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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UxZWOdZLbc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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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한복음 17:1-11 |
영광과 영생
요 17:1-11, 부활절 일곱째 주일, 2020년 5월24일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를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면 3년 공생애와 십자가 죽음입니다. 십자가 처형의 위기가 코앞에 닥쳤을 시점에 예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로 피신하는 겁니다. 악한 세력과의 대화는 아예 가능하지 않으니 후일을 도모한다는 생각으로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몸을 숨기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십자가 처형을 배수진으로 친 채 자신의 길을 올곧게 가는 겁니다. 예수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이런 운명 앞에서 진지하게 풀어야 할 두 가지 숙제가 예수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기 죽음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찾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뒤에 남을 제자들에 대한 걱정입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오늘 우리는 그중의 일부인 요 17:1-11절을 설교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1) 먼저 요 17: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역개정이 아니라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공동번역이 훨씬 자연스럽게 번역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주십시오.
여기서 ‘때’는 자신이 십자가에 처형당해야 할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는 십자가 죽음에서 두 가지 신학적 의미를 찾았습니다. 하나는 아들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들은 예수 자신이고,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예수의 영광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당시에 십자가 죽음은 영광이 아니라 치욕이고 모욕이고 버림받음이었습니다. 바울은 고전 1:2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꼭 기억해둬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 십자가는 반역자들에게 내리는 로마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는 로마 정권에 폭력적으로 저항한 혁명 투사가 아니었기에 십자가에 처형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가 유대인에게 미움을 받아서 죽어야 했다면 돌에 맞았어야만 합니다. 예수 자신도 십자가 처형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는 사실이 공관복음에 간략하게나마 서술됩니다. 막 14:32절 이하에 따르면 체포당하던 날 밤에 예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 앞에서 심히 놀라며 슬퍼하면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토로했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가 지나기를 바라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드렸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는 왜 십자가에 처형당했는가, 하는 질문은 예수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일종의 화두였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대답입니다. 그 대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장애인도 고치며,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덩어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하신 예수라고 한다면 로마 정권을 비롯한 악한 세력을 강력한 카리스마로 제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당시에 기대되었던 메시아의 능력이었으니까요. 예수는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사탄에 세 가지 시험을 받았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라, 성전 위에서 뛰어내려서 안전하게 착지해봐라, 세상의 부귀와 명예를 손에 넣어보라는 요구였습니다. 한 마디로 초능력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자만이 메시아가 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 사탄의 요구를 거부한 예수는 이제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 처형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영혼의 깊이에서 외치며 살았던 한 인간에게 이보다 더한 비극과 모순은 없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예수의 영광이라는 말이 과연 성립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오늘 본문에 따르면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에게 영광이 드러난다는 말은 이를 통해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가 예수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2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다.
만민을 다스릴 권세가 바로 예수의 영광이라고 요한복음이 말하지만, 당시에 그런 권한은 로마 황제에게 있었습니다. 미국이나 우리나라 대통령처럼 당시 로마 황제로 선택된 사람은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황제에게는 로마 제국 안에서 살던 모든 사람에 대한 생살여탈권이 있었으니 권세로만 보면 영광, 맞습니다. 이와 달리 예수 제자들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에게 그런 권세가 있다고 믿고 외쳤습니다. 황제는 기껏해야 정치 경제의 차원에서 권세를 행사할 수 있었지만, 예수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서 권세를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을 비롯한 신약성경 전체가 붙들고 있는 이런 주장이 실제로 옳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바르게 대답하려면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죽은 나사로 집에 들렀을 때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시간이 무한히 연장되는 생명(endless life)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생명(eternal life)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런 생명을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일상의 작동방식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문학적인 비유로 설명하면, 우리는 땅을 기는 애벌레처럼 살기에 공중을 나는 나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애벌레의 삶을 지배하는 자가 예수 당시의 로마 황제였다면 나비의 삶을 지배하는 이는 예수였습니다.
애벌레가 아니라 나비의 삶을 예수의 가르침으로 바꿔서 설명하면,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힘으로는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고, 그의 사랑이며 자유이고, 해방이며 공의입니다. 그분의 자비이고 안식입니다. 희망이며 평화입니다. 우리를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는 능력입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방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먹고 마시고 입는 걱정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일상의 걱정은 상대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지 못하면 일상의 걱정에 떨어지고, 일상의 걱정으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는 더 거리가 점점 멀어집니다. 거꾸로 하나님 나라를 현실로 경험하면 일상의 걱정이 축소되고, 어린아이의 영혼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일상의 걱정에서 벗어나니 하나님 나라가 더 선명하게 경험됩니다. 저의 설교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우리나라 최저 생계비는 하루 8시간 일하는 걸 계산해서 대략 월 1백80만 원입니다. 부부가 함께 일하면 3백만 원은 벌 수 있습니다. 3백만 원으로 넉넉하지는 않으나 충분히 생활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있으면 계산이 달라지긴 합니다. 맞벌이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일반적인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즘 기본 소득이 거론되는 중입니다. 우리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진보한다는 조짐입니다. 대한민국 정도의 경제 수준이라면 모두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최소한 굶지 않고,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수 있고, 가끔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고, 도서관에 들러 책을 볼 수 있으며, 산책하면서 야생화를 넋 잃고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 성능이 좋아서 괜찮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손쉽게 시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피로 사회’를 벗어나지 못할까요? 자살자들이 왜 그렇게 많을까요? 답은 여러분이 아실 겁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걱정하느라, 또는 자기를 자랑하느라 실제의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겁니다.
