하나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11절이 이 사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에스겔 선지자의 이 비유는 절망적인 상황에 떨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것이기에 지금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으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건강합니다. 다른 이들이 다 부러워할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마른 뼈가 아니라 윤기 흐르는 삶을 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런 조건만으로 우리의 실존이 마른 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입니다. 그런 조건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정도로 우리의 육체는 약합니다. 조금만 세월이 지나면 노쇠하고 곧 죽습니다. 대학교 총장이나 국회의원에게 따라다니는 사회적 직위도 사실은 그렇게 믿을만한 게 못됩니다. 그런 직위에 오른 분들이 육체노동자들과 다른 점은 신경 써야 할 일이 많다는 점과 연봉이 높다는 것뿐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결혼해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삶은 멋진 인생이 아니냐, 이런 인생을 마른 뼈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혼자 살아도 멋진 인생일 수 있고, 가정을 이뤄도 그저 그런 시시한 인생일 수 있습니다. 그런 조건들은 절대적인 게 아니라 허상입니다. 우리가 추종하는 그런 조건들이 우리의 삶을 더 피곤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다 알고 있고, 이미 경험한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마른 뼈라는 실존을 뚫어보는 사람이 있고, 모르거나 외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살림의 능력
에스겔이 본 환상에서 여호와가 마른 뼈를 살린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본문의 역사적 배경에서 말한다면 앞에서 짚은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서 끌어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숨도 크게 못 쉬면서 살았기에 거기서 해방되는 걸 구원이라고 여겼고, 그런 일을 행하는 분이 바로 여호와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애굽에서의 해방과 바벨론에서의 해방입니다. 애굽에서의 해방은 기원전 13세기에 일어났고, 바벨론에서의 해방은 기원전 6세기에 일어났습니다. 구약성경은 이 두 역사적 사건을 기둥으로 만들어진 집과 같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되고, 바벨론에서 해방되었다고 해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닙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일상에서도 좋은 대학교만 들어가면, 좋은 직장만 얻으며, 좋은 사람과 결혼하기만 하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인생은 그런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고대 이스라엘이 정치적인 해방을 얻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살리는 능력’으로, 즉 생명의 능력으로 알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기독교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믿습니다.
이런 믿음이 실질적인 내용을 갖추려면 생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일상 용어로 바꾸면 ‘삶’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니라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철학자가 그걸 붙들고 씨름했지만, 모두에게서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대답은 찾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조금씩 가까이 갈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데카르트는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말입니다. 데카르트에게 삶의 본질은 사유입니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의지와 표상’입니다. 위로 거슬러 올라가서 스토아 철학자들은 ‘로고스’를 거론하겠지요.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할 거구요. 노자와 장자는 도라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을 열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인류가 하나의 결정적인 대답을 아직 찾지 못한 이유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생명 세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 세계의 밖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죽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 아무도 생명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비행기 추락으로 무인도에 떨어져서 모든 사람은 죽고 젖먹이만 살았다고 합시다. 그 아이를 늑대가 키웠습니다. 그 아이가 자랐습니다. 자기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지구에서 사는 우리 인간이 그 아이와 비슷합니다.
설교하는 당신은 생명을 뭐라고 생각하는데, 하고 묻고 싶으신가요? 성경에서 배운 대답이 바로 저의 생각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도 저와 똑같이 생각할 겁니다. 성경은 생명을 ‘어떤 거다.’라고 규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말할 뿐입니다. 철학자들과 생물학자들과 물리학자들, 그리고 삶을 깊이 있게 탐색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부분적으로 나타난 흔적들입니다. 부분적인 흔적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하나님 생명 자체는 아닙니다. 여기 바닷가 해변에서 모래로 어떤 예술가가 비너스 형상을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 모래알 입자는 분명히 비너스 상을 구성하는 요소지만, 모래알 자체가 비너스 상은 아닙니다. 비너스 상에 필요한 모래알을 한곳에 모아둔다고 해서 비너스 상이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비너스 상을 만든 예술가가 여기서 핵심입니다. 그 예술가는 비너스만이 아니라 앞으로 다른 작품도 만들 것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알려면 모래알 같은 흔적에만 머물지 말고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을 알라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에스겔도 오늘 이야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아는 것을 강조합니다. 13절과 14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살아날 겁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은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는 문장에 꽂혔습니다. 그 여호와는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 1절에서 에스겔은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자기에게 임재하고 영으로 데리고 가셨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좀비 물 SF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마른 뼈 이야기를 통해서 에스겔이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영입니다.
