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

영광-찬송 (엡 1:3~14)

성탄절 조회 수 3572 추천 수 0 2021.01.03 17:20:31
설교보기 : https://youtu.be/Ejqvskss1xk 
성경본문 : 에베소서 1:3~14 

영광-찬송

1:3-14, 성탄절 후 둘째 주일, 202113

 

 

터키 이즈미르주()의 에페소스(에베소)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유적이 많습니다. 그 유적이 2015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두 번 방문했습니다. 한번은 2차 선교 여행 끝에 아주 짧게 방문했고(18:19~20), 다른 한 번은 3차 선교 여행 초반에 2년 동안(19:10) 머물렀습니다. 두 번째 방문에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아데미숭배와 관련한 사업가들이 주민들을 선동하여 큰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 선교로 인해서 자신들의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동이 끝난 뒤에 바울은 에베소를 결국은 떠났습니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 바울은 감옥에 갇힌 몸으로 에베소에 사는 기독교인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게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여기에는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라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시원적이고 원형적인 형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찬송

1:3~14절은 당시 초기 기독교가 널리 불렀던 일종의 찬송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시편과 비슷합니다. 이게 에베소서의 특징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는 많이 거론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주로 찬양 시 형식으로 서술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찬송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나옵니다. 3절에서 보듯이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해서 14절의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삶이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갔을 때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경험했기에 영광-찬송의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 우리도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3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위 구절에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경험한 표현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찾은 겁니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였습니다.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도 하나님을 참되게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엔 크리스토)에서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관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된 하늘의 영적인 복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복에 관한 내용은 4절 이하에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나옵니다. 여러 내용 중에서 저는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한 가지에 나머지 내용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5절을 보실까요?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도 원칙적으로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유대교나 기독교가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그런 유대인들의 신앙을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인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짚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결정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유대교는 예수님을 여러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만 생각했기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를 그대로 따를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어느 쪽이 옳은가요? 둘 다 옳을 수 있을까요?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내세우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혈통적인 차원으로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차원으로서 자신들에게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 두 가지 사실에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초지일관 살아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칭찬받을만합니다.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태도는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 형식을 절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당시 유대교 당국자들과 유대인들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형식에 매달리면 위선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형식주의와 위선은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당시 유대교가 얼마나 위선적이었는지를 우리는 복음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종교적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단적인 예가 안식일 논쟁과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자세하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서 결국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종교재판에 부쳐서 신성모독 죄를 선고했고, 결국은 로마 사법 당국에 고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이제 유대교가 강조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과 성전이나 율법의 절대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일종의 종교적인 터부(taboo)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와 비교될만한 한 가지 단적인 예를 들면 십일조 헌금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십일조 헌금을 잘 바치면 온갖 복을 다 받는다고 믿습니다. 수입에서 십 분의 일을 자기가 아니라 교회 활동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의미라면 나쁠 게 없습니다. 오히려 권장할만합니다. 일종의 형식인 십일조 제도가 터부가 되어 율법주의나 주술로 떨어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터부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얽매이게 합니다. 생명이 위축되는 겁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교의 종교적 터부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영혼의 해방감이 충만했기에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상에서도 즐거운 일이 있으면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죄와 죽음에 이르는 우리의 전체 운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워졌으니,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명분과 성전 종교의식과 율법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인정해주시어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어찌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은 3절과 6절과 12절과 14절에 반복해서 영광-찬송을 올린다고 말한 것입니다. 6절만 읽어보겠습니다. 