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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bROKrNyEou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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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편 50:1~6 |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산상 변모 주일, 2021년 2월14일
오늘 설교 본문인 시 50편에는 “아삽의 시”라는 표제가 달려 있습니다. 대상 25:1, 2절과 대하 29:30절에 따르면 아삽은 예루살렘 성전 업무를 맡은 레위 지파에 속한 인물로 성가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여러 편의 시편도 썼습니다. 시편 50편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시작부터 그 표현이 웅장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mighty) 분이시며 주님(Lord)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을 다룰 수 있는 능력자이고, 따라서 우리를 구원할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이 세상을 부르셨다고 합니다. 세상 일부를 부르신 게 아니라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 전체를 부르셨다고 말입니다. 일출과 일몰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심층적인 통찰이자 인식이며 고백입니다.
빛
2천5백 년이나 3천 년 전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출과 일몰 장면을 어떻게 느꼈을지를 상상해보십시오. 아득히 먼 저 동편과 서편에서 매일 벌어지는 그 자연 현상은 익숙하기는 하나 손에 잡히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모양과 색깔로 물든 하늘 앞에서 그들은 산골에서만 살던 다섯 살 아이가 처음으로 동해 바닷가 앞에 섰을 때처럼 경외심을 느꼈을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신앙은 거대한 지구와 우주를 대면하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창조 영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신앙전통을 오늘 우리는 놓쳤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직면하지 않습니다. 자연과학에 대한 인식이 별로 적극적이지 않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자연을 생각하더라도 아주 희미하고 막연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어떻게 재미있고 착하게 사느냐, 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일출과 일몰의 주인공인 태양은 지구에서 1억5천만km 떨어져 있습니다. 1초에 30만km를 가는 빛이 9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시속 1천km인 국제선 여객기를 타고 간다면 15만 시간이 걸립니다. 날짜로 계산하면 6,250일입니다. 태양계에서 가장 멀리 있는 해왕성까지 빛이 도달하려면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보다 최소한 수십 배는 더 걸릴 겁니다. 태양과 같은 별들이 은하계에는 최소한 1천억 개 이상입니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까지 거리는 2~3광년입니다. 이 거리가 얼마인지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태양이 속한 은하계와 비슷한 은하계가 우주에는 최소한 1천억 개 이상입니다. 우주가 팽창하는 중이라는 우주 물리학자들의 주장이 맞는다면 우주 크기는 138억 광년이라는 말이 됩니다. “해 뜨는 데부터 지는 데까지”라는 시편 기자의 진술에는 현대인들이 우주 앞에서 느끼는 당혹스러움이 들어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런 세상을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이게 실감이 납니까?
시편이 기록되던 시대를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빅뱅, 초신성, 블랙홀, 흑암 물질과 흑암 에너지, 양자 개념과 장 개념, 초끈이론 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세상에 대한 직관은 오늘 우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물리 정보를 알아도 세계의 궁극적인 실재(reality)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 앞에서 오늘 우리 역시 어린아이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태양 빛을 받습니다. 그 빛이 지구를 살립니다. 도대체 빛의 실재는 무엇일까요? 어떤 때는 빛이 입자로 나타납니다. 빛의 입자인 광자가 지구 표면에 부딪혀서 어떤 작용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색깔을 본다는 사실도 빛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 빛은 파동으로 나타납니다. 만약 빛이 입자 성질뿐이라면 유리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유리를 통과한다는 말은 입자가 파동이라는 뜻입니다. 빛이 왜 입자이면서 파동인지를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언젠가 그 현상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왜 그래만 하는지는 여전히 비밀로 남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든 물리 현상은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오감으로 느끼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카를로 로벨리의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라』 참조, Reality is not what it seems)
하나님이 세상을 부르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세상을 그렇게 신비롭게 존재하도록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토대라는 말이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눈여겨봐야겠지요. 예를 들어서 여기 흙집을 짓는 장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 장인이 정성을 다해서 흙집을 한 채 지었습니다. 장인의 예술혼이 그대로 묻어난 이 흙집은 세상에서 오직 그 한 채뿐인 집입니다. 장인의 제자라면 그 흙집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연구할 겁니다. 그런 관찰과 연구가 너무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도 모릅니다. 장인의 예술혼이 느껴질 때마다 노래를 부르고 싶어지지 않겠습니다. 그런 심정으로 시편 50편을 기록한 사람은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처럼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가대와 함께 찬양하는 중입니다.
