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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하는 교회 (엡 6:10~20)

성령강림절 조회 수 1138 추천 수 0 2021.08.22 21:12:30
설교보기 : https://youtu.be/wozy_xJcwC8 
성경본문 : 에베소서 6:10~20 

전투하는 교회

 

6:10~20, 성령강림후 13, 2021822

 

 

바울은 감옥에 갇힌 적이 몇 번 됩니다. 로마법에 저촉된 겁니다. 법은 원래 정의롭게 실행되어야 하나, 실제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법도 사람이 다루는 것이니까 얼마든지 오용될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은 여러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처지인 만큼 절실한 심정으로 편지를 썼을 겁니다. 그중의 한 편이 에베소서입니다. 그 편지가 살아남아서 신약성경에 포함되었습니다. 그 편지를 소중하게 보관했던 이들, 그 편지를 다시 사본으로 만든 이들의 노력 덕분에 오늘 우리는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초기 기독교의 원초적인 신앙을 접할 수 있습니다.

 

싸울 대상

오늘 설교 본문으로 주어진 단락(6:10~20)끝으로라는 부사로 시작합니다. 에베소서 전체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그 내용이 비장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강해지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단순한 덕담이 아닙니다. 전쟁을 앞둔 군인들을 향한 부대장의 격문(檄文)처럼 들립니다. 1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전투에 나설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이런 말이 오늘 우리에게는 멀리 느껴집니다. 종교의 자유가 완전하게 보장된 대한민국은 마귀의 간계라든가 대적한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에베소서가 기록되던 시대와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근본적으로는 다를 게 없습니다. 교회는 당시나 오늘이나, 지난 2천 년 역사에서 늘 전투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교회 전체에서도 그렇고 개별 기독교인의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전투적인 성격을 잃었다는 말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입니다. 교회는 왜 전투적인 공동체일까요? 기독교인은 왜 전투하듯이 살아야 할까요? 전투적으로 산다는 게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어디서나 따지고 드는 태도로 살라는 뜻일까요? 전투적으로 살기보다는 평화롭게 사는 게 더 복음적인 삶이 아닐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면 우선 바울이 말하는 그 전투의 대상이 누군지를, 즉 전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12절에서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바울은 여기서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닌 자와 상대해야 할 자를 구분했습니다. 먼저 싸울 상대가 아닌 것은 혈과 육입니다.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의역의 방식으로 이를 인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피와 살이 인간을 가리킨다고 본 것입니다. 인간을 상대해서 싸우는 게 아니라는 말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싸움의 대상으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사소한 문제로 시작한 싸움이 나중에는 감정싸움으로 격화해서 처음의 문제가 해결되어도 적개심은 그대로 남습니다. 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앞에서 바울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이 편지를 쓰는 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기를 감옥에 넣은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21:27절 이하에 바울이 체포되는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옵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 아시아 지역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보고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바울이라는 작자는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을 헐뜯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방인인 에베소 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일은 성전 목독입니다.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끌고 성전 밖으로 나가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로마 군대 천부장이 급히 부하들을 이끌고 현장으로 출동했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바울을 일단 군중들과 격리했습니다. 바울은 이후 여러 번 재판을 받았고, 결국 황제에게 항고하여 로마로 압송당합니다.

바울은 이 일이 있기 이전에도 억울한 일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고후 11:23절 이하에 따르면 그는 여러 번 감옥에 갇혔고, 태형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로마 형벌인 태장도 세 번 당했고, 돌에 맞은 적도 있습니다. 자기를 그렇게 몰고 간 사람을 미워할 만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즘 갑질이라는 단어가 종종 사용됩니다. 을의 처지에서는 분통이 터질만합니다. 갑을 적대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사람을 상대로 싸우지 말라고 하면 그 말이 귀에 들릴까요?

 

어둠과 하늘

물론 들리지 않습니다. 그걸 알아들을 수 있으려면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실질적인 악의 근원을 뚫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세력이 바로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바울은 이를 어둠의 세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문장이 조금 복잡합니다. 다시 12b절을 읽겠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주관자들은 모두 어둠의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이 어둠의 세력이 곧 하늘에 있는 악한 영입니다. 여기서 싸워야 할 악의 특징이 두 가지로 묘사되었습니다. 어둠과 하늘입니다.

1) ‘어둠은 악이 숨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악이 어떤 때는 선으로 위장합니다. 그래서 쉽게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겉으로 표시 나게 악한 것들은 오히려 대항하기가 쉽습니다. 어둠의 세력은 식별하기 어려워서 싸우기도 어렵습니다. 앞에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체포 장면을 설명했습니다. 바울이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고 예루살렘 주민들을 선동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표면적으로는 옳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선동당한 군중들도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히틀러의 나치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세계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 유대인과 동성애자들과 공산주의자들과 집시들과 장애인들을 제거했습니다. 대의를 위해서는 작은 불의는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어둠에 숨어 있는 세력입니다.

