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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AlabCQbTX9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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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로마서 4:13~25 |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사순절 둘째 주일, 2021년 2월28일
오늘 설교 성경 본문인 롬 4:13~25절에는 파격적으로 들리는 문장이 여럿 나옵니다. 우선 롬 4:15절을 보십시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율법은 헬라어 ‘노모스’의 번역입니다. 헬라어-영어 사전에는 노모스가 법이라는 뜻의 ‘law’로 나옵니다. 법조인이 되는 학교를 가리켜서 ‘로스쿨’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나오는 단어가 바로 법이라는 뜻의 노모스입니다. 우리는 법을 공동체의 토대로 여깁니다. 법이 없으면 세상이 무법천지로 변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바울의 문장만 보면 법이 인간의 삶을 오히려 파괴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관점과는 반대되는 진술입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그리스의 고린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기원후 56년 초에 로마서를 집필했습니다. 당시의 기독교는 오늘의 교회와 크게 달랐습니다. 교회가 아직 기본적인 골격이나 내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겨우 첫발을 옮기기 시작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확실합니다. 바울은 세계의 중심 도시인 로마의 기독교인들과 협력하여 복음을 유럽 전역에 전하고 싶었습니다. 로마를 거쳐서 스페인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을 로마서에 피력할 정도입니다. 이런 선교 프로젝트를 실현하려면 우선 로마 교회와 돈독한 신뢰 관계를 쌓아야 합니다.
신뢰 관계는 그 무엇보다도 신앙의 정체성에서 확보됩니다. 그 신앙의 정체성에서 핵심은 율법입니다. 오늘 우리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지만, 당시에는 율법에 대한 견해 차이가 컸습니다. 기독교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는 가능한 한 유대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기에 유대교가 요구하는 율법 준수를 대체로 받아들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구성원들이 태생적으로 유대교인들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이는 자연스럽습니다. 당시 교회가 처한 현실에서 보더라도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세력이 워낙 약하니까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인받고 있던 유대교의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유대교가 기독교의 보호막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달리 바울은 이방인 기독교인들도 할례와 토라를 준수해야 한다는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비주류였던 바울은 자기를 지지해줄 세력이 없어서 이 싸움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과감하게 율법이 ‘진노’를 불러온다고 발언한 겁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바울은 논리적으로 뛰어난 사람입니다. 무조건 율법을 부정하거나 나쁘다고 매도하는 게 아닙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근거를 먼저 거론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창 15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기에 하인 중에서 믿을만한 사람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에셀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어서 가나안 땅도 약속하셨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을 자기들 소유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약속의 근거가 율법에 있는 게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입니다.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 진술은 창 15: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율법 자체가 없었습니다. 율법은 수백 년 역사가 흐른 뒤에 모세 시대에 나왔습니다. 율법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의 약속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근거합니다.
바울은 오늘 성경 본문 18~21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아내인 사라는 아이를 낳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겁니다. 이를 19절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나 되었는데도 그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20절과 21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더 견고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식이 없는 사람이 기도하면 자식을 준다거나, 직장이 없는 사람이 기도하면 좋은 직장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기복주의가 아니고 광신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자식과 땅이 생긴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울은 17(후)절에서 독특한 문장으로 설명했습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에 관한 개념 규정이 여기서 두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는 “죽은 자를 살리심”이고, 다른 하나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심”입니다. 앞의 말은 부활을 가리키고, 뒤의 말은 창조를 가리킵니다. 서로 통하는 진술입니다. 두 번째 규정이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철학적으로 들립니다. ‘없는 것’은 무(無)이고 ‘있는 것’은 존재입니다. “왜 무는 없고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철학적으로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질문할 뿐이지 대답은 모릅니다. 현대 철학과 현대과학도 세상의 존재 근거와 이유를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2백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하여 오늘 우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고고학적으로 확인할 수는 있으나 왜 그렇게 진화해야만 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지구를 인간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가 지배할 수도 있었습니다. 진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반드시 출현해야만 할 궁극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아무도 계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존재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런 존재의 신비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비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분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 경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기에 아브라함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바랄 수 없는 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문제는 하나님이 누군지 실감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가끔 생각하거나 말하기는 하지만 막연합니다. 죽음과 삶의 문제, 무와 존재의 관계에 관해서 관심이 깊지 않으니 어떻게 하나님을 바르게, 실감 나게, 갈망하면서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의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었다고 22절에서 말합니다. 이 문장을 기억해두십시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의로 여겨졌다는 말은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율법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오류입니다. 오류에 매달려서 살면 생명을 잃습니다. 의로움을 얻지 못합니다. 자신이 인생을 걸었던 대상에서 의로움을 얻지 못한다면 “장고 끝에 악수 둔다.”라는 바둑 격언처럼 진노를 이룬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혹시 진노를 불러오는 인생길을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길 바랍니다.
진노라는 단어는 은유입니다. 율법대로 사는 삶이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설교 도입부에서 말씀드렸듯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작동 원리는 (율)법입니다. 국회와 법원과 검찰과 기업체 등등, 이 세상의 모든 조직은 법으로 돌아갑니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사회가 카오스에 떨어집니다. 시민들이 법을 잘 지키는 삶은 필요합니다. 율법이 진노를 불러온다는 말은 율법으로는 의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입니다. 이게 실제 우리 삶에서 무슨 뜻인지는 우리가 이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교회가 50억 원을 모아서 꿈에 그리던 교회당을 건축했다고 합시다. 그런 일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감동적인 일도 많을 겁니다. 모두가 흡족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당 건축으로 영혼의 만족은 불가능합니다. 건축이 계획대로 잘 끝나는 그 순간만 잠시 흥겨울 뿐이지 계속되지 않습니다. 비싼 아파트에 입주했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교회당 건축을 무리하게 추진하면 오히려 교회 생활에서 어려움이 늘어납니다. 그것으로 영혼의 만족이 안 되니까 인간적인 만족감이라도 채우려고 서로 경쟁하게 됩니다. 교회당 건축으로 신자들 사이에서 나쁜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일은 흔합니다.
