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lassic Style
- Zine Style
- Gallery Style
- Studio Style
- Blog Style
설교보기 : | https://youtu.be/pkb_lk7tt94 |
---|---|
성경본문 : | 예레미야 4:11~12, 22~28 |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창조절 둘째 주일, 2022년 9월11일
예레미야의 영적 실존
구약에 나오는 문서 선지자 중에서 실존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은 제가 알기로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멸망한 기원전 587년 이전 40년간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당시에는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제국들의 각축이 심각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기원전 721년에 멸망시킨 앗시리아의 국력은 조금씩 약해졌고, 신흥 제국인 바벨론이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남쪽으로는 애굽 제국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세 제국의 틈바구니에 끼어있었던 유다는 생존이 위태로웠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런 시대를 살았습니다.
기원전 609년에 유다의 운명이 걸린 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애굽의 바로 군대와 싸우던 유대의 요시야 왕이 싸움터에서 전사했습니다. 요시야는 예레미야와 나이가 비슷합니다. 그는 보기 드물게 개혁적인 왕이었습니다. 요시야 왕의 개혁 운동을 지지하면서 그와 함께 나라를 바로 세워보려던 예레미야의 계획이 물 건너간 겁니다. 이 사건 뒤로 유다 왕들은 애굽 왕이나 바벨론 왕에 의해서 지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다 백성들의 자부심에 손상이 갔습니다. 나라가 누란에 떨어졌을 때는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지혜롭고 존경받는 왕이 진두지휘를 하든지, 그게 아니라면 왕궁을 중심으로 한 고위급 정치인들이 집단 지성을 통해서 문제를 풀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시야 왕 이후에 유다에는 믿을만한 왕이 없었고, 국제 정세에 관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라의 방향을 바르게 이끌어갈 만한 왕족이나 귀족이 없었습니다.
렘 28장에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 관한 상징적인 사건이 보도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진 하나냐 선지자와 예레미야의 공개 논쟁이 그것입니다.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2년 안에 유다의 어려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준다고 선포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강탈해간 모든 성전 기구를 돌려받을 것이며, 포로들도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4b절에서 그는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는 하나냐를 거짓 선지자라고 비판했습니다. 렘 28:15은 이렇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두 선지자가 서로 정반대의 견해를 보였습니다. 하나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유다 왕과 귀족과 유다 백성들의 귀에는 하나냐의 선포가 딱 들어왔습니다. 국내외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자신들에게는 그런 난국을 헤쳐나갈 힘이 없는 상황이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신다는 하나냐의 설교가 귀에 쏙 들어온 겁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냐의 마음도 이해하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유다 백성들이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으니까요. 유다 백성들의 간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공공의 적이었고, 요즘 표현으로 ‘왕따’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깁니다. 예레미야는 무엇을 근거로 유다 백성들을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해서 그들의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든 것일까요?
거짓 가르침
당시 유다 백성들은 두 가지 종교 이데올로기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이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확신이고, 다른 하나는 바알 숭배의 특징인 열광적인 신앙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어마어마한 건축물이 주는 위압감과 안정감은 분명히 있습니다. 지금도 로마 베드로 성당이나 그와 비슷한 교회당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함께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열정적으로 ‘씨씨엠’을 부르고 율동을 곁들이는 집회에 참석하거나 ‘주여 삼창’ 등을 외치는 심야 집회에 참석하면 영혼이 해방되는 듯한 기분에 휩싸입니다. 일종의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겁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무조건 매도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이 ‘싸이의 흠뻑쇼’를 즐기는 현상과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험은 아무리 즐거워도 한순간입니다. 이전투구처럼 돌아가는 세상 안으로 들어오면 요즘 젊은이 용어로 ‘현타’가 옵니다. 예레미야가 볼 때 예루살렘 성전의 절대화와 열광적 신앙 안으로의 몰입함으로써 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하나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사이비입니다. 하나냐 선지자를 비롯한 유대 왕과 귀족과 백성들의 운명이 어떨지도 예레미야의 눈에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비유적으로 매일 군것질만 하거나 술에 찌든 사람의 육체 건강이 어떻게 될지를, 그리고 ‘막장’ 드라마만 보는 이들의 정신 건강이 어떻게 될지를 예측할 수 있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런 삶에 각각의 심판이 기다린다고 말해도 됩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인격과 교양과 삶 됨됨이가 수준 이하가 아닙니다. 본래 사람의 판단력이 그렇게 대단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이성도 그렇게 탄탄하지 않습니다. 감정에 치우치기도 하고, 개인적인 탐욕을 정당화하려고 거짓 논리 안으로 쉽게 빠져듭니다. 자신을 너무 믿지 않는 게 오히려 지혜로운 겁니다. 저도 저 자신을 전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제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둡니다. 특히 어떤 절박한 상황에 떨어지면 최소한의 판단력 자체가 무너집니다. 이를 ‘멘붕’이라고 부르더군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런 위기가 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또는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라도 생명의 기준점인 하나님 말씀에 가까이 가는 게 최선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심판을 설교하면 설교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예레미야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예레미야가 처한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선지자 역할을 그만두고 은둔해버리고 말았을 겁니다. 그는 본래 제사장 출신이라서 어디 가도 단란한 가정을 꾸리면서 잘 먹고 잘살 수 있었습니다. 상당한 정도의 재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렘 16:1절 이하를 따르면 예레미야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예레미야의 영혼이 절박했다는 뜻입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견뎌낼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예레미야는 기원전 587년 유다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때까지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고독한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친구이자 제자인 바룩에게 받아적게 해서 예레미야서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겁니다.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여 자신의 모든 삶을 던진 예레미야의 삶이 예레미야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거짓 안도감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유다 백성은 왜 거짓 가르침에 쉽게 넘어갔을까요? 왜 값싼 위로에만 귀를 기울였을까요? 예레미야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렘 4:22절을 들어보십시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앞에서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논쟁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예레미야가 보기에 하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하나냐의 주장이 거짓말인 이유는 유다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거짓을 믿게 한다는 말은 거짓 안도감에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거짓 안도감에 떨어지면 무엇이 실제로 생명 충만인지, 무엇이 영혼의 자유인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선이며 악인지, 무엇이 정의이며 불의인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며, 무엇이 죽이는 일인지를 생각할 마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 후손을 위해서 지구 생태계를 어떻게 어떻게 덜 훼손시킬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소비 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무신경하게 삽니다. 영적인 긴장감이 없는 겁니다. 그걸 일상 용어로 바꾸면 삶의 ‘매너리즘’이 아니겠습니까.