오늘날 어둠의 세력이 어떻게 숨어서 활동하는지를 잘 살펴보십시오. 우리의 일상에도 어둠의 세력은 몰래힘을 발휘합니다. 선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악한 사람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남을 돕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오히려 남을 이용합니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악과 선은 완전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선한 사람도 없고 완전히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선과 악이 서로 교차합니다. 어떻게 사는 게 선한 삶이고, 또 악한 삶인지 구분하기도 어렵습니다. 북한은 무조건 악이고, 남한과 미국은 무조건 선이라고 말할 정도로 단순한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오늘의 현실 정치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어둠의 세력은 교묘하게, 그리고 위선적으로 작동하기에 어디서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마귀의 간계에 맞서는 우리의 싸움은 힘든 싸움입니다.

2) ‘하늘은 악한 영이 압도적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거대한 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살던 로마 체제도 압도적이었습니다. 하늘의 악한 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입니다. 그런 세력을 개인이 뚫고 나가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것을 오늘의 사회학 용어로 바꾸면 구조 악입니다.

저는 자본을 숭배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야말로 오늘날의 악한 영, 즉 구조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구조 안에서 개인들은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모두 무기력해집니다. 예를 들어, 여기 전인적인 교육을 실천하려는 중고등학교 교사가 있다고 합시다. 학생들을 데리고 숲속 산책하러 나가고, 예술 공연을 다니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하고, 정치 사회 문제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전문가를 초청하여 악기를 가르치거나 노래를 가르치고, 또는 철학과 문학 강연을 열고 싶습니다. 육체와 정신과 감정발달에서 가장 예민한 시절을 사는 그들에게 삶의 신비와 경외를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학교 당국과 학부모들은 이런 교사를 반기지 않습니다. 꿈은 야무져서 좋으나 비현실적이라고 여기고 옆에서 뜯어말릴 겁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사는 많은 이들은 구조 악에 압도되어 소모품처럼 삶을 영위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하늘의 악한 영이 우리 삶을 완벽하게 지배한다는 증거입니다. 이게 눈에 들어오는 분들도 있고, 강 건너 불로 느끼는 분들도 있겠지요.

 

완전무장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은 어떻게 싸우면서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요? 싸움을 통해서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을까요? 누가 여기에 딱 들어맞는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바울의 충고와 가르침을 여러분에게 전할 뿐입니다.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힘든 싸움을 앞두고 완전무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11절과 13절에서 반복했습니다. 전신 갑주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πανοπλίας(완전한 갑옷)입니다. 완전무장이라고 번역하면 됩니다. 어둠의 세력인 하늘의 악한 영을 대항하는 싸움이 어렵기에 적당하게 무장해서는 곤란합니다.

14~17절에서 바울은 이 완전무장을 문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진리의 허리띠, 정의의 가슴막이,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신발, 악한 자의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는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대충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있고 어려운 내용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신앙적인 완전무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완전무장이 일반 기독교인에게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출가 수도승이나 신학자나 선교사, 또는 목회자 같은 교회 지도자들에게나, 그것도 부분적으로 어울리는 듯이 보입니다. 일반 신자들은 일상을 살아내는 일만으로도 벅찹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교회 지도자들에게만 이런 완전무장을 요구했다고 보면 곤란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을 포함한 에베소 교회 전체를 향한 말씀입니다. 개별 기독교인은 이런 완전무장을 할 수 없으나, 공동체로서 교회는 악한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서 완전무장을 해야 하고, 의지만 있으면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교부 시대부터 규정된 교회의 네 가지 본질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신경에 나옵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교회라고 말입니다. 니케아 신조는 이를 더 세분화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교회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입니다. 이런 특성을 정리하면 교회 공공성입니다. 오늘날 사기업처럼 돌아가는 한국의 개신교회 모습과 반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자본주의 구조가 한국교회처럼 철저하게 자리 잡은 분야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교회가 어떤 때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자영업처럼 비칩니다. 어느 교회는 너무 크고 어느 교회는 너무 작습니다. 교회 상호 간 연대감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목사의 이중직 문제가 불거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세속 직업을 허용하는 문제입니다. 택배나 대리기사, 또는 학원 차 기사일 등등입니다. 지금 저는 목회자의 노동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한국교회의 공공성 문제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로마가톨릭 교회는 교구 차원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합니다. 한국교회도 노회나 총회에서 접근하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으나 개교회주의가 만연하기에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교회 현실에서 바울이 말하는 영적인 완전무장은 요원한 주장입니다.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어둠의 세력과 하늘의 악한 영과 싸울 능력이 없으니 교회가 자기들끼리 영역 싸움에 몰두합니다.

