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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7m1ILE4m3o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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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누가복음 24:28~35 |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부활절 셋째 주일, 2023년 4월 23일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유형입니다. 하나는 무덤이 비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도 두 유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눅 24:1~12절은 일단의 여성 제자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무덤에 묻힌 지 이틀 후, 그러니까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시간에 무덤을 찾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무덤에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었습니다. 대신 천사 둘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합니다. 이 여성들이 무덤에서 본 이상한 현상을 사도들에게 전했으나 사도들은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엠마오 두 제자
이어지는 눅 24:13~35절은 다른 복음서에 없는 누가복음만의 부활 전승입니다. 이른바 ‘엠마오 두 제자’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은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는 중이었다는(눅 24:13) 말로 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들은 며칠 전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모든 걸 포기하고 미련 없이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지난 며칠간에 벌어진 일을 이야기하면서 길을 가던 그들 곁에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두 사람은 ‘눈이 가리어져서’(눅 24:16) 끼어든 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들과 예수님 사이의 대화가 27절까지 이어집니다. 먼저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며칠간 겪은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합니다.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서 십자가에 달았다. 2) 우리는 그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라고 믿었다. 3) 우리 모임 중에 어떤 여자들이 무덤에 갔으나 시체를 못 보고 천사만 보았고, 제자들이 다시 확인하러 무덤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설명을 듣고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1) 당신들은 왜 선지자들이 이미 언급한 말씀을 믿지 못하는가. 2)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은 다음에 ‘영광’에 들어갈 것이다.
그 순간까지 두 제자는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가 누군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저물어가자 두 제자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예수께 하룻밤 묶고 가자고 말합니다. 예수께 친근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 상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더 함께 지내면서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저녁밥을 먹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눅 24:30절을 읽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예수께서 ‘떡’을 들고 축하하신 이 장면은 두 가지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하나는 소위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눅 9:16절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떡과 물고기를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나눈 마지막 유월절 만찬입니다. 눅 22:14 이하를 따르면 예수께서는 떡을 들고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사건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이었습니다. 오병이어는 구약의 메시야 사상에 부합하는 사건입니다. 남자만 해서 자그마치 5천 명 이상이라고 하니까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합하여 줄잡아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들판으로 몰려들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 데다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 돌로 빵을 만들어보라는 마귀의 유혹에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거절하셨으나, 여기 들판에서는 사람들의 그런 먹고 사는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신 겁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거의 메시아급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병행구인 요 6:15절은 놀라운 표적을 본 군중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서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고 보도합니다. 만약 예수께서 정치적인 야망이 있었다면 이 기회를 이용해서 예루살렘을 접수하러 가자고 군중을 선동할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은 오병이어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오병이어 때는 제자들도 덩달아 들뜰만한 축제 분위기였으나 유월절 식사 때는 죽음을 앞둔 이에게서 유언을 듣는 자리와 같아서 가라앉은 분위기였습니다. 오병이어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정점을 찍는 사건이라 한다면 유월절 만찬은 모든 계획이 끝장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경험했겠지요.
눈 밝음
유월절 만찬 이후 며칠에 걸쳐서 예수님의 체포와 제자들의 배신과 십자가 처형과 매장과 빈 무덤에 얽힌 일들이 아주 빠른 템포로 진행되었습니다. ‘이게 뭐지?’ 하는 궁금증만 잔뜩 안고 엠마오까지 온 이 두 제자는 어떤 낯선 이가 지금 떡을 손에 들고 축사한 다음 떼어주는 광경을 본 것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그들은 기시감을 느꼈겠지요. 31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은 물론 시(詩)적인 겁니다. 그들이 몇 시간 동안 동행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게 시력 때문이라고는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유레카’가 여기에 해당하기도 하고, 돈오(頓悟)도 그렇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평소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구름이나 나무나 벌레가 어느 순간에 아주 큰 존재감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산과 숲이 나날이 새로워지는 절기에는 그런 경험이 무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다시 테니스에 눈이 밝아졌습니다. 젊었을 때 밝아졌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공을 라켓으로 칠 때 강하게 치려고 힘을 주면 줄수록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팔도 고장 납니다. 손과 팔에 힘을 빼고 라켓을 던지듯이 부드럽게 쳐야만 공이 무게감 있게 나갑니다. 아주 간단한 원리인데도 그걸 실제 몸으로 느끼기는 쉽지 않아서 동호인들은 어느 단계를 벗어나기 힘듭니다. 늦은 감이 있긴 하나, 이제라도 테니스에 눈이 밝아졌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서 그들 앞에 있는 이가 바로 이전에 자신들이 스승으로 모셨던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는 말만 나오고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당신이 바로 예수님 맞습니까, 하고 묻지도 않습니다. 우리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실의에 떨어진 제자들을 다시 규합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더 힘있게 밀고 나가자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그 즉시 안 보이게 되었다고만 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두 제자에게 무언가 격려의 말씀이라도 남겼으면 좋았을 텐데, 그냥 아무 말 없이 안 보이게 된 겁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 부활은 기자가 보도 원칙에 따라서 설명할 수 있는 일반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비유적으로 초등학생이 괴테의 『파우스트』을 읽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 같은 어떤 사건입니다. 제자들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죽었던 예수께서 자기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표현할 수 있을 뿐이지 그 현상을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부활에 관한 복음서 이야기가 오늘 우리 눈에도 어딘가 어색하게 보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무덤을 찾아갔다가 이상한 현상을 목격한 여성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자연스럽게 들리시나요?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우리가 아는 한에서 아무도 죽었다가 살아날 수는 없습니다. 죽음에 가까이 갔다가 다시 살아나는 임사체험은 가능합니다. 간혹 죽은 이를 관에 넣고 장례 준비를 하는 중에 관 안에서 어떤 소리가 나서 열어보니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있긴 합니다. 그런 현상은 죽기 이전의 몸으로 돌아오는 것이기에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늙거나 병들어서 죽습니다. 홀연히 문 닫힌 방안으로 들어오거나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주변 사람이 그를 보는 즉시 어디론가 사라지지 못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그런 임사체험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건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이미 알고 계시나요?