5절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벅찬 느낌이 전달될 겁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은혜의 영광을 찬송한다는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신앙적으로 옳은 가르침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다고 느꼈을지 모르겠군요. 그렇습니다. 말이 영광-찬송이지 실제의 삶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더 많이 벌어집니다. 일희일비, 좌고우면, 좌불안석으로 살아갑니다. 좋을 때는 너무 좋고, 나쁠 때는 너무 나쁜 생각에 파묻힙니다. 현대인은 대체로 조울증을 앓는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개인과 사회와 정치 영역에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현재 정부의 정책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주 성급하게 비판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정책은 늘 양면성이 있습니다. 전체 방향이 괜찮으면 그 정책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어느 정도 기다려야 합니다. 손님이 밀려 있는 중국집에 가서 자기가 시킨 요리가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쏟아내는 증상과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대책만 해도 그렇습니다. 초기에 중국에서 귀국하는 사람들을 막지 않는다고 막무가내로 비판하고, 조금 후에는 마스크 정책과 재난 지원금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트집 잡듯이 열을 올렸습니다. 이제는 백신 문제로 또 불평합니다. 우리나라의 방역은 상대적으로 성공적이었습니다. 다른 나라가 “K-방역이라고 다 인정합니다. 백신 문제도 로드맵에 따라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방역 실패라고 끊임없이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와의 전시 상황이니 국민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할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이 이런 소란에 오히려 앞장섭니다.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소란과 소동이 자신들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제 눈에는 사회적인 조울증 현상으로 보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다 보니 기독교인들도 영광-찬송의 삶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집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어떤 순간에 찬송이 나옵니까? 어떤 일이 있을 때 찬송하고 싶을 정도로 행복감을 느끼십니까? 그 답은 여러분도 알고, 저도 압니다. 자신이 갈망하던 일이 이뤄지는 순간에 우리는 노래하고 싶어집니다. 결혼, 직장, 아이, , 여행, 건강 등등에서 이를 경험합니다. 자기가 지지하는 프로 축구나 프로 야구단이 아슬아슬하게 우승하면 정말 짜릿할 겁니다. 문제는 이런 조건은 늘 상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고, 모두가 건강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이 늘 승리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인생이 다 그렇지 신앙인이라고 해서 별다른 게 있냐,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이런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소소한 행복을 많이 누리시기를 저도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행복 세일즈맨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영광-찬송을 일상에서 경험하지 않으면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일상에서 절대적인 기쁨의 유일한 토대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걸 설명하는 게 쉽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기는 자신이 없으니까요. 쓸데없는 생각에 떨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더 궁극적으로는 지금 살아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사는 저도 이런 실정이니 치열한 생존경쟁의 원리로 작동하는 세속 사회에서 사는 여러분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절대 경험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소소한 즐거움과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영광-찬송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게 좋겠습니다. 차이가 없다면 굳이 신앙생활을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그 차이를 이미 아는 사람은 굳이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찬송의 삶을 느끼면서 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 차이가 눈에 확연하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극단적인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여러분이 사하라 사막 단체 여행을 갔습니다. 자유 시간에 혼자 사막에 들어섰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모래폭풍이 불어서 10앞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사막에서 며칠을 헤맸습니다. 기운도 바닥이 났습니다. 그 순간에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취업 걱정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자식의 결혼 준비나 일주일 뒤에 나올 건강종합진단 결과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구조대가 자기를 찾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합니다. 정신이 가물가물하던 순간에 구조대가 여러분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순간의 느낌이 바로 영광-찬송입니다. 다른 그 어떤 잡념도 일절 개입하지 않는 절대 경험입니다. 이런 절대 경험이 아니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상은 사막에서 길을 잃는 경우와는 달리 모든 게 쾌적하고 넉넉하고 안전합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경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게 삶의 딜레마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편안하고 즐겁게, 아무 불편 없이, 더 나아가서 소비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단체 여행을 가서 호텔에서만 머무는 행태입니다. 삶이 늘 그렇고 그렇습니다. 기껏 해봐야 상대적으로 조금 더 안락할 뿐입니다. 삶의 절대적인 차원과 점점 더 높은 담을 쌓기에 영광-찬송이라는 오늘 본문의 고백이 멀리 느껴지는 겁니다. 영광-찬송은 몰라도 되니 크게 고생하지 않고 그냥 즐겁게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만 조금 비우면 대충 그럴듯한 인생은 누구나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불교 용어에 백척간두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척간두는 아무 의지할 대상이 없는 극한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앞에서 예로 든 길잃은 사막과 같습니다. 겉으로 멀쩡해도 사실은 우리의 삶 자체가 백척간두이고 모래폭풍이 부는 사막입니다. 왜 그런지를 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다 아실 겁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릴 테니 저의 설명이 여러분의 생각과 같은지 다른지 보십시오. 하나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우주에서 너무나 외로운 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아득하고 아찔합니다. 다른 하나는 여러분 개인은 궁극적으로 혼자라는 사실입니다. 우주에서 외로운 지구처럼 여러분도 모두 절대적으로 혼자입니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나 가족과도 결국은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혼자 죽어야 하듯이 살아있을 때 모두 실존적으로 혼자입니다. 말 그대로 백척간두입니다. 아주 명백한 사실인데도 우리는 그런 궁극적인 실존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천하태평으로 삽니다. 그럴 여유가 ‘1’도 없는데 말입니다. 무엇인가에 바빠서 그럴까요? 그걸 고민해봐야 아무 해결책이 없기 때문일까요?

