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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성령강림절 조회 수 10952 추천 수 0 2020.06.14 20:02:42
설교보기 : https://www.youtube.com/watch?v=anasLpHi0S4 
성경본문 : 창세기 18:1-15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18:1-15,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2020614

 

 

성경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은 몇 명일까요? 이스마엘과 이삭 두 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가장 많을 겁니다. 두 아들 중에서 형인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서자이고, 동생인 이삭은 적자(嫡子)입니다. 아브라함의 정통성은 이삭에게 이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은 다음에 다시 그두라라는 후처를 얻어서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내용은 창 25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죽기 전에 대부분 유산을 이삭에게 물려주고 여러 명의 서자에게도 적당한 재산을 손에 들려주어 이삭이 사는 지역에서 멀리 떠나 살게 합니다. 이복형제들끼리 싸움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습니다.

 

1) 이삭의 출생에는 많은 비화가 숨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설교 본문인 창 18:1-15절에 나옵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였습니다.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이민자로 산 지 70년은 족히 되었습니다. 이제 가나안에서 맹주 역할을 할 정도로 재산을 불렸습니다. 친아들이 없었다는 게 아쉽다면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십여 년 전에 낳은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세 명의 나그네로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전통에 따라서 그 나그네들을 집으로 끌어들여 극진하게 대접했습니다. 그 내용이 창 18:1절 이하에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환대받은 나그네들이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라는 여자니까 낯선 남자들 앞에 나타나지는 않고 장막 안에 머물렀습니다. 나그네들이 아브라함에게 이상한 말을 합니다. 내년에 다시 이곳을 들리겠다면서 그때 사라가 아들을 볼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는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많았습니다. 사라의 생리가 끊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사라는 장막 안에서 이런 대화를 듣다가 속으로 웃었다고 합니다.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환대를 받았으니 덕담으로 저런 소리를 한다고 사라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3절과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삭 출생에 관한 이 에피소드는 21장에 이르러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름을 이삭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들 이삭에게 팔 일 만에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백 세고, 사라의 나이는 구십 세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재미있는 전래 동화를 머리에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이 묘사된 사실 그대로 일어난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믿음의 바탕에는 본문에 기술된 대로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존재라는 사실은 성경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사도신경도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는 고백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주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모세 시절에 홍해가 갈라져서 유대 민족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널 수 있었다거나 여호수아가 전쟁을 벌이던 시절에 해와 달을 멈추게 하셨다는 이야기가(10:12 이하) 그렇습니다. 생리 현상이 끝난 나이의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은 이 사건도 하나님의 초자연적 전능을 가리킨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2) 이런 생각에 몇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재난이 서로 모순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끔찍한 이야기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이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연재해가 일어나기도 하고, 한 인간의 인생을 파괴하는 질병이나 사고도 일어나고, 인간의 악행으로 인한 불행도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시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는 걸까요?

이 질문에 우리는 아직 적극적이면서도 완전한 대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소극적이면서 제한적인 몇 가지 대답만 알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불행과 재난이 벌어지는 자리에 함께하십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십자가 처형보다 더 끔찍한 재난은 없습니다. 마태복음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1:23)입니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예수의 운명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고후 4:6). 그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다면 그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죽음조차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리라고 한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불행과 재난의 자리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그 어떤 재난과 불행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개인이나 민족에게 닥치는 재난과 불행에 저항해야 합니다. 거기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런 노력을 기울여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재난과 불행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민족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 함께하셔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재난과 불행도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에 포함됩니다. 칼 바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향곡에는 중간에 불협화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단락만으로 보면 듣기 불편하나 전체 교향곡에서 보면 그것마저 조화롭다고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비슷한 의미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악마저 궁극적으로는 선하게 사용하신다고 말입니다. 이런 설명으로 어떤 개인이 끔찍한 불행을 얼마든지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향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당장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사실을 선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모든 일을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폭군처럼, 독재자처럼 밀고 나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를 제한하심으로써, 그리고 낮추심으로써 참된 능력을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2:6, 7절을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낮아지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빌 2:9절이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전능하심의 실체라는 말을 세상은 거들떠보지 않을 겁니다. 세상은 실제로 경제 정치 군사의 차원에서 압도적인 힘이 있어야 전능하다고 말합니다. 제국의 모습이 바로 그런 전능을 상징했습니다. 그 로마 제국에 의해서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야말로 참된 승리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기독교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생각하십니까?

