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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77SKZRQF4s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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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이사야 11:1~10 |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대림절 둘째 주일, 2022년 12월4일
오늘 설교 성경 본문인 사 11:1~10절 앞 대목인 10:24절 이하 단락에는 우리말 성경으로 ‘주께서 앗수르를 멸하시리라’라는 제목이 붙었고, 뒤에 나오는 13:1절 이하 단락에는 ‘바벨론에 대한 경고’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이집트와 더불어서 이사야 시대에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볼 때 이집트는 남쪽이고, 앗수르는 북쪽이며, 바벨론은 동쪽입니다. 서쪽은 지중해입니다. 크게 보면 고대 이스라엘은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이에 끼어 있던 셈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열강의 세력 틈바구니에서 늘 생존이 위태로웠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 중반 남유다를 반(反)앗수르 동맹에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요즘 ‘한미일 동맹’이라는 말이 있듯이 말입니다. 반앗수르 동맹에 들어가면 앗수르 제국과의 전쟁도 불사해야 합니다. 들어가지 않는다면 앗수르에 예속될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선택이 나라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유다 왕은 고심 끝에 반앗수르 동맹에 들어갔으나 나중에 상황이 바뀌어 오히려 앗수르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중입니다. 이사야는 반앗수르 동맹을 반대했으나 그렇다고 앗수르를 무조건 추종하는 것도 마뜩잖게 생각했습니다. 무서운 기세로 주변 작은 나라를 합병해가는 앗수르를 하나님께서 멸절시킬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바벨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 13:19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 … ” 세계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의 이런 생각은 기도만 하면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나 아무 근거 없는 자기 확신이나 일종의 정신승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고 경험하고 믿는 데서 오는 영적인 통찰이자 확고한 기다림입니다.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역사를 홀로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는 모두가 놀라워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신뢰했기에 이사야는 앗수르와 바벨론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공의로우심
하나님이 어떻게 통치하시는지를 오늘 본문이 설명합니다. 그 설명의 시작은 ‘한 싹’과 ‘한 가지’ 이야기입니다. 다윗왕의 아버지인 이새의 가문에서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고, 그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할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즐거워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4~5절을 읽겠습니다.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지금 나라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이사야가 선포하는 메시지는 한가해 보입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에 맞서 군사력을 높여야 할 때가 아닌가요? 다른 나라를 압도할 정도로 부자 나라가 되는 게 최우선의 과제가 아닐까요? 그런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고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인다는 말은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를 억압하는 세력을 응징한다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우리말 성경에 붙은 소제목 ‘평화의 나라’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하신다고 보았습니다. 그 평화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에 핵심은 공의(righteousness)와 성실(faithfulness)입니다. 공의와 성실은 같은 뜻입니다. 공의로울 때만 믿을만하니까요.
이런 공의(정의)로우심이 필요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부자는 스스로 자기를 지킬 수 있으나 가난한 자는 자기를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법 정신의 핵심도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로움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늘날 많은 이들이 정의와 공정을 ‘능력주의’ 관점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진실한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제쳐두고, 그 사람의 능력만을 기준으로 삼는 겁니다. 독일에서 사는 한인 교포가 뒤늦게 시작한 대학공부에 관한 경험을 어느 시사 주간지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수강 신청을 온라인에서 제비뽑기로 한다는군요. 코로나 이전에는 현장에 모여서 진행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나 장애인이나 학생회에서 활동하는 학생들에게 우선권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제도가 도입된 이유는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거나 인터넷 속도가 느린 집에 사는 학생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라고 합니다. 도대체 정의는 무엇인가요? 장애인들을 비장애인과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하게 하는 게 정의일까요? 여자 청년도 남자 청년처럼 군대에 의무적으로 가는 제도가 공정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겸손한 자를 정의로움으로 심판하고 판단하신다고 말하는 이사야는 지금 앗수르와 바벨론 같은 제국이 얼마나 난폭한지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들 제국은 자기를 세상의 중심으로 삼는 체제입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주변의 작은 나라를 자신들의 세력권에 끌어들입니다. 채찍과 당근을 겸해서 사용합니다. 자기 나라 건설 현장에 작은 나라 사람들을 투입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고, 공용어를 자기 나라말로 바꿉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런 앗수르에 결사 항전하다가 결국은 망했고, 남유다는 항복하는 조건으로 속국이 되었습니다.
