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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63n0HoBZ-7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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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가복음 10:17~22 |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막 10:17~22, 창조절 6주, 2021년 10월10일
영생을 찾는 사람
예수님 공생애 중에 예수님을 만나러 온 사람들은 세 부류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지게 하려는 사람들이고, 둘째는 병을 치료받으려는 사람들이고, 셋째는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막 10:17~22절에 나오는 사람은 세 번째에 속합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꿇어앉아 겸손한 태도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에 관한 자세한 정보가 본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병행 구절인 마 19:16~30절에는 부자 청년으로, 눅 18:18~30절에는 부자 관리로 나옵니다. 그가 부자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당시나 오늘날이나 부자들은 사회적인 영향력이 큽니다. 성취감과 자부심도 있습니다. 약간만 베풀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습니다. 자기 인생이 잘 풀린다고 생각하기에 부자들은 대개 현실에 안주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 그런 흔한 부자가 아니라 영적인 관심이 높은 사람이었나 봅니다. 21절에는 예수님이 그를 사랑하셨다는 말도 나옵니다.
이 사람이 언급한 ‘영생’은 구원이나 진리라는 말로 바꿔도 됩니다. 불교 개념으로 바꾸면 열반입니다. 생명 완성이거나 성령 충만, 그리고 해방과 안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용어들이 가리키는 차원에 관해서 무감각한 사람이 있고, 끊임없이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찾지 않고 그냥 일상에 묶여서 삽니다. 인생이 뭐 특별한 게 있나 돈 많이 벌어서 최대한 즐겁게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죽으면 되지, 하고 삽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렇게 살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산다고 해도 행복한 인생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서 인생의 무료함에 떨어질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을 찾아온 이 사람은 부자였으나 그런 일상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의 질문에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영생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관념적이지 않고 실천적인 질문입니다. KJV은 이 문장을 “what shall I do?”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는 구원받을 수 있는 옳은 행위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물은 겁니다. 현대인도 비슷한 방식으로 삽니다. 높은 연봉을 받으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 “what shall I do?” 대통령에 당선되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 좋은 교사로 인정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요? 틀린 질문은 아니지만 옳은 질문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가치 있는 행위를 실천하더라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게 맞는 말일까요?
예수님은 일단 이 사람이 생각하는 관점으로 대답하십니다. 19절에는 여섯 가지 윤리적 행위가 열거됩니다. 십계명에 나온 내용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고대 유대인들은 이런 계명을 통해서 그들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역사에는 이와 비슷한 법전들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헌법과 법률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이 사람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이런 말을 할 때 그 사람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느껴집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율법 훈련을 받았을 겁니다. 그의 말은 반만 옳습니다. 율법의 형식을 지켰다는 점에서는 옳지만, 율법의 본질을 지켰느냐 하는 점에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율법의 형식에 충실했다고 해서 율법의 본질에도 충실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법의 형식 논리에만 묶여 있는 법조인들에게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반反명제’(마 5:21~48)에서 이를 정확하게 짚은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항목이 나오는데 그중에 한 항목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마 5:21~22절에서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라는 모세의 율법을 거론한 뒤에 실제로 벌어진 살인 행위만이 아니라 친구에게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행위도 살인 못지않은 잘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더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 실행으로 인간이 완전해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문자인 율법에는 그 율법의 실체가 완전하게 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율법의 근본적인 한계를 가리킵니다. 그런 율법을 절대화하면 위선에 떨어집니다. 위선은 생명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율법의 한계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말한 이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칭찬을 받을 줄로 기대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이 십계명의 여섯 항목에다가 한 가지를 더 보태신 것으로 들립니다.