불과 광풍
하나님이 세상을 부르셨지만,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 사실에 관심을 보이는 건 아닙니다. 시큰둥한 이들도 있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특별한 한 지역과 사람들을 거론합니다. 시온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시온은 예루살렘과 거기에 사는 주민들을,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빛을 비추신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빛처럼 환하게 느끼고 경험하고 반응한 사람들입니다. 그 빛이 온 세상으로 흘러간다고 시편 기자는 보았습니다. 그들의 하나님 경험은 불이나 광풍처럼 아주 또렷하고 강력합니다. 3절이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똑같은 세상에서 사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불이나 광풍처럼 폭발적인 능력으로 경험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경험이 전혀 없거나 뜨뜻미지근합니다. 요즘 젊은 지식인들은 하나님 경험을 냉소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들에게 제가 조언해봐야 소용이 없겠으나, 하나님을 삼키는 불이나 광풍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을 놓치고 산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은 매일 태양 빛을 받으면서도 태양 자체를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비유로 말한다면 고급 포도주를 마시면서도 알코올에 취할 뿐이지 포도주에서 발산하는 향과 맛 자체를 음미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억지로 그 향과 맛을 느끼라고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빛과 불과 광풍이라는 하나님 경험을 제사 의식으로 형상화했습니다. 시편 찬송, 제물, 기도, 하나님 말씀이라는 제사 의식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라고 불릴만합니다. 난파선에서 구출 받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연대감이 형성되듯이 그들에게도 특별하고 거룩한 연대감이 형성되었고, 그런 연대감이 제사 행위로 나타난 게 아니겠습니까. 5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어떤 이들은 예배를 드리면 밥이 나와 술이 나와, 우리 삶에서 별로 실용적 가치가 없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인생살이에서 탈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공감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배의 궁극적인 의미가 훼손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명의 빛과 불과 광풍으로 경험한 사람들이기에 거룩한 연대감 가운데서 오늘도 일상을 멈추고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공의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침묵 당하면 안 됩니다. 빛과 불과 광풍으로 강력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그 말씀의 핵심을 오늘 본문 5절은 하나님의 공의라고 말합니다. 다시 들어보십시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영혼을 불사른 이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하늘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신다고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공의(righteousness)를 얼마나 간절하게 원했는지를 이 구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삶은 세상에서 버림받았습니다. 그런 세상은 하나님의 공의와 거리가 멉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외친 선지자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모스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니라.”(암 5:24)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전통이 신약에도 이어집니다. “너희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개별 기독교인과 교회는 하나님의 공의에 관심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공의를 단순히 정치와 경제의 관점에 한정해서 보면 안 됩니다. 사람이 만든 정치와 경제 제도로서의 정의는 필요하기는 그런 정의는 인간을 구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조세 정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세금을 법에 따라서 정당하게 내야만 합니다. 세금을 적게 내려고 수입을 줄여서 신고하는 일도 자주 일어납니다. 종합소득세에 대한 조세저항도 있습니다. 세금을 비롯하여 정치와 경제 영역의 정의는 우리가 꾸준히 세워나가야 할 주제이나 그것만으로 세상이 정의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훨씬 넓은 의미에서 생명을 완성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그의 생명이 완성되기를 기다려야 하고 기다려야만 합니다. 돛단배인 우리는 바람이 불 때를 기다려야지 우리가 바람을 일으킬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 기다림은 막연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를 파괴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어두움의 세력에 저항합니다. 한 마디로 “당신이 우리말 듣지 않으면 국물도 없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인생 종 치는 거야.”라는 위협에 순순히 굴복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빛과 불과 광풍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오늘의 설교는 다시 하나님의 빛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빛이 시온을 비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빛을 보았는지가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서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빛, 또는 생명의 빛을 어디서 실감할 수 있을까요? 저는 바울이 이에 관해서 언급한 유명한 구절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고후 4:6절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 구절을 제 말로 풀어서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던 태초에 빛이여 존재하라고(창 1:3) 명령하시어 빛을 만들어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와 운명에 드러난 하나님의 공의와 생명과 구원과 영광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인식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오늘은 산상 변모 주일입니다. 교회력의 성서일과에 따라서 주어진 셋째 말씀인 막 9:2~9절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중요한 내용이라서 세 공관복음에 다 나옵니다. 예수님이 제자 세 명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광채가 났고 희어졌다고 합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엘리야와 모세는 모두 빛과 불과 광풍과 연관이 깊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즉 참된 생명이 드러났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산상 변모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빛으로 변형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빛은 하나님과 생명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빛으로 변형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우리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죽음은 우리가 완전히 변형되는 결정적인 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죽으면 우리는 더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누구를 만나지도 않고, 더는 미워하지 않으면서 기존의 방식으로는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운명이 두려우십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완성하시는 계기라면 정말 기다려지는 순간일 겁니다.
저는 언젠가 종말이 오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과 모든 생명체와 우주 전체를 빛으로, 즉 완전히 새롭게 변형시키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변형이 곧 생명 구원입니다. 예수 믿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말이냐, 하고 묻지는 마십시오. 제가 여전히 교회 안에서 목사로 사는 이유는 살아있는 동안에 이미 그 하나님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르침이 온전하고 실질적으로 유지되는 공동체는 이 세상에서 교회 외에는 없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런 가르침의 전통을 힘닿는 데까지 이어가는 것만으로 저의 인생은 그 어떤 인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의미 충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저와 생각이 같으실 겁니다. 아멘!
죽음은,
빛으로 변형되신 예수님처럼,
내가 완전히 빛으로, 새 존재로 변형되는 결정적인 계기라는 말씀에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새로운 인식의 빛을 비추시며 상쾌한 바람으로 흘려보내주시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코로나와 함께하는 일상에서 느긋하게 기다리며
그 빛과 불, 바람을 눈여겨보고 누리겠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브리서 2장 부분을 읽고 있는데...
2:15절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 대목과도 연관이 되네요.
죽음이 더 이상 두려움만이 아닌 기다림의 대상이니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