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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 (롬 8:6~11)

사순절 조회 수 7574 추천 수 0 2023.03.26 17:57:20
설교보기 : https://youtu.be/xj26d8eeal0 
성경본문 : 로마서 8:6~11 

하나님의 영

8:6~11, 사순절 다섯째 주일, 2023326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제가 느끼는 감정은 복합적입니다. 우선은 그의 영적인 내공을 제가 따라가기 벅차다는 느낌이 그것입니다. 기껏해야 1천 미터 높이의 산만 올라가 본 사람이 전 세계에서 고봉으로 알려진 8천 미터 이상 14개 산을 모두 등반한 산악전문가 앞에 선 심정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세계가 너무 신비롭고 강력해서 그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겠다는 궁금증, 또는 호기심이 계속 이어집니다.

로마서를 읽을 때 그런 감정이 더 강렬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8:6~11)에 나오는 단어를 몇 개만 일단 짚어볼 테니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살펴보십시오.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 하나님과 원수,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죽을 몸 등등입니다. 이런 단어는 로마서 8장 전체의 문맥과 연결됩니다. 8:1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8장의 마지막 절인 3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생명을 이 세상의 그 어떤 세력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사건이야말로 복음의 요체입니다. 이 복음의 요체를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설합니다. 그걸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다시 전해드리겠습니다.

 

육신의 생각

바울은 육신의 생각영의 생각을 나눠서 설명합니다. 6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θάνατος)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ζωὴ)과 평안(ερήνη)이니라.

 

육신의 생각을 육체적인 본능, 즉 성욕과 식욕과 사회적 성취 욕망 등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또는 인간의 부도덕한 생각과 행위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육신의 생각은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런 삶의 태도는 곧 율법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제정한 규범과 시행규칙들입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와 레위기와 민수기와 신명기를 가리키는 모세오경을 율법서라고도 부릅니다. 그 다섯 권의 책에 수많은 법칙과 규범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출 12장은 유월절과 무교절에 관한 세칙이 나오고, 21장에는 주인과 종의 관계, 폭행에 관한 규정이 나옵니다. 22장에는 배상에 관한 규정도 나옵니다. 오늘날 형사소송법이나 가정법과 비슷한 내용이 모세오경에 나오는 겁니다. 그런 규칙과 규범을 지키는 일이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길이었습니다. 바르고 착하게 살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예상외로 바울은 그런 삶의 방식을 가리켜서 죽음을 불러오는 육신의 생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의 이런 비판이 옳다고 여깁니까, 너무 과격하다고 여깁니까? 노골적으로 말해서, 법은 지키는 게 옳습니까, 안 지켜도 됩니까? 대답하기 까다로울 겁니다. 율법 중심의 삶이 죽음이라고 바울이 말한 이유가 7절에 나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제가 누누이 반복하지만, 바울이 율법 전통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율법 전통을 법치주의라는 말로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아무도 법치주의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법치로 인간의 삶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짚은 겁니다. 법을 아무리 완벽하게 정비하고 사람들이 법을 지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정의와 평화가 이 세상에 온전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분명하기에 그는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도 않고 굴복할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1조는 다음과 같이 두 항목입니다. 1)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세계 대부분 문명국가는 민주공화국을 지향합니다. 우리가 김일성 왕조 독재체제라고 여기는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처합니다. 본래 법은 그걸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얼마든지 왜곡되거나 더 나아가서 조작될 수 있습니다. 재정적인 능력이 있는 반사회적 피고인들이 거금을 들여서라도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를 선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다 알지 않습니까. 검찰의 기소독점주의를 폐기해야 한다든지, 소선거구제에서 중대선거구제로 바꿔야 한다는지, 대통령제가 아니라 내각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모두 법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입니다. 바울의 표현으로 바꾸면 법은 생명에 굴복할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이 문제는 법조계와 정치 영역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직결됩니다. 법을 통해서 사회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듯이 높은 학력과 기술과 경력 등을 통해서 인생을 성취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요즘은 우리나라가 선진국 문턱에 발을 디딘 탓인지 세계적 스타가 종종 나옵니다. 연봉 일억이 넘는 사람들도 제법 많습니다. 말 그대로 럭셔리하게 사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그런 삶을 서로 부러워합니다. 거기서 갈등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지금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도 가능한 한 그렇게 멋지게 살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삶의 조건을 채웠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할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도 않고 굴복할 수도 없다는 바울의 통찰이 우리의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인간은 배부른 돼지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형상

