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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먹으라!" (출 12:1-14)

창조절 조회 수 847 추천 수 0 2020.09.06 18:54:53
설교보기 : https://youtu.be/9HdF3G5bmCo 
성경본문 : 출애굽기 12:1-14 

급히 먹으라!”

12:1-14, 창조절 첫째 주일, 202096

 

 

유대인들에게는 몇 개의 중요한 절기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기독교와 가장 가까운 절기는 유월절입니다. 1) 예수는 유월절을 맞아 성지순례차 예루살렘에 들어왔다가 체포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합니다. 2)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유월절 어린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3) 유월절이 이집트에서의 해방을 가리킨다면 예수 사건은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입니다. 4)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만찬을 먹었고, 기독교인은 예배에서 성만찬을 했습니다. 이 외에도 기독교가 유대교의 유월절을 특별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깊이 이해하려면 유월절 신앙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 유월절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대목이 바로 오늘 설교 본문인 출 12:1-14절입니다.

 

파라오와의 담판

모세는 이집트에서 소수 민족으로 사는 유대인(히브리인)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이끌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당대 초일류 강대국인 이집트를 상대로 하는 이런 명령은 임파시블 미션에 가까웠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모세의 제안을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이집트에 내리는 재앙을 무기로 해서 협상에 들어갔지만, 파라오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런 밀고 당기는 협상이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아홉 가지의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나일강물이 피로 변한 것, 개구리 떼, , 파리, 가축의 죽음, 악성 종기, 우박, 메뚜기 떼, 흑암이 그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종종 일어날 만한 현상이었습니다. 자연과학이 크게 발전한 지금도 바이러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데, 33백 년 전이야 무슨 말을 더 보탤 필요가 있겠습니까. 마지막 담판에서 파라오는 모세에게 물러가라.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 나타나면 죽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위협했고, 모세는 파라오에게 당신이 말한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 얼굴을 보지 않겠다.”라고 응수합니다(10:28, 29).

이제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앞두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특별한 의식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유월절 의식입니다. 유월절(踰越節 Passover) 죽음의 천사가 지나갔다라는 뜻입니다. 유대력으로 니산월(아빕월이라고도 부름. 태양력으로 3-4) 10일에 일 년 된 수컷 양을 준비해야 합니다. 14일 저녁에 양을 잡습니다. 양의 피를 출입문 틀 상단 좌우에 바릅니다. 그리고 밤에 가족이 다 모여서 양고기를 불에 구워 먹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맛이 나는 나물을 함께 먹어야 합니다. 날것으로 먹거나 삶아서 먹으면 안 됩니다. 남은 음식은 다음 날 아침에 모두 불에 태워서 없애버립니다. 육식과 채식이 곁들어졌으니 영양가 면에서는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먹을 때 어떤 복장을 하는지도 언급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11절입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1절이 묘사하는 방식으로 음식을 먹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허리띠, , 지팡이는 여행에 필요한 거지 먹는 데 필요한 게 아닙니다. 음식은 천천히 먹어야 합니다. 유월절 음식을 급하게 먹어야 하는 이유는 이집트 땅을 하루빨리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피해 도망가듯이 떠나야 합니다.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밥맛도 느낄 수 없습니다. 당장 손에 들 수 있는 것만 들고, 그리고 지게나 달구지에 올릴 수 있는 물품만 챙겨서 떠나야 합니다. 속히 떠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유월절 의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월절 신앙은 광야 40년을 통해서 유대인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아무 데서도 편안히 머물지 못했습니다. 짐을 풀고 잠시 지내다가 다시 떠나야 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야 겨우 정착했습니다.

이집트 땅을 급히 떠나야 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곧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내전으로 인한 살육일 수도 있고, 급성 전염병으로 인한 집단 사망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12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유월절 의식이 실행되는 그날 밤의 분위기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실감이 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이 처음 일어났다고 알려진 중국 우한이 한 때 봉쇄되었었습니다. 봉쇄 조치가 일어나기 전에 우한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건이 안 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여건이 되는 사람은 다 떠났습니다. 이런 일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도 일어났고, 지난 2, 3월에 우리나라 대구에서도 자칫하면 일어날 뻔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봉쇄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확진자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면 어쩔 수 없습니다.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는 고대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죽음의 도시를 떠나야 하니 여유를 부리면서 밥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당시 한 유대인 가정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이라 해도 좋고, 아내의 입장도 좋고, 자녀들의 입장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지금껏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끔찍한 열 번째 재앙이 이집트 전역을 휩쓸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살아남을 것인지, 그 재앙에 모두 휩쓸릴 것인지 불안합니다. 서로 말을 섞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런 말만 듣고 마음 편히 그날 밤을 지낼 수는 없습니다. 온갖 망상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자신들을 이집트 사람과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겁니다. 이집트를 떠난다고 해도 자신들의 생명이 부지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린 말씀에 따라서 최대한 말을 줄이면서, 우리가 제사를 지낼 때 그러하듯이 진지하게, 유월절 의식을 하나하나 진행할 뿐입니다. 양을 잡아서 피를 문틀에 바르고 다른 몇 가지 음식을 장만합니다. 그리고 곧 여행을 떠나는 복장으로 준비된 음식을 급히 먹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대대손손이 유월절 의식을 지켰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4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대충 처리해야 할 것들