제국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거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당장 큰일이 날 듯합니다. 누가 이를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사야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를 앗수르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신다고 말합니다. 이사야의 이런 설교는 옳은가요? 설득력이 있나요? 아니면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의 발언인가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을 여러분은 여전히 옳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가난해도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고, 정말 행복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가난이 지긋지긋하신가요?
절대 평화
이사야의 선포를 이해하려면 그가 꿈꾼 새로운 세상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세상입니다. 조폭 메커니즘에서 사는 사람은 수도원의 삶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이사야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은 앗수르 제국으로 인해서 서로 싸우고 파괴하는 일이 없는 나라입니다. 현실이 아니라 동화에서나 맛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런 세상을 본문 8~10절이 그림처럼 묘사했습니다. 8절만 읽겠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이사야가 꿈꾸는 세상은 완벽한 평화가 실현된 세상입니다. 더는 잡아먹거나 잡아먹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9절에 나왔듯이 해도 없고 상함도 없습니다. 아무도 눈치 보지 않아도 됩니다. 생존의 위기를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분노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잘난 척도 없습니다. 인정 욕구도 없습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세상입니다. 특히 인간 문명이 꽃피운 이후로 실현된 적이 없습니다. 문명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오히려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세상입니다.
오래전에 읽은 책 『오래된 미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와 영화 <늑대와의 춤을> 등에 나오는 라다크 사람들과 인디언들에게서 그런 흔적을 느꼈습니다. 그들도 싸울 때가 있으나 상대를 파멸하는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습니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사람은 파괴적인 존재로 진화되는 게 아닐는지요. 문명의 극치를 달리는 21세기 현대인들은 겉으로는 세련되었으나 속으로는 적개심과 분노를 멈출 줄 모릅니다.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도 큽니다. 인류는 지구에서 포식자의 상층부를 완벽하게 지배합니다. 모든 동물과 식물을 인간 기술로 조작하며, 에너지를 무한 사용합니다. 무기 산업도 끝이 없습니다. 이런 문명이 앞으로 지속 가능할까요? 아니, 지속해도 될까요? 이런 세상에서 오래 살고 싶으신가요? 개인적인 차원에서, 여러분의 내면에서 끝없이 반복하는 갈등과 분노와 짜증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으신가요? 그런 방식으로라도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나름 풍족하게 살면 충분한 인생인가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는 이사야의 거룩한 상상력이 인류 문명 역사에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무의미한 게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깨어나게 하는 외침입니다. 사람으로 가능하지 않은 그런 평화를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약속이자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불가능한 가능성’입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니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평화입니다. 이런 꿈이 없다면 이전투구로 돌아가는 이 세상을, 그리고 온갖 번뇌가 가득한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겠습니까.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사는 평화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실감하려면 지금 여러분이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누군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 말입니다. 혹시 가족 중에 있나요, 교우인가요?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다행이겠으나 없지 않을 겁니다. 우리나라와 북한이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제가 가끔 하소연하듯이 말씀드렸듯이 내일이라도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 평양, 신의주를 거쳐서 북경까지 갈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형제 국가처럼 지낼 수 있는 날이 당장이라도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사는 이사야의 노래를 못들은 체하고 살아야 합니까.