 

중보기도

바울은 오늘 본문 후반부 18~20절에서 기도에 관해서 말합니다. 어둠의 세력과 싸운다거나 완전무장해야 한다는 전반부의 심각한 내용과 결이 다르게 들립니다. 그러나 같은 이야기입니다. 숨어서 압도적인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악한 영과 투쟁하려면 교회의 공공성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그 공공성의 본질이 바로 기도입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9절과 20절 말씀도 비슷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이를 한 단어로 묶으면 중보기도입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줄 안다면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겁니다. 하나가 될 때 교회는 악한 영과 전투할 수 있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의 결론을 내리는 대목에서 중보기도를 언급한 것입니다. 대형교회 예배에서 대표 기도를 드리는 이가 가난한 교회를 위해서 진정성 있게 중보기도를 드린다면 전체 교회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신학자를 배출해야 하고, 교회의 분열을 극복할 것인지,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는 전투를 치열하게 펼칠 것인지를 생각하기에는 기독교인의 먹고사는 문제 역시 너무 시급합니다. 이 문제를 단칼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문제에 눈을 뜨는 신자들이 늘어나면 교회가 개혁될 것이고, 줄어들면 위축될 겁니다. 한국교회 전체를 놓고 보면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큽니다. 물론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말처럼 깨어있는 기독교인도 많습니다. 성령께서 선하게 인도해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할 뿐입니다.

저는 설교를 마치면서 교회의 두 가지 신학적 성격을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오늘 설교를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교회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됩니다. 보이는 교회는 지금 구체적으로 기독교인이 모이는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완전하지 못합니다. 공격도 받습니다. 그래서 전투적인 교회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완전한 교회입니다. 이미 승리한 교회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이 두 교회 사이에서 긴장하면서 삽니다. 한편으로는 치열하게 전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말론적 승리를 노래합니다. 이미 승리한 교회를 희망하고 기다리면서 전투적인 교회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개별 기독교인의 한평생 인생살이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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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최용우

August 26, 2021
*.107.101.242

지난주간 같은 본문으로 작성한 설교가 너무 강렬해서 이번주 '햇볕같은이야기'에 6편으로 쪼개어 매일 발송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과 약간 다른 부분도 있지만,  목사님 설교를 참고하여 글을 만들다보니 본의아니게 목사님 글이 조금씩 들어갔습니다. (짧은 쪽지글의 특성상 인용구나 출처를 밝히지 않으니 이해해 주십시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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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6, 2021
*.182.156.212

예, '조금씩'이 아니라 '많이' 들어가도 좋습니다.

내 설교문이라고 해도 순전히 내 것도 아니니까요.

오는 주일 설교 본문이 아가 2:8~13절인데, 

여러가지로 은근히 걱정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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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2556
858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020-07-19 2176
857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4] 2020-07-12 6290
856 성령강림절 쉼 (마 11:16-19, 25-30) [2] 2020-07-06 5993
855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3119
854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2504
853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3336
852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2694
851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2520
850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2359
849 부활절 사랑과 계명 (요 14:15-21) 2020-05-17 2430
848 부활절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4] 2020-05-10 2691
847 부활절 성찬 예배 공동체 (행 2:42-47) [2] 2020-05-03 2111
846 부활절 눈이 밝아진 제자들 (눅 24:13-35) 2020-04-26 4104
845 부활절 예수의 손과 옆구리 (요 20:19-29) [2] 2020-04-19 5735
844 부활절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2] 2020-04-12 3928
843 사순절 주의 손과 주의 얼굴 (시 31:9-16) [6] 2020-04-05 2963
842 사순절 여호와의 손과 영 (겔 37:1-14) [2] 2020-03-29 2596
841 사순절 예수는 심판 주다! (요 9:35-41) [2] 2020-03-22 5152
840 사순절 생존의 위기 앞에서 (출 17:1-7) 2020-03-15 3142
839 사순절 영생과 예수 (요 3:1-17) 2020-03-08 2695
838 사순절 의와 생명 (롬 5:12-19) [2] 2020-03-01 3245
837 주현절 영광스러운 미래의 생명 (마 17:1-9) 2020-02-23 2268
836 주현절 "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8] 2020-02-16 3619
835 주현절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전 2:1-12) [8] 2020-02-10 3322
834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6693
833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3070
832 주현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7] 2020-01-19 2864
831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4076
830 성탄절 하나님을 본 사람 (요 1:10-18) 2020-01-05 2925
829 성탄절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2] 2019-12-29 3224
828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6826
827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3251
826 대림절 "파루시아" (약 5:7-10) [5] 2019-12-16 3093
825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5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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