 

3) 다시 오늘 설교 본문이 말하는 사라의 임신과 출산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사라가 죽은 다음에 아브라함이 후처를 얻어서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 이삭이 장가든 이후이니 나이가 줄잡아 120세는 되었을 겁니다. 그가 유산 문제를 다 해결하고 죽은 나이는 175세였습니다. 당시 나이 계산은 지금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쯤 줄여야 오늘의 나이에 해당합니다. 아브라함은 90세까지 살았을 것이고, 이삭을 낳을 때의 나이는 50세이며, 사라의 나이는 45세쯤 되었겠지요. 합리적인 추정입니다.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을 고대 사회에서 여자 나이 45세에 아기를 낳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사라의 임신과 출산을 가능하게 했냐, 아니냐 하는 논란은 무의미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생리가 끊겼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아기를 낳는 일은 아주 드물지만 벌어집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세례 요한의 부모도 늙어 아기를 낳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오늘 설교 제목에 나와 있듯이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인식과 경험이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뚫어보는 게 중요합니다. 인간의 삶이 근본에서 파괴되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오늘의 이 현실에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4) 우리는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사는 거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추상적으로 삽니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매진하는 걸 삶이라고 여깁니다. 대학교수, 판검사, 기업체 사장, 의사 등등이 인생의 목표라는 젊은이들이 많을 겁니다. 자기의 목표를 이루거나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다음에는 또 다른 목표가 세워집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모든 게 자본으로 통합니다. 그게 다 이루어지면 무엇이 남을까요? 잘 먹고 잘살 수 있다고 대답할 겁니다. 그런 목표 설정과 성취는 엄격하게 말해서 추상적인 겁니다. 그게 삶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표 성취를 통해서 행복하다는 사람을 저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만족한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실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생명 충만하게 하는 힘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는 우리의 존재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손에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생명의 시원적 능력이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생명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 능력이 바로 못 하실 일이 없는 그분의 전능하심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그냥 못 하실 일이 없는 분이 아니라 선하게못 하실 일이 없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선한 일에서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믿습니다. 인생살이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다 알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이 선한 능력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선한 전능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곳곳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감정적인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선한 능력으로의 사랑입니다. 그를 믿기에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흔한 말로 불치병에 걸려도 괜찮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런 일이 막상 닥치면 힘들기는 하겠지만 그 방식으로도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불행한 순간을 저 혼자는 간단히 해결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은 못 하실 일이 없으신 분이기에 제가 그 상황을 돌파할 수 있도록 어딘가에 길을 열어두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궁극적으로 죽음의 순간도 돌파할 수 있게 도와주실 겁니다. 하나님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높고 깊은, 절대적인 사랑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을 믿고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정말 옳은 신앙일까요? 종교적 자기 합리화는 아닐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 인생이 잘 풀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이 안 풀려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하나님이 그 자리에 함께하셔서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그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시고 사랑이 풍성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깊이 경험하지 못하면 산다는 사실입니다. 부모의 깊은 뜻을 모른 채 자기 주관대로 떼만 쓰는 아이처럼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 할까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서 벌어진 불편한 상황이 좋은 예가 되겠군요. 우리는 지금 제대로 모이는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불편한 일이 많습니다. 앞으로 교회가 어떻게 될지 걱정도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영광 가득하고 은혜 충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하게 못 하실 일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여러분이 원하는 수준만큼 따라오지 못하기에 걱정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잘 보십시오. 말썽 피우는 자식이라도 큰 병으로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연봉이 대폭 줄어든 분은 없으신가요? 일용할 양식만으로 우리 영혼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다 알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못 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우리에게 선한 능력으로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그걸 다 놓치기에 하나님이 전능하고 선하신 분 맞나, 하고 의심합니다. 죽을 때까지 그런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평안도 없고 안식도 없고 해방도 없습니다.

 

5) 이렇게 질문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당신 설교처럼 나도 하나님이 못 하실 일이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으며 살고 싶은데, 잘 안 된다. 어떻게 하면 그런 하나님의 능력을 온 영혼으로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 방법을 가르쳐 달라.”라고 말입니다. 대답하기 전에 저도 아직 완전한 믿음의 깊이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구원을 이미 이룬 게 아니라 이루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함께 달려가자는 뜻으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합니다. 달려가야 할 방향을 우선 분명하게 잡는 게 중요합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운명에 가까이 다가가는 게 최선입니다. 한번 가까이 가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꾸준히 구도적으로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끔찍한 재앙인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어느 순간에 여러분에게 생명의 궁극적인 현실(ultimate reality of life),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상에서 배운 기준들과 완전히 다른 삶의 기준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실체가 환하게 들어올 겁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보았던 것처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볼 것입니다(7:5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코로나19 사태만이 아니라 살벌한 국제관계와 과학문명의 비약적인 발전과 기후변화 등등, 수없이 많은 문제가 뒤범벅된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마십시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을 약속하셨던 우리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데에 못 하실 일이 없는 분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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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베뢰아

June 14, 2020
*.76.41.248

목사님,
이번 주 설교는 오디오나 유투브 영상이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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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5, 2020
*.182.156.135

이제야 유튜브 파일을 링크합니다.

요즘 최적의 동영상 파일을 만들려고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세상살이가 복잡하게 돌아갈수록 

우리는 더 단순한 삶을 붙들어야할 텐데,

이런 삶의 태도가 쉽지 않겠으나 안 될 일도 없으니

6월 둘째 주간 주님의 평화가 베뢰아 님에게 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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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베뢰아

June 15, 2020
*.76.41.248

감사합니다.