시시비비
이걸 누가 모릅니까? 문제는 상대방이 변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양쪽이 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시시비비를 따지니까 해결되지 않는 겁니다. 시시비비는 때에 따라서 필요하기는 하나 근본에서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시시비비에서는 우리 자신이 늘 옳은 게 아닌데도 자기를 주장하고, 그런 방식으로는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시비비의 공적 장소인 대한민국 법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면 됩니다. 시시비비는 인생의 하수들이 붙들고 있는 방식입니다. 인생살이의 고수는 시시비비가 아니라 일종의 ‘도(道)’를 붙들고 삽니다. 도의 세계에는 누가 조금 더 잘못하고 덜 잘못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눈이 쏟아지면 지저분한 땅인지 깨끗한 땅인지가, 평평한 땅인지 울퉁불퉁한 땅인지가 중요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도는 순례자로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산티아고 순례에 나선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누가 명품 장비를 갖췄는지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교회끼리도 경쟁하지 않고 교우끼리도 경쟁하지 않습니다. 목적지까지 한 걸음씩 내디딜 뿐입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내용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체가 따라주지 않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알지만, 감정이나 기분이 따라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시행착오를 반복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건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사는 우리 자신을 일단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말고 작은 발걸음이나마 앞으로 내디뎌야 합니다.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조금씩이나마 성숙해지는 겁니다. 그런 성숙은 억지로, 또는 자동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충만함이 그 답입니다. 9절을 귀담아들어 보십시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시시비비가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KJV이 ‘the knowledge of the Lord’라고 표현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니까, 동양식으로 말해서 도가 세상에 충만하니까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지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독일어 루터 성경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인식’(Erkenntnis)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호와를 인식하고 알 때 그 어떤 해와 상함도 없는 평화의 나라를 온전히 지향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는 지식’은 예를 들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존재의 근거가 우리 안에 없습니다. 숨만 끊어지면 죽습니다. 인간만 독자적으로 지구에서 살아가지도 못합니다. 지구 안에서 만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분명하게 알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조금씩이라도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역시 여호와를 아는 지식과 인식과 믿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세상살이에 바쁘겠으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넓혀나가시기 바랍니다.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의 경지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삶도 분명히 달라집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잘 알고 잘 믿어도 실제 삶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고 차이가 없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평화 지향적인 삶으로의 변화가 없다면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충만한 게 아니라 아주 빈약하거나 왜곡된 겁니다. 설교하는 저도 이런 말씀 앞에서 두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가 말하는 하나님에 관한 인식과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생각했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사야가 말하는 평화의 왕(시 9:6b)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이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서로 시시비비를 따지기 때문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시시비비가 사실은 죄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모든 시시비비를 폐기했습니다. 그의 십자가 처형이 이를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받으러 온 예수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무덤에 묻혔던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자’로 경험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진 순간입니다. 여러분 모두 젊은 시절 연인을 만날 때 느꼈던 그런 설레는 마음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살아가십시오.
목사님, 이번 주 설교 말씀은, 듣고 읽고 도저히 댓글을 안 달 수가 없네요. 저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데, 이민 교회의 환경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넓히기에 어려움이 많아 목사님 설교에 많이 의지하던 중, 제대로 신학을 공부하고 싶기도 하고 전문적인 준비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공부도 리드해보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이번 가을 학기에 신학대에서 목회학 석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첫 학기가 끝나가는데,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풀타임 교수와 신학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풀타임 학생을 동시에 하려다보니) 과제와 읽어야 할 책 등이 큰 부담이 되면서 이 과정을 계속해 나가야할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번 목사님 설교 말씀이 제가 마음을 추스리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되어 감사의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이사야가 꿈꾼 이상적인 모습에서, 시시비비를 넘어선 도를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읽어내시는 목사님이야 말로 정말 21세기의 이사야이시라는 생각입니다. 평화지향적인 삶으로의 변화가 없다면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라는 말씀도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고 제 정곡을 찌르는 죽비소리로 들립니다. 목사님 말씀에 큰 힘을 얻어 저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넓히고 또 나누기 위해 계속 순례의 길을 걷겠습니다. 추워진 날씨에도 건강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우희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