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면 하늘의 보화를, 즉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직업과 재산과 가족까지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명령은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신 걸까요? 자기를 찾아온 이 사람을 곤란하게 하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건 아닙니다. 십계명을 형식적으로는 지킬 수 있으나 그 근본 의미까지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what shall I do?”는 일상에서 나름으로 의미가 있으나 궁극적인 차원에서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죽는 순간에 자기의 선행을 기억하면서 만족해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사회적 신분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런 것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22절에 따르면 이 사람은 재물이 많았기에 슬픈 기색으로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사람에게 재물에 대한 욕심이 유난히 많았다거나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비교적 선량하고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재산과 영생 사이에서 적당하게 균형을 잡고 사는 방법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오히려 어려운 처지에 떨어졌습니다. 재산도 지키고 영생도 얻을 수 있는 길이 막혔으니, 그가 슬퍼할 수밖에 없었고, 근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한평생을 재산과 영생 사이에서 외줄 타듯이 긴장하고 갈등하면서 삽니다. 자본주의가 노골화된 뒤에는 이런 긴장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영생, 구원, 해방, 평화, 안식을 외면하고, 노골적으로 재물을 얻는 데만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지금과 같은 악한 경제 메커니즘 안에서는 그게 차라리 속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성남시 ‘대장동 개발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점입가경입니다. 무협 소설에서나 사자성어 모음집에서나 볼 수 있는 용어도 나옵니다. ‘화천대유’라거나 ‘천화동인’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50억 약속 클럽’이라는 말도 나돕니다. 어느 국회의원의 아들이 6년 동안 직원으로 일하다가 퇴직금을 50억이나 받았다고 합니다. 이건 사실로 이미 드러나서 그 국회의원은 여론의 질책을 견디지 못하고 의원직을 사퇴했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의혹이 불거질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대장동 개발로 투자 대비 천문학적인 이익금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투자금액의 천 배 배당금을 돌려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대동강물을 팔아먹었다는 봉이 김선달보다 훨씬 더 과감하게 토지 개발사업을 벌인 겁니다. 이런 정도라면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아니라 도박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유 시장경제 제도 안에서 산다고 해도 이런 일까지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남시 관계자와 정치인들과 법조인들이 어떻게 결탁했는지는 앞으로 검찰이 밝혀내고, 책임을 물어야겠지요.
자본주의의 미래
저는 이번 일을 보면서 자본주의의 속성을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이와 비슷한 일은 이미 앞에서도 많이 일어났고 앞으로도 반복될 겁니다. 부(富)가 선이라는 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아닙니까. 돈이 되기만 하면 불법도 마다하지 않고, 교묘하게 법망을 피할 생각만 합니다. 기업의 이윤을 위해서 오염물질을 비정상적으로 처리합니다. 우리 후손이 살아야 할 땅을 비양심적으로 훼손시킵니다. 우리 개인들도 매일 플라스틱과 스티로폼을 얼마나 많이 배출하는지 모릅니다. 지금 편하고 값싸게 사용할 수 있기에 모든 쓰레기 처리를 후손에게 맡기는 태도입니다. 무엇이 의미 있는 삶인지에 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만 그럴듯하게 하면 대통령에 당선될지 모릅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이 천박한 자본주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저는 경제사회학자가 아니기에 이 주제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방향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방향을 저는 성경에서 배웠습니다. 이미 오늘 본문에서 부자의 운명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자기 신세를 슬퍼하게 되고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산에 관한 더 직접적인 예수님의 말씀은 눅 12:13~21절에 나옵니다. 어떤 부자가 밭을 경작하여 큰 소출을 얻었습니다. 그는 곡식을 쌓을 곡간을 걱정했습니다.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현실감이 나는 표현입니다. 이 부자는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인생일 겁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예수님이 이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말한 이유는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킨 투사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 뒤에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를 반동분자로 매도하고 부정한 게 아니라 부자의 삶이 오히려 불행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재물에만 신경을 쓰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술과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취하면 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처럼 처음에는 사람이 재물을 다루지만 거기에 길들면 재물의 노예가 됩니다. 그 사람의 세계는 모두 재테크 방식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나라처럼 짧은 시간에 벼락부자가 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저를 포함하여 대다수 사람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이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정답을 저는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타당한 완전한 정답은 세상 종말이 오기 전까지 찾지 못할 겁니다. 