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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jmWzOeNUwI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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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애굽기 20:1~17 |
십계명 “너머”
출 20:1~17, 사순절 셋째 주일, 2021년 3월7일
예술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은 폴란드 영화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1941~1996)를 아실 겁니다. 그가 만든 영화에 <데칼로그>(1988년 제작)가 있습니다. 십계명을 가리키는 데칼로그(decalogue)라는 영화는 열 가지 주제를 시리즈로 만들었기에 전체가 열 편이나 됩니다. 다 보려면 시간이 꽤 걸립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당시 공산 정권 치하였던 폴란드에서 이 주제가 다가오는지를 고유한 시각으로 풀어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와 화면이 대체로 어둡지만, 인간 삶의 적나라한 심층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십계명은 모세와 연관됩니다. 출 32장에 따르면 모세가 십계명으로 추정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돌판 두 개를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모세는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드렸습니다. 나중에 모세는 깨진 돌판과 똑같은 돌판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 돌판은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와 함께 솔로몬 성전의 언약궤 안에 보관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번에 걸친 전쟁 통에 언약궤와 함께 십계명 돌판 두 개는 사라졌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출 20:1~17절에는 그 십계명의 내용이 나옵니다. 똑같은 내용이 신 5:1~12절에 나옵니다. 1) 다른 신을 두지 말라. 2) 우상을 만들지 말라. 3)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지키라. 5)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라. 9) 이웃에 대하여 거짓말하지 말라. 10) 이웃집을 탐내지 말라.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에 나오는 항목은 로마가톨릭교회의 분류에 따른 것이라 개신교회의 십계명 항복과 비교해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1번과 2번을 하나로 묶어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라고 했고, 10번을 둘로 나누어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와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로 했습니다. 저도 언제 준비가 되면 이 십계명을 주제로 책을 한 권 쓰고 싶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열 개 항목을 오늘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한 가지만 보겠습니다. 이 항목이 예수님의 말씀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 한 가지는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최초의 살인 이야기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창 4장에는 아담과 이브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인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인은 자기가 농사지어서 바친 제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이 양을 키워서 바친 제물을 받으셨다는 사실로 인해서 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분한 마음으로 동생을 들판에서 때려죽였습니다. 인류의 처음 가족에게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입니다. 구약성경은 형제 살인에서 시작해서 그 살인 이야기를 계속 이어갑니다. 너무 잔인해서 ‘19금 영화’처럼 자녀들과 함께 읽기 불편한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걸 보면 인류 역사는 개인과 집단의 살인으로 점철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살인하지 말라.”라는 말씀과 충돌하는 하나님의 명령도 종종 나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겼다는 이유로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집단 살인 명령을 내립니다. 이 명령에 따라서 레위 자손들은 하루 만에 삼천 명의 이스라엘 사람을 죽였습니다(출 32:27, 28). 그 장면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9).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들과 서로 죽이고 죽는 싸움을 벌였습니다.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수 6:21)
“살인하지 말라.”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 어떤 때에는 “죽이라.”라고 명령했다는 성경의 진술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죽여도 된다는 말인가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바알을 숭배하는 이들은 죽여도 괜찮다는 말인가요? 죽여야 할 대상인지 아닌지를 도대체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요?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제는 우리가 그냥 외워서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제가 젊은 시절 군목을 활동하면서도 이런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장병들에게 무조건 살인하지 말라고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북한군을 죽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보다는 군 대체 복무를 선택하는 <여호와의 증인> 교인들이 성서적으로 더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첨단의 문명사회에서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살인하지 말라.”라는 십계명을 사실상 위반하고 있습니다. 간접 살인에 가담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예는 수없이 많아서 제가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장 단적인 예는 우리나라가 자살 공화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살자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중고등 학생들은 주로 공부 스트레스로 인해서 자살합니다.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돌아가는 노동 현장의 막장에 내몰려 자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성 소수자들도 종종 목숨을 끊습니다. 노인 자살률은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높습니다. 공동체성은 훼손되고 각자도생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사회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이 이런 높은 비율의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봐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겁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립니다. 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모두 자살하지는 않습니다. 따돌림을 당해도 버티는 사람은 많습니다. 감옥에서도 살기 마련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울증을 자살의 원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살을 당사자만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옳지 않습니다. 사람이 모두 건강하거나 경쟁력이 높은 게 아닙니다. 마음의 장애도 있고 몸의 장애도 있습니다. 그들이 장애를 견딜 수 있도록 돕는 사회가 있고, 무관심한 사회가 있습니다. 무관심한 사회는 간접적으로 살인하는 겁니다. 언젠가 서울의 강남 어느 지역에 장애인 학생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설립하려고 교육청에서 공청회를 열었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장애인 어머니가 눈물로 호소하자 거기 모인 대다수 주민은 못들을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그들이 비인격적이거나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집값이 내려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서 그럴 뿐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간접 살인 아니고 무엇일까요?