인간이 생명체 중에서 특별한 존재라는 게 그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다고 창세기는 말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여기 가난을 극복하고 극적으로 성공한 기업가가 있다고 합시다. 정치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있고, 학문에서 성공한 교수도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 가기까지는 희망에 부풀어 있습니다. 성공하기만 하면 여한이 없다고, 정말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막상 그 자리에 올라가면 거기서 더는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합니다. 높은 자리야말로 사람에게 마약과 같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인생을 살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언젠가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런 상황을 사람은 견디지 못합니다. 은퇴 뒤에 정신적으로 혼란에 떨어지는 이들이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인격이 파괴되기도 합니다. 노욕에 떨어지거나 완전히 삶에 대한 의욕 상실에 떨어집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고상하고 교양이 있는 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죽음과 비슷하게 사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육신의 생각은 죽음이라고 말한 겁니다.

실제 교회 생활에서 이 문제가 어떻게 드러날까요. 저는 얼마 전에 지인이 담임 목사로 있는 어느 교회의 주일 공동예배와 거기서 선포된 설교를 유튜브로 접했습니다. 소도시인 그곳에서 가장 큰 교회이고, 목사는 50대 초반으로 사람 됨됨이가 반듯한 사람입니다. 예배 전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서 경배와 찬양 유의 집회가 진행되더군요. 설교의 시작은 묘비명 이야기였습니다.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이들의 묘비명을 열거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묘비명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강조했습니다. 그 동영상에서 저는 예배가 일종의 종교적 교양으로 다뤄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교회 생활을 성실하게 하고 세상에서 모범적으로 사는 걸 누가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게 바로 바울이 말하는 육신의 생각이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잠시 종교적 기분으로 들뜨게 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영혼의 만족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성장주의와 율법주의적 신앙 행태와 권위주의적 체제에 싫증을 느낀 그리스도인 중의 일부는 자연주의 영성에 몰두합니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를 멀리합니다. 숲을 찾고 강과 바다를 찾습니다. 귀농이나 귀촌을 감행합니다. 자연주의 영성이 매력적이면서 창조신앙에 근거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렇게만 살아도 의미 있는 삶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연주의 영성은 아무리 좋아도 모조품입니다. 모조품도 모조품 나름이겠지요. 진품에 80% 가까운 모조품이라면 80%가 가짜인 것에 비하면 칭찬받을만합니다. 그러나 그게 진품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진품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근사한 모조품으로 만족하겠으나 진품을 뚫어보는 사람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근사한 모조품에 자신의 삶을 베팅하면 결국은 죽음입니다. 제가 너무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 같은가요? 제가 아니라 바울이 극단적입니다. 그는 지금 유대교 주류와 투쟁하는 중입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으나 지금 모조품에 만족한다고 말입니다.

자연주의 영성이 상대적으로 수준이 높기는 하나 그리스도교 영성의 근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자연은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도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면서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아들과 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도 자연에 속한 겁니다. 얼마나 예쁘고 귀엽고 듬직합니까? 손자들이라면 더 그렇겠지요. 그 아이들은 곧 늙고 병들고 말썽을 피우고 삶을 힘들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대상이기는 하나 거기서 사랑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실망할만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절감하실 겁니다. 실수투성이입니다. 인식과 판단의 오류도 자주 벌어집니다. 감정도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이유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3:17) 선포했고, 바울도 롬 8:22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영의 생각

이 세상의 피조물 그 어디에서도 구원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거기서는 기껏해야 좋은 기분을 맛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을 받는 정도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미술관에서 명작 그림을 보는 듯한 즐거움입니다. 상대적으로 가치 있을 뿐이지 결국에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의 생각으로 바꾸라고 외칩니다. 그 영은 9절이 말하듯이 하나님의 영’(Πνεμα Θεοῦ)이자 그리스도의 영’(Πνεμα Χριστοῦ)입니다.

이라는 표현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신이라고 번역해도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더는 육신의 생각으로 살지 않습니다. 생각(mind)이 자기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약속에 집중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그 약속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걱정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그리고 안심하고, 의심하지 말고 집중하는 겁니다. 먹는 음식이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사람의 생각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무한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을까 조바심하고, 살림살이의 어려움으로 가족들이 동반 자살했다는 뒤숭숭한 소식을 일상으로 접하는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바울의 이런 발언을 실감하기 어렵긴 합니다. 그 말씀에서 빛을 느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말씀에 가까이 가려고 하겠지요. 문제는 그 빛을 느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11절의 내용이 빛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1절에 중복해서 나온 문장이 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입니다. 그냥 단순히 창조주 하나님이 살린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를 살리신 이가 살린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없으면 우리의 죽을 몸이 사는 일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와 하나 되면, 그의 영이 우리 안에 있으며,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삶의 중심으로 삼으면 결국에는 죽음으로 끝날 우리가 산다는 게 확실한가요?