어느 정도 적당한 선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게 최선입니다. 적당한 선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도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에 돈을 사용해야 하니 불로소득만 아니라면 돈은 많이 벌수록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일용할 양식 외의 것들을 모두 악한 재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는 여러분 자신이 상황에 맞춰서 판단해야 합니다. 제가 설교자이지만 여러분과 똑같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하는지만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자본이 인간을 존중하도록 힘을 모아서 투쟁하는 삶입니다. 경제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은 그대로 두면 이번 대장동 개발 사건에서 보듯이 악마가 됩니다. 자본도 사람이 다루는 것이라서 마음만 먹으면 제어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예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세금 제도가 하나의 방법입니다. 높은 소득에는 높은 세율을 부과하고, 낮은 소득에는 낮게 부과해서 그 세금으로 보편적 복지를 끌어올리는 겁니다. 여기에 정치의 역할이 있습니다. 인간 존중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보편 복지에 높은 가치를 두는 정치 집단이 있고, 그것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능력에 맡기는 정치 집단이 있습니다. 전자는 진보 계열이고, 후자는 보수 계열입니다. 한쪽이 완전히 선하고 다른 쪽이 완전히 악한 건 아닙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효율성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라도 저는 최소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했다고 보시나요, 아니면 악마의 얼굴이라고 보시나요?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 우선권을 두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게 실제로 제가 설교자로서 하고 싶은 말입니다. 본문에서 이 부자는 재산이 많아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재산을 다 처분하라는 말씀이 너무 파격적이긴 했으나 사실은 그것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게 핵심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생각이 있었다면 재산 문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은 됩니다. 제가 보기에 재산에 관한 말씀이 없었더라도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나서지 못했을 겁니다. 부부가 헤어질 때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다 대지만, 마음이 떠났다는 게 핵심이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천박한 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시대를 삽니다. 부에 대한 욕망이 끝을 모르는 불행한 시대입니다. 개인이 뚫고 나가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에리식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신들을 무시하다가 징벌을 받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식탐을 감당하지 못하는 징벌입니다.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나중에는 자기 몸까지 먹어치웁니다. 오늘의 사회 현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길을 잠시 멈추고 여러분이 지금 자본주의 추종자로 사는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제자로 사는지를 확인해보십시오.
부스러기 님의 대글에 공감한다는 의미로 여기 김선우 시인의 <내 따스한 유령들>에 나오는
시 "마스크에 쓴 시2"를 사진으로 올려드립니다.
지난주 월~목까지 산청군 성심원에서 하동군 화개장터까지 지리산둘례길 2차여정을 마쳤습니다.
한 110km를 걸었네요.
걸으면서 정목사님의 부자청년 설교를 묵상하며 걸었습니다.
목사님이 지적하신대로 기본적인 종교 생활을 잘 했다고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너머의 하나님과 나와의 진정한 만남이 없으면 윤리적 교조적인 종교생활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 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 너머를 위해서는 나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고개를 넘고 넘어 가는데 나 왜 부자청년처럼 이 고개를 넘지 못하는 것일까?
종교의 윤리적인 규범은 이 고개를 넘기 위한 잘 차려진 준비인데.
정작 가고 넘어 가야 할때는 이 규범과 스스로의 제한이 하나님과 참 만남을 막고 있지 않는지.
때론 버려야 할때 버려야 작아진 나를 발견 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해보았습니다.
걷다보면 딱 트인 마을과 강을 만나는 것처럼, 질문 또한 하다보면 언젠가 참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만나겠지요.
돈에 미친 세상에 격하게 공감하는 세상사람들.....
'오징어 게임' 신드롬에 대해 누가 이런 촌평을 내었더군요
분명 J은 돈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고 하셨거늘
우린 양수겸장을 이제껏 잘도 해내가고 있으니
당신이 경계지어 놓은 믿음의 울타리를 종횡무진 잘도 넘나들며 믿고 있는 우리 믿음의 신통방통을
그 분이 차마 예상못하고서 속단하여 말씀하신걸까요?
아님 두 주인을 섬기면서도 '우리가 설마..' 하며
서로 속고 속이는 집단광기에 빠져있는건가요?
회당에 나온 귀신들린 자를 J이 준엄하게 질책하셨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코와 귀가 썩어 떨어져나가는데도
도무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나병환자요 돈 귀신들린자로 살아가면서도
회당출입의 열심을 여전히 잘도 하고 있거늘
개과천선의 가능성이라곤 전무한 우리의 구제불능조차
그분의 구원의 열심에 걸림돌이 안되는걸까요?
이러고도 계속 이 뒤틀린 믿음이라도 놓치않아야 하는건가요?
도저히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는, '죄인중의 괴수'라는 탄식과 절규를 흉내내지 않고서는 나갈수가 없거늘,
이러다가 교묘한 자기기만에 세뇌되어 평생 '내가복음'이란 썩어빠진 동아줄을 붙들다 소천하는게 아닐까 불안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