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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l67zdOrbSj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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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애굽기 33:12-23 |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창조절 일곱째 주일, 2020년 10월18일
모세 전승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의 하나가 오늘 설교 본문인 출 33:12-23절에 나옵니다. 시내산에서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시내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까지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앞으로 40년을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살아내고,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 살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의 압축은 십계명입니다. 이제 희망에 부풀어 시내산을 떠나야 할 그 순간에 모세는 하나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하나님은 그 요구에 대답하십니다.
하나님 부재 경험
모세가 하나님에게 요구한 내용은 당연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모세는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33:13)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이미 충분하게 입었는데도 그걸 다시 요구하는 겁니다. 이 요구가 16절에 다시 나옵니다. 당시 모세가 이렇듯 다급하게 은총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6절은 이렇습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그가 요구한 은총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가리킵니다. 그런 증거가 있어야만 주변의 다른 종족들과 자신들이 구별되는 게 아니냐고 따지듯이 말합니다. 모세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면, 그리고 앞에서 그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알면 이런 요구가 어색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주로 초자연적 기적과 연관하여 무수하게 많았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와 정치적 협상에서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다는 증거로서의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홍해사건은 이스라엘의 가장 오래된 노래로 남아 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홍해를 건넌 뒤에 다른 여자들과 함께 소고를 들고 춤을 추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21). 광야 생활을 시작하면서 닥친 물과 양식 문제도 기적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보았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모세는 무슨 증거를 더 원하는 것일까요?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두 교황>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현재 교황 프란체스코가 교체되기 얼마 전 두 사람이 바티칸 교황청과 인근의 여름 별장에서 1박2일 동안 함께하면서 나눈 대화가 영화의 기본 구도입니다.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직 사직하겠다는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교황직은 원래 평생직입니다. 프란체스코는 뜯어말립니다. 베네딕토 16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젊어서부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살았다. 독신으로 살았으나 전혀 외롭지 않았다. 열심히 공부하고 가톨릭교회를 위해서 살았다. 그런데 요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니 내가 어떻게 교황직을 더 수행한단 말인가.”
신앙의 깊이로 들어간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 부재를 경험합니다. 거꾸로 깊이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확신한다고 큰소리칩니다. 이게 하나님 경험의 역설입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순간에 그 하나님은 또 멀어집니다.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죽음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려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영적인 경험입니다. 시내산에서 은총의 증거를 보여달라고 외치는 모세도 그런 경험을 토로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건성으로 알았다면 아무런 의심도 없고, 불안도 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동하여 가나안땅으로 가자고, 거기에서 잘 먹고 잘살 거라고 외쳤을 겁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대중을 선동하듯이 말입니다.
모세의 하나님 부재 경험은 단지 종교적인 차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삶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들은 그 세월의 더께만큼 인생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더 강렬하게 느낍니다. 삶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는 게 가장 참된 것인지도 더 헷갈립니다. 그가 막노동자로 살았든지, 지식인으로 살았든지, 전업주부로 살았든지 삶 자체를 솔직하게 직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절체절명의 자리에 섭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인생을 살았다고 가정해봅시다.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리고, 비교적 건강하고, 다른 이들에게 사람 좋다는 말도 듣고, 자식들도 다 성실하게 살아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조금 지나면 우리는 모두에게 잊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존재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도대체 삶이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우리의 일상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육의 본질에 천착하는 교사들은 종종 교육의 한계를 처절하게 느낍니다. 