우리는 아직 부활의 실체를 다 아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도 그 실체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난 현상에 관한 서술도 일목요연하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다음과 같은 색다른 부활 현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 십자가 처형 이후에 다른 제자들과 어울려서 옛날 직업인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어느 날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밝아오는 이른 시간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끌어 올리기 힘들 정도로 생선이 많이 잡혔다고 합니다. 그 순간에 요한으로 추정되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요 21:7)라고 외칩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해변에서 먹었습니다. 요 21:14절은 그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끝맺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난 장소는 대개 예루살렘과 그 인근입니다. 이런 국면에서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추정되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부 생활을 했다는 건 어딘가 어색합니다. 그들이 그물질하던 디베랴 호수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상당히 먼 지역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사건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밝은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생명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자신들의 그 경험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어서 어리둥절하고 있던 그들에게 영적인 인식이 깊어지자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인식이 깊어지는 걸 오늘 본문은 눈이 밝아졌다고 표현했습니다.
눈이 밝아지는 길
어떻게 눈이 밝아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두 제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되자 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32절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이 고백은 두 제자만이 아니라 부활 공동체에 속한 초기 그리스도인들 전체의 신앙고백입니다. 모세의 글과 선지자들의 글을 정확하게 알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엠마오 제자 이야기 바로 뒤에는 열한 제자의 부활 경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 먹은 뒤에 다시 성경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눅 24:44~46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을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나? 이런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비유적으로, 이것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자기는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물리학자에게 양자 얽힘과 양자 중첩 현상을 증명해보라고 요구하는 행태와 비슷합니다. 물리학자처럼 미시 물리 세계에 눈이 밝지 않은 사람에게는 양자의 세계가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양자 얽힘과 양자 중첩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눈이 밝아지려면 물리학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듯이 예수 부활에 관한 제자들의 경험을 이해할 정도로 눈이 밝아지려면 성경 전반에 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창조와 출애굽과 선지자들의 영적 통찰에 이르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의 눈이 밝아져야만, 즉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깊이 알아야만 부활을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만 따로 떼놓고 이해가 되냐 안 되냐, 믿을 수 있냐 못 믿냐, 증거가 있냐 없냐, 하고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기자가 반복해서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을 언급하는 겁니다. 행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도 구약을 근거로 예수 부활을 변증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에 관한 기본적인 인식과 깨달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은 바로 앞에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도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영적으로 시각장애인인 셈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일은 일단 시력을 회복하는 겁니다. 또는 들을 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4월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장애인은 전체 국민의 5% 정도라고 합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중심이 된 장애인 단체들이 20~21일 이틀에 걸쳐서 서울 지하철 출근길 기습 탑승 시위와 노숙 시위를 벌였다고 합니다. 의견이 서로 나뉩니다. 그들의 주장을 전폭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려고 시민 일반의 출퇴근 길을 볼모로 삼는 건 지나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장애인 단체의 주장은 분명합니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해달라는 겁니다. 지금은 지난 시절에 비해서 많이 좋아지긴 했으나 휠체어를 타고 도심을 자유롭게 이동하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도 휠체어를 탄 교인이 접근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그들의 과격한 시위가 ‘밝은 눈으로 살고 싶다.’라는 몸부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몸부림을 어느 정도로 받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그 사회의 성숙도이겠지요.
여러분은 지금 영혼의 눈이 조금씩이라도 밝아지고 있나요? 밝아지기는커녕 더 어두워지는 건 아닌가요? 저는 여러분이 처한 형편을 다 알지 못합니다. 성경에 근거하고, 제가 경험한 한도 안에서 권면할 뿐입니다. 영혼의 눈이 밝아져서 부활의 주님께, 즉 생명의 실체(reality of life)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갔으면 합니다. 아멘.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을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나?
칼바르트와 판넨베르크를 생각해 봤습니다.
신학을 풀이하는 두 사람의
관점이 아주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관점으로는 칼바르트는 세상의 모든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는 전제에서 신학을
펼치고 (절대타자)
판넨베르크는 반대로 세상의 모든사람이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라는 전제에서
신학을 펼친듯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1,2차 세계대전- 상황가운데 칼바르는 예수중심주의를 주장할수밖에 없었고, 판넨 베르크는 과학의 발전과, 무신론의 공격(?)에서 어떻게 기독교의 진리가 보편적 진리로 하나님을 진리라고 이야기 할수 있는가를 해명??
서두의 질문에 칼바르트적인 사유라면 아마도 ‘중심을 잡으면 되니까 내버려 둬!’ 그랬을 듯 하고
판넨베르크는 책 어디선가 그런 것 처럼 부활(희망)을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벧.전3:15) 당부 하지 않았을까..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간직한 희망을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분명히 밝혀야 할 말을 준비해야겠습니다
.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초기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을 통해 동일한 신앙고백을 할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여 말씀하셔서 말씀으로 인해 나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해 주십시요"
위 설교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장을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다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만 따로 떼놓고 이해가 되냐 안 되냐, 믿을 수 있냐 못 믿냐, 증거가 있냐 없냐,
하고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창조부터 종말까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삶도 어느 시점만 놓고 판단하면 안 되고
그의 전체 삶을 놓고 판단해야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거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그렇고 우리 삶도 마찬가지인데
내공이 깊어져야만 성숙한 상태로 진입할 수 있는 게 아닐는지요.