이 대목에서 여러분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이해하기 까다로운 신학 개념을 잠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생명입니다. 사도신경 마지막 단락에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그 문장이 말하는 몸의 부활은 종말론적인 사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당장 멋지게 사는 게 중요하지 언제일지 모를 종말에 다시 산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불평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불평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진 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종말은 창조와 동시적 사건입니다. 종말론적 생명은 이미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운명에서 볼 때 죽음이 출생과 동시적 사건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경험했다면 이미 종말론적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절에서 이렇게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영이 산다는 표현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 자체는 아닙니다. 생명을 완성하실 하나님이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셨기에 죽을 몸인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는 육신의 생각인 율법에, 즉 품위 넘치고 고상한 인간이 되어서 명성을 떨쳐보겠다는 생각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6절에서 바울이 짚은 생명과 평화가 인생살이에서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뜸한 골목에서 한 중학생이 여러 명의 난폭한 친구에게 조롱받고 위협받는 그 자리에 역도 국가 대표 선수인 맏형이 나타난 형국과 비슷합니다. 그 자리에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곤혹스러운 국면을 해결해버린 국대형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그 경험을 다른 이에게 설명할 수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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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March 27, 2023
*.253.57.26

어거스틴이 그랬다죠?
"주는 영원이시기에 당신의 연대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이
항상 오늘뿐입니다"라고요

종말은 창조와 동시적 사건이기에
종말에 완성될 생명은 이미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오늘 이 메세지를 제대로 따라가려면
어거스틴 정도의 통찰력없이는 언감생심이겠구나
싶습니다
'종말론적 생명완성의 선취'가
목사님 설교를 꾸준히 들어온 다비안들에게는
익숙한 표현이겠지요
여전히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요

어느 신학자가 그랬더군요
우리가 무심코 흘려버린 오늘이란 시각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나눈 당신의 일부이다..
당신에겐 언제나 현재뿐이라는
이 시간의 비밀과 신비속에서
종말론적 생명완성의 약속을
그저 성경속의 건조한 교리가 아니요
오늘 비밀한 방식으로 선취되어 있음을
뚫어보려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수준의 선이해 없이는 불가능한건가요?

시공간속에 던져 놓아 주시고는
시공간을 초월해 있는 나를 만나고
시공간을 초월한 차원에서 내 약속을 받아들여라...
요구하시니
주여!!
우리의 능력을 혹여 과대평가하고 계신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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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7, 2023
*.157.223.56

부스러기 님의 글은 재미있습니다.

진정성도 전달되고요.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대신 질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아니면 좋은 뜻으로 불가지론자이신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종말론적 생명 완성' 등등의 말들을 

일종의 '화두'로 여기면 됩니다. 

아무도 화두를 완전히 풀지는 못해요.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즉 화두를 붙드는 거 자체가 중요합니다.

종종 예로 들지만, 

모세도 하나님을 보고 싶어 했으나 얼굴은 못보고 등만 봤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등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분의 옷깃으로, 그분의 숨결로, 그분의 천둥소리와 번갯불로 만족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하나님은 무리한 요구를 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리한 대답을 찾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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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김사관

March 27, 2023
*.42.197.253

부활절을 2주 정도 앞두고 한국 교회 강단에 꼭 필요한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부활절도 대부분의 강단에서는 '예수 부활을 무조건 믿으시오'의 자기 신념을 모토로 설교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한국 교회에 팽배해져 있는 '육신의 생각'들을 거두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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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7, 2023
*.157.223.56

김 사관 님, 잘 지내시지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영'을 좀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목사라는 직업은 이런 점에서 장점이 있네요.

의무적으로라도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전하다면 

목사의 영혼이 계속 자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세상살이에 압박당하는 일반 신자들에게 늘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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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7115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6971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7453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6843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7299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7412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7409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7438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7330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7481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7018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7396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7402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7436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7403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7392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7416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7406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7425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7120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7448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7754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7921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7454
»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7574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7437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8551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7859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7655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8062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8035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7923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8986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8355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8098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7956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9068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9278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9386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11128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10651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11082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8515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8208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8140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9024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8108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961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9029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8152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9062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8835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9072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8668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936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9180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7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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