밥을 급히 먹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상황이 다급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일에 여전히 매달릴 겁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 무엇인지 구분하는 게 물론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일상에 치이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던 유대인들의 일상에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돈을 빌리거나 빌려준 일도 있습니다. 오래 준비해서 벌여놓은 사업도 있었습니다. 이집트 정부에서 실시하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젊은이도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이 그들에게도 똑같이 있었습니다. 인생살이에서 어떤 절체절명의 순간을 붙들고 사는 사람에게는 그런 일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집에 불이 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전히 식탁에 앉아서 근사하게 밥을 먹거나 독서삼매에 빠지거나 유튜브로 멋진 음악을 감상할 분들은 없을 겁니다. 가족이 집에서 빠져나오는 일 외에는 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불 난 집에 사는 게 아닌데, 왜 그렇게 특별한 상황을 전제해서 말하느냐고, 그런 말은 현실과 동떨어진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세상은 잘 돌아갑니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서 일상이 크게 흔들리지만 그래도 절망적이지는 않습니다. 얼마 지나면 적절한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될 것이고, 모든 일상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저는 코로나19 이전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실존은 열 번째 마지막 재앙을 앞둔 이집트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일상 자체가 사실은 폭풍 전야의 고요함과 비슷합니다. 지금 아무리 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도 언젠가는, 아니 곧 죽는다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일상 자체 안에, 또는 일상 근처에서 이미 죽음의 천사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도 될까요? 서울 강남 지역의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갭투자, 영끌, 패닉바잉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이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있는지, 토목건설업자와 언론의 결탁으로 벌어진 일인지, 자본주의의 숙명인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와중에 모두가 서로 헐뜯는 방식으로 대결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겠습니다. 국민 모두의 정신 건강에 큰 해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정상적으로 투자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거기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결과에 상관없이 실망감은 더 커집니다. 그게 죽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파트 문제만 이런 게 아닙니다. 최근에는 정부와 의사협회 사이에서 엄청난 충돌이 있었습니다. 상당수의 의사가 몇 주간에 걸쳐서 파업까지 했으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사회 과학이나 국가 경영, 또는 대중의 욕망 차원에서 이 문제를 분석할 능력은 제게 없습니다. 다만 환자 치료까지 거부하면서 의사협회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한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수입이 늘어난다는 말인데, 인간 생명에 관한 일을 천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는 허무한 일이 아닐는지요. 그 허무는 곧 죽음의 천사가 일으키는 재앙입니다.

유월절 만찬을 급히 먹는다는 말의 실제적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생명을 얻는 일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안들을 대충 처리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이익이 더 많아 돌아가냐 하는 것들은 대충 처리합니다. 그런 문제로 다투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자기가 받아야 할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최저임금제나 기본소득과 같은 문제를 두고 싸울만한 때는 싸워야 합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어떤 사안으로 갈등하고 싸우더라도 이게 사람과 공동체 전체를 살리는 일인지, 단순히 자기 이익만을 챙기기 위한 이전투구인지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죽음의 천사가 이집트 전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엄청난 일을 행하게 될 그 순간에, 그래서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급히 먹어야 할 그 순간에 누가 더 넓은 집에 사느냐, 하는 문제로 싸울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가나안을 향해서

앞에서 저는 유월절 의식에서 밥을 급하게 먹어야 할 이유가 엄청난 재앙이 떨어질, 죽음의 도시가 될 이집트를 곧 떠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집트를 떠난다는 말은 곧 전혀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집트를 과감하게 떠날 수 있었던 데에는 가나안이라는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가나안은 표면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실 겁니다. 둘째, 가나안은 하나님께 자유로이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땅입니다. 이 두 번째 이유가 핵심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처음으로 이집트의 파라오를 만났을 때 한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5:3). 파라오는 이집트에서 제사를 바치라고 중재안을 냅니다.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의 중재안을 거절했습니다. 적당한 타협으로는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에게 자신들의 미래를 맡긴 아주 특별한 민족입니다. 저는 그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려고 그들은 지금 대단한 모험을 감행하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4백 년 동안 살았던 이집트를 떠나는 일은 모험입니다. 이게 다른 사람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파라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에 있던 주변의 다른 소수 민족도 유대민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신앙도 중요하지만 먹고 사는 게 더 중요한 마당에 지금 가긴 어딜 가냐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이집트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유대민족이 이집트를 떠날 수 있었던 데에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가 나올 때마다 여러분과 똑같이 이 시대를 사는 설교자로서 저는 뭔가 설교하기가 주저됩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생명의 주관자이자 집행자로 경험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돈이 신으로 숭배받는 세상에 사는 이들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그래서 무능력해 보이는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없기에 그만 생각하고, 성경이 말하는 사실만을 그대로 전할 뿐입니다. 모든 불확실성을 마음에 담고 유월절 의식을 따라가는 유대인처럼.

