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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X6DyZ-ioOH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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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린도전서 12:4-13 |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성령강림 주일, 2020년 5월31일
오늘 설교 본문인 고전 12:4-13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성령’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홉 번이나 나옵니다. 고전 12장만이 아니라 13장과 14장도 성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령 문제가 고린도 교회에서 논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논란의 중심에는 은사 문제가 놓여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 중에서 성령을 받은 증거가 방언 은사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에도 그런 흔적들이 나옵니다. 방언은 특별한 언어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 경험의 비밀에 가까이 가는 것이기에 초기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은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바울도 자신이 방언 기도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한다고(고전 14:18) 밝혔을 정도입니다. 문제는 방언 은사를 독점적으로, 그리고 특권적으로 주장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의 방언 은사가 가장 우월하기에 다른 은사를 무시하는 겁니다. 바울은 이 문제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가 분열될 위험성을 발견하고 바르게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내용이 고전 12-14장에 나옵니다. 방언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14장에 나오고, 오늘 본문에는 은사와 성령의 관계에 관한 신학적인 해명이 나옵니다. 방언이 본질적으로 성령의 은사이기에 성령과의 관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바울이 생각한 겁니다.
1) ‘은사’라는 단어는 헬라어 ‘카리스마’의 번역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그 백성들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 바로 카리스마입니다. 성령은 헬라어 ‘프뉴마’의 번역입니다. 프뉴마는 바람, 숨, 기, 영이라는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에 초기부터 기독교는 성령을 창조의 영, 구원의 영, 부활의 영, 종말의 영 등등으로 불렀습니다. 성령의 능력 가운데 하나가 은사 수여입니다. 그 은사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고전 12:4절에서 바울은 은사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라고 했습니다. 은사는 다양하나 그것을 주시는 능력인 성령은 같은 영입니다. 5절에서 바울은 약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기독교인의 직분은 여러 가지이지만 주(主)는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는 하나님이자 곧 성령입니다. 6절에서는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합니다. 6절과 7절을 읽겠습니다. 루터 성경을 제가 번역해서 읽겠습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의 능력은 여러 가지이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모든 일에서 역사하십니다. 이런 일을 나타내심으로써 성령의 은사를 공동의 이익이 되게 하셨습니다.
4절부터 7절까지 내용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여러 은사가 성령이라는 하나의 근원에서 온다는 사실이 한 가지이고, 은사를 통한 성령의 나타나심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에 유익이 된다는 사실이 다른 한 가지입니다. 즉 다양성과 공공성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8절부터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합니다. 8-10절에 여러 가지 은사의 목록이 나옵니다. 오늘의 교회와 연결되는 내용도 있고, 거리가 있는 내용도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 이 목록 중에서 방언과 방언 통역이 맨 나중에 나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일부가 열을 올리며 자랑해 마지않던 은사가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 목록에는 당시 교회의 모든 은사가 나열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컨대 구제나 교회 행정도 은사에 속합니다. 오늘의 교회에서는 성가대와 어린이 주일학교 교사, 교회 도서관 봉사나 식사 당번 역시 다 은사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은사의 목록을 언급한 뒤에 11절에서 은사와 성령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이 구절에서도 역시 은사의 주도권이 성령에게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바울은 다음 단락인 12절과 13절에서 은사 문제를 몸과 지체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이지만 몸에 딸린 지체는 여럿이고, 그것이 서로 다릅니다. 팔과 다리, 머리와 가슴과 허리, 눈과 코와 귀와 입의 기능은 분명히 다릅니다. 몸 안에는 더 다양한 장기들이 있습니다. 창자와 간의 기능이 완전히 다르지만 둘이 다 몸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몸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지체는 교인들입니다. 다양한 은사로 살아가는 교인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 한 몸으로서의 유기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곧 성령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앞에서 교회 안에서 은사가 다양하지만, 성령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짚었습니다. 여기서는 그 은사의 다양성을 훨씬 뛰어넘는 문제까지 거론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유대인도 있고 헬라인도 있었고, 아직 종의 신분인 사람도 있고 자유 시민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바꾸면 기업 사장도 있고 그 종업원도 있다거나 대학교 총장도 있고 청소부가 있습니다. 흑백 인종 분쟁이 여전했던 1960년에 미국 교회로 말하면 한 교회에 백인도 있고 흑인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조선 시대로 돌아간다면 양반과 백정이 한 교회에 있는 겁니다. 극복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지만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바울의 이런 주장은 혁명적인 발상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입니다. 이런 새로운 세계관의 토대는 교회가 성령 공동체라는 사실에 놓여있습니다.