반명제
마태복음 5:21절 이하에는 소위 예수님의 반(反)명제가 나옵니다. 여섯 항목입니다. 예수님은 이 대목에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에 갇혀서 읽는 게 아니라 말씀의 본래 의미를 살려낸 것입니다. 반명제의 첫 번째 항목이 바로 살인에 대한 것입니다. 마 5:21, 2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이 살던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은 자기가 다른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만 않으면 “살인하지 말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살인자를 보고 손가락질하면서 자신들은 떳떳하다고 자부심을 느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제 살인 행위만이 살인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화를 내거나 욕하거나 무시하는 언행도 역시 살인죄 못지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주장은 억지스럽게 들립니다. 우리는 쉽게 남을 무시하고 화를 내고 (겉으로나 속으로) 욕을 합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살인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살인이라는 행위는 이미 그 사람 안에서 발생하는 분노와 원망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기 전에 이미 그의 마음에 시기심과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과 실제로 죽이는 행동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화가 나더라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것은 실제로 살인을 저질렀느냐 아니냐, 하는 시시비비에 떨어져서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의 근본 의미를 놓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 근본 의미는 생명 존중입니다. 다른 말로 타인 존중입니다.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존중한다면 우리는 살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제와 이웃에게 화내지 않고 욕하지 않으며, 그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화내고 욕하고 무시한다는 말은 생명의 주인이 얼마나 존엄한 분인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조선 시대에 암행어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어사는 지방 민심을 살피기 위해서 남루한 옷을 입고 변장하곤 했습니다. 한 마을의 사또가 제멋대로라면 변장한 어사를 무시했을 겁니다. 초라한 행색의 나그네가 어사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무리 못돼먹은 사또라고 하더라도 어사를 존중합니다.
경쟁 위주로 돌아가는 이런 척박한 세상에서 어떻게 타인을 늘 존중하면서 사느냐, 그렇게 살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비법을 제가 알지는 못합니다. 저도 생명 존중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합니다. 다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말씀은 드릴 수 있습니다. 이미 여러분도 다 아는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저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분명히 구별되는 개인이기도 하지만 전체 인류에 속한 존재입니다.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과 제가 큰 범주에서 똑같다는 뜻입니다. 다만 저는 운이 좋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런 불행한 운명을 피했을 뿐입니다. 예컨대 저도 노숙자나 외국인 노동자가 될 수 있었고, 장애인 가족을 둔 사람이나, 성 소수자, 감옥에 갇힌 자, 이런저런 이유로 손가락질받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연히 그렇게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제가 실제로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화도 안 내고 속으로 욕도 하지 않고 사느냐,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저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원수 사랑
예수님의 반명제에 나오는 둘째 항목은 간음입니다. 간음도 십계명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에 관해서도 앞의 살인 항목에서처럼 다음과 같이 파격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여기서 여자를 남자로 바꿔도 됩니다. 이 항목도 살인 항목과 논리가 비슷합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간음 행위만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발생하는 마음속의 왜곡된 성적 욕망 역시 큰 문제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간음한 자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역시 그 간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실제로 살인한 사람과 화만 낸 사람이 똑같은 게 아니듯이, 실제로 간음한 사람과 마음으로만 음욕을 품은 사람이 똑같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걸까요?