유월절 공동체인 유대 민족이 하나님 안에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통해서 세상을 전혀 새롭게 경험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사실을 선지자들은 말씀으로 기록했습니다. 실제로는 척박한 땅인 가나안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겉으로는 제국이 저 잘난 듯이 큰소리치지만, 하나님 말씀 안에서는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그 사실이 눈에 들어왔기에 그들은 과감하게 이집트 제국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파라오가 신으로 숭배받는 이집트에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뚫어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집트에서 모든 집안의 첫 자녀가 죽고 짐승의 맏배가 죽는 일이 벌어진다고 과감하게 표현했습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으니 이집트를 속히 떠나야 합니다. 속히 떠나려면 급히 먹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고대 유대인들처럼 이집트를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역사 안에서 우리와 똑같이 몸을 지니고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생명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급히 먹으라.”라는 오늘 그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소중하기에 무엇을 먹을까 하는 일에는 신경을 덜 써도 됩니다. 우리는 그걸 허락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이 세상살이에서 많은 것을 골고루 챙겨서 잘 먹지 않아도 괜찮으니, 마음 놓으십시오. 대신 예수에게 가까이 가는 일에 힘쓰십시오. 이를 통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 세계에 들어갈 것입니다.


profile

[레벨:15]베뢰아

September 07, 2020
*.76.41.248

출애굽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통해 세상과 인생을 전혀 새롭게 경험하고 인식 했기에, 

바로와 제국의 한계를, 즉 생명이 불가능함을 뚫어 보았다. 

그 깨달음을, 

애굽인들과 가축의 처음난 것이 다 죽을 것이라고 

급히 먹고 떠나자고 과감하게 표현한 것이라는 대목이

새롭게 놀랍게 다가옵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니, 10가지 재앙 각각이 그들의 어떤 통찰일지 좀더 엿볼 수 있어요.


출애굽은 하나님과 관계에 집중하려고, 풍요롭고 익숙한 곳을 떠난 것임을 기억하고

먹을 것 입을 것에 덜 신경 쓰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 나라와 생명의 신비를 구하며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오늘도 깨우침의 말씀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97]정용섭

September 07, 2020
*.137.91.228

베뢰아 님에게 성서의 세계가 생생하게 전달되는가 봅니다. 

제가 자주 말한 거지만 

성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달을 볼 수 있다면 

성서가 왜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인지를 알게 될 겁니다.

급히 먹으라는 저 표현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라는 예수 말씀은 

서로 통합니다.

베뢰아 님의 대글을 통해서 

내 설교가 과연 전달될까, 하는 저의 걱정이 

공연한 노파심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옥한 이집트 고센 땅에서 척박한 가나안 땅으로 길을 떠나는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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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2328
808 성령강림절 "믿음" (히 11:1-3, 8-16) 2019-08-11 2090
807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2204
806 성령강림절 살아계신 하나님 (호 1:2-10) [4] 2019-07-28 2227
805 성령강림절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눅 10:38-42) [4] 2019-07-21 2439
804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1957
803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 파송 (눅 10:1-11) [2] 2019-07-07 2072
802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2278
801 성령강림절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6] 2019-06-23 1888
800 성령강림절 지혜의 근원 (잠 8:1-4, 22-31) [4] 2019-06-16 2302
7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롬 8:14-17) [9] 2019-06-10 2395
798 부활절 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서 (행 16:16-34) [4] 2019-06-02 4784
797 부활절 예수의 평화 (요 14:23-29) [4] 2019-05-26 2323
796 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2019-05-19 1904
795 부활절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5] 2019-05-13 2055
794 부활절 바울,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행 9:1-6) [4] 2019-05-05 2433
793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1850
792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2381
791 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4] 2019-04-14 2266
790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2193
789 사순절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5] 2019-03-31 2756
788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2325
787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2475
786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2341
785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1956
784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2379
783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2483
782 주현절 예수 부활의 증인들 (고전 15:1-11) [8] 2019-02-12 3392
781 주현절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6] 2019-02-03 2893
780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2831
779 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6] 2019-01-21 2368
778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2388
777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2641
776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3150
775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2292
774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2130
773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2323
772 대림절 예수 강림! (살전 3:9-13) [6] 2018-12-02 2534
771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1927
770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3741
769 창조절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6] 2018-11-12 4905
768 창조절 나오미와 룻 (룻 1:1-18) [10] 2018-11-04 3618
767 창조절 바디매오의 구원 이야기 (막 10:46-52) [4] 2018-10-28 4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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