의사들도 의료 행위의 한계로 인해서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판사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법을 올바로 집행한다는 확신이 안 생기는 겁니다. 시인도 그렇고 예술가도 그렇습니다. 사업을 탁월하게 해서 백만장자가 된 사람도 마찬가지의 불안에 떨어집니다. 도대체 이렇게 많은 돈이 자기 삶에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의 한계로 인해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로서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활동 자체로 궁극적인 의미를 얻지 못합니다. 인생이 다 그런 건데 뭘 심각하게 생각하냐, 그러려니 생각하고 살면 충분하지, 하고 주장한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좀 거칠게 말하면, 강아지나 고양이도 다 그런 정도는 삽니다. 그런 사람은 은총을 갈망하는 모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은혜를 베풀 자
모세의 요구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것이 바로 은총의 증거니, 봐라.”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다.”(17절)라고 정언적으로 말씀하실 뿐입니다. 은총은, 즉 절대 생명이나 존재의 깊이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체라는 뜻입니다. 삶을 어떤 구체적인 형태나 현상으로 묘사할 수 없듯이 하나님을 어떤 형태나 현상에 제한해서 묘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18절에서 다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광은 은총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나의 영광은 이것이니, 봐라.”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19(후)절에서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아포리즘이라고 할만한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하십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엄청난 말씀입니다. 제가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을 이런 말씀을 대할 때마다 다행으로 느낍니다. 이 구절에 두 단어가 나옵니다. 은혜와 긍휼입니다. 은혜와 긍휼은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생명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 경험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을 가장 충만하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문장을 오해합니다. 하나님이 폭군처럼 자기 마음대로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푼다면 우리 인간은 허수아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문장만으로 본다면 그런 느낌이 들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지극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문장에서 알아들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몰라도 인생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사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눈과 귀를 닫고 사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오늘의 시대가 여기에 역행하기에 많은 이들이 그런 시대 정신에 휩쓸려서 산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듯이 이 시대는 생명을 선물이 아니라 자기 소유라고 가르칩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인생이 거덜 날 듯이 비명을 지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주 설교했습니다. 은혜가 성경의 핵심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매 주일의 설교를 은혜만 전해도 잘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알기에 은혜를 오늘 다시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 따라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 자로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만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 자는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한 사람입니다. 준비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은혜를 베풀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보냈는데도 그 초대를 거절한 사람을 잔치에 데리고 올 수 없는 경우와 같습니다.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이룬 업적에, 즉 자랑거리에 매달려서 삽니다. 예수 당시에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인생 업적을 자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할 수 없습니다. 배가 부른 사람은 옆에 아무리 맛있는 먹을거리가 있어도 먹지 못하는 거와 같습니다. 반면에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런 인생 업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업적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매달리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배가 고프기에 거친 음식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아는 사람은 어떤 형편에서도 자기 삶을 노래하고 즐거워합니다. 존재론으로 감사하고 삶을 이웃과 나눕니다. 정의로운 일에 연대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 고구마 한 상자를 선물로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고구마 농사를 지은 사람의 정성이 들어 있습니다. 여름 햇살과 비와 탄소와 흙이 빚어낸 고구마입니다. 그런 걸 선물로 받았으니 기쁨으로 충만하고, 더 바랄 것이 없다는 듯이 맛나게 먹습니다. 옆 사람과도 나눕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지구가 엄청난 힘을 쏟아서 생산한 고구마 한 상자로 대해보십시오.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 자입니다.