현대인들도 일상의 반복 가운데서 삶의 매너리즘에 떨어지곤 합니다. 살아있다는 사실의 신비를 느끼지 못합니다. 삶의 방향에 관해서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스마트폰이 이런 현상을 가속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흔한 병인 우울증이나 우울증과 반대되는 쾌락주의적인 행태도 삶의 무력감인 매너리즘에서 오는 부정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인생이 아주 재미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긴 합니다. 실제로 재미있을 수도 있으나 아예 생각 자체가 없는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동물과 달리 고유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삶의 매너리즘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목사도 영적인 긴장감을 놓치고 목회 매너리즘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교회 성장론에 떨어진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일반 신자들의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멋진 현대식 교회당과 파이프오르간과 성가대와 유명한 담임 목사와 대형마트처럼 온갖 종류의 유사 종교 프로그램과 구제와 봉사 활동과 심지어 부부 클리닉이나 노인 여가 활동 프로그램으로 가득한 교회에 나간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해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요소들은 생명 충만에 이르게 하는 본질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 매너리즘을 은폐시키는 포장지입니다. 그런 데 길들면 자기의 궁극적인 미래에 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지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머물 뿐입니다. 늙은 부모와 죽음에 관해서 진지하게 대화해보신 적이 있나요? 죽음과 그 이후 문제에 관해서 진지하게 대화하는 부부들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스무 살인 1973년에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신학생, 전도사, 부목사, 담임 목사로 산 세월이 대구 샘터교회를 은퇴하는 올해로 50년이 되었습니다. 평생 신학책을 끼고 살았고, 신학과 그리스도교 영성에 관한 책을 수십 권 썼고, 신학생을 가르친 세월도 꽤 됩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습니다. 이게 저의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 1:8)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더 깊이 알고 싶습니다. “현재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12)라는 바울의 진술도 더 깊이 알고 싶습니다. 신구약 성경이 말하는 ‘태초’와 우주물리학이 말하는 ‘빅뱅’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철학이 말하는 정신과 성경이 말하는 영의 관계가 무엇인지도 더 알고 싶습니다.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제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제 설교는 모두 이런 궁금증에서 출발합니다. 여담으로 지금까지 제가 대구 샘터교회 예배에서 남긴 설교문이 1천 편 가까이 되는데, 앞으로 1천 편을 더 남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먼 훗날 여러분이 대구 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들어오시면 지금보다 훨씬 늙은 제가 쓴 설교문을 보실 수 있을지 모릅니다. 구십 살에도 새로운 설교를 할 수 있을지, 저의 20년 후가 기대됩니다. 제가 아주 뛰어난 영성가, 설교자라서가 아니라 성경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세계가, 듣는 분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나이를 더 먹으면서 점점 더 새롭게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러다가도 순식간에 하나님 말씀에 관한 모든 흥미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늙은 사람의 앞날은 한 치도 내다보기 힘드니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막연한 안도감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유대의 현실을 냉철하게 보았습니다. 바벨론 왕인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대를 정신 차리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일종의 주화파이고, 적대자들은 주전파입니다. 누가 옳은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주전파가 보면 예레미야는 비겁한 인물입니다. 그는 바벨론의 첩자라는 비난도 실제로 들었습니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정치가나 국제 외교 전문가가 아니라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전하는 중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는 애굽의 도움으로 바벨론을 물리칠 수 있다는 근거가 희박한 낙관론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포퓰리즘에 떨어져서 무턱대고 싸울 때가 아닙니다. 설령 예레미야의 판단에 오류가 생겼다 해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삶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지자들 덕분으로 유다 백성들은 절체절명의 바벨론 포로 사건을 겪으면서도 다른 소수 민족이 그런 운명 가운데서 해체되는 거와 달리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 과정에서 벌어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어야 한다는 생각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민족이라서 유다 민족의 혈통인 다윗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게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데에 실제로 관심이 있습니까?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데에 관심이 있을까요? 그렇지 못한 현상이 한국교회에 종종 나타납니다. 아주 특별한 사건이긴 하나, 서울에 있는 사랑**교회는 그 지역 재개발 조합의 합법적인 요구에 버티기로 일관하다가 5백억 이상의 보상금을 받아냈다고 합니다. 소위 알박기 작전을 펼친 겁니다. 그런 억지를 부려서 돈을 많이 받아냈겠으나 그리스도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다시 한 단계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오늘 본문이 말하듯이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한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에게서 나타나는 단적인 예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라고 호소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의 외침도 결국에는 이런 호소와 결을 같이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약에서는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벧후 3:18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요한복음(10:15)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안다는 인식에 이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이시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왜 의롭게 된다는 것인지를 더 실질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그의 사랑 안으로, 그의 하나님 경험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저의 영혼이 자유를 얻고 참된 안식과 평화를 얻는다는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저의 생각과 같으리라고 믿습니다.
맨붕-멘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