이런 설명이 여전히 멀게 느껴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영혼의 만족이나 의로 여겨졌다는 말이 뭐지, 하고 말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결속되었다는 뜻입니다. 비유적으로 농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농사꾼은 평생 흙에서 흙과 함께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흙의 힘을 그는 느낍니다. 손으로 흙을 만지면 영양과 수분 상태를 압니다. 그에게 흙은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그는 흙에 대해서 의로워진 겁니다. 흙을 통해서 생명을 얻은 겁니다. 농사꾼이 흙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 듯이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았습니다. 의로움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은 똑같이 한 인생을 지구에서 삽니다. 대개 비슷한 수준에서 삽니다. 평균 80~90년 정도 삽니다. 돈이 많으나 적으나 하루에 두 끼나 세 끼 먹습니다. 하루에 숨 쉬는 양도 비슷합니다. 사장으로 사나 현장 노동자로 사나 큰 차이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끌어가는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요? 인생의 목표를 이루셨는지요. 각자의 인생살이를 제가 평가하려는 게 아닙니다. 정말 소중한 삶의 차원을 혹시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가 염려스러울 뿐입니다.
오늘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 소중한 차원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인정받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결속되는 일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느냐, 이미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데, 하고 속으로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군요. 교회 다녀도, 아니 교회에 다니기에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율법에 묶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원래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여러분 각자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경험이 있는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무(없는 것)를 존재하게 하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사로잡힌 경험 말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거나 희미하다면 여러분은 인생살이에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외면한 사람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크게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게 바로 진노를 이루게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우리의 믿음
바울은 하나님에게서 의로 여김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23절과 24절에서 설명했습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과 우리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똑같이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영혼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기는 힘듭니다. 그의 부활도 믿기 힘듭니다. 십자가 죽음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활을 이해하고 믿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현대 지성인들 대다수는 십자가와 부활을 냉소적으로 대합니다. 경험론에 붙들려서 자기가 경험한 실증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게 옳은가요? 바울은 25절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첫째, 바울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만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수 십자가에서 아무런 감동도, 삶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둘째, 바울은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해서 예수가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실존이 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만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즉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기 삶을 완성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예수 부활이 남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아주 특별하고 위대한 사건입니다. 오죽했으면 아브라함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다고 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살아있으나 실제로는 죽은 자이며 동시에 없는 것(無)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생명의 빛으로 우리 영혼을 환하게 비춥니다. 그 빛이 있어야만 믿음이 가능하고 그 믿음이 여러분을 의롭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끌어들일 것입니다.
와, 설교듣기와 읽기에서 대단한 경지를 보여주시는군요.
은빛 님이 인용한 저 문장을 흘려보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저 문장을 뺄까 말까 잠시 망설였어요.
설교 마지막 지점에서 뭔가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그래도 저 내용이 설교에서 일종의 화룡정점이기에
어떤 이들에게는 소화하는 데 방해가 되겠으나
어떤 이들에게는 화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냥 '지르듯이' 설교했습니다.
저런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든지 완전히 새로운 차원입니다.
은빛 님이 깊이 생각하는 것은 좋으나 혼자 생각만 해서는,
마치 동네 바둑을 두는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바둑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듯이
계속 골치만 아프지 해결하지는 못할 겁니다.
(어쩌면 해결할 수도 있어요.)
요즘 제가 강독하는 판넨베르크의 <자연신학> 207-211쪽에 나오는
"생명의 자기 초월" 항목을 이해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어보세요.
뭔가 번개가 치는 듯한 순간이 닥칠지도 모릅니다.
제 강독으로는 72강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있으나 실제로는 죽은 자이며
동시에 없는 것(無)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생명의 빛으로 우리 영혼을 환하게 비춥니다.
그 빛이 있어야만 믿음이 가능하고 그 믿음이 여러분을 의롭게 합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끌어들일 것입니다.
목사님, 이 문장을 지난 주 설교 때 듣고 주중에도 계속 생각했습니다.
저 문장 안에 저의 희망이 있고, 절망이 있습니다.
저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완벽하게 알 것도 같고 정말이지 하나도 모를 것도 같습니다.
"역설" 속에 담긴 진리가 실존 세계로 내려오면 적잖이 혼란을 줍니다.
무아, 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무아, 라는 것을 인식하는 그 주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신의 창조 행위의 궁극적 의미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도 또 저 문장들이 주는 깊은 울림을 수긍할 수밖에 없기도 해서
한 주간 내내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았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고 싶은, 나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주장하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해체해서 하나님께로 가닿을 수 있을 것인가, 사순절 기간을 지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 속에 자리한 자기 부인이라는 메시지가
목사님 설교와 맞물려 아주 골치가 아픕니다.ㅎㅎ
생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계속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실제로는 내가 죽은 자이며 아무 것도 아닌 것,
이것을 사순절 기간 내내 묵상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