긍휼히 여길 자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자비로 번역해도 되는 단어입니다. 긍휼을 얻어야 한다는 말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키리에 엘레이송”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긍휼도 제가 설교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아는데도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사람은 늘 죄의식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긍휼을 갈망한다는 말은 우리의 실존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고 인식이자 고백입니다. 거듭해서 이 사실을 확인해야만 우리는 하나님이 긍휼히 여길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사죄 기도를 드린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앞에서 예로 든 영화 <두 교황>에서 또 하나의 장면이 목사인 저에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 뒷부분으로 넘어가면서 현직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아직은 아르헨티나 추기경이었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는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집행합니다. 고해성사는 로마가톨릭의 일곱 성사 중의 하나인데, 사제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의식입니다. 절대 군주의 자리에 해당하는 교황이 다른 사제에게서 고해성사를 받는 게 외부인들에게는 낯설게 보일 겁니다. 가톨릭교회가 고해성사를 거룩한 의식으로 계속 유지하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개신교회는 사람인 사제에게 고백하지 말고 하나님께 직접 고백하는 게 옳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긍휼만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은 똑같이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문제도 종교적인 차원에만 해당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남의 희생을 발판 삼아서 살아갑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1) 정치적인 민주화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현대사에서 많은 사람이 민주화를 희생당했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의료의 발전도 사실은 많은 의료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인생을 그런 연구에 쏟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자기 목숨을 건 실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실험용 동물을 생각하면 우리 인간의 죄는 하늘을 찌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아니면 이런 부담감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2)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인 수능시험이나 대학입시를 보십니다. 한 사람이 합격하면 다른 사람은 불합격합니다. 불합격된 사람의 희생이 합격한 사람의 바탕입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실존이기에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정의라고 여겼으나 실제로는 정의가 아닌 일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사랑이라고 여겼으나 실제로는 사랑이 아닌 일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자랑거리로 여겼으나 실제로는 그것이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효자나 효부 한 사람이 나오면 거기서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여럿 나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저 깊고 아득한 차원을 직면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긍휼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긴 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사죄 기도를 바치는 심정으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은 모세 같은 인생을 살고 싶으신가요? 여러분의 자녀가 모세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어떤 모세를 원하십니까? 성경은 홍해를 가르고, 반석을 쳐서 생수를 내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게 하는 기적 행위자 모세를 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모세도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 자로, 그리고 긍휼히 여길 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인류 역사에서 현실(reality)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현실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에 보내신 생명의 현실입니다. 값없이 우리는 그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의 십자가 죽음은 긍휼의 실체(reality)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 말씀에 따라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맛볼 것입니다. 아멘.
삶이 은혜요 선물이기에 존재론적으로 감사해야 한다!
이 명제에 영혼 깊은 곳에서의 승복이 전제되지 않고는 설교 마지막 문장까지 어떤 울림도 있을수 없겠구나.. 싶습니다.
이어령 선생의 수필집에 그런 문구가 나오더군요.
'오늘 아침 한 통의 전화가 나의 평안을 일시에 산산히 깨뜨렸다'
욥의 처지까지는 아니어도 그 분의 부재와 침묵을 통감할수 밖에 없는 크고 작은 나락에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요,
예측불허의 크고 작은 염려꺼리 앞에서 탄식과 한숨의 점철이 우리의 실존이요 숙명이거늘
이 실존속에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존재론적인 감사와 기쁨이 어떻게 터져나올수 있을까?
다른 다비안들은 이 수준에 이르렀는데 나만 그런걸까?
자괴감이 드는 설교였답니다.
존재와 삶의 그 아득한 깊이와 신비, 어둠, 허무를 매일 직면한채, 이를 뚫고나가는 안간힘 속에서
존재론적인 기쁨, 즉 구원에 시나브로 이르게 되는 것인가요?
거기에 이르는 지난한 하루 하루의 일상이 이미 구원을 살고 있는 것인가요?
오늘 서편 하늘에 뜬 초승달을 보셨는지요.
밤 7시에서 8시 사이에 저는 테니스장에서 봤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초승달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겠어요.
죽음에 임박해서 1억원과 초승달을 선택할 기회가 오면
누구나 초승달을 보려고 할 겁니다.
상투적인 표현이나,
죽음이 바로 코 앞이라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부스러기 님이 열망하는 존재론적인 기쁨을 맛볼 겁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이미 죽었다는 신앙을
붙들고 사느냐가 여기서 관건입니다.
이런 신앙의 삶을 구도적으로 추구하면,
물론 두 발을 땅에 대고 사는 한 시행착오는 여전하겠지만
그분을 닮아간다는 걸 느끼게 될 겁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늘 새롭습니다. 모세의 하나님 경험이 눈에 보이는 경험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부재 경험이었다니... 이렇게 깊은 뜻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