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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창조절 조회 수 3312 추천 수 0 2022.09.05 08:18:38
설교보기 : https://youtu.be/qG7lDt1sicE 
성경본문 : 누가복음 14:25~35 

왜 예수 제자인가?

14:25~35, 창조절 첫째 주일, 202294

 

 

예수님이 갈릴리 인근에서 활동하다가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길에 많은 사람이 동참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4:25절이 그 상황을 이렇게 간략하게 전합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당시 예수님은 유대교 당국자들과 고위급 인사들에게 위험인물로 낙인찍혔기에 자기 주변에 가능한 한 사람들을 많이 끌어들이는 게 유리합니다. 그 세력을 보고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몰려든 군중들에게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26절에 따르면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를, 더 나아가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어서 27절에 따르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는 자도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군중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본문이 보도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의 다른 대목(6:66)을 미루어 짐작건대 일부만 남고 나머지는 다 흩어졌을 겁니다.

 

내 제자

어떻게 보면 냉정하기 들리는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을 단순히 따라다니는 사람과 제자는 구분됩니다. 많은 군중 틈에 끼어서 예수를 단순히 따라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구경 삼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존경할만한 랍비였고, 여러 종류의 기적 행위자로 알려졌으니까 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질타를 통해서 군중들은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군중은 각자 다른 이유로 예수에게 몰려든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현상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을 가득 채운 하나님 나라는 사회공학적인 구도로, 즉 많은 사람의 세력에 힘입어 일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듣기 민망할 정도의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 겁니다. 무슨 말인가요? 자기에게 몰려든 이들이 모두 당신의 제자는 아니라고 뜻입니다.

본문에는 내 제자’(μου μαθητής)라는 독특한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26절과 27절과 33절입니다. ‘내 제자라는 표현은 예수와의 특별한 관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사람만이 예수의 제자입니다. 이 말은 거꾸로, 실제로 예수의 제자가 되지 않고도 얼마든지 예수를 따라다닐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를 오늘의 상황으로 바꾸면, 예수 제자가 아닌 목사도 있고, 예수 제자가 아닌 장로도 있고, 예수 제자가 아닌 선교사도 있습니다. 그걸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이 얼굴에 표시 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설교하는 저는 예수께서 내 제자라고 부를만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냥 겉으로만 목사 행세를 하는 사람일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른 일로 바빠서 이런 질문에 아예 관심이 가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내 제자를 군중들과 구분하는 이유에 대한 대답이 28절부터 32절까지 두 가지 비유로 나옵니다. 하나는 망대 건축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 준비입니다. 망대를 세울 때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먼저 계산하지 않으면 기초만 쌓고 끝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합니다. 전쟁에서도 적군의 군사력을 파악해야 합니다. 자기 나라 군사력이 크게 부족하면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사신을 보내서 평화 조약을 맺는 게 지혜로운 겁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제자로 살 준비가 되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수고가 헛됩니다. 33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의 제자가 될 사람에게는 소유를 버리는 일이 바로 망대 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비용을 계산하는 것이며, 전쟁을 벌이기 전에 군사력을 계산하는 겁니다. 이런 준비가 철저하지 않으면 망대 건축이 실패하고, 전쟁에서 지듯이 예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게 과연 맞는 말인가요? 모든 소유를 버리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요? 예수의 제자로 살려면 직장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재산도 포기해야 한다면 누가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씀은 출가 수도승 이외에 일상을 살아가는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우리가 감당하기 어렵거나, 현실적이지 않은 차원의 말씀을 하신 겁니까?

저는 예수님이 무소유를 보편적 진리로 말하거나 출가자의 삶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어울려서 사는 일상의 삶을 제한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풍성하게 누리기를 원하는 분이십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면서 교양 없이 산다고 바리새인들에게서 비판받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실제의 삶을 부정하거나 위축시키는 분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그런 오해를 살만한 이야기가 종종 나오긴 합니다.

19:16절 이하, 10:17절 이하, 18:18절 이하에는 예수님에게 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던 한 부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예수 당신을 따르라는 말을 듣자 슬픈 기색을 보이면서 떠났다고 합니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병행구는 각각 이 이야기에 끝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과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비교합니다. 이런 표현만 본다면 예수님은 재산과 소유를 부정적으로 보신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럴 생각이었다면 예수께서는 사막으로 은둔했어야 합니다. 그건 세례요한에게 어울리는 삶입니다. 예수께서는 빈들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재물과 소유를 부정한 게 아니라 그로 인한 삶의 왜곡에 저항하신 겁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경제학자들이 종종 거론하는 슈퍼리치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미국에는 1%의 부자가 95%의 부를 독점한다고 합니다. 양극화가 날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기득권층과 부자들의 이익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제도라고 규정합니다. 우리나라도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지난 몇 년간 아파트 폭등으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영끌이라는 신조어도 만들어졌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도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건 이해가 갑니다. ‘슈퍼리치나 그에 버금가는 이들에 의해서 벌어지는 정략과 권모술수가 사회 전체를 위험에 떨어뜨립니다. 삶을 왜곡시키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겁니다.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즉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소유 문제를 거론한 이유는 단순히 사회과학적인 차원에서 경제 정의를 실현해야겠다는 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유보다 더 소중한 게, 아니 절대적으로 소중한 게 있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소유와 재물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그 소중한 것은 생명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안식과 평화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끝없이 펼쳐지는 자기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험하는 것, 즉 우상으로부터의 탈주입니다. 그게 생명의 현실입니다. 그 모든 것을 압축하면 내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와의 특별한 결속을 가리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단어 무 마데테스라는 단어에서 영적으로 큰 울림을 경험했을 겁니다.