성령 공동체라는 표현이 모든 기독교인에게 실감 나게 들리지는 않을 겁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성령이 발휘하는 능력으로만 경험할 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힘으로 경험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에 개인과 사회에 생명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여기 교사가 있다고 합시다. 그의 교사 활동이 학생들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살리면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기 국회의원이 있다고 합시다. 그의 활동이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활동은 죽이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3) 바울이 염려하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좀 더 들여다봅시다. 은사 문제로 논란이 벌어졌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은 7절에서 성령의 은사가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개역개정은 단순히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고 번역했지만 루터 성경(zu gemeinsammen Nutzen)과 NIV 성경(for the common good)은 공동의 유익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일종의 공공성, 또는 공동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지 못하면 은사를 오해하는 것이며, 그렇다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여기서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더 주목해서 보십시오. 팔과 다리가 자기만 앞세운다면 몸 전체는 잘못됩니다. 우화 식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다리가 가장 중요하니까 머리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모두 다리로 만들겠다고 주장하거나, 눈이 가장 중요하니까 코와 귀를 없애고 눈만 열 개 만들자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몸은 망가집니다. 바울이 절실한 마음으로 지금 편지를 쓰는 고린도 교회에는 공공이 아니라 사사로이 은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은사를 자랑의 기회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의 공동체성이 파괴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교회 생활과 관련해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여러분은 모두 은사를 받았습니다. 은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은사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사람으로 태어났는데도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거와 같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 은사를 받지 못하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모두 설교 은사를 받은 게 아니고, 모두 운영위원의 은사를 받은 게 아니고, 모두 청소 은사를 받은 게 아닙니다. 자신이 무슨 은사를 받았는지 알지 못할 뿐이지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별거 아닌 듯이 보이는 발톱도 일종의 지체입니다. 눈썹도 그렇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자신이 어떤 지체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연결되어 있는지 알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면 그는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게 아닙니다.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내용으로는 받은 게 아닙니다.
4) 둘째, 이 대목에서 더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은사가 실제로 성령에서 온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의 하나가 바로 앞에서 짚은 공공의 유익입니다. 또는 공동선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공공 유익이나 공동선에 두는지, 아니면 자신의 사사로운 유익에 두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게 칼로 무를 자르듯이 늘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아주 미묘하고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공공의 유익을 구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자기의 유익에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그걸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아무리 잘못된 일이 교회에서 벌어져도 개인보다는 교회 전체를 생각해서 무조건 덮어둬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 개혁을 위해서 싸울 때는 싸워야겠지요. 개신교회의 이름에 ‘프로테스탄트’이 붙은 게 괜한 게 아닙니다. 싸움도 근본에서는 공적이어야지 사적이면 곤란합니다. 그 사사로운 마음이 쌓이면 언젠가 공동체를 파괴할 것입니다.
자신의 은사를 공공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공공의 유익이 무엇인지 구분하기도 어렵습니다. 인격과 교양으로 어느 범주 안에서 공공의 유익을 구할 수는 있겠으나 자기가 아는 범주 너머로는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대충 교양이 있는 기독교인으로 살아도 크게 흠이 잡히지는 않으니, 그렇게 살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사십시오. 저는 설교자로서 여러분에게 기독교인의 인격과 교양을 설교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삶의 모양만 바꾸는 것이라서 삶의 본질이 바뀌는 신앙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은사를 말하면서 계속해서 성령과의 관계를 거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은사의 출처인 성령에 가까이 가지 않고 어떻게 그 은사를 은사답게 사용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5) 바울은 13절 후반절에서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 성령을 마신다는 말은 문학적인 비유입니다. 이 표현은 같은 13절에 언급된 세례와 연관됩니다. 세례는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의미의 종교의식입니다. 이 종교의식의 출발은 예수에게 일어난 십자가 죽음과의 연합입니다. 그 십자가 죽음은 피이기에 세례는 이 피와의 연합입니다. 세례는 성령 사건이라는 점에서 바울이 “성령을 마신다.”라고 표현한 겁니다. 세례가 성령 사건이라는 말은 세례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실제로 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로 생명을 얻는다는 우리의 주장을 공허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 게 아니라 돈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누가 옳은가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의 종교의식은 세례입니다. 세례는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방식을 진행됩니다. 물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은 이전의 자신이 죽었다는 뜻이고 물에서 나왔다는 말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은 사람은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새롭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면 생명을 얻는다는 말도 실감하지 못하고 성령을 마신다는 말도 실감하지 못합니다.
예수 믿고 세례받았어도 실제 삶에서는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새롭게 태어났다는 사실이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세례를 오해하기에 벌어지는 생각입니다. 세례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지 새로운 사람으로 이미 성숙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생아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면 죽습니다. 상당히 긴 시간을 돌봐줘야 합니다. 교육해야 합니다. 세례받은 사람도 영적으로 돌봄을 받아야만 실제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돌보지 않은 채 자신이 새로운 사람이 됐는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불평한다면 그는 먹기를 거부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신생아 돌보듯이 돌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제라도 아기 키우듯이 돌보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6)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받고,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났으며, 계속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안다면 자신의 은사를,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할지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런 방향으로 삶이 더 풍성해지면 자기는 무한히 축소될 것이며, 거기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자유와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그게 구원의 실체입니다.
상투적인 예이지만 이 대목에서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일주일 뒤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시다. 그 사실을 알기 전과 안 후의 여러분은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새사람이, 또는 다른 사람이 된 겁니다. 세상이 달라 보이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완전히 새로워집니다. 신경전을 벌이던 사람과도 더는 신경전을 벌이지 않고, 공연한 일에 시간을 소비하지 않을 겁니다. 성령으로 세례받은 사람은 이렇게 새로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이 모두 한 몸이 되었다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삶이 우리에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이런 신앙의 내공이 깊어질 수 있도록 자신의 영혼을 돌보면서 기도하고 계시는지요? 너무 먼 이야기라서 아예 포기하셨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받고 성령의 잔을 함께 마신 우리가 지체로 참여하는 교회는 곧 성령 공동체입니다. 말만 성령 공동체에 속했다고 하지 말고, 성령 공동체의 길을 갑시다. 그 길은 자신의 은사(삶)를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고 공동선과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집을 부리지 않고 그분께 마음을 열면 성령이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