3) 남과 비교하지 않고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 중에서 영적으로 수준 높은 삶을 누리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들어가기 전에 북아메리카에 살던 인디언들은 자연과 하나 되어서 살았습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 중간에 멈춘다고 합니다. 영혼이 따라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겁니다. 그들은 야생말의 땀과 사람의 땀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땅에 사는 모든 동식물이 형제이며 자매였습니다. 자연 영성이 매우 뛰어났던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그런 수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예수를 믿어야만 생명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요?
이 대목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알아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나비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었던 예수는 십자가 처형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것으로 예수의 운명이 끝났다면 예수는 구약 시대에 등장했던 여러 선지자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을 겁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자”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통 부활이라고 하는 그 사건입니다. 예수 부활은 기독교의 일방적인 주장이니 증거를 대라고 말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누구나 인정할만한 객관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을 무슨 수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주장하는 증거는 실험실에서 반복될 수 있는 생물학적인 현상입니다. 그 현상마저 아직 최종적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겁니다. 생명 현상에서 일부에 불과한 생물학적 증거만으로 빅뱅 이후 140억 년 동안 이어져 왔으면 앞으로 종말까지 이어질 긴 우주 역사를 판단하겠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예수 부활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를 대라는 주장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얄팍한 사실만 믿겠다는 불가지론에 해당합니다. 인식론적 교만입니다.
이해가 안 되지만, 이해되는 것보다 더 귀한 일들이 우리의 일상에서도 벌어집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올 만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여기 심한 장애를 앓는 여자와 부부로 사는 남자가 있다고 합시다. 남자와 여자의 구도를 바꿔도 됩니다. 이런 관계는 누가 보더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좋은 조건의 여자를 선택할 수 있었던 이 남자가 그 여자를 왜 사랑하는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남자에게 나타나는 삶을 통해서만 우리가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남자는 정말 행복하게 삽니다. 늘 기쁘고 평화롭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면서 삽니다. 직장 일이 잘 안 풀려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남자는 그 장애 여자를 통해서 그런 삶의 경지에 올랐다고 고백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마음 상태가 이와 비슷했습니다. 예수 부활을 경험했기에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증거라면 증거입니다.
4)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나름으로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영역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관계입니다. 전자는 자연주의로 나타나고 후자는 휴머니즘으로 나타납니다. 저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예수에게 가까이 가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궁극적인 생명을, 즉 영생을 온전하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거꾸로 자연주의와 휴머니즘만으로 제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연을 보십시오. 장엄하고 아름답고 신비롭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이니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연은 매우 파괴적입니다. 잔인합니다. 야생 동물들의 세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 오래 굶주린 어린 새끼를 위해서 사냥에 나선 어미 사자가 있습니다. 어린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 영양 한 마리가 있습니다. 사자의 사냥이 성공해야 할까요, 실패해야 할까요. 언젠가 지구에 큰 빙하기가 찾아오거나 인간이 방어할 수 없는 변종 바이러스가 창궐하면 인간은 모두 죽을 겁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개인의 강렬한 느낌도 죽음과 함께 어둠의 나락에 떨어집니다. 자연은 신비롭기는 하되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인간 사이를 따뜻하게 이어주는 휴머니즘도 그렇습니다. 여러 종류의 인간관계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토대입니다. 좋은 친구, 부부, 가족, 교우 관계 등등입니다.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휴머니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문제는 휴머니즘도 역시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휴머니즘을 실행하는 사람에게도 실망할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요즘 소위 ‘정의연’ 문제로 대한민국이 시끄럽습니다. 지난 30년간 이 단체에서 일했던 사람이 사리사욕을 위해서 이 단체를 이용했다는 주장이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실체적 진실을 아직 모르기에 왈가왈부하지는 않겠습니다. 잘못한 것만큼 책임을 지면 될 겁니다. 목사를 포함하여 정의와 평화를 주장하는 휴머니스트도 위선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휴머니즘을 통해서 인간이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초기 기독교인들도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시인들과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에게 나타나는 교양인의 삶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활동하는 조직과 정치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만 생명의 권세가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에게 발생한 십자가와 부활 사건만이 인간을 궁극적인 차원에서 살리는 영생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신앙이 3절에서 이렇게 표현되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영광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주어진 영생의 권세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소명을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요 17:22절에는 더 놀라운 발언이 나옵니다. 예수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었다고 말입니다. 아버지의 영광과 아들의 영광에서 오는 생명의 빛이, 즉 죄와 죽음의 어두움을 밝히는 영생의 빛이 오늘 우리를 환하게 비춥니다. 아멘!
말씀 잘들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사람들의 죄를 대속한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기 위한 것이군요. (예수의 다스림이 곧 영생이군요)
아빌라의 데레사의 "영혼의 성"을 읽다보니까 거기에도 애벌레와 나비의 비유가 나오더라고요. 애벌레가 죽고 나비로 부활해야 참 생명 안에서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를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의 다스림(영생)을 받는데 제약이 없기 위해서 나 역시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가야 하는군요.
험한 길인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