역설적이게도 그 고립무원의 자리를 절실하게 경험한 사람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십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 오늘 에베소서 본문이 그렇게 반복해서 강조하는 그 영광-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설마 그럴까, 하고 믿기 힘드신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에 더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모래폭풍이 휘몰아치는 사막에서 구조대를 만난 사람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옆 사람이 말려도 영혼의 깊이에서 찬송하고 싶어서 못 견딜 것입니다. 2021년은 하나님의 이러한 은총이 여러분에게, 그리고 저에게 더 풍성해지는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profile

[레벨:26]최용우

January 08, 2021
*.107.101.242

지난주 토요일에 처음으로 설교문을 미리 받아 보았습니다.^^ 

꼭 예습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참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교인들에게도 미리 보내시는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09, 2021
*.137.91.228

저의 목회 철학은 교인이 자원하지 않는 일은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원칙적으로 강요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겠지만요.

저의 설교문을 미리 받아보는 샘터교회 교인들은 몇 명 없습니다. ㅎㅎ

방금 이번 주일 설교문을 메일로 보냈는데, 

뒤에 신청한 분들도 있고 해서 전체는 91명입니다.

이분들에게 앞으로 3년 동안 저의 설교문을 보낼 예정입니다.

설교문 작성은 저의 영혼이 생기를 잃지 않는 공부니까 

누가 하라말라 하지 않아도 당연히 해야겠지요. 

그러고 보니, 최용우 작가에게 검증을 받는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아이구, 춥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기억나는 요즘 날씨군요.

이 추운 '순간'을 모두가 놀랍도록 신비로운 생명 현상으로 경험했으면 합니다.