설교를 빨리 듣고 싶은 마음에 독촉을 하게 되었네요^^

가만히 앉아서 편하게 듣기만 했는데...

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복잡한 기계적인 일에 한없이 시간을 보내는 손길이 숨어 있음을

기억하겠습니다. 


익숙하게 안다고 생각한 아브라함과 사라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의미를 새롭게 배웁니다.

하나님은 선한일에 전능하신거고, 그건  생명의 시원적 능력이며 곧 우리를 사랑하심이네요.

저의 삶이 추상적인 다른 목표들에 한눈 팔지 않도록 

예수님에게 나타난 그 생명에 눈이 더 밝아지는 공부를 계속해야겠어요

일상에서 삶의 실체를, 생명을 충만하게 느끼도록 구하고 구하면서요. 


바이러스와 더위에도 불구하고

비밀스럽운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목사님과 샘터교회에 충만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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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6, 2020
*.182.156.105

독촉, 잘하셨어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도 새롭게 깨달은 게 많습니다.

성서의 세계가 훨씬 넓고 깊게 보이네요. 

"숨어 계신 하나님"을 보물찾기 하듯이 찾으면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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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거북도사

June 17, 2020
*.151.220.52

목사님 잘 지내시죠 오랜만에 글 남깁니다.

옛날 찬양이 생각나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kfXk0dCXw-U#action=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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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7, 2020
*.182.156.135

예, 거북도사 님은 2005년에 다비아 회원이 되셨네요. 

지금은 어느 교회선가 목회를 하고 계시겠군요. 

링크 해놓은 어린이 찬송가가 은혜롭습니다.

어린이 찬송가의 내용만 잘 알아도 

기독교 신앙의 모든 걸 아는 셈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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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 사순절 생존의 위기 앞에서 (출 17:1-7) 2020-03-15 10943
839 사순절 영생과 예수 (요 3:1-17) 2020-03-08 10648
838 사순절 의와 생명 (롬 5:12-19) [2] 2020-03-01 10824
837 주현절 영광스러운 미래의 생명 (마 17:1-9) 2020-02-23 10113
836 주현절 "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8] 2020-02-16 11797
835 주현절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전 2:1-12) [8] 2020-02-10 10803
834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14008
833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10612
832 주현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7] 2020-01-19 10850
831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11618
830 성탄절 하나님을 본 사람 (요 1:10-18) 2020-01-05 11929
829 성탄절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2] 2019-12-29 10762
828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15370
827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17298
826 대림절 "파루시아" (약 5:7-10) [5] 2019-12-16 13684
825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20456
824 대림절 전쟁 연습, 평화 연습 (사 2:1-5) [7] 2019-12-01 14257
823 창조절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골 1:1-20) [6] 2019-11-24 12609
822 창조절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는 날! (눅 21:6-13) [8] 2019-11-17 11614
821 창조절 두려워 말라! (학 1:15-2:9) 2019-11-10 10799
820 창조절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눅 19:1-10) [9] 2019-11-03 15981
819 창조절 여호와의 날에 구원 얻을 자 (욜 2:23-32) 2019-10-27 12222
818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15043
817 창조절 말다툼과 진리의 말씀 (딤후 2:8-15) [2] 2019-10-14 10804
816 창조절 믿음과 구원 (눅 17:11-19) 2019-10-06 11643
815 창조절 투쟁적인 믿음 (딤전 6:6-16) [4] 2019-09-29 12918
814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10404
813 창조절 하나님의 근본 속성 (딤전 1:12-17) [7] 2019-09-15 11792
812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11798
811 창조절 복 있는 삶 (눅 14:7-14) [2] 2019-09-01 12612
810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10594
809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10880
808 성령강림절 "믿음" (히 11:1-3, 8-16) 2019-08-11 11949
807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11596
806 성령강림절 살아계신 하나님 (호 1:2-10) [4] 2019-07-28 10860
805 성령강림절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눅 10:38-42) [4] 2019-07-21 12182
804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14613
803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 파송 (눅 10:1-11) [2] 2019-07-07 11353
802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10817
801 성령강림절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6] 2019-06-23 15581
800 성령강림절 지혜의 근원 (잠 8:1-4, 22-31) [4] 2019-06-16 11378
7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롬 8:14-17) [9] 2019-06-10 11890
798 부활절 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서 (행 16:16-34) [4] 2019-06-02 21547
797 부활절 예수의 평화 (요 14:23-29) [4] 2019-05-26 13053
796 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2019-05-19 11914
795 부활절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5] 2019-05-13 10301
794 부활절 바울,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행 9:1-6) [4] 2019-05-05 12527
793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11740
792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10722
791 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4] 2019-04-14 10707
790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10736
789 사순절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5] 2019-03-31 10783
788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10930
787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10776
786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11757
785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10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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