내 제자가 된다는 말은, 예수님 공생애 때 어떤 제자들과 그 부모들이 오해했듯이, 하나님 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닙니다. 가끔 부흥사 류의 사람들도 신자들을 선동하여 그런 한 자리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속으로는 그런 한 자리를 생각할 겁니다. 그리스도인들만 구원받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에 들어가서 영원히 고통당한다는 생각은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신앙이라기보다는 철저히 세속적인 이기주의입니다. 예수 제자가 된다는 말의 격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여러분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복음 안으로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겠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예수의 복음(유앙겔리온, 1:1, 14), 즉 기쁜 소식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복음으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실제로는 복되지 않으나 표면적으로 사람들이 복되다고 하는 다른 일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로 인해서 우리는 늘 일희일비하고, 좌고우면하고, 쫓기기도 하고 작은 일로 화를 내면서 삽니다.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오해받으면 불면증이 걸릴 정도로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속된 표현으로 지지고 볶는방식으로 삽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복음은 그림의 떡이지 실제 삶의 능력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안 그런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의 복음이 현실로 느껴지십니까?

복음서가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절대적인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앞에서는 예루살렘 성전도 상대화됩니다. 안식일도 절대적인 규범이 못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지위와 명예도 사소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강력한 태풍이라고 생각해보세요. 내일 태풍이 몰아치는 게 확실하다면 동네 사람들이 공연한 일로 싸우는 일은 없습니다. 감정 상하는 일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태풍의 피해를 최소화할지를 의논하고 대책을 세웁니다. 하나님 나라를 개인적으로 더 실감하려면 죽음을 생각해보십시오. 내년에 자기가 죽는 게 확실하다면 다른 사람과 싸울 일이 뭐겠습니까. 너무 극단적인 예이긴 하나 예수께서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일상에서 생생하게 경험하시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도 그런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생명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제가 종종 예로 드는데, 꽃과 바람과 구름과 아기 웃음과 커피 향에서도 가능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경험한다면 오죽하겠습니까. 이런 경험에는 돈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매 순간 생명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분들은 아쉬울 게 전혀 없어서 다른 이들에게 너그러워집니다. 이런 경험이 모두에게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소수에게만 주어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은혜로 주어집니다. 제 생각에 그런 은혜가 유지되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걸 가리켜서 수행이라고 합니다. 수행이 없으면 어느 사이에 하나님 나라는 희미해지고 사람들 사이의 시시비비만 현실로 다가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우리 삶에서 시시비비가 의미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정의로운 세상과 교회 개혁을 향한 투쟁이 무의미하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것도 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즉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적인 균형감각과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복음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21:36)이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칼 라너, 칼 바르트, 판넨베르크, 몰트만 등등의 신학을 공부하면 좋다고 말해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기가 뭔가를 안다는 생각에 갇혀 있는 겁니다. 비유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도주 경험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소믈리에는 포도주 전문가입니다. 여러 등급의 소믈리에가 있습니다. 백 등급에 오른 소믈리에도 있고, 오십 등급인 소믈리에도 있습니다. 저는 십 등급 정도일 겁니다. 갈 길이 멉니다. 백 등급은 포도주 맛을 백 가지로 경험할 수 있는 소믈리에입니다. 보통 사람은 기껏해야 5등급이겠지요. 더 낮은 사람은 3등급이고요. 아예 등급에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포도주 맛은 느끼지 못하고 술 취함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1~3등급에 해당하는 사람이 포도주 맛을 더 깊이 알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불행한 일이 아닐까요? 제가 종종 말씀드렸지만, 종교 전문가라 자처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와 비슷합니다. 여러분은 율법주의에, 즉 원칙주의에 떨어졌던 바리새인으로 만족하시겠어요, 복음 안으로 늘 깊이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예수의 제자가 되고 싶으신가요?

마가복음에 따르면 이 복음은 그냥 복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1:1)이고, 하나님의 복음(1:14)입니다.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대답은 명백합니다. 그들이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지극하고 온전한 사랑을 경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생명과 그 회복의 능력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을 옥죄는 죄에서 해방되는 경험에 이르렀습니다. 더는 교만하지 않게 되고, 더는 절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에게서 온전하게 존중받는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몸 파는 여자로 추정되던 사람이 예수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향유를 쏟아부은(7:36 이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된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은 다른 게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를 둘러싼 조건과 인간관계와 자기 소유에 묶여 있으니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나요? 술 취한 사람은 포도주 맛의 깊이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매월 한 번씩 열리는 신학공부 모임에서 요즘은 칼 라너의 책 기도의 절실함과 그 축복에 대하여를 강독하고 있습니다. 지난 828일에 읽은 대목에는 주기도를 원본으로 한 라너의 기도문이 나옵니다. 마지막 단락이 이렇습니다. “저희가 당신 안에서 살도록, 그리고 당신의 자유와 당신의 생명 안에서 살도록 저희를 저희 자신에게서 구하소서.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늘 자기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나르시시즘’(병적인 자기애)이라고 합니다.

본문 마지막인 34절과 35절에는 갑자기 소금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서 쓰레기통에 들어갑니다. 앞에서 설명한 제자로서의 정체성이 없으면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쓰레기와 같다는 뜻입니다. 준엄한 말씀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교회 공동체도 복음과는 거리가 먼 종교 친목 단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그리고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더 천착했으면 합니다. 거기서 복된 소식을 날로 새롭게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는 실제로 예수 제자인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런 질문이 희미해지는 순간에 짠맛을 잃은 소금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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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716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163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20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6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76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79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4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6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5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27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59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4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6
»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2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01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45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6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54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4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5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6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53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61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39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4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4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96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1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4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54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36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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