복된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을 맞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924 창조절 욥의 회개 (욥 42:1~6) new 2021-10-24 110
923 창조절 속죄와 구원 (히 5:1~10) 2021-10-17 597
922 창조절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막 10:17~22) [5] 2021-10-10 855
921 창조절 욥의 재난 & 욥의 믿음 (욥 1:1, 2:1~10) [1] 2021-10-03 810
920 창조절 생명과 지옥 (막 9:42~50) [4] 2021-09-26 1051
919 창조절 지혜 그 '너머' (약 3:13~4:3) 2021-09-19 815
918 창조절 지혜 & 그 너머 (잠 1:20~33) [3] 2021-09-12 1116
917 창조절 놀람의 근거 (막 7:24~37) 2021-09-05 960
916 성령강림절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 (아 2:8~13) [1] 2021-08-29 852
915 성령강림절 전투하는 교회 (엡 6:10~20) [2] 2021-08-22 1128
914 성령강림절 예수와 영생 (요 6:52~58) [2] 2021-08-15 1170
913 성령강림절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 6:35, 41~51) [3] 2021-08-08 1166
912 성령강림절 만물의 충만-그리스도의 충만 (엡 4:1~16) [3] 2021-08-01 977
911 성령강림절 가난한 자의 피난처 (시 14:1~7) [2] 2021-07-25 1323
910 성령강림절 예수 십자가와 세계 평화 (엡 2:11~22) [2] 2021-07-18 1379
909 성령강림절 왕-선지자-그리스도 (막 6:14~29) [1] 2021-07-11 1232
908 성령강림절 열두 제자 파송 이야기 (막 6:1~13) [2] 2021-07-04 1147
907 성령강림절 "딸아!" (막 5:25~34) [4] 2021-06-27 1408
906 성령강림절 "지금", 은혜와 구원 (고후 6:1~13) [5] 2021-06-20 1713
905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막 4:26~34) [4] 2021-06-13 1477
904 성령강림절 왕의 출현 (삼상 8:4~11, 16~20) [1] 2021-06-07 1451
903 성령강림절 충만! (사 6:1~8) [5] 2021-05-30 1804
902 성령강림절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요 16:5~15) [2] 2021-05-23 2222
901 부활절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시 1:1~6) [8] 2021-05-16 1847
900 부활절 예수 사랑 안에! (요 15:9~17) [5] 2021-05-09 1864
899 부활절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요일 4:7~21) [2] 2021-05-02 1980
898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1405
897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2734
896 부활절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1] 2021-04-11 3024
895 부활절 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3] 2021-04-04 3008
894 사순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2021-03-28 1971
893 사순절 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6] 2021-03-21 1795
892 사순절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15] 2021-03-14 2925
891 사순절 십계명 "너머" (출 20:1~17) [7] 2021-03-07 4088
890 사순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2] 2021-02-28 1858
889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2890
888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1527
887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1370
886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4140
885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1940
884 주현절 하늘이 열리고 … (요 1:43~51) [7] 2021-01-17 3835
883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5136
»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3572
881 성탄절 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5] 2020-12-27 6033
880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4231
879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6256
878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5429
877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4378
876 창조절 영벌인가, 영생인가! (마 25:31-46) [3] 2020-11-22 5470
875 창조절 '주의 날'과 일상 (살전 5:1-11) [4] 2020-11-15 5556
874 창조절 생명 완성의 때 (마 25:1-13) [2] 2020-11-08 5477
873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6424
872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2605
871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7580
870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2826
869 창조절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2] 2020-10-04 4210
868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5565
86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2731
866 창조절 용서, 그 불가능한 명령 (마 18:21-35) [9] 2020-09-13 5527
865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2867
864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2328
863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2349
86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2418
861 성령강림절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마 14:22-33) [2] 2020-08-09 3108
860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2828
85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2551
858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020-07-19 2171
857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4] 2020-07-12 6283
856 성령강림절 쉼 (마 11:16-19, 25-30) [2] 2020-07-06 5988
855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3108
854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2497
853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3332
852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2686
851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2510
850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2353
849 부활절 사랑과 계명 (요 14:15-21) 2020-05-17 2423
848 부활절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4] 2020-05-10 2689
847 부활절 성찬 예배 공동체 (행 2:42-47) [2] 2020-05-03 2105
846 부활절 눈이 밝아진 제자들 (눅 24:13-35) 2020-04-26 4099
845 부활절 예수의 손과 옆구리 (요 20:19-29) [2] 2020-04-19 5733
844 부활절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2] 2020-04-12 3924
843 사순절 주의 손과 주의 얼굴 (시 31:9-16) [6] 2020-04-05 2952
842 사순절 여호와의 손과 영 (겔 37:1-14) [2] 2020-03-29 2594
841 사순절 예수는 심판 주다! (요 9:35-41) [2] 2020-03-22 5148
840 사순절 생존의 위기 앞에서 (출 17:1-7) 2020-03-15 3133
839 사순절 영생과 예수 (요 3:1-17) 2020-03-08 2687
838 사순절 의와 생명 (롬 5:12-19) [2] 2020-03-01 3239
837 주현절 영광스러운 미래의 생명 (마 17:1-9) 2020-02-23 2265
836 주현절 "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8] 2020-02-16 3612
835 주현절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전 2:1-12) [8] 2020-02-10 3315
834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6683
833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3062
832 주현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7] 2020-01-19 2852
831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4066
830 성탄절 하나님을 본 사람 (요 1:10-18) 2020-01-05 2921
829 성탄절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2] 2019-12-29 3222
828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6812
827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3244
826 대림절 "파루시아" (약 5:7-10) [5] 2019-12-16 3092
825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5372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