권능과 영
우리말 성경은 겔 37:1(a)절을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 ”라고 번역했는데, KJV과 루터 성경은 “주님의 손(The hand of the Lord)이 내 위에 임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주님의 손과 여호와의 권능은 뉘앙스에서 차이가 나지만 근본에서는 동의어입니다. 마른 뼈 이야기가 전개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골짜기에 무더기로 쌓인 마른 뼈가 다시 자기 짝을 찾아서 연결되고 힘줄과 살이,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들어와서 살아나는 일은 곧 권능을 가리킵니다. 그 권능은 창조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창 1장이 서술하는 창조 때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9절). 창 1:3은 이렇습니다. “빛이 있으라.” 에스겔은 창조 사건을 염두에 두고 지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저는 이런 일이 지금도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보일 겁니다. 가장 가깝게는 요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봄꽃입니다. 겨울철 매실나무와 복숭아나무와 벚나무를 보면 죽은 듯합니다. 따뜻한 바람이 불편 거기서 화사한 꽃이 나옵니다. 마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런 현상이 시시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손이 하는 일입니다. 나무와 꽃은 자연 현상이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실제 우리 삶을 생각해도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을 정도로 어려운 형편에 떨어졌다고 합시다. 마른 뼈처럼 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손은 가까이 있습니다. 형편이 나빠지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의 눈에 들어옵니다. 시시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황홀하게 경험합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오늘 본문에 따르면 무덤을 열고 나와 살아나는 것입니다.
저의 작은 경험을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작년에 몇 번 발작한 통풍으로 약간 고생했습니다. 어느 날 밤입니다. 그날도 발의 통증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화장실에 가야만 했습니다. 발이 너무 불편해서 기어갈 형편도 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하나 궁리하다가, 제가 평소 사용하는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서 손으로 벽을 밀면서 화장실까지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재미있고 통쾌했는지 모릅니다. 통풍으로 인한 고통은 잠시니까 재미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실제로 휠체어에 앉아서 지낼 수밖에 없는 장애를 입는다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그건 그때 가봐서 생각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손으로 나를 살리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며, 따라서 어떤 운명에 떨어진다고 해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렇게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충분하지 않을는지요. 여러분은 인생을 통해서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손을 인식하려면 우리에게 영적인 관점이 필요합니다. 생명은 우리가 소유하거나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니 모든 삶은 준비된 사람에게는 삶의 절정입니다. 두 발로 자유롭게 화장실을 드나들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제가 경험한 것처럼 바퀴 달린 의자에 얹혀서 삐뚤삐뚤하면서 드나드는 일도 똑같이 귀하고 멋진 삶입니다. 치타처럼 초원을 쏜살같이 달려야만 살아있는 게 아니라 달팽이처럼 천천히 움직여도 살아있는 건 똑같습니다. 그래서 성경 기자들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고 자주 노래했습니다. 감옥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중환자실에도 물론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즉 살리는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감싼다는 사실을 얼마나 절실하게 느끼며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온 상황에서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당장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 해방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언제일지 모릅니다. 지금은 바벨론 제국의 질서에 묶여서 살아야 합니다. 그 질서는 다른 꿈을 꾸기에는 너무 강력합니다. 당시에 에스겔의 이야기를 받아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 미래를 상상한다는 게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손과 영을 선포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백성이 된다면 어려운 형편에 굴복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겁니다.
전대미문이라 해도 좋을 듯한 ‘코로나19’ 사태를 맞은 요즘 여러분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대구 경북 지역은 이로 인한 어려움이 다른 지역보다 더 큽니다. 우리 교회도 오늘로 교회당에 모이지 않는 온라인 예배를 여섯 번째로 드립니다. 언제 어려움이 해결될지 궁금할 뿐이지 감을 잡기가 힘듭니다. 다행스럽게 우리 교우 중에는 확진자가 없습니다. 몇몇 가정은 생업에 지장을 받고 있습니다. 직접 생업에 지장을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경제가 총체적으로 어려워지면 간접적으로 어려움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는 상황과 비슷하다면 비슷합니다. 미래가 불확실해서 답답하겠지만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는 에스겔 선지자가 선포한 여호와의 손과 영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여러분도 살리실 것이니, 기대하고, 힘을 내십시오.
다른 분들도 저와 비슷하겠지만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다른 이에게서 일어난 일처럼 살펴보는 경향이 종종 있어요.
통풍으로 잠을 못자던 그 날도 나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보자, 하는 생각이었지요.
화장실 문제를 해결하는 순간에 "내가 이겼다." 하고 속으로 환호성을 쳤습니다.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친구와의 게임에서 내가 이겼으니 통쾌할 수밖에요.
봄을 노래하는 슈베르트의 가곡 "im Fruehling"(봄에)을 한번 듣고
코로나19의 침침한 분위기를 잠시라도 벗어나봅시다.
https://www.youtube.com/watch?v=wDPQS201F_Q
통풍의 고통 속에서 바퀴 의자를 타고가며 재미와 통쾌를 느끼셨다는 목사님의 얼굴을 상상하며 빵! 터졌지만 그 심정이 너무나 공감됩니다.
혹시 목사님만 느끼시는 비밀인양 통쾌라는 단어를 쓰셨다면 죄송합니다. ㅎㅎ
어떤 상황에서도, 날마다 소박한 삶 가운데 우리를 감싸고 있는 하나님의 손과 영을 감지하며 살아갈 때 모든게 기적이고 창조인거 같아요..
며칠 전 자려고 누웠는데 체끼가 있었는지 가슴이 답답하며 숨이 안쉬어지고 식은 땀이 나면서 불안해지더라구요~ 갑자기 가족과 형제, 이웃들과 이별을 한다는게 참 슬프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 죽음을 당겨서 살아가며 더 비워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