예수님의 반명제는 뒤로 네 항목을 더 언급합니다. 이혼, 맹세, 앙갚음, 이웃 사랑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두 항목은 십계명에 나오고 뒤의 네 항목은 다른 데에 나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여섯 항목은 모두 율법에 속하는 명제이기에 십계명이라고 봐도 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항목이 이 반명제의 대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계명의 본질이 여기에 달린 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레 19:18절 말씀입니다. 이웃은 이스라엘 사람이고 원수는 이방인입니다. 이웃은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고 원수는 율법에서 멀어진 사람입니다. 이웃은 선이고 원수는 악입니다. 대다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레 19:18절이 제시하는 기준에 따라서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도 다시 파격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마 5:44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은 현실감이 떨어지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원수 사랑은커녕 이웃 사랑도 잘하지 못합니다. 이웃 사랑과 원수 미움이라는 기준에 숨어서 자기를 종종 합리화합니다. 예수님이 여섯 항목의 반명제를 통해서 말씀하려는 핵심 내용이 48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율법, 즉 십계명의 완성입니다(마 5:17). “Be Perfect” 오늘 설교 제목에 따르면 그것은 곧 십계명 “너머”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또는 완전하게 인생을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사실을 경험적으로 압니다. 오늘날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불안하게 살고 불만스럽게 삽니다. 누가 더 십계명을 바르게 지켰느냐 하는 문제로 끊임없이 시시비비를 가리기에 바쁩니다. 아무도 거기에서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죽을 때까지 누가 옳으냐, 누가 선하냐, 누가 선명하냐 하는 문제로 다투기만 할 겁니다.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십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 인생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여러분의 인생을 끝내고 싶으신가요? 자신이 왜 이렇게 잘났지, 아니면 내가 왜 이렇게 못났지, 하는 생각만 하다가 숨을 거두고 싶은 분은 없을 겁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십계명 “너머”인 완전한 인생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여러분이 이미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결속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즉 그를 믿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완전하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궁극적인 미래의 생명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부활의 약속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과 저는 이미 완전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기에 십계명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교에서 언급한 영화 "데칼로그"
설교복기에서 언급한 동명의 책 "데칼로그"
저자는 젊을 때 튀빙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것을 행운이라고 말합니다.
위르겐 몰트만과 에버하르트 윙엘에게 배울 수 있어서라네요.
전 40여년 교회 다녔지만 다비아, 샘터 와서야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저자에겐 그게 인생의 행운씩이나?
그 책을 몇 년 전 구입해서 서문만 읽어봤었는데,
오늘 마음먹고 .... 훌쩍 넘겨서 맨뒤장 맺는글만 봤습니다.
설교 마지막 대목에서도,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율법, 즉 십계명의 완성입니다(마 5:17).
이렇게 보는 것도 재미있군요.
와, 우디 님이 김용규 선생의 <데칼로그>를 소장하고 있군요.
그분 책은 대부분이 두툼합니다.
<데칼로그>도 579쪽이나 되는군요.
그 뒤로 각주나 인덱스가 나오면 쪽수가 더 늘어나겠지요.
십계명 '너머'가 '완전'이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살기는 간단하게 아니에요.
완전하지 않은 실존 안에서 어떻게 완전해질 수 있을까요?
숙제지요.
우리가 이미 믿음으로 완전해졌다는 사실을 붙들고,
다르게 표현하면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자녀라는 사실을 붙들고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사람으로서, 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매 순간 치열하게 투쟁하면서 살아가야겠지요.
정해진 답으로서의 삶은 따로 없어요.
이런 맥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완전해졌다는, 생명의 완성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보는 거겠지요.
실질적인 완전은 죽음으로써만 가능한 차원이니
그 사실이 두렵고 떨리기는 합니다.
시간 내서 김용규 선생 저 책을 읽어보시고
독후감을 써서 다비아에 올려보세요.
생명의 완성이신 하나님을 오시기를 기다리지만,
예전이나 지금은 암담한 현실이 반복 됩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자정 할 수없어 사법당국의 고소, 고발만 즐비하고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기본적인 상식적 조차 허용 안되는 강요된 침묵이 최고의 선인양
변질되는 교회을 수없이 봅니다.
오늘 복음서의 예수님이 장사치들로 가득한 성전을
뒤엎는 사건을 읽을때마다 속이 시원 합니다.
계명이 우리를 얽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한 단계 뛰어넘는 하나님을